직박구리에게 배우다 / 차례 시인의 말 · 5 제1부 흔들리는 길 흔들리는 길 직박구리에게 배우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그냥 꽃이 아니다 홀로 걷는 가을 길 나이 들어가면서 가을 들녘에서 숨이 막힌다 묘지 가방의 무게 물든다는 것 통증 이제야 병원에서 다낭의 물결 따라 모과처럼 백일홍 핀 날34 겨울 섬진강에서36 제2부 역설 역설 동백꽃 봄은 오지다 몽돌 해변에서 시집을 읽었네 하얀 고양이 매화밭에서 봄 공원에서 봄, 섬진강에서 동백꽃 봄 지리산의 봄 초록의 계절 비응항 모항에서 낙엽을 바라보며 라일락이 피었다 오월, 어느 날 잡초 구상나무가 아프다 제3부 어머니의 밥상 어머니의 밥상 걱정마셔요 이팝나무 감태 늙어가는 섬 팔금도 3 간장 항아리 빈 집 빈집들이 있는 풍경 돌하르방 풍경을 담다 팔월 무더위 속의 언덕을 오르다 소망 빗소리에 젖어 사춘의 봄날 서승현 시인 제4부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재난문자 검은 그림자 팽목항에서 주먹밥 동백꽃 영웅이라고 부르지마 하얀나비 또 다시 오월 해무 등에 진 것은 짐이 아니다 길 위의 낙타 시의 빛깔 잘못 든 길 연실蓮實 열대야에 태풍이 지나간 자리 붕어빵 작품론 / 生의 깊이와 생각의 깊이 / 강경호

▣ 몇 편의 작품 소개 흔들리는 길 며칠째 폭설주의보가 내리고 신경을 곤두 선 초긴장 상태로 칼바람 사이 뚫고 출근한다 눈발은 바람에 어지럽고 외출한 가족의 안부가 불안하다 인생은 폭설의 연속이어서 늘 미끄러워 흔들리는 길, 천 번을 흔들려야 꽃이 피고 천 번을 흔들려야 엄마가 되고 천 번을 흔들려야 강을 건널 수 있다 푹푹 빠지는 발걸음 내딛으며 미끄럽고 흔들리는 길을 간다. 직박구리에게 배우다 마당에 직박구리 한 쌍 찾아왔다 늘 함께하는 부부이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대야에 받아 둔 물에서 날개를 펴고 어린아이 물장난치듯 건반 위 음표처럼 경쾌한 몸짓으로 서로의 악기가 되어 연주한다 허공에서 부리를 맞대기도 하고 날갯짓 맞장구 치며 길 없는 길 내며 온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나란히 가는 길 어느 순간도 같이하여 영원永遠이 된다는 것 직박구리 한 쌍이 가르쳐 주고 날아갔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두모악 갤러리*에 그가 있었네 주인 없는 그리움 생각할수록 그리움은 커지지만 내 내면과 마주한 날 생각하지 않으면 그 생각은 없어 편하고 생각도 한 생각 생각이 잠들어 버리네 자연은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 했네 사진 속에서 일렁이는 용눈이 오름 오름마다 누워있는 나신의 여인들 육신이 죽어가도 여인들의 온기를 부활했네 오래된 친구처럼 연인처럼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그가 그 섬에 있었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고 김영갑 작가의 오름 사진집 이름. ？두모악 갤러리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소재. 그냥 꽃이 아니다 돌담에 기댄 벚꽃 핀 봄날, 정갈하게 비질한 듯 골목의 쓸쓸함을 지운다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꽃이 피기까지 사람이 살아온 궤적과 같았으리 그러므로 그냥 꽃이 아니다 햇빛과 태풍과 눈보라가 피워낸 꽃이다 삶의 쓸쓸함이 깃든 사람이다 길에 떨어져 바람에 휩쓸리는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그 길을 걸어온 나는 꽃이었다 사월 첫 주 사람들은 꽃구경 나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데 저 가녀린 꽃잎은 아픔이다 슬픔이다. 홀로 걷는 가을 길 가을 언덕에 그녀가 서 있다 들녘은 배부르고 따뜻한 모습인데 소중한 기억들은 하나둘 지워지고 어깨에 짊어졌던 바위 같은 짐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저물면 내려놓을 수 있으려나 햇살은 짱짱한데 그녀의 시선 끝에 촉촉하게 젖어오는 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 모든 것이 꿈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의 이면에 켜켜히 쌓인 것들 아이처럼 펑펑 울며 모두 쏟아내고 싶어도 소리죽여 속울음 우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그 고생 잊지 않고 있다고 그녀는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나이 들어가면서 초록 나뭇잎의 광휘가 황홀한 봄날 나무의 감정을 느껴본다 보드라운 팔로 바람의 속삭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을 안고 보니 나도 한때는 푸른 청춘이었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 보이고 듣지 못한 것들 들린다 “흰 것이 씻어서 된 것이 아니며 검은 것이 물들여 만든 것이 아니듯”*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는다 나중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늦게 일어난 짱짱한 햇볕을 보듬는다. ？「능엄경언해」 출전 가을 들녘에서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 끝에서 떨던 가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기운이 스미는 가을산은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햇볕 받은 일렁이는 억새의 몸짓이 가볍다 천지는 풍요로움으로 넉넉하고 계절은 저물어가는데 푸르렀던 마음은 이다지도 야위어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걷는 발걸음은 어디쯤일까 지상의 모든 生들이 흔들리며 아프게 아프게 피어났겠지만 오늘은, 이정표 잃은 길 정처없다 쓸쓸한 생의 길에서 한때 빛나던 초록빛 생각들 어지럽게 뒹구는 날 은발의 억새꽃처럼 흔들리고 있다. 숨이 막힌다 한계절 울긋불긋 아름다웠던 단풍 절정을 끝으로 바람에 떨어져 무참히 짓밟혀 배수구가 막혔다 빗자루로 쓸어야 할 곳을 쓸고 단단하게 막혀버린 흙들을 파내야 하는데 동맥동화 환자의 혈관처럼 비가 오면 쓸려온 나뭇잎이 더 단단하게 막아 물이 길에 넘쳐 아수라장이다 나의 길은 오후를 지나 늦가을로 접어드는데, 길가에 뒹구는 낙엽의 최후를 보며 숨이 막혀온다. 묘지 산책길 묘지 하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승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것처럼 봉분은 낮아지고, 잔디도 사라지고 한겨울 마삭만이 푸르다 돌보는 흔적이 없던 이곳에 누군가가 작은 돌탑 하나 쌓아 죽은 자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듯 生이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평지로 되돌아가는 봉분이 풍화(風化)하고 있다. ▣ 작품론 生의 깊이와 생각의 깊이 - 김은아 시집 『직박구리에게 배우다』 강 경 호 (시인·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김은아 시인의 제3시집 『직박구리에게 배우다』는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서 지향해 온 시적 경향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삶의 연륜이 깊어지는 만큼 시적 의미가 더욱 깊어지고 삶에 대한 깨달음과 통찰이 더욱 진지해졌다. 이는 삶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더욱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 시집들이 보여주는 실존적 물음을 삶의 형식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다. 일상과 자연에서 얻는 깨달음의 시편은 그의 삶에서 던져지는 질문을 그가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생명성을 탐구하는 시편들 또한 한층 견고해져 생명성의 본질을 묘파하는데 익숙해져 있어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더욱 과묵한 연민의 모습을 띠고 있어 그가 시를 단순한 언술행위로만 보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김은아 시인이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착하지 않고 사회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서정시가 대상 너머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김은아 시인의 『직박구리에게 배우다』는 앞서 펴낸 두 권의 시집의 시적 경향을 더욱 심화시켜 형이상학적인 지점에서 발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2. 인간은 보편적으로 세월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깨달음의 지혜를 갖게 된다. 그 깨달음은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일상의 사소한 정서적 사건에서 보다 나은 인간의 길을 체험을 통해 얻게 된다. 이러한 시의 변화가 김은아의 시집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좀체로 나타내지 않는 시인의 성정이지만, 시를 쓰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에서 시라는 장르가 지닌 여러 장치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시킨다. 이는 시와 시인의 체험이 만나는 지점으로 이번 시집에서 보다 성숙한 면모를 보여준다. 마당에 직박구리 한 쌍 찾아왔다 늘 함께하는 부부이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대야에 받아 둔 물에서 날개를 펴고 어린아이 물장난치듯 건반 위 음표처럼 경쾌한 몸짓으로 서로의 악기가 되어 연주한다 허공에서 부리를 맞대기도 하고 날갯짓 맞장구 치며 길 없는 길 내며 온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나란히 가는 길 어느 순간도 같이하여 영원永遠이 된다는 것 직박구리 한 쌍이 가르쳐 주고 날아갔다. - 「직박구리에게 배우다」 전문 자연은 언제나 시인에게 영감을 준다. 영감은 상상력의 근원이 되어 새로운 이미지는 물론 정신적 깊이에 이르게 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이기도 한 시인은 마당에 날아와 대야에 받아둔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직박구리 한 쌍을 바라본다. 어쩌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정경이지만 화자는 깨달음에 이르는 순발력을 갖는다. 그저 대야의 물에서 물장구치는 직박구리 한 쌍의 즐거운 한때일 뿐인데, 그 모습에서 “날개를 펴고 어린아이 물장난치듯/건반 위 음표처럼 경쾌한 몸짓으로/서로의 악기가 되어 연주한다”고 한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변용하여 직박구리 한 쌍의 행위를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서로에게 악기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위한 아낌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악기는 음악을 연주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몸이 상대의 감정, 여기에서는 즐거움과 행복한 감정을 표출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이러한 직박구리의 행위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화자는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허공에서 부리를 맞대기도 하고/날갯짓 맞장구 치며”가 바로 그것이다. 오직 상대를 위한 사랑의 몸짓이다. 이러한 직박구리의 행위에서 화자는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나란히 가는 길”을 유추한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마침내 “어느 순간도 같이하여/영원永遠이 된다는 것”을 직박구리 부부로부터 깨달음의 메시지를 얻는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시 속에서 물장구를 치고 노는 직박구리 한 쌍을 지켜볼 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일 뿐이다. 다만 부부새의 행위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인간도 직박구리 부부처럼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은아 시인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다음의 「홀로 걷는 가을 길」은 최근 김은아 시인의 정신지리를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가을 언덕에 그녀가 서 있다 들녘은 배부르고 따뜻한 모습인데 소중한 기억들은 하나둘 지워지고 어깨에 짊어졌던 바위 같은 짐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저물면 내려놓을 수 있으려나 햇살은 짱짱한데 그녀의 시선 끝에 촉촉하게 젖어오는 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 모든 것이 꿈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의 이면에 켜켜히 쌓인 것들 아이처럼 펑펑 울며 모두 쏟아내고 싶어도 소리죽여 속울음 우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그 고생 잊지 않고 있다고 그녀는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 「홀로 걷는 가을 길」 전문 이번 시집에서 김은아 시인의 시에서 왠지 모를 우수가 느껴진다.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온 세월을 보내고 자식들을 키워 세상에 내보낸 뒤에 느끼는 허무랄까? 이 작품은 그런 그에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시제가 말해주듯 인간은 혼자서 스스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도 사계로 치자면 ‘가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은 풍요로움과 더불어 쓸쓸함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는 시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가을 언덕에/그녀가 서 있다”는 고백은 화자 자신이기도 한 그녀가 서 있는 장소이며 공간이다. 가을은 “배부르고 따뜻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깨에 짊어졌던 바위 같은 짐/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마음 속에 아직 내려놓지 못하는 짐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녀의 시선 끝에 촉촉하게 젖어오는/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여진다. 화자 자신의 모습이다.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꿈결 같다. “생의 이면에 켜켜히 쌓인 것들”이 마음에 남아있다. 그런 까닭에 아직 부려놓지 못한 짐이 있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런 화자는 “아이처럼 펑펑 울며 모두 쏟아내고 싶”다. 그렇지만 “소리죽여 속울음” 운다.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짐’이 무엇인지 이 작품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실존의 본질적인 어떤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자 내면에 깃든 짐이 그를 속울음 울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것은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그 고생 잊지 않고 있다고/그녀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작품은 생이 깊어지면서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김은아 시인이 자신에게 건네는 위안의 헌사라고 할 수 있다. 「겨울 섬진강에서」는 보다 깊어진 김은아 시인의 정신지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은 추위에 익숙한 듯 차고 견고한 정신으로 투명하게 흐른다 강은 언제부터 흐르는 법을 알았을까 켜켜이 퇴적된 시간의 침묵 강을 닮은 사람들은 生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강물처럼 가슴에 저마다의 무늬를 새기고 제 길을 흘러간다 살아있는 목숨들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어서 오래된 강의 시간을 헤아릴 수 없지만 강물처럼 피투성이가 되어도 제 길을 가는 것을 알아 아무리 견고한 추위와 바윗덩이에 부딪쳐도 포기하지 않는다 문득, 겨울 섬진강에 와서 내 가슴 속에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었다. - 「겨울 섬진강에서」 이 작품엔 신난한 세월을 살아낸 시인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다. 더불어 존재의 근원과 본질을 묘파하고 있어 시인이 살아가는 방식과 생의 좌표가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주지하다시피 흔히 ‘강’은 유장하게 흘러가는 역사와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가 깃들어있다. 화자는 겨울 섬진강에 와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겨울강이므로 “차고 견고한 정신으로 투명하게 흐른다”고 겨울강 풍경을 명징하게 노래한다. 강은 끊임없는 질문이어서 “강은 언제부터 흐르는 법을 알았을까”라고 강의 시원과 근원을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시간과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강과 인간의 생은 닮았다. 시간 속에 묵묵히 흘러가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生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한다. “다만 강물처럼 가슴에 저마다의 무늬를 새기고/제 길을 흘러간다”고 한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제각기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강’과 ‘인간’을 같은 존재로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에 비해 인간의 삶은 지극히 찰라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살아있는 목숨들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라는 화자의 진술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강’과 ‘인간’ 모두가 “피투성이가 되어도 제 길을 가는 것”이라는 멈출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즉 “아무리 견고한 추위와 바윗덩이에 부딪쳐도/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화자의 이러한 인식은 오래 흘러온 강물과 지금까지 불굴의 의지로 강물처럼 흘러온 인간의 삶이 서로 닮아있으므로 겨울 섬진강을 바라보는 화자는 삶의 의지를 강하게 다짐한다. 그러므로 화자는 “내 가슴 속에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은아 시인의 삶의 지표를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흔들리는 길」이 있다. 폭설주의보가 내려 칼바람 속에서 출근하는, 위태롭지만 삶에 충실한 화자의 모습과 폭설 속의 가족 안부를 걱정하는 모습이 강인하고 따스하다. 이렇듯 시련 속에서 이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천 번을 흔들려야 꽃이 피고/천 번을 흔들려야 엄마가 되고/천 번을 흔들려야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한다. 「가방의 무게」에서는 가방의 무게를 인간이 진 짐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생각에도 무게가 있으니/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짐’에 대한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묘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길가에 있는 묘지가 “사람들 기억 속에서/점점 잊혀져 가는 것처럼/봉분은 낮아지고,/잔디도 사라”진다고 한다. 아웅다웅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와 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3. 김은아 시인의 첫 시집에서부터 끈질기게 천착하는 시적경향의 하나는 ‘생명성 탐구’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관심은 자연에 대한 애정에서 연유한다고 봐야 한다. 자연을 노래한 시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특히 동양적 사유의 원천은 자연을 숭배해 온 우리 선조들의 삶의 태도에서 기인하였다. 자연보다 낮은 자세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해 온 겸손의 미덕은 자연의 생태적 특징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켜 그것을 닮고자 하였다. 김은아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지리산 천왕봉 오르는 등산로 구상나무 공동묘지 죽음의 전시장이다 ‘살아 백 년’이라는 구상나무가 하얗게 탈색되어 가는 몸부림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사라졌듯 토종 구상나무를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온은 점점 뜨겁게 차오르고 눈이 오지 않아, 비도 오지 않아 나무도 사람도 숨쉬기 버겁다 불볕더위와 강풍, 건조한 날이 늘어 산불도 늘어간다 식수원이 고갈되고 있어 목이 마르다 높은 산에 깃든 우리들의 산신령 구상나무가 아프다고 한다. - 「구상나무가 아프다」 전문 화자는 등산로를 따라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있다. 산을 오르다 보니 “구상나무 공동묘지”가 있다. 이것을 화자는 “죽음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