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 이은규 시집

저 : 이은규출판사 : 문학동네발행일 : 2019년 08월29일 | 종이책 발행일 : 2019년 07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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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가서 죽을까”
당신이 건네준 문장,
그 문장과 문장 사이를 진동했던 내 시간의 흔적, 그것은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1.
2012년 첫 시집 『다정한 호칭』으로 독자들에게 따뜻하고 애틋한 시세계를 열어 보인 이은규 시인. 그 무엇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다정하게 불러 새로이 돌아보게 한 시편들에 많은 독자들이 꾸준히 이 시집을 찾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그가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49편을 담아 돌아왔다.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뀌는 등의 익숙한 소재로부터,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들/일들의 운동성과 그것이 환기하는 존재와 부재를 포착해내는 데 탁월한 그. 마치 한곳에 소리 없이 선 채 만물이 피고 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그만의 섬세한 세계는 두번째 시집에서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펼쳐진다. 다음의 시를 보자.

2.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는데, 않고 있는데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했다
미안(未安)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본 적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봄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봄의 미안' 중에서)

그때의 바다라면 파도라면 이야기라면,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까 속삭이고도 다시 피어오르는 구름 같은 시간을 나눠 갖자 물결구름의 문장이 모래알에 닿기 전 흩어진다면, 차라리 음악일까 그러니 재앙 같은 청춘이여 오라, 아름답게 부서져버릴 마음이라면 더더욱
('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 중에서)

긴 겨울의 끝 어느 날 문득 ‘바로 오늘부터 봄이구나’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분홍 꽃잎 하나 날리는 것을 목격하는 바로 그 순간. 그렇게 봄이 열린다는 것은 시인에게 쏟아지는 기억과 마주해야 함을 의미한다. 언젠가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슬프게 분홍빛으로 변한 세상을 마주해야 함을 의미한다. 봄이 왔다, 는 것은 결국 봄이 간다, 는 것과도 같은 말이기에, 봄은 잠시 머무르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라는, 이것은 시인에게만 해당하는 ‘봄의 미안(未安)’은 아니리라. 출렁이며 밀려왔다 쓸려가는, 아름답게 부서져버리는 파도를 앞에 두고 ‘재앙 같은 청춘’을 곱씹는 것 역시.
이렇듯 낯설지 않은 자연의 시어들을 그것이 가진 이미지 대신 운동성에 중심을 두고 맛볼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읽는 이의 가슴에 곧바로 스민다.

3.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채시(采詩)’의 흔적이다. 떠다니는 문장들의 채집, 이상과 백석의 시에서부터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대사에 이르기까지, 사랑했던 이와 사랑했던 작품으로 추측되는 넓은 스펙트럼의 채집 활동은, 시인에게 “고요한 식물채집이 아닌, 뼈아픈 과제로” 주어졌다. “역사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과 사람들이 나눈 문장들이”라는 데 기반을 두었으리라.(「채시(采詩)」) 때로는 채집 대상의 문장을 받아 적는 나와 그것을 부정하는 나 사이에서 흔들리는 문장으로, 때로는 바래고 표백되어 투명해진 문장으로, 때로는 그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지우는 날들과 그 날들을 넘어서기 위한 날들에 써내려간 문장으로 시집 곳곳에 박혀 있다. 나를 구원한 문장들인 동시에 “나는 그의 앵무입니까, 앵무가 아닙니까” 묻게 하는 문장들. “때로 한 문장을 넘어서기 위해서/ ...

목차 TOP

시인의 말
1부 모든 사랑은 편애
목화밭 이야기/ 홍역(紅疫)/ 말의 목을 끌어안고/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간절기/ 골목의 다짐
인력/ 귀가 부끄러워/ 매화, 풀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검은 숲/ 세상 쪽으로 한 뼘 더

2부 빗장뼈의 어원은 작은 열쇠
오는 봄/ 기울어진 빨강/ 하얀 밤, 앵무/ 꿈꾸는 우울/ 빗장/ 목요일이었던 구름/ 간헐적 그리움/ 탐구생활/ 꽃소식입니까/ 밤과 새벽의 돌멩이/ 겨울의 호흡/ 무릎베개/ 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

3부 편지 속 문장은 언제 도착할까요
밤의 이중나선/ 벚꽃 이동통신/ 스노볼/ 봄의 미안/ 봄 ...

본문중에서 TOP

언젠가 대신 신발끈을 매주며 함께 있는데도 풀릴 만큼 좋아, 묻고 답하던 날 마지막 꽃에 귀기울이면 그날의 목소리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 모든 나무에게 꽃이 그렇듯 함부로 피는 사랑이란 없다 잘못 매듭지어진 시간이 있을 뿐
('매화, 풀리다' 중에서)

그리워하면 그리워할수록 멀어지는
이상한 법칙에 대해 놀라지 않기로 한다

희미한 살냄새가 묻어나는 연필
지문 가득한 지우개를 만지다가

한 사람과 먼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을
아름다운 법칙에 대해 믿지 않기로 한다
다행이거나 다행이지 않을 뿐
('인력' 중에서)

문을 활짝 여시오
꼭 닫으시오 문을

마음이라는 무한한 원을 어떻게 열고 닫을까
빗장뼈의 어원은 작은 열쇠
('빗장' 중에서)

그때의 바다라면 파도라면 이야기라면,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까 속삭이고도 다시 피어오르는 구름 같은 시간을 나눠 갖자 물결구름의 문장이 모래알에 닿기 전 흩어진다면, 차라리 음악일까 그러니 재앙 같은 청춘이여 오라, 아름답게 부서져버릴 마음이라면 더더욱
('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 중에서)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했다
미안(未安)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

저자소개 TOP

이은규 [저]

1978년 서울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수학. 2006년 <국제신문>, 2008<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현재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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