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시리즈 : 2011 오늘의 소설가 40인 컬랙션 시리즈(eBook)

출판사 : 문학동네발행일 : 2011년 07월11일 | 종이책 발행일 : 2009년 06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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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듯하면서도 날선 문장, 무심한 어조로 삶의 이면에 숨겨진 불안과 고통을 예리하게 파헤쳐온 소설가 강영숙의 세번째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가 출간되었다. 두번째 소설집 [날마다 축제]가 출간된 것이 2004년, 첫 장편소설 [리나]가 출간된 것이 2006년이니 꼬박 5년, 3년 만인 셈이다. 1998년 등단 이후 네번째, 2004년 여름부터 꾸준히 발표해온 아홉 편의 단편이 묶인 이 창작집은, 지나치게 느리지도 또 성급하게 빠르지도 않은 그의 작품의 행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고정된 소설문법에 메이지 않으며, 자기 정체성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그것을 넘어서려는 작가의 시도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한결 더 깊이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삭막하고 권태로운 도시, 그 속에서는..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에는 '사건'이 없다. 작품 속 공간들에서는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는다. 주로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특정되지 않은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도시'라는 공간 자체는 그러한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자신의 '지루하고 권태로운' 풍경 속으로 삼켜버린다.
자연재해는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리지만, 강영숙 소설에서 그것은 오히려 일상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우울하고 삭막한 도시의 삶이 '자연재해'를 통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애초부터 삶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소설가 강영숙이 현실을 바라보는 한 방식일 것이다.

쿨한 유머 한 조각과 함께 찾아가는 '또다른 삶'의 가능성

그렇기에 작품 속 인물들은 시종일관 '쿨'한 태도를 유지한다. 때로는 무심하고, 때로는 무덤덤하게 드러나는 인물의 태도는 체념 혹은 자기 방어의 다른 표현에 다름아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 속 인물들은, 실은 나름의 우울을 앓고 있는 이들이며, 이들의 증상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뒤통수를 향해 탬버린을 던지는 행동' [스쿠터 활용법] 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끌고 가 목을 눌러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 [안토니오 신부님] 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들의 우울은 대개 표면적으로 실연失戀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도시'가 겪는 불모不毛의 우울을 함께 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영숙의 소설은 이러한 우울을 앓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불모의 세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끝없이 우울의 세계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끌어내어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디디려는 시도로 강영숙이 제시하는 것은 '유머'이다. 그러나 배꼽을 쥐고 까르르 웃게 하는 식의 유머가 아니다. 대시 영어회화 시간에는 입도 뻥긋 못 하던 '나'가 동남아여자의 삶을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하는 장면 [갈색 눈물방울],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신수영복을 입은 채 운동장을 달리는 모습 [스쿠터 활용법] 등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그러나 한번쯤은 꿈꿔볼 만한 일이다. 이들 장면이 선사하는 '쿨한 유머 한 조각'과 더불어, 세상의 우울을 함께 견디며 '또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고자 하는 '우울증적 유머의 세계', 이것이 바로 소설가 강영숙의 세계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갈 수 있고 또 가야 하는 길이라고 쉽게 단언하거나 낙관하지 않는 것이 강영숙의 소설이다. '쿨'하고 무덤덤한 외양을 하고 있는 소설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체념적 비관과 환멸이 깊이 숨어 있다. 강영숙의 소설의 우울이 더 깊어지고 있는 듯 보이는 것 또한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

목차 TOP

스쿠터 활용법
안토니오 신부님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천변에 눕다
해안 없는 바다
K에게
갈색 눈물방울
자이언트의 시대

해설 / 김영찬 - 흔들리는 소설들
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TOP

지난해의 요란한 폭우로 천변의 물길은 또 달라졌다. 폭우가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물길이 바뀌고 천변의 지형이 변했다.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서 아무도 또 폭우가 닥쳐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한 기류 따위는 눈치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왠지 늘 그랬다. 다른 사람도 다 아는, 내일 바로 닥쳐올 일을 혼자만 몰랐다.
(/ 천변에 눕다 중에서)

그녀는 바다 너머 저 먼 곳으 육지와 이곳의 육지를 연결하는 깊은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쓰나미의 성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몇십 년 만에 한번씩 그렇게 들끓어올라 바다를 두 동강 내고, 해일로, 지진으로 나타나 육지의 지형을 바꿔놓지 않으면 안되는 사정은 뭘까. 바다야, 너는 몇살이니? 그녀는 신고 있는 신발을 벗고 납작하게 엎드려 바다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 아직도 쓰나미는 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 해안 없는 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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