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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희 수필가의 작품집 〈다 카포 Da Capo〉을 읽었다.
글을 읽으며 문장마다 조용히 웃기도 하고 조용히 눈물짓는 백승희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행복과 위로, 애도와 회복, 실수와 기회,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담은 수필집이다. 저자는 힘껏 고개를 돌려 지나온 삶을 바라본다.
지나칠 수밖에 없을 지라도 삶은 천천히 나아가도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지적이면서도 다정하게 다가오는 언어들이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지나온 삶을 믿어보라는...

강미애(평론가)
백승희 수필가의 작품집 〈다 카포 Da Capo〉을 읽었다.
글을 읽으며 문장마다 조용히 웃기도 하고 조용히 눈물짓는
백승희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행복과 위로, 애도와 회복, 실수와 기회,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담은 수필집이다. 저자는 힘껏 고개를 돌려 지나온 삶을 바라본다.
지나칠 수밖에 없을 지라도 삶은 천천히 나아가도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지적이면서도 다정하게 다가오는 언어들이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지나온 삶을 믿어보라는...

계절을 날염하는 동안 14
오래된 강에서는 종소리가 난다 19
소리나무 22
집으로 가는 길 26
미리 가 본 서기 2031년 어느 날 31
광화문 연가 34
영목항에서 길을 묻다 39
감나무가 있는 풍경 43
터널의 속도 46
조우(遭遇) 48
흰소를 만나다 50
너에게로 가는 길 56
수요일의 마중 60
일곱 개의 반지 66
수면 양말 71
빗소리가 지나간 자리 76
고비사막에서 80
흠뻑 젖다 83
초록을 비우며 86
욕망하는 색 90
외투 95
사(謝)를 읽다 100
실패 104
다 카포(Da Capo) 109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114
나의 심장이 깜빡인다 118
아무렇지도 않게 122
신시모도 가는 길 124
휘발합니다 128
레인스틱 132
시를 줍다 137
바람을 만나다 140
향기로 지은 집 144
침목 146
기억을 잡고 있던 고리들이 헐겁다 149
그냥, 꽃이었다가 152
복사꽃 수의 155
막사발 이야기 157
시는 잃어버린 지평을 찾아가는 일 162
봄은 172

다 카포(Da Capo)
악기 하나쯤 연주하고 싶었다. 같은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던 이웃끼리 크로마하프를 배웠다. 금속 줄 때문인지 악기의 첫 느낌은 차가웠다. 하지만 나의 가슴을 채우기엔 충분했다. 기본 코드와 주법을 익히고 나니 한 계단 올라선 것처럼 내가 대견했다. 악기는 C코드 하나를 눌러 도. 미. 솔 음만 나오게 하고 코드바는 다른 음을 막아준다. F코드나 다른 코드 역시 3음이 한 코드이다. 크로마하프는 화음 악기로써 멜로디를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 인생을 연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함께 모여서 멋진 화음을 내는 것처럼.
「바위섬」과 「등대지기」, 「옛 시인의 노래」 등을 익히느라 손끝이 알알했다. 쇠줄을 긁어 바위섬을 가두고 코드를 눌러 파도 소리를 건져 올렸다. 등대의 불빛이 어둠의 바다를 밝히는 상상 속에 고독한 사내 뒷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프의 줄이 끊어지듯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제각각의 사연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겨우 손에 익었던 악기가 손에서 멀어졌다. 창고 안 깊숙한 곳에서 하프는 잊혀갔다.
오래된 아파트에 재건축이 확정되었다. 플래카드가 바람을 탔다. 새로운 바람이 부는 소리다. 날마다 갖가지 물건들이 들어왔던 현관문을 박차고 버려졌다. 나도 정리를 시작했다. 창고 문을 열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정리하던 순간이었다. 낯익은 악기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크로마하프였다. 악기를 꺼내려고 하자 나사가 물고 있었던 줄이 주르르 쏟아졌다. 한순간 지난 기억들이 빈터에 내려섰다.
35년 전 이곳은 허허벌판이었다. 무지개 꿈을 꾸는 사람들은 분양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서서 순번을 기다렸다. 방송에서는 아파트 투기 과열지구라고 연일 보도되었고 헬리콥터까지 상공을 맴돌며 소란스러웠다. 빈터에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 역시 신혼 초에 주택 마련의 꿈을 꾸었다. 흙먼지 속에서 고층아파트의 높이를 허공에 세우며 온종일을 서 있었던 것 같다.
행운이었다. 확률로 어림할 수 없는 당첨이 되었다. 그렇게 분양받은 꼭대기 집은 문만 열어두면 바람이 언제나 팔을 휘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보송보송 빨래도 잘 마르고 그득하게 햇볕을 채운 베란다에는 키 작은 채송화와 제라늄, 분꽃, 장미 넝쿨을 올렸다.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문밖 화단에서는 라일락 향기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덩달아 아카시아 향도 문안으로 계절을 알려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하늘로 뻗어간 이 공간에서 우리 가족을 보듬어 한자리를 지켜왔고 두 아이가 잘 자라서 분가를 했다. 그러면서 아파트도 나와 함께 늙어갔나 보다.
이 자리에 재건축으로 아파트가 지어져 화려하게 복귀한다고 하니 기대감이 생긴다…. 아파트에서의 삶은 철새처럼 목 좋은 곳을 찾아 살다가 이동하는 것인가. 함께 분양받아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이웃들이 떠났고 낯선 사람들이 정을 붙이다가 또 집을 옮겨갔다.
크로마하프가 심하게 망가졌다. 마치 고장이 난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슴 한쪽이 무너진다. 조심스레 모은 조각들을 나무상자에 담았다. 어렵게 찾은 악기점에 가서 수리를 부탁했으나 새로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악기를 다시 고쳐놓고 싶었다.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다행히 시간이 걸리겠지만 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크로마하프는 창고 안쪽에 있었으므로 빛이 잠긴 곳에서 버려진 줄을 몰랐을 것이다. 같이 있던 선풍기는 한 해에 한 번은 바깥 구경을 하고 제 몫을 하지 않았는가. 하프는 삼십 년 동안을 무엇을 꿈꾸었을까. 언제나 문이 닫히고 나면 빛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간 후였을 텐데.
크로마하프는 가슴으로 켜는 악기다. 화음, 하모니, 균형감을 하나하나 가슴으로 짚어 나가야 한다. 첫사랑처럼 알싸했던 크로마하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수리를 마친 악기가 돌아오면 재건축으로 다시 세워질 나만의 공간에서 다시 연주하고 싶다. 가족들과 나와 오랜 인연을 맺은 지인들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본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주변에는 가까운 산이 있고 종합운동장이 있어 좋다. 그 길을 걸으며 퇴행성 관절염에 걸린 내게, 편한 신발을 신기고 천천히 연골을 재생하는 꿈을 꾼다. 메스 대신 의지라는 부목을 대고 걸어볼 생각이다. 근육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병행하며 지탱해보려 한다.
내 인생의 조바꿈이 필요한 때다. 단조에서 장조의 밝고 경쾌한 미래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시간의 벽돌을 쌓으리라. 밤이 조용해진다. 다시 처음인 듯. 크로마하프의 꿈이 접혀 있던 것처럼 내 가슴에 안고 싶었던 것은, 싱싱한 푸른 꿈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