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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는 밑바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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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메이비",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 "나비 같은, 아니아니, 빛 같은"에 이어 장영수의 네번째 시집.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의 생활의 얼룩이 묻어 있는 시공간에 대한 미적 관조와 변론을 담고있다. 시인에게 시는 자신의 삶 여기저기를 살피고 또 그 옳고 그름을 진단하는 자기 성찰의 거울에 해당한다. 때문에 이번 시집은 시인 장영수의 일상의 내면을 엿보고 감상하는 체험을 하게 한다.

    목차

    * 시인의 말

    희망
    허름한 뒷골목에서 1
    허름한 뒷골목에서 2
    허름한 뒷골목에서 3
    청춘을 위하여
    정신주의 1
    정신주의 2
    시를 쓰는 이유 1
    욕망과 더불어
    벽을 마주하면
    다도해
    거리에서
    시를 쓰는 이유 2
    義肢倉을 통하여
    휴가에 대해 생각하다가
    2000년의 편지
    빈 통 같은 것으로, 나는, 1
    극복을 위하여
    빈 통 같은 것으로, 나는, 2
    우리들의 시간
    생의 밑바닥에서 1
    생의 밑바닥에서 2

    깊은 밤, 잠들지 못하며,
    세상 먼 바깥쪽에서
    팔려가는 당나귀에 대한 고찰
    정교리에서
    삶에 대한 변명
    선산
    고향 1
    고향 2
    기적 소리 들으며
    묵상
    희망은 빛났다
    인간사란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이 많은 삶 속에서
    몸에 대하여
    무엇이 두려워 1
    무엇이 두려워 2
    오렌지족에 대하여 1
    오렌지족에 대하여 2
    배꼽의 홈에 낀 때를...
    그 넋들의 숨소리를
    모밀촌에서
    청색 기아 트럭에 대한 기억
    모니터를 보며
    중랑천변의 편지
    미궁 속에서
    백조의 호수에 대하여
    어떤 고향의 여름
    권력의 모습
    바람 앞의 등불들을 보는 것처럼

    현실을 위하여
    위대함에 대하여
    님들에게
    마음의 평화에 대하여
    한 5·16에 대한 기억 1
    한 5·16에 대한 기억 2
    알프스에서 1
    알프스에서 2
    靑山
    기쁘나 슬플 때나
    가을이 무겁게 다가왔다
    아주 훌륭한 신세계에 대하여
    햇빛이 얼굴에 정면으로 쏟아진 순간

    * 해설 ·시와 삶의 변론 ·홍용희

    본문중에서

    [해설 - 시와 삶의 변론 / 홍용희]

    장영수의 네번째 시집 『한없는 밑바닥에서』는 자신의 소시민적인 일상사에 대한 변명의 기록물이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의 생활의 얼룩이 묻어 있는 시공간에 대한 미적 관조와 변론을 주조음으로 한다. 시인에게 시는 자신의 삶의 입각점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또한 그 옳고 그름을 진단하고 새김질하는 자기 성찰의 거울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것은 그의 일상성의 속내를 감상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의 이와 같은 “삶이 있으므로 삶의 이름으로”(「삶이 있으므로 삶의 이름으로」, 『나비 같은, 아니아니, 빛 같은』) 시를 쓴다는 명제는 첫 시집 『메이비』(1977)에서부터 적용된다. 그는 특히 첫 시집에서 자신과 사회의 그늘진 삶의 굴곡을 치열하고 치밀한 언술로 호기롭게 묘파하는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의 생활도 일정한 범주 속에 안착되면서 점차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원심력이 소실되어가는 양상을 드러낸다. 이번 네번째 시집은 자신의 주변 일상사에 대한 진솔한 표백과 반추의 언어가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이 시집은 활달한 시적 역동성과 긴장은 약화되었으나 시와 일상적 삶의 친연성은 더욱 면밀해진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일상성의 현장은 어디이며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가? 장영수의 이번 시집의 특이점을 이해하는 길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는 지고
    잔치도 볼장도
    다 보고 사람들
    이미 꽤 오래 전에
    끼리끼리 다들
    흩어져간 뒤

    젖고 마른 각종
    쓰레기들만 함부로
    시린 발에 걸리는
    어둑한 이 빈터에
    윙윙거리는 바람은
    더욱 차가운 때에

    어찌하여 나는
    소중한 그 무엇들을 다
    잃은 사람처럼 끝끝내
    한사코 서성이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마치 세상 먼
    바깥쪽 영원한 캄캄한
    허공을 홀로 떠돌면서도
    기어이 세상 속으로 굳이
    다시 돌아오려는 쓸쓸한
    유성처럼 운석처럼…… ―「세상 먼 바깥쪽에서」 전문


    시적 화자가 서 있는 자리는 “세상 먼/바깥쪽”이다. 그곳의 시간은 이미 “해는 지고/잔치”도 끝난 늦은 저녁이고, 공간은 머물다 간 사람들이 남긴 “젖고 마른 각종/쓰레기들만 함부로/시린 발에 걸리는” 빈터이다. 화자는 홀로 생의 활력과 기운이 모두 스러지고 마감된 허적의 뒷자리를 배회하고 있다. 아니 세상은 늘 화자를 이와 같은 썰렁한 소외의 뒤안길로 몰아낸다. 그래서 화자는 “어찌하여 나는/소중한 그 무엇들을 다/잃은 사람처럼 끝끝내/한사코 서성이는가”라며 스스로를 향한 비탄에 젖는다. 물론 이러한 탄식은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 역시 “끼리끼리 다들” 어울리는 세상의 무리 속에 섞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마치 세상 먼/바깥쪽 영원한 캄캄한/허공을 홀로 떠돌면서도/기어이 세상 속으로 굳이/다시 돌아오려는 쓸쓸한/유성”과 “운석”에 비유한다. “세상 먼/바깥”이란 “세상”의 안에 대한 이항 대립적인 상대성 속에서 성립된다. 특히 “세상 먼/바깥”에서의 세상과의 “먼” 거리감은 화자의 세상으로부터 피투된 소외감의 심도이면서 동시에 세상 속을 향한 열망의 강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이번 시집의 도처에 등장하는 “한없는 밑바닥에서” “생의 밑바닥에서” “허름한 뒷골목에서” 등등의 언표들은 공통적으로 시인 자신의 준거 집단의 중심 지대에 안착하지 못한 절망·좌절·소외·열패 의식 등의 산물이다. 그러면, 그가 이러한 무력감과 변두리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 시편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변론에 해당한다.


    잠은 한 방에서 나란히
    잔다 하겠으나 피아노 놓고
    책상 놓으니 비집고 다닐
    통로도 제대로 안 남았다

    그러니 시가 되었겠는가
    공부가 되었겠는가 여름이면
    5층 옥상 열기에 아이들 땀띠에
    아내는 부채를 쥐고 살았다

    그러니 무엇이 되었겠는가
    직장에선 노는 자리에 잘
    못 끼는 놈 스승들에겐
    진득하지 못한 놈 ―「팔려가는 당나귀에 대한 고찰」 부분


    화자의 시선에 반사된 자신의 삶의 초상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다. 화자는 자신의 시 창작과 학문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만족스럽게 펼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이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5층 옥상 열기”로 표상되는 가난의 압박은 그의 시 창작과 공부 길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로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는 어중간한 삶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직장에선 노는 자리에 잘/못 끼는 놈 스승들에겐/진득하지 못한 놈”이라는 인상이 각인되면서 그의 삶은 세상의 무리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에게 무력감과 패배감을 안겨준다.

    오늘날 세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열린 기회와 번영의 땅으로 비쳐진다. 각종 매스컴은 성공 시대의 주인공들의 화려한 무용담을 전시하면서 미래의 꿈과 환상을 부추기고 재생산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불안하기보다는 매혹적인 곳으로서의 이미지를 항상 유지하고 관리한다. 그러나 세계의 실상은 기회와 행운보다 오히려 결핍과 고통으로 이끄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의 월계관은 다수의 실패자의 절망을 디딤돌로 삼는다. 따라서 장영수 시인의 고단한 삶의 이력에 대한 진솔한 토로는 쉽게 사회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다음 시편에서 드러나는 그의 기억 속에 구름장처럼 흐르는 마음의 편린들은 실상 많은 사람들의 곡진한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마음들을 부른다
    시궁창에 처박힌 마음
    가만히 노래 부르던 마음

    살기에 여념 없던 마음
    결연히 무엇을 다짐하던 마음
    시름겨워 눈물짓던 마음
    너무 무거워 대책 없던 마음
    ……
    마음들을 부를 수 있는 대로
    부른다 불러모은다 ―「마음의 평화에 대하여」 부분


    화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자국들을 돌이켜보고 있다. 이미 시간의 물결에 파묻힌 과거지사들이지만 그러나 그 실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지난 세월의 곡절들이 엉켜 있는 마음의 덩어리가 슬며시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 마음의 응결체는 “살기에 여념 없”고, “결연히 무엇을 다짐하”고, “시름겨워 눈물”지으며, “너무 무거워 대책 없던” 신산스런 순간들을 생생하게 머금고 있다. 이러한 마음들은 화자의 “잠들지 못하는 밤”의 시간을 더욱 길고 지난하게 만든다. 화자가 이와 같이 어렵고 힘겨웠던 순간들의 마음을 불러모으는 것은 지금도 그와 유사한 심정을 겪으며 “한없는 밑바닥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영수의 시 세계에서 신산고초의 기억들이 현재적 시각에서 안온한 빛으로 착색되거나 화석화되지 않고 서늘하게 현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삶의 현실이 이처럼 어렵고 힘겨울 때 시적 상상력은 유년의 추억이 깃들인 고향을 향하게 된다.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의 품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을 위무하는 재생과 정화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영수의 시편에서는 고향의 이미지가 영혼의 안식처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에게 고향은 이미 불모지로 변질된 곳이며 뿌리 깊은 상처의 연원지이다.


    선산이라 여기던 곳을
    개인 소유 부동산으로
    만든 장남 집안 때문에
    현실은 누가 걷어찬
    돌멩이들처럼 되고말고
    굴러, 가버렸다

    모두 어이없어 하면서도
    어르고 조르고
    보채는 것을 당할 수 없어
    인감 도장들을 내어준 뒤
    가을 산 아래 옛일들은 인간의
    탐욕과 갈등 속에 매몰되었다 ―「선산」 부분

    고향은 없었다 도저히
    앞이 안 보이는 어느 날
    한 친척은 농사일 정리하여
    이민 떠났고
    〔……〕
    실속이라곤 실오라기만큼도
    없던 아버지들과 그래서
    집안 건설 자식들 건사 능력들이
    없어서 그랬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되뇌던 어머니들과 ―「고향 2」 부분


    화자에게 고향은 아름답고 온화한 삶의 원형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과 갈등 속에 매몰”되기는 고향 마을도 도회지와 다를 바가 없다. 고향의 선산이 가문의 전통을 잇고 결속력을 지탱시키는 신성한 터전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하고 오히려 갈등과 분쟁의 근원지로 변질되고 있다. 공동체적 삶의 전통적 풍속이 “누가 걷어찬/돌멩이들처럼” 수척하게 나뒹굴고 있다. 화자에게 고향이 그리운 안식처의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지 못한 점은 근자에 와서의 일만이 아니다. “실속이라곤 실오라기만큼도/없던 아버지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의해 집안도 자식들도 제대로 건사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의 오랜 회한과 체념과 동정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선대의 무능과 무책임의 그림자는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면서 “도저히/앞이 안 보이는 어느 날,” “농사일 정리하여/이민”을 떠나야 하는 막막한 떠돌이 삶을 강요하기도 한다. 화자에게 애초부터 “고향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무겁고 침울한 고향의 이미지를 순화시킬 수 있는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는 먼 이국 땅 알프스의 풍경 앞에서도 문득 미숙아처럼 성장하지 못한 꿈의 실재를 떠올리곤 한다.


    세계는 한여름에도 눈 덮인 산봉우리 아래 있었다

    산 가장자리 눈 더미는 탁류를 이뤄 침엽수림 골짝으로 쏟아졌다

    세계는 우주의 무엇들이 날아들어 이뤄진 것 같았다

    별들이 소멸하고 태어나고 움직이는 형상에도 이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세계가 거센 탁류로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리 꿈들은 언제까지나 그냥 그대로인 것을 또한 보았다.
    ―「알프스에서 1」 전문


    이 시는 각각의 행이 독자적인 의미의 마디절을 이룬다. 화자는 알프스의 풍광에 대한 감회를 절제된 단정적인 종결어미를 통해 직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눈 덮인 알프스의 산봉우리가 천체의 이미저리와 결부되면서 우주적인 장엄미를 획득하고 있다. 침엽수림 사이로 눈 더미가 녹아 흐르는 거대한 탁류를 목도하면서 화자는 문득 태초의 창조적 시간을 떠올린다. 화자에게 “세계는 우주의 무엇들이 날아들어” 이루어낸 신비한 무한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화자는 “별들이 소멸하고 태어나고 움직이는 형상”과 “거센 탁류로 쏟아지는 소리”가 어우러진 웅장한 자연의 풍경 앞에서 돌연 작고 낮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그 어디를 간다해도 우리 꿈들은 언제까지나 그냥 그대로인 것을 또한 보았다.” 5행까지 치중하고 있는 경물에 대한 묘사와 6행의 정회가 서로 어긋난 부조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 화자는 알프스의 이국적 풍경 앞에서 새삼 자신의 미완의 꿈에 대한 비감에 젖고 있다. 그의 무의식의 저층에는 유년의 고향에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속되는 떨쳐버리고 싶은 절박한 절망과 결핍이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삶의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알프스에 이르자 자책과 무력감의 일상적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자신도 모르게 솟구쳐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의 이러한 욕망은 성사되지 못한다. 오히려 세계의 “그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리 꿈들은” 실현되지 못한다는 엄정한 현실을 다시 확인할 따름이다. 시인에게 소외와 열패감의 그림자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끈덕지게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밥을 먹을 때나/책들을 뒤적일 때나/깨어 있을 때엔 언제나//몸을 앞세우면/마음이 무거웠고 마음을/따라다니노라면 육신들이/나를 잡아내렸다”(「생의 밑바닥에서 2」)고 진술한다.

    이렇게 보면, 이번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한없는 밑바닥에서”는 “변변한 재산도 집칸도 없이 그래도 고향이라고 살았었”(「한 5?6에 대한 기억 1」)던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의 어느 곳에서도 희망과 꿈의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유폐된 삶의 일상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그가 과거와 미래의 어느 곳에서도 침잠할 수 있는 평화의 안식처를 마련하지 못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허름한 뒷골목”과 “생의 밑바닥” 자체의 고유한 의미와 미덕을 찾고 재발견하는 것이다. 기실 그의 몸에 젖어 있는 결핍감과 주변 의식 역시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준거 집단의 중심 지대에 대한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허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따라서 실재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그 본질적 가치를 인식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뻔한 테이프이나
    틀어본들 무엇이
    파릇파릇 자라날 리도
    없을 테니

    안팎을 피곤하게
    하지 말고 좀더
    여물 때까지 마음을
    그냥 두는 게 더 낫다

    열심히 살기로 하자
    세상 한중간을
    들여다본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 밖의 다른
    무엇이 (시인에게)
    또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빈 통 같은 것으로, 나는, 2」 전문


    전체적인 시적 정황이 차분하고 담담하다. “허름한 뒷골목”으로 표상되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일상에 대한 반복되는 토로가 “파릇파릇”한 희망의 새싹을 불러올 수는 없을 터이다. 오히려 비관적인 자신의 삶에 대한 반복되는 변명은 스스로를 소극적이고 체념적으로 길들이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화자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그는 스스로 “열심히 살기로 하자”고 새삼 다짐한다. “그 밖의 다른/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열심히 사는 삶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한없는 밑바닥”의 “세상 한중간을” 올바로 통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스로 “고통 한중간을/겨냥하고 꿰뚫는” “반짝이는/침 같은 화살 같은”(「침」)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시험도 잘 못 보고
    운동도 잘 못 하고
    그림도 노래도 그렇고
    집안은 너무 어렵고

    그런 아이들이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는 이승의
    이 현실 속에서 우등생
    몇 명이 주목받고
    사랑받는 성격 좋고
    인물 좋고 집안 좋은
    아이들이 배려되는

    〔……〕

    그때 거의 매일
    야단맞으면서도 무시
    당하면서도 학교 다녔던
    아이들은 위대했다고
    나는 다시 말해야 한다. ―「위대함에 대하여」 부분


    이제, 화자는 “사랑받”고, “성격 좋고/인물 좋고 집안 좋은” 소수의 우등생보다 오히려 공부도 운동도 노래도 잘하지 못하고 집안도 어렵지만 “거의 매일/야단맞으면서도 무시/당하면서도 학교 다녔던/아이들”이 위대했다고 고쳐 생각한다. 한없는 “자책감/거부감 무력감” 속에서도 이를 참고 견디며 넘어선 아이들이야말로 인간적 성숙과 성장의 주역들이 아니겠는가. 위대함이란 생래적으로 고통과 결핍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지 않던가. 진정한 위대함의 밝은 빛이 극단적인 궁핍과 고통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욱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음 시편에는 “40년 넘게 밥을/빌”며 한없이 낮은 곳에서 살았던 이가 시인이 추구하던 희망의 전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40년 넘게 밥을
    빌어 더 힘든 이들을
    돌본 이가 있어

    저 일몰 때의
    소스라침 같은
    깨달음이 있어

    깡통을 들고
    걸어가는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그 수천 배도
    넘는 이들을 돌보는
    일들이 멀리 퍼져

    희망은 빛났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희망은 빛났다」 전문


    충청도 음성 꽃동네 마을의 유래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시적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평생을 “깡통을 들고/걸어”다녔던 “생의 밑바닥”의 주인공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스라침 같은/깨달음”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어 있다.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도우며 살았던 그의 모습을 기린 “동상”이 곧 우리 사회의 빛나는 희망의 전령으로 현존하고 있다. “한없이 낮은 곳”이 한없이 높은 곳이 될 수 있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없이 낮은 곳”의 중심에서 이를 온몸으로 감싸안으며 구원해나가는 것이 곧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지름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장영수의 시 세계에서 “한없이 낮은 곳”은 무력감과 패배감을 안겨주는 자리이기도 하면서 “희망이 밀물처럼”(「희망」) 밀려오는 가능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이번 시집 전반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체념·자책·무기력·소외감의 반복적 표출이 생산적인 희망의 역동적 에너지로 결집될 때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위대함과 희망의 경우처럼 시 역시 고통과 소외와 결핍이 풍요로운 성장의 양식이다. 따라서 장영수의 시 세계에서 “한없이 낮은 곳”은 한없이 크고 풍요로운 시적 토양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체현할 때, 그의 시 세계는 초기에 “불어라 바람이여. 불어서 그 모든/증오 그 모든 저주 그 모든/무시와 걷어차임 끝에 어느 날/저 바다나 이 들판, 산골짜기에 햇빛/따뜻이 오시는 것이 있을 때까지”(「復活의 序 1」, 『메이비』)라고 노래하던 시적 활력과 집중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에서” 그 중심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초극하려는 시적 모험은 한없이 높은 시적 층위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의 시 세계가 스스로 고통의 중심을 꿰뚫어나감으로써 자신과 세계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반짝이는/침 같은 화살 같은”(「침」) 치밀하고 치열한 역동성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저자소개

    생년월일 1947~
    출생지 강원도 원주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4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73년 계간 [문학과지성] 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서울대 사범대 불어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메이비]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 [나비 같은, 아니아니, 빛 같은] [한없는 밑바닥에서] [그가 말했다] 등이 있고, 역서로 [시란 무엇인가] [문학의 상징, 주제 사전]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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