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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전개 : 임승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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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임승유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24년 06월 10일
  • 쪽수 : 128
  • ISBN : 97911416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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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무엇이 무엇을 지나 무엇이 되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지나 아름다움을 넘어가고.”

‘나’라는 장소를 ‘나’로만 채우지 않기 위하여,
‘한 사람’ 이상일 때 발생하는 생명력 쪽으로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작가 임승유 신작 시집

출판사 서평

평범한 일상의 인물과 사건을 정제된 언어로 다루면서 그 사이를 틈입하는 찰나의 긴장감을 낯선 감각으로 선사해온 임승유 시인, 그의 네번째 시집 『생명력 전개』가 문학동네시인선 213번으로 출간되었다. 2011년 작품활동을 시작해 세 권의 시집을 펴내고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며 오롯한 시세계를 구축해온 그가 4년 만에 펴내는 신작 시집이다. “친척 집에 다녀와라”라는 가족의 말에 집을 나선 ‘여자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한 첫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에서 시인은, 금지되었기에 더욱 매혹적인 세계 속 흔들리는 화자를 그렸다. 이어 “미묘한 차이를 지닌 수많은 오늘을 발생시키는 행위”와 “여기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도 여기에 없는 상태”(「뼈만 남았다」)에 대한 탐구가 인상적인 두번째 시집 『그 밖의 어떤 것』과 세계의 정형성에서 부러 벗어나 자발적으로 길을 잃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까지, 임승유의 화자는 시작/출발은 있으되 완성/도착은 없이, 외려 목적지 그 자체보다 그 사이의 온갖 샛길과 갈림길들을 탐구하는 데, 거기서 시작되는 관계들에 골몰하는 존재들이었다.
그 근간에는 ‘나’라는 1인칭 시적 화자가 시의 주도권을 잡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가 있으리라. ‘나’라는 장소를 ‘나’로만 채워버리는 일에 대한 염려는 임승유 시가 안으로 파고드는 심상을 다루기보다 서사성을 띠게 했고, 신작 시집에서도 이런 인상적인 특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생명력 전개’라는 시집 제목에서 ‘생명력’은 “이야기에는 한 사람 이상이 등장한다. 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가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되기를 반복했다”라는 ‘시인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원래 있는 것,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관계를 통해 부여되고 만들어지는 긴장감과 가능성에 가깝다.

임승유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나’가 보는 것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것도 포함된다. ‘나’가 어떤 위기에 봉착해 있는 순간 ‘나’의 눈에 불현듯 들어오는 소철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는 인지는, ‘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나’의 서정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음식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가 당연히 필요하듯,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의 시선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시선 또한 존재한다는 것 역시 당연하다. 임승유가 전면화하는 일상의 낯선 감각이 이런 차원의 ‘당연한 것’을 앞세우고 있다고 상정할 때, 우리는 임승유의 시가 한 감정에 대해 말하기 위해 수많은 일상적-서사적 장치를 설정한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_선우은실, 해설에서

시편들에서 “한 사람 이상이 등장”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울먹이는 심정이” 된 ‘나’의 곁에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여기서 뭐하세요?”라고 선뜻 건넨 말 한마디 덕에 ‘나’는 “해가 비치는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한편에선 “미나리 캐 올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나’가 있고(「그의 태도와 눈빛」), 남천 나무를 보며 어린 시절 기억 속 ‘금천’이라는 아이를 떠올리기도 한다. 시들한 남천과 “엄마 뒤로 숨던” 금천, “키우던 애가 커서/ 키우는 마음이 뭔지 아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 남천-금천 이름의 유사성과 함께 새로이 다가온다(「중요한 역할」). 외출하기, 나갔다 들어오기, 기다리기, 우연히 마주치기, 알아보기, 기억을 떠올리기 등의 행위를 통해 발생한 관계와 장면들 쪽으로 나아가는 화자를 따라가는 즐거움이 이 시집을 읽는 기쁨일 것이다.
생활 속에서 전개되는 생명력이 있는가 하면 글쓰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 되게 하려면 뭘 먹어야 하는데. 도통 뭘 먹는 법이 없는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녀는 자꾸만 음식 생각을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음식 생각이 끼어들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생각을 몰아내고 문장에 몰입하기 위해 얼른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시작하자. 가장 손쉬운 건 감자. 수돗물에 감자를 씻어서 냄비에 넣고 기다렸다가 익으면 젓가락으로 푹 찔러서 먹는 거야. 문제는 바구니의 감자가 오래됐다는 것. 오래돼서 싹이 나서 벌써 이파리까지 상상해버렸네. 그렇다면 껍질 벗긴 후에 채 썰어서 감자채전을 해먹는 것도 방법. 스며드는 기름 감각. 하지만 그녀는 벌써 여러 번 감자채 썰다가 손톱까지 썰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썰게 할 수는 없다. 감자 써는 사람을 바꿀까. 아직 감자를 썰다가 손톱을 썬 적 없는 사람으로. 그로 하여금 껍질 벗긴 감자를 채칼에 대고 문지르게 하다가 위험해진다 싶으면 쥐고 있던 부분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그다음 감자, 그다음 감자, 그렇게 하다가 감자채가 쌓이면 쌓인 감자채에 물을 부어 전분이 빠지도록 해놓은 다음에

물 묻은 손을 티셔츠 자락에 문지르며 책상 앞에 그가 앉는다. 앉아서 문장을 적어나간다. 아까 뒤로 빠져 있던 그녀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모든 과정을 문장으로 적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뒤로 빠져 있던 나는 그녀로 하여금 읽던 소설을 마저 읽게 하고 싶지만

그녀는 허기진 상태라서 이 문장이 끝나기 전에 전분이 빠진 감자채에 소금과 튀김가루 약간을 섞어 기름에 부치기 위해 일어나 부엌으로 가야 한다.
_「감자 양식」 전문

소설 속 등장인물인 “도통 뭘 먹는 법이 없는 여자”와 “앉아서 문장을 적어나”가는 ‘그’, “그녀로 하여금 읽던 소설을 마저 읽게 하고 싶”은 ‘나’, 이들이 소설의 안팎을 드나들며 각자가 먹는 것, 쓰는 것, 읽는 것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과정이 「감자 양식」이라는 시로 쓰임으로써 또하나의 층위를 갖는 것 또한 자명하다. 겹겹의 관계 속 인물들은 감자를 손질하고 채를 썰고 전을 부쳐 먹고 또 먹도록 하는 양식(糧食)에 집중하면서 시라는 장르의 양식(樣式)이 갖는 ‘나’의 권위로부터 멀어진다.
한편 「감자 양식」의 감자채전을 비롯해 이 시집에는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마감도 하면서 만두 만들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만두에 대한 시를 쓰기로 했다. 만두를 미리 끌어와 시를 쓰고 시에 언급된 만큼 만두를 만드는 것이다.// (…) 지금은 만두만 생각하자. 만두란 무엇인가. 나는 만두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만두는 만두 만드는 일요일에 도착할 수 있는가. 그럴 때의 만두란 언젠가 먹어본 적 있으며, 오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날 모퉁이 만두 가게에서 혼자 먹던 만두인데// 오오 여기서의 만두란 그런 서정적 만두여서는 안 됩니다”(「만두」)라는 구절이나, “카레는 혼자 먹게는 안 되지. 먹게 된다면 며칠은 먹겠지. 어떻게든 먹으려고 양파를 썰다가 양파가 자라는 양파 밭을 떠올려도 눈물은 안 난다. 다만 떠올려보고 안 가본 데가 많았으므로 양파 밭에 들어가보기로 하는데”(「카레」) 같은 구절은 관념의 흐름을 서사적 방식으로 보여주며 ‘생활하기-시쓰기’의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

옛날 사람들은 두려움도 없이 저런 말을 잘도 했다. 엄마 혼자서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란 사람이 너한테 가장 잘한 일은 일찍 죽어버린 거라고 말하던 엄마는 가장 잘 이해했다.
_「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부분

숟가락으로 오이 속을 파내던 엄마가 이쪽을 까맣게 잊고 오이 속을 파내고 있으면

슬픔이 몰려옵니다.

슬픔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엄마가 설탕통에 숟가락을 집어넣으려 하는데 말입니다.

하마터면 나는 슬픔에 빠져 식구들이 하나둘 문 열고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설탕통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엄마가 온데간데없어지는 것도 모를 뻔했습니다.
_「늙은 오이 속 파내기」 부분

임승유 시인은 출간 전 편집자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여성이 발화 위치를 찾아내 기어이 발화하는 그 순간에 다다르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말했다. ‘그녀’ ‘여자’ ‘여자애’라 불리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시편들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그리고 ‘엄마’. “엄마가 등장하는 모든 시편들이 내내 마음에 남아 복기하게 만듭니다. 복기는 저를 갉아먹는 행위지만 시를 쓰게 하는 힘이기도 해요. 제가 궁극적으로 가닿고 싶은 지점은 ‘엄마’를 빼고도 ‘엄마’에 대해 발화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라고 시인이 이어 말하기도 했듯 ‘엄마’라는 호칭이 갖는 위치성과 그 존재가 갖는 고유성은 시인에게 다 풀지 못한, 끝끝내 더 잘 들여다보고 싶은 근원적 세계일지 모른다. “엄마?// 괜찮아. 네 문장 속에서 악을 썼더니 머리가 조금 아플 뿐이야!”(「감자 껍질 까기」)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문을 닫는 이번 시집, ‘엄마’에서 시작해 나의 엄마와 엄마인 나를 경유해 엄마가 다는 아닌 ‘엄마’에 닿기. ‘엄마’ 없이 엄마를 쓰기. 임승유의 ‘그녀’들이 더 멀리 나아가보기를 바라며 짚어두고 싶다.
“무엇이 무엇을 지나 무엇이 되는. 숨을 훅 들이쉬고. 내쉬고.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지나 아름다움을 넘어”(「애니시다의 죽음」)가는 일. 『생명력 전개』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드나드는’ 것이리라. “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빛으로 색깔을 만들”(「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수 있는 것처럼 시집 속 인물들과 시인, 그리고 독자 저마다 품게 될 기미와 전조들이 만들어갈 고유하고 무수한 생명력들을 기쁘게 상상해본다.


◎임승유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4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저에게 이번 시집은 ‘시쓰기에 대한 시집’으로 읽히기도 했는데요, 시들을 정리하며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시라는 장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주로 1인칭 화자인 ‘나’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는 ‘나’라는 1인칭 화자에 집중하게 되는 장르지만, ‘나’가 어떻게든 관계 속으로 들어가길 바랐어요. ‘나’의 목소리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 목소리가 어떻게 생명력 있는 관계로 확장되고 재배치될 수 있는지 쓰면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페르소나를 사용한다거나 다른 이를 초점 화자로 내세운다거나 하는 게 저한테는 인위적으로 느껴졌어요. 기존의 말하기 방식에서 벗어나되 그 벗어남이 인위적이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런 고민을 하다보니 제가 서사를 주로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이전 시집에서도 서사가 안 쓰인 건 아니지만 1인칭과 2인칭 위주였다면 이번 시집엔 3인칭이 많습니다. ‘그녀’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녀’가 특정 인물로 한정되지 않고 무한하게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집을 묶었는데요, 그녀에 대해서는 아직 할말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2. 시집의 제목 '생명력 전개'는 표제시가 없습니다. 이 제목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전 시집들 제목이 좀 긴 편이라 짧고 선명한 제목을 염두에 두고 고민하던 중에 편집자님께서 제안해주신 ‘생명력 전개’가 언뜻 눈에 들어왔어요. 저한테는 생경한 구절이라서 제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이후로도 자꾸만 생각이 나더라고요.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번 시집이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고, 어쩌면 그다음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제목이 두 개 있었고 나름 귀여운 것들이었지만 솔직히 수세적인 제목이었습니다. 이번 시집엔 용기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쓴 시가 적잖이 담겨 있습니다. 더 나아가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중얼거리고 있는데, ‘생명력 전개’는 저에게 그다음도 있다는 감각을 갖게 해주는 제목입니다.
이번 시집 화자에게 ‘생명력 전개’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라는 대답을 할 겁니다. 직전 시집에서 시인의 말을 빌려 “생활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화자거든요. 겁이 많긴 하지만 관계를 향해 조금씩 걸어나가고 있으며, 입김을 불어넣어 면적을 넓히듯 발화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관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는 사람이지요.

3. 시 속에 채소를 포함한 식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람들도 인상적으로 많고요. 유독 작가님에게 잘 포착되는 존재들/행동들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제 시 속으로 잘 들어오는 존재나 행동들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관심을 갖는 건 특정 존재라기보다는 그 존재와 관련된 장면입니다. 언젠가 친구와 강변을 바라보면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비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저 앞에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더라고요. 친구는 비와 대면하는 순간에 집중해 「대치」라는 시를 썼습니다. 제가 썼다면 다가오고 있는 비를 바라보는 장면에 대한 시가 됐을 겁니다.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뒤섞이면서 저라는 존재를 뒤흔드는 장면에 매혹되는 것 같아요. 채소나 식물 그리고 사람들이 제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제 일상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전 저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이질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잘 못해요. 가까이 있는 존재들을 낯설게 인식하는 감각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4. 수록작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시가 있으실까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이번 시집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 중에 ‘엄마’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죠. 저는 시를 써오면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뭔가 말하는 게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왔어요. 엄마로서의 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도 제 엄마에 대해서는 못할 줄 알았던 거죠. 하지만 저에 대해 말하려면 엄마를 경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먼저 그 위치에 가본 사람이잖아요. 여성이 발화 위치를 찾아내 기어이 발화하는 그 순간에 다다르는 장면을 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관련 작품들을 찾아 읽고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시집이 나온다고 하니까 좀 두려워요. 엄마가 제 시집에서 맞닥뜨린 ‘엄마’를 본인이라고 생각할까봐요. 발화를 하고 난 후에 남는 오해와 이해, 그 너머까지 계속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엄마가 등장하는 모든 시편들이 내내 마음에 남아 복기하게 만듭니다. 복기는 저를 갉아먹는 행위지만 시를 쓰게 하는 힘이기도 해요. 제가 궁극적으로 가닿고 싶은 지점은 ‘엄마’를 빼고도 ‘엄마’에 대해 발화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5. 이 시집을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려요.

독자들이 자신을 어느 곳에 위치시키면서 시를 읽어주실지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합니다. 첫 시집이 나왔을 때 먼 길을 찾아와서 질문을 건네줬던 여학생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대면한 첫 독자분들이었는데요, 질문에 대답을 해나가면서 깨달은 사실은 제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그날의 질문에 화답하는 시를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이 조금이나마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추천사


이야기에는 한 사람 이상이 등장한다. 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가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되기를 반복했다.

2024년 5월
임승유

목차

시인의 말

1부 그때 못 봤던 거 보러 가자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만두/ 그의 태도와 눈빛/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끌어들여 이틀에 걸쳐/ 해낸 작업에 대한 보고서/ 여주/ 감자 양식/ 나오는 사람들/ 직접적인 경험/ 중요한 역할/ 들어올린 발꿈치의 우아함/ 충북대학교/ 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2부 이제 그만 와서 카레를 먹어
날씨/ 카레/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서/ 점심시간/ 이야기/ 밀어서 넘어트리기/ 작은 수건/ 음복/ 두 사람이/ 그 여자 얼굴/ 부끄러움/ 화양동

3부 모든 이가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
모두 도망이라도 간 듯 조용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오/ 의자 위에 올라서서/ 세 사람/ 레몬/ 비 오는 날 물 끓이기/ 소설 읽고 나서 하는 청소/ 애니시다의 죽음/ 어둠을 밝히는 불빛/ 늙은 오이 속 파내기/ 설거지/ 상진 녹색 진실 바지

4부 다 같이 일어나 추는 춤처럼
내 마음속에 언제나/ 양육/ 다세대주택/ 두 개의 마음으로/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동안/ 여성 시 읽기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 찾아온/ 늙은 여자/ 야외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나눈 대화/ 스웨터/ 종묘/ 크고 작은 애들/ 감자 껍질 까기

해설| 식물의 시선, 낯섦의 형식_선우은실(문학평론가)

본문중에서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
레몬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잘 안 돼서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것이다.
_「레몬」 부분

나갔다 들어와보니 네가 죽어 있다. 나가기 직전에 네가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 안 난다. 언제나 거기 있고. 언제나 살아 있고. 심지어 무성하게 살아 있어서 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걱정을 놓아버렸다. 심지어 아름다웠다. 아름다워. 그 말을 입에 올린 게 문제였을까. 뻔뻔하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려서. 아름다움이 오염되었나. 영원할 것처럼. 이렇게 가벼운 무엇이. 무엇이 무엇을 지나 무엇이 되는. 숨을 훅 들이쉬고. 내쉬고.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지나 아름다움을 넘어가고. 나는 나갔다가 들어오고. 애니시다가 죽었다.
_「애니시다의 죽음」 전문

늙은 오이는 대개 부엌 서늘한 구석에 놓여 있습니다. 저렇게

고집스러운 채소는 정말이지……

혼잣말을 했을 뿐인데

설탕통을 꺼내려 찬장 문을 열던 엄마가 멈칫하는 게 보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는 종종 그런 말이 들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_「늙은 오이 속 파내기」 부분

수족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수족관 앞에서 기다려보고 싶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수족관 앞에서 만나면 콜라를 한 캔씩 사서 마시고 마주보며 웃다가 수족관은 이런 곳이구나 백 센티미터가 넘는 은갈치가 전시되어 있으면 백 번도 넘게 수족관에 다녀본 사람처럼 수족관을 돌아다녔겠지만요 그 사람이 그러니까 수족관 앞에서 기다려보고 싶다던 사람 말이에요 내가 일요일에 수족관 앞에 나타나면 더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잖아요 그래서 일요일만 되면 수족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수족관 앞에서 기다리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갔답니다 백 번도 넘게 일요일에 말이에요
_「부끄러움」 전문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은 두 사람 말고도 더 많은 사람이 나오는 소설이지만 어쩐지 외투를 꺼내 입는다는 기분으로 나도 절벽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노란 꽃을 꺾어 들고 두 사람이 소설 밖으로 나오면서 소설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있다. 두 개의 마음으로 인해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의 삶이 멈추지 않는다.
_「두 개의 마음으로」 부분

저자소개

임승유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73

저자 임승유는 197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2011년『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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