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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여준 현미경 같은 추억 더듬기를 연상시키는 장편 소설.
② 소능마을의 호랑이할매로 불리던 대찬 여장부를 중심으로 4대에 걸친 비곡(秘曲)을 토속적인 언어와 현란한 지적 감수성으로 이루어냄.
③ 여기 감히 하나의 문학 장르를 선언한다.
이것은 채홍문학, 즉 무지개 문학으로서, 彩虹文學이요, the rainbow literature이다. 이는 전 생애를 통하여 단 하나의 작품을 위해 각 장르와 형식을 총동원하여 지우고 덧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계획하고 행하려는 채홍문학이 세계문학사에 최초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만의 채홍문학을 고집하여 펼쳐나가다 보면, 색다른 모습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④ 최초로 도전한 내 혁명적 문학의 시도가 우리가 갖고 있는 문학의 안일을 일깨워, 여러 모로 문학의 기니피그guineapig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앞으로 이 작품이 세계 문학사에 찬연히 빛날 날을 기대하면서, 딴엔 위대한 완성을 위하여 보유에 보유를 거듭하는 일만 이어지리라.
⑤ 권말부록에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하고 실험적인 200여 미완성작품을 수록함.

채홍문학 선언서 / 4
차례 / 9
주요 등장인물 / 10
가계도 / 12
일러두기 / 14
1장 해돋이가 노을을 삼키다 / 15
2장 호랑이 할매가 뿔났다/ 40
3장 호랑이가 아무한테나 잡히나 / 51
4장 호박떡거리에서 만난 사람 / 89
5장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겹도라지 / 134
6장 내 고향 음식 철학사/ 146
7장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 161
8장 유리구슬 / 275
9장 마카렌세스, 그리고 외나무다리 / 283
10장 겨울 매미 / 310
11장 그리움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 340
12장 초병, 나비 잡다 / 345
13장 백도라지가 나타났다 / 399
14장 돕레의 하루 / 428
15장 교육결혼 / 470
16장 초도, 석도 / 506
17장 브라질은 영원하다 / 519
18장 잃어버린 출판을 찾아서 / 561
19장 해돋이의 황량함 / 592
20장 선운사 동구는 미당도 모른다 / 610
21장 NO / 612
22장 서울이란 요술쟁이 / 635
23장 일몰의 허수아비들 /646
24장 회오리밤의 꿈 /656

권말 부록 미완성 작품들 /681

아침이 없었다.
비 개인 후 가는 국숫발로 만든 작사리처럼 짝 퍼지던 햇살도, 호랑거미줄에 매달렸던 아침이슬의 영롱한 반짝거림도, 긴긴 밤을 깨우듯 창공을 날갯짓하던 제비도, 보슬비 내릴 때 청아하게 울어 대던 청개구리도, 이젠 아침이 없으니 볼 수가 없다.
오래 전엔 부지런한 마을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타작을 했다. 그러면 보석처럼 박혀 곧 쏟아질 듯한 석류 알알 사이에 맺힌 물방울이, 탈곡기에서 튄 벼 낟알에 맞아, 튕겨, 흩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수많은 보석이 퍼지는 것이었다. 그런 빛나고 아름답고 소중했던 추억 속의 광경이 못 견디게 다가와 호흡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 된다. -15p

고선의 친정 솔뫼는 전체 팔십여 가호인데, 그중 고 씨가 칠십여 가호인 집성촌이었다. 마을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서쪽 방향 아래쪽은 달구지 두 대 겨우 빠져 나갈 정도로 뚫려 있었다. 마을 위쪽에는 저수지가 두 곳 있는데 마을 어귀에서 보면, 오른쪽 큰 저수지가 일제강점기 때 조성되었다. 비록 첩첩산중이지만 진주와 가깝고 재 너머 인물 많다는 고성 영현면과도 가까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유학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귀한 동경제일고보 출신이 둘이나 있었으니, 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물산이 풍부했고, 개화가 일찍 되어 여성도 기본교육을 받았다. -40p

유년 시절 보르헤스는 호랑이를 열렬히 숭배했다. 파라나 강가의 수풀이나, 모든 것이 뒤엉긴 아마존 정글에 사는 흰색 바탕의 밤색 얼룩무늬가 있는 호랑이가 아니라, 코끼리를 탄 전사들만이 맞설 수 있는 줄무늬가 선명한 아시아의 호랑이를. 그는 동물원에 가면 호랑이 우리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그는 호랑이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 백과사전이나 자연사 책을 뒤적이곤 했다. 그는 백과사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유년 시절이 지나자 호랑이도 나이를 먹고 그의 열정도 시들었다. 그러나 그의 꿈속에는 여전히 호랑이가 살아 있었다. 어딘가에 가라앉은 듯한, 혹은 혼돈에 빠진 듯한 부드러운 가죽에는 여전히 그 모습이 지속되고 있었다. 잠이 들면 꿈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지곤 했지만, 그는 곧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때마다 이것은 꿈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의지대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멋진 오락거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에겐 무한한 능력이 있었기에 언제든 호랑이를 불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 그의 꿈의 무능함이여! 그의 꿈들은 그가 그토록 원했던 맹수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분명 호랑이가 나타나긴 했으나 꿈속의 호랑이는 해부되거나, 약골이거나, 생김새가 온전치 못하거나, 참기 어려울 만큼 작거나, 너무 빠르게 사라지거나, 개나 새를 닮은 엉뚱한 호랑이였다. -51p

저옥은 부모를 잃고 몽민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다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우연히 대산 외외가 육촌오빠의 주선으로 사천 읍내 유명한 요정에서 설거지를 했다. 어느 날 스님들이 변장하여 요정에 왔다. 비록 변장을 했지만 마담과 오래된 색시들과 종업원은 다들 목례로 인사를 주고받는 듯했다. 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상당히 큰 물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들이 기거하는 구룡사는 어느 대통령의 장모가 드나드는 사찰로서 이 일대에 그 위세가 살벌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큰 스님으로 통하는 주지는 천하가 자기 발 아래였다. 한창 흥이 무르익을 무렵 큰기침을 하면서 큰 스님이 통싯간을 가는 것이었다. 마담은 저옥한테 뜨뜻하고 알맞게 데운 물수건을 들고 통싯간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일러주었다. 스님은 용무를 마치고 헛기침을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89p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이들의 중간 귀착지가 저옥무당네였다. 건넛마을에 살며 비단 장사를 하는 은이빨 여인이며, 사천강가 옹기장수며, 해마다 초봄쯤 왔다가 내년 이맘때 와서 외상값을 받아가는 담양 죽세장수들도 단골 축에 든다고 하겠다. 워낙 집도 크고, 방도 많고 인심도 후하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가 보다. -134p

특히 고향의 한 해 후배와 같이 솔가리를 작은 짚동처럼 만들어서 한 짐 지고 사천 읍내 장에 가서 팔았다. 그리고 벼르고 벼렸던 읍내 찐빵 집에 들어갔다. 제백은 아직 먹고 있는데 후배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빨리 먹고는 설탕이 묻은 빈 접시를 핥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한참을 지켜보다가 “이제 그만 핥아라.”하고 반강제로 낚아챘다. -146p

모범수로 교도소살이를 마친 두 도라지 형제가 소능마을에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향인 담양에 간 것도 아니었다. 백도라지는 교도소 취사장에서 허드레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왼쪽 등짝에 하얀 반점이 서너 개 나타났다. 죄수들은 말했다. 육고기를 갑자기 많이 먹은 탓일 거라고 했다. 직감으로 문둥병의 시초였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소록도에 가긴 싫었다. 일제강점기 때 거세를 했다는 소문 때문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으로 밀항하기로 맘먹었다. 오사카에 고모가 있다는 사실만 알고 무작정 갔다. -161p
어느 봄날, 바람 하나가 내 품에 안겨왔다. 어디서 왔으며, 왜 내게로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바람은 팔랑개비 무늬가 든 유리구슬 네 개를 목숨마냥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막연한 두려움에 구슬을 빼앗아 창공에 던져버렸다. 구슬이 태양에 반사되어 천지사방으로 오색 빛 되어 뻗쳐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가올 내 청춘을 어렴풋이 예감해 보았다. 그때 내 품에 있던 바람은 빛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눠 날아갔고 형언할 수 없는 설렘과 흥분에 사로잡혀, 만추의 제법 따스한 햇살에 취해 황금빛 버드나무 잎사귀의 찬란한 반짝거림을 멀리한 채 한동안 그렇게 눈시울만 적시고 있었다. 십이 열차의 입석도 감지덕지 오감해서 한걸음에 내달리기 일쑤였다. -275

대학 새내기 늦가을, 광화문 덕수제과 이층에서 다섯 개 대학 서른 명이 모여 클럽을 결성했다. 처음엔 문예클럽으로 시작했으나 회원 중 대다수가 그냥 모임이 좋아서 학과가 문학 관련 학과라 참석은 했지만, 문학적인 소질도 흥미도 잃었던 차에, 한 회원의 친지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줄 인형극〉인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귀국하여 회원들 앞에서 시연을 해보고 싶다는 통보를 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마리오네트는 성서 속 ‘동정녀 마리아’에서 나온 말이다. -283p

남도의 한적한 고원 지대인 도산밭골. 그곳은 가을 억새가 고양이털처럼 부드러웠어요. 마을 사람들은 가끔 마을 잔치를 하러 이곳으로 오지요. 소위 회취라고 하지요. 주로 냇가에서 하지만 가뭄이 들 때는 기우제를 올릴 겸해서 이렇게 산에서도 하지요. 회취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돼지고기지요. 돼지는 주로 제백네 야외 외양간두엄 위에다 새 짚을 깔아놓고 잡지요.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놈의 다리를 붙잡고 주로 강천 아저씨나 운백 형이 도끼를 돌려 힘껏 콧등 위 양미간 사이를 정통으로 내리치면, 꽥 하고 네 다리를 파르르 떨며 쭉 뻗어요. -310p

고선이 죽기 하루 전 날, 고계도 교도소에서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고선과 한 날 한 시에 죽었다. 교도소 측에서는 그토록 오래 교도소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연고자가 혹여 있다 해도 쉬쉬하며 거들떠보지 않으리라는 교도소 측 자체 판단 아래 근처 야산에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묻었다.
고선은 소능마을 장골산 중턱에 묻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깊은 여름 밤, 소나기와 큰 바람과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하늘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나고 천지가 훤해졌을 때 고선과 고계 무덤에 벼락이 내리쳤다. 두 시신이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지가 고요해졌다. -340p

군대였다.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에 대지는 뜨겁게 달구어져 열기를 토해내고, 시간마저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뭔가 사건을 만들어야 이 질식할 것만 같은 멈춘 시간이 움직일 듯했다. 훈련소에서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제백이 훈련병일 때 폭양이 엄습하는 8월 중순의 피알아이교장은 죽을 맛이었다. 오 분간의 휴식 시간 때 그는 천인공노할 발설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345p

백도라지가 밀항해서 오사카에 살고 있는 고모를 찾았다. 고모는 남편이 죽자 담양에 과년한 딸 한 명을 남겨두고 오사카에 와서 식당 종업원으로 있다가 마침내 그 음식점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유한 지 몇 달 만에 고모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런 물증이 될 만한 서류도 뭐도 없어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오롯이 같이 일했던 나이 지긋한 일본 여종업원한테 식당이 넘어가고만 이후였다. 하숙집에 와서 고모의 체취가 묻었을 것 같은 공책 한 장과 청주 한 병, 그리고 사탕을 놓고 명복을 빌었다. -399p

한 마리 망토개코원숭이가 절벽에 붙어 무섬의 동짓날 밤을 지새우는 것보다 더 덧없는 역사 앞에서, 구절초 지는 이 가을밤에 생활의 두문 불출자가 되어, 삶의 이인증 환자가 되나보다. 드디어 돕레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군대 후유증에 걸려, 뜬 구름 잡듯 신경에 금이 간 시절, 자작나무 잎이 햇살에 한껏 흔들거려 반짝일 때, 그 자작나무는 겨울이 되면 우듬지를 제외하고 스스로 가지를 친다. 가지가 떨어지면 하얀 수피가 드러난다. 하늘로 곧게 뻗은 ‘순백의 몸통’은 강직함과 고결함의 상징이 됐다. 녹음이 짙은 여름, 단풍 화려한 가을의 자태도 곱지만 새하얀 수피가 오롯이 드러나는 겨울에 자작나무의 우아함은 배가 된다. 스물일곱 살 제백이 검은 망토를 걸친 채 도산밭골에서, 상사바위에서, 큰골 어귀의 숨은 동굴에서, 그리고는 어두운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타오르며 힘차게 그 동굴을 떠났다. -428p

어느 여류 시인이자 소설가는 〈33세의 팡세〉를 노래했다. 싸늘한 산장의 여름 새벽, 소복 입은 여인이 비수를 물고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제백 나이 서른세 살이 되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만혼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다. 결혼이란 형식적 절차만 밟아 일단 사람 구실을 하고 그 후는 바람을 피우든 첩을 얻든 마음대로 하라고까지 할 정도로 성화였다.
어느 날, 대법원 직원으로 있는 친척동생의 배려로 소능마을 사람들이 청와대 관람 차 왔었다. 그날 제백도 그들의 숙소로 갔다. 그날 밤 친척 중 한 분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 우화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470p

제백 장모는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에서 태어났다. 장인의 고향은 이웃 상리면이었다. 배, 사과가 많이 생산되어 지금은 과일면으로 바꿨다. 품질 좋은 국광 사과를 수확하여 땅에다 저장해 놓았다가 인천 등지에 팔면 그 수익이 농사 열 배에 해당해서, 그 덕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그 당시는 이북이 대체로 잘 살았다고 하겠다. 문맹률도 교회가 있어서 그런지 남한보다 낮았다. 그때 제백 고향에서는 여자들도 오십 대에 접어들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래서 할머니, 어머니, 장모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전혀 흉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북은 달랐다. 제백이 장모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자 마누라가 당장 빼앗아버렸다. -506p

호텔에 여장을 풀고 관광에 돌입했다. 이구아수 폭포보다 큰 세계 최대의 과이라 폭포가 수몰된 이야기에 고향의 약물보 위, 작은 소, 용소, 능화숲 앞 소 등이 수몰되어 저수지가 된 것을 연상했다. 출장 사흘째는 제백 일행이 이타이푸호에서 제트요트를 탔다.
동이 튼 아침 일찍 카타라타스호텔에서 나와 코파카바나 해변을 거닐어 보라. 그 지저분함이란!
여기서 우리는 위장과 기만까지는 아니더라도 꾸밈에 대해, 두 번도 아닌 단 한 번 정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다. 일상과 보통하고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았는데, 마나카낭 축구장의 쓸쓸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경기 없는 날의 모습이며, 리오의 삼바대축제 장소인 삼보드로모는 또 어떻고, 거리며 주변이 마치 폭격 당한 사천 격납고를 연상시켰다면 모독일까.
-519p

제백은 대학에 다닐 때도 자력으로 힘들게 근근이 학비를 충당하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했고, 일요일 오전엔 그룹 과외 지도를 하였다. 그는 한때 소공동 극빈자들이 모여 잠만 자는 곳에서도 생활했고, 홍제동 뒷산 중턱에 위치한 판잣집 방 한 칸을 얻어 자취생활도 했다. 처음엔 친구 한 명과 같이 생활했다. 먹을 반찬이 없어 밥을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아 고추장에 비벼 마늘 한두 조각을 반찬 삼아, 찬물로 억지로 넘겼다. 소낙비가 내리는 여름날엔 고무 대야를 방 가운데 놓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비를 받았다. 집 주인은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천장 수리를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이다. 그의 방 책꽂이에 도서관 아르바이트 하면서 가져와 반납하지 않은 책 서너 권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중 세계 유명 작가들의 에세이를 모은 원서 한 권이 눈에 띈다. -561p
출협 납본은 문교부에서 위탁받은 업무였는데, 세월이 흘러 다들 출협의 고유 업무로 착각하고 있었다. 납본실은 접수창구를 제외하곤 삼 면이 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복제 단속원 열 명이 출근하여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고, 잡담하다 가고, 마지막에 서무를 겸한 단 한 명만 남아 업무를 보았다.
납본실은 여직원 두 명, 남자 직원이 부장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 십일 제곱미터의 협소한 장소지만 불평 없이 근무했다. 제백은 TO상, 서류상 형식적으로 한국출판금고 직원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출협 업무를 보게 되었다. -592p

미당이 몇 잔 마시자 ‘작년 것만 아직도 남었읍디다’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조금 더 취하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잔 마시고 나서 얼큰했을 때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읍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연히 비틀비틀 헤어질 때는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라고 했습니다. 깨어나 제백도 기억이 아리송해서 미당께 전화로 간밤의 안부 겸 어느 것이 맞냐고 여쭤봤더니,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잘 모릅니다. 허허허. 자, 전화 끊어요.”
향가 이래 최고의 시를 지은 그도 독불장군일 수 없으렷다.
일찍이 고려의 이제현은 ‘눈에서,
“여관 집 주인 참으로 된 사람이어서 우리를 위해 술 항아리를 내놓네. ”라고 읊었다.
그 이전에 그 누가 이와 엇비슷한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610p

제백은 어제도 걸었다. 오늘도 걷고 있다. 광화문역, 서대문역, 대림역, 석계역은 두 개 구가 포함되어 있고, 사당역과 구로디지털역은 세 개 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세 개 노선이 있는 역은 고속터미널역, 김포공항역, 동대문역사문화 공원역, 디지털미디어시티역,상봉역, 종로 삼가역이며, 공덕동역과 서울역, 왕십리역, 청량리역은 무려 네 개 노선이 있다. 구파발, 응암, 구산, 지축, 증산, 녹번 등의 역과 대조, 진관, 갈현 등의 동 이름이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다. 그것들이 거의 한 곳에 몰려 있어 우연의 일치 치곤 묘했다. 그리고 마포구의 창전동과 서대문구의 창천동이 있다. 은평구의 신사동, 강남구 신사동, 관악구 신사동이 있다. 제일 긴 역 이름도 알아냈다. 일곱 음절이 가산디지털단지, 구로디지털단지이고, 여덟 음절은 디지털미디어시티인데, 다들 공통점이 외래어란 점이다. 대망의 아홉 음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순우리말 역은 굽은다리, 노들, 돌곶이, 뚝섬, 마들, 먹골, 버티고개, 새절, 애오개 정도. 누군가 보라매도 언급했지만 원래는 몽골어. 그리고 사가정역이 조선 시대 대문장가인 서거정의 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혼란스런 것은 역 이름엔 장한평을, 동 이름은 장안평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612p

제백네 아파트 뒤편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방벽 같은 바위산이 있다. 가로 육십 미터, 세로 오십 미터 가량의 제법 큰 규모다. 그곳은 구십 도 절벽이라 식물이 자라지 못하지만, 종종 물기를 머금은 바위 벽면이 마치 큰 캔버스인 양 여기저기에 여러 가지 형상이 그럴 듯하게 나타나곤 한다.
어느 날이었다. 눈이 내릴 것만 같은 날씨였다. 잔뜩 찌푸린 날씨였지만 대체로 포근했다.
제백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살고 있는 아파트의 십칠 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왜 바로 뒷산이 있는데 그 운동법을 택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그것은 산길에 유기견과 길고양이 들이 떼를 지어 다니기도 했고, 산모기나 하루살이 떼의 극성 때문이라고. 특히 조용히 벤치에 앉아 명상이나 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