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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인의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는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김추인의 시는, 개개 시편마다 따라붙는 풍요로운 인간 학명들처럼, 새롭게 탄생하고 부가되는 인간 해석의 경험과 혜안을 충일하게 펼쳐간다. 우주적 스케일과 내면적 디테일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그의 시는 독자적 음색을 정점에서 구가하고 있다.
시인은 저 거대한 자연과 미소한 인간이 공존하고 결속하면서 세계를 이루어간다고 믿는다. 비록 인간이 “만나고 떠나며 떨림을 주고받는 분주한 존재들” 일지라도 그 뿌리는 “신이 편애한 생명체로서 우주 특구를 누리는 족속”임을 잊지 않는다.
그 위대한 프로젝트에는 “하늘도 바다도 신기루도 사라지는/무無”도 깃들이고 “반쯤 늙어서야 보이는/허무 빛깔의 그리운 것들”도 들어오는데, 이때 사물들은 자연 물성 그대로 현현하지 않고 한결같이 세계의 보편성 속에서 상징적 상관물로 몸을 바꾸어간다. “얼음송곳 찔리는 맨발 위에 기도를 얹고 서 계신 이들의 성스러운 숲”이나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우주”가 말하자면 그 보편성의 주인공들이다. 이제 우리는 “홀로 글썽글썽 눈이 부신” 시인이 “다중우주를 넘보는” 순간에 감동적으로 동참하면서, 그가 제안하는 “한 판 빛의 퍼포먼스”를 통해 “오늘은 오늘의 태양에 기대기로” 마음 먹는다.
우리 시단에서 매우 보기 드문 철학적이고 심미적인 통찰을 수반하면서 김추인의 시는 그렇게 우주 바깥으로까지 하염없이 번져가고 있다. 아름다운 빛을 지상으로 쏘는 언어의 파동이 귀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이번 김추인 시인의 시집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는 인간 학명에 관한 재해석 또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반향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동안 인류가 인간 규정을 하면서 제거한 인간 원형을 복구하면서 근원적 담론을 탐색하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기존의 인간 의미를 우회하면서 현존하는 인간 체계의 문제를 벗겨내고 있다. 선행적으로 기표화 된 인간 개념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수많은 소타자들인 인간 학명을 통해 제기한다. 이것은 학명이 가진 충동적 만족을 넘어서 인간 담론 그 자체의 원형과 의미를 탑재하기를 바라는 대타자의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사막은
길이 없어 다 길이었다

길을 나서면
길이 먼저 길을 내주었고
바람이 등을 밀어 주었다

천번을 미워하면
만번을 안아주던

우리별, 아- 어머니

붉은 사막, 나의 우주에 앉아
어머니 속울음을
다중의 내가 듣는다

불이헌에서

1부 신기루는 몽상 중

거울 | 11
별 여행자의 니르바나 | 12
아주 느린 편지 | 13
케나가 노래할 신기루 | 14
사하라의 전생을 엿보다 | 15
내게서 말똥내가 난다 | 16
선線의 미학 | 17
머나먼 스와니를 위하여 | 18
눈표범 | 19
마음의 서쪽 | 20
달빛 내리던 모래의 섬 | 21
화석 | 22
바다가 우리를 데려가리라 | 24
길 위에서 길을 상상하다 | 26
21그램의 길 | 27
겨울바람 | 28
유적지의 공중계단 | 30


2부 장미의 침묵

타카마츠의 새를 기억한다 | 35
향수는 어디다 뿌리나요? | 36
유리알 유희 | 37
외사랑 | 38
장미원의 퍼포먼스 | 39
나의 수많은 ‘첫‘ 들에게 | 40
밀레니엄 보고서 | 41
십일월엔 남녘 바다엘 가고 싶다 | 42
기억의 고집 | 43
세포가 기억하는 잠버릇 | 44
다락방이 있는 집 | 45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 46
달아, 밝은 달아 | 47
상징의 연못 | 48
일반 상대성이론의 실체 | 49
설렘의 방정식 | 50
민들레가 어느날 | 52


3부 암호를 풀다

어제, 미래를 걸어가신 알선생님 | 57
무탄트의 통찰 | 58
열역학 제2법칙 | 59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 60
다중의 세계, 수많은 나를 보다 | 62
상상나무의 마음산책 | 63
여기는 목성역입니다 | 64
미리 보이는 특이점 | 66
상상은 현실을 만든다 | 68
메타 세콰이어 | 70
특별시민의 어느 하루 | 71
별에서 살다 | 72
나, 어디서 와 어디로 흘러가는가 | 73
인류세 | 74
Blue Technology | 76
위대한 프로젝트 | 78
열역학 제2법칙에 반反하여 | 79


4부 벽속의 아이들

욕망이라는 환상열차 | 83
튀빙겐의 아픈 영혼 | 84
틈새의 미스테리 | 85
플라스틱에게 | 86
무거운 반성 | 87
쌍문동 어디쯤에서 | 88
시간이 기록하는 인간사 | 89
명상, 하나의 광대한 동공이 열리는 | 90
층간소음 밀고자 | 91
소쩍새가 운다 | 92
아버지의 숲 | 94
행인3, 행인4입니다 | 95
불편한 진실 | 96
암흑물질 | 97
벽 속의 아이들 | 98
바다의 집시, 해파리 | 199
해설┃신인류의 몽타주와 인간 원형 고찰 ┃ 권성훈 | 101

하늘과 땅의 접지에 지평선이 누워 있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선의 비의秘意
찔레의 5월은 벌 떼 붕붕대는 평원
지평선의 시간은 정지에 가깝다

아무도 그은 적 없는 선
누구도 의심한 적 없는 선
없으면서 있는 존재의 이름을
누가 맨 처음 불렀을까

몽상과 현실 사이,
영상 이미지를 구현하던
타르코프스키의
정지화면에서 나, 오래 서성인다

멀리서 있지만 가까이서 없는 역설의 접점
없는 존재의 있음이라니
북해도 설원 아득히 누워있던 한 금, 지평선
- 「선線의 미학」 전문


오랜 침묵 후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을 때 입가의 미세한 떨림을 본 듯하다
나도 표 안 내고 떨고 있다는 걸 안다
내 주변은 떨림으로 가득 차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떨림들이 부유하고 있다

존재들에겐 모두 떨림이 있다

산들바람이 올 때 은행잎들이
고요한 떨림으로 반응하듯
보이지 않는 빛의 떨림으로 해서
시공간이 진동하듯
진동은 차갑고 기계적이나 떨림은 뜨겁다 음악은 사랑은 그 자체로 떨림이지만 은혜하는 사람과의 별리는 심장을 때린 진동으로 죽으리만치 사무치게 파동쳐 나가는 것

138억 년 전 그날 이후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만나고 떠나며 떨림을 주고받는 분주한 존재들이 되었다 세상에는 보이는 떨림보다 보이지 않는 떨림이 더 많다 나와 그대의 떨림으로 해서 우주는 사랑스러운 방주가 될 수 있었던
-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전문

수많은 방울의 다중우주 속 다중의 나를 보다
하나의 비누방울 속에 실린 채
대우주의 망망대해를 달리는 중이다 표류 중이다

비누방울이 커지고 같은 두 개의 방울로 분리된다면 나 또한 분리되어 똑 닮은 아기우주에서 나와 나는 다르게 자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으리
내 서재 안에 또 다른 차원의 우주가 있다 치면 언젠가 우린 차원을 기어코 넘나들 수 있을 것
시공간에 축지법을 쓰듯 공간을 접고 구부려 어느 한순간에 드나들 수 있으리란 것

아기우주의 나를 상상하다
역마살에 끄달려 모래땅을 떠도는 나는 감자를 깎고 있는 나는
없는 그에게 메모를 날리고 있는 시무룩한 나는

은하의 푸른 희미한 신기루를 달리는 환상열차를 보다
- 「다중의 세계, 수많은 나를 보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