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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대의 『십 원 동전의 항변』은 크게 5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 서평 】


탄탄한 내공으로 지은 '수필집' 한 채
- 정국대의 「십 원 동전의 항변」 작품세계 -


차달숙 수필가. 시인
(부산문학인협회 명예회장)

1. 들어가면서

정국대 작가는 1944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시인, 수필가로 등단하여 부산문인협회, 시가익는마을, 부산 수영구문인회 회원이다. 현재 부산문학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왕성한 창작 활동과 문단 활동 등 노년에 전방위 문학을 하는 엔터테인먼트 문학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속해서 불타고 있는 문학에 대한 열정은 때로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다.
정국대 작가는 2012년 계간 《문예시대》 신인상을 받으며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그 후 서구문화원에서 시 창작과정을 수료하고, 2015년 계간 《문예시대》에서 배상호 시인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2018년 시집 『철든 여자』을 발간하였으며, 2021년 『바다는 늙지 않는다』라는 제2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수상으로는 2013년 사회복지법인 청전 「제4회 세대공감 문예한마당 공모전」 대상에 뽑혀 부산시장상을, 2015년 부산 서구문화원 「제3회 전국시낭송대회」 우수상, 2016년 부산시 주최 「출산 장려 편지쓰기 대회」 금상으로 부산문인협회 회장상을 받았다.
2021년 계간 《문심》 시 작품상을, 《수영문예》에 게재한 수필 「비 내리는 수영사직공원」으로 특별작품상을, 제2시집 『바다는 늙지 않는다』로 부산문학인협회 현대시 저작상을 수상했다. 2022년 제3회 문심문학상 우수상을 받고, 올해 계간 《문심》 제18호에 게재한 「십 원 동전의 항변」이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시와 수필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2. 작품세계를 펼치며

▣ 새 날듯이 옛집으로 가는 길

자기가 정한 별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 듯 그저 자석에 쇳가루 끌리듯이 가는 길이 있다.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것이 포기할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길이 있다. 자연 속에는 우리가 쉬 헤아리기 힘든 자기 길을 찾아가는 걸음들이 있다.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뜻하는 회귀라는 말은 돌 회回에 돌아갈 귀歸가 합해진 말이다. 마땅히 돌아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회귀를 대표하는 것은 아무래도 연어가 아닌가 싶다. 자신이 태어난 동해안 하천을 떠난 연어들은 멀리 알래스카와 베링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그 거리가 무려 4만여km나 된다고 한다. 서울~부산 거리의 100배에 이르는 길이다. 그 먼 길을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어떻게 되돌아오는 것인지, 틀림없이 다시 찾아오는지 그 어떤 과학적인 설명도 신비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다.
신비롭기는 뱀장어도 뒤지지 않는다. 뱀장어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갔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와 생을 마감하는 연어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뱀장어는 오히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바다로 나간다. 아직도 그곳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 수 없는 깊은 바닷속 해저 산맥 어딘가에 알을 낳는다. 세상의 위험으로 벗어난 저만의 자리를 뱀장어는 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때가 되어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은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정해진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는 듯이 어미가 살던 강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들이 가는 길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다. 대체 실처럼 가늘고 작은 새끼들이 어미가 살던 곳이 어딘지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것인지 수수께끼도 그런 수수께끼가 없다 싶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미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던 새끼들이 태풍이나 폭풍을 만나는 경우이다.
그러면 엄청난 거리를 해류에 떠밀리게 되는데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밀렸음에도 새끼 뱀장어들은 다시 방향을 찾아 어미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잃어버릴 수 없는 길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일까. 곧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 알을 낳고는 죽어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주는 어미의 지극한 사랑이 새끼들의 몸속 지도처럼 남아 있기 때문일까. 하나하나의 신비함에 숙연해질 뿐이다.
사람이 성장하여 고향이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고 유년 시절 기억을 아름답게 바꾸어서 반추하는 일을 문학이나 심리학에서는 '퇴행move back'이라 하고, 또 '귀소본능歸巢本能'이니 '회귀본능回歸本能'이라 하기도 한다.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상자들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 때문이다. 정국대 작가는 오래된 과거 기억을 건져 올려 오늘에 비추는 일이 아름답게 투영되고 있다. 그가 새 날듯이 옛집으로 가는 길에서의 작품을 만난다.

고향 가는 버스만 타면 내 마음은 날개를 단다. 황강이 유유히 흐르는 남정교를 지나면 내 눈은 바쁘다. 강변 절벽 아래에 있는 연호사와 함벽루에 반갑고도 아련한 눈길을 보낸다. 마치 헤어진 첫사랑이 먼 길을 돌고 돌아 만나는 애틋함과 슬픔 같은 마음으로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똑같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이 가고 기다리는 이 없어도 꼭 들리게 되는 곳이 연호사와 함벽루이다. 어쩌다 그냥 오게 되면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중략)
나이를 먹어가며 연호사와 함벽루는 또 다른 의미로 자주 찾게 되었다. 손님이 오면 딱히 갈 곳이 없는 관계로 보여주고 싶은 곳이 되었고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또한 친구들과 겨울에 눈이 하얗게 덮인 백사장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연호사 뒷산 대야성이 있던 자리에 성벽은 없어졌지만, 성터의 흔적은 남아 있다. 황우산은 높지 않아 자주 올랐던 산이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황강과 백사장에 듬성듬성 서 있는 미루나무들은 슬프도록 아련했다. 그 모습이 어쩌면 내 고독의 무게를 더해 주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나는 수덕사로 출가한 김일엽 스님(속명 김연주)의 『청춘을 불사르고』란 책을 읽고 난 뒤여서 한참 감성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즈음 자주 찾은 연호사 주지 노스님을 잊을 수가 없다. 연세가 드셨지만, 항상 정갈하시고 인자한 웃음을 잃지 않고 반겨 주셨던 분이다. 가끔 차도 내주시며 다독여 주셨다. 마음이 울적하고 슬플 때, 가기만 해도 위로가 되던 곳이다.
- 「그곳에는」 중 일부 -

나는 작은 면 소재지에서 위로 오빠 둘, 언니 셋에 막내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며느리를 보신 후였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며느리 보기 부끄러워 출산의 뒤처리도 제대로 못 하시고 이불속에 밀쳐 두었다고 한다. 해산 소식에 달려온 올케언니가 씻기고, 젖이 모자라 어렵게 구한 우유를 먹고 자랐다는 얘기를 들었다.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막내라고 보살핌을 많이 받고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식사 때에 아버지는 독상을 차려드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둥근 상에 같이 밥을 먹는다. 아버지상에만 놓여있는 갈치나 고등어가 먹고 싶어 칭얼대면 아버지는 곁에 앉히시고는 뼈를 발라 주셨다. 다른 식구들의 눈총을 받으며 키가 작아 베개를 의자 삼아 아버지상에서 밥을 먹으며 의기양양했던 그 시절이 어제만 같다. (중략)
설을 사흘 앞둔 몹시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까지 어렸던 나는 그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관을 붙잡고 몸부림치며 울던 어머니와 친척들이 우는 것을 보고 따라 울었다. 놀러 간 언니를 찾아가든 일이며, 아버지 상여 옆을 떡을 들고 따라가든 나는 다섯 살 철부지였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을 상실했는지 전혀 짐작도 못 할 나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분가해 살던 큰오빠 식구와 같이 살게 되면서 고모가 된 나는 귀여움을 받던 자리를 조카에게 내주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전 같지 않았으며 그때의 어머니들이 다 그랬듯이 경제력이 없는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짐을 지웠다는 자책으로 자식들 단속이 심하셨다.
- 「나의 어린 시절」 중 일부 -

합천 장날은 3일 8일로 5일 만에 장이 선다. 장이 서는 하루 전에 오빠는 삼천포로 물건을 사러 가신다. (중략) 장날 아침 소매하는 분들은 손님에게 생선을 묶어 줄 간추린 짚을 필요한 만큼 준비한다. 자기들이 팔 수 있을 만큼 종류별로 몇 상자씩 가져다 팔기 좋게 진열하고 손님을 맞이한다. 몇 마리씩 짚으로 묶어주는데 집에 다 가도록 풀리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절인 고등어는 큰 마리 속에 작은 것 한 마리를 넣어 한 손으로 팔았다. 지금도 안동 간 고등어나 재래시장에 가면 한 손씩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합천에는 장날 아니면 식품을 사고파는 상설시장이 없어 모든 상행위는 오직 장날만 이루어졌던 것 같다. 합천은 분지라서 그런지 겨울은 유난히 춥고 여름은 더웠다. 겨울은 날씨가 추워서 며칠 정도는 신선도가 유지되어 별문제가 없는데 여름철이 문제였다. 장날 다 팔지 못한 생선은 소금 간을 해서 인근 장으로 가서 소매인들이 팔고 지역 상인들에게 넘기기도 했다. 그래도 남은 생선은 상하기 전에 양이 적으면 이웃에 헐값에 팔기도 하고 그냥 나누어 주기도 했다.
중학교 재학 중 번 텅 빈 시장에 소금 간을 많이 한 생선 상자를 늘어놓고 부채로 파리를 쫓으며, 숙제했던 일이 생각난다. 생선의 비린 냄새와 같이 지워지지 않는 소녀 시절의 슬픔 같기도 해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또렷하게 떠오른다.
어물전 도매업을 하던 오빠는 10년 후 통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 수산업 협동조합 중매인으로 시작하여 규모는 작으나 냉동 공장 2개를 운영하며 활발하게 사업을 잘 끌어나갔다. 냉동이나 냉장 시설이 없던 그 당시 오빠와 올케언니가 다 팔지 못한 생선 때문에 조릿조릿 애태우던 모습이 가끔 떠올라 먹먹하다.
- 「어물전 기억」 중 일부 -

위 인용 글에서 정국대 작가가 회상하는 고향 합천과 어린 시절의 생활 모습이 잘 그려진다. 연어나 뱀장어의 회귀처럼 가슴이 설렌다. 여기서 역증상연逆增上緣이라는 말이 생각된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고통을 더욱 분발하는 인연으로 삼아라.'라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일랑 연어처럼, 뱀장어처럼 영혼에 새겨진 길을 따라 마음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작가는 행복하다고 생각해본다. 저자의 심리 속에 모든 지나간 일이 이미 순수화되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기 때문이다.

▣ 비평적 의식과 성찰

인간은 일생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탐색하는 존재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삶의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물음들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는 존재이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예술 활동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가기도 하고 일반 대중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답을 찾는다는 것과 제시한다는 것 사이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유의 강이 흐르기에 사실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일단 그런 행위를 위해서는 그들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들로부터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 중 하나가 비평적 의식을 바탕으로 한 성찰이다.
수필은 시나 소설처럼 상상이나 은유를 통해 그럴듯하게 가공의 집을 짓는 창작 활동이 아니다. 기억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갈무리해 두었던 일상을 길어내어 그 의미를 새롭게 음미해보는 작업이다. 또한 그 체험을 해석하여 유의미성을 내일 삶에 적용해 보는 관조와 성찰의 자전적 기능을 본질로 삼는다.
어느 날 길 가던 할머니가, 길에 떨어진 내 친구 십 원짜리를 만났습니다. 아픈 허리를 굽혀 주어서는 떨어뜨린 사람이 혹시 없나 주위를 살폈습니다. 그러고는 소중히 호주머니에 넣는 걸 인상 깊게 보았지요. 내 자존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은 참 슬픈 이야기가 있답니다. 바로 이 할머니가 베란다에서 시들어 가는 꽃을 아파트 화단에 심으려고 호미질합니다. 몇 번 하지 않아, 내 친구 십 원짜리 동전이 자꾸 나왔습니다. 흙이 묻고 녹이 슬고 삭아 어떤 친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십 원짜리 언니도 몇 있고, 백 원짜리 오빠도 몇 있었습니다.
알루미늄이 들어간 작은 십 원짜리 내 친구가 제일 비참했습니다. 또래인 내가 보아도 부식 정도가 심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누가 왜 죄 없는 우리를 생매장 했을까요. 까닭을 알 수 없는 할머니는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꽃 심는 것도 잠시 잊었습니다. 수돗가에서 흙을 씻고 수세미로 닦아도 동전 노릇하기는 영 글렀습니다. 이걸 어쩌나 신문지를 깔고 말리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생각이 많으신지 내내 우울한 표정입니다. 나도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동전을 화단에 묻은 사람이 작은 돈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전 액수는 부스러진 십 원짜리도 있고 해서 셀 수는 없지만 큰 종이컵 하나는 될 정도입니다. 전부 쓸 수 있다면 라면 몇 개는 살 수 있습니다. 적은 돈이라고 허투루 하는 사람이라면 배가 고파보아야 돈 귀한 줄 알겠지요.
- 「십 원 동전의 항변」 중 일부 -

재작년에 발간된 어느 책자에서 읽은 '누가 이 돌고래를 죽였나.'라는 기사가 생각난다. 내용은 타이 송클라주 운하에서 둥근머리돌고래 한 마리가 표류했다. 수의사들과 고래 보호 단체 회원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결국 숨졌다. 숨지기 닷새 전 비닐봉지 다섯 개를 토하고 숨진 돌고래의 충격적인 부검 결과다. 돌고래의 배 안에서 시커먼 비닐봉지가 무려 80개, 무게만 8킬로, 다른 플라스틱 조각들도 나왔다. 비닐봉지를 토한 것은 살고자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는 너무나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 또 플라스틱 빨대가 꼽힌 채 살아가던 바다 거북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공범이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략)
요즘 공중화장실에서 물티슈는 변기가 막히니 넣지 말라는 주의문구를 종종 보게 된다. 종이 화장지 외에 물티슈 사용량도 많이 늘었다. 편리성도 있지만, 값이 싸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판촉 행사로 물티슈를 공짜로 여기저기서 공짜로 나누어 준다. 화장지처럼 옆에 두고도 쓴다. 휴대하기에 좋도록 소포장도 많이 나와 휴대하며 쓰기도 한다.
손주 둘을 키우는 친구 집에서 일하는 가사 도우미 이야기다. “걸레를 씻어 가며 청소를 안 하겠다.”라고 하면서 평수가 넓은 아파트를 물티슈로만 청소한다고 한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아예 걸레가 없다는 집에서는 물티슈를 상자로 사 놓고 쓴다니 그 소비량이 가히 짐작이 간다. 다음 세대에는 걸레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구나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또한 많은 생물이 함께 살아가야 할 이 지구에 너무 많은 무례를 범한다는 생각에 혼자 반성한다. 문제는 지금의 생활 방식으로는 환경 문제가 호전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국가의 국민일수록 쓰레기 배출이 많다.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내 나름대로 해 본다.
수년 전 독일을 여행하고 온 수필가 C 선생은 공항에서 생긴 다음 일화를 소개했다. 옷차림이 단정한 신사, 숙녀들이 여행객들이 마시고 버리는 플라스틱 물병이나 음료수병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네 개를 가져가면 지방 정부에서 1유로와 덤으로 물 한 병을 받는다. 8개를 모아서 2유로를 받으면 한 끼 식사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환경도 지키고 저소득 가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이런 정책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쓰레기를 만드는 일은 불가피하다. 조금은 느리게 살아가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일회용 용기 사용을 줄이며 웬만한 것은 재사용하면 좋겠다. 자원을 아끼고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다 보면 살기 좋은 환경이 되리라 믿는다. 후손들의 삶이 건강하고 풍요롭기를 기원하면서, 우선 나부터 실천하겠다고 다짐한다. 지구는 하나 뿐이다.
- 「공범」 중 일부 -

위 인용 글은 어디선가 본 듯한 지극히 낯익은 모습이다. 그 모습이 발아되고 숙성되어 작은 파문으로 다가온다. 수필은 특별한 삶, 신기한 소재들이어야 문학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의 맛은 언제 어디선가 본 듯한 지극히 낯익은 모습들이 발아되고, 숙성되어 작은 파문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수필은 시나 소설처럼 상상이나 은유를 통해 그럴듯하게 가공의 집을 짓는 창작 활동이 아니다. 기억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갈무리해 두었던 일상을 길어내어 그 의미를 새롭게 음미해보는 작업이다. 또한 그 체험을 해석하여 유의미성을 내일 삶에 적용해 보는 관조와 성찰의 자전적 기능을 본질로 삼는다. 이런 수필의 평이한 일상성에 충실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독자로서 행복한 일이다.

▣ 인간 정신이 바탕으로 된 수필

우하 박문하 선생은 '수필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슴으로 시를 쓰고 머리로써 평론을 쓴다면 수필은 두 다리로써 쓰는 문학이다. 수필은 인생과 생활을 단단히 딛고 선 묵직한 두 다리 없이는 써지지 않는 것이다. 생활의 바탕이 없는 수필 문학은 공허한 기교에 불과하다. 나는 일찍이 내가 수필을 쓰는 이유의 하나로 현실 생활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오는 일종의 카타르사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필에 대한 긍지를 가진 박문하 선생은 수필의 문체에 대해서 “글이란 참된 데서 피어나고, 만드는 데서 시든다.”라고 하여 꾸밈새 없는 소박하고 진실한 수필이라야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수필가 현석 김병규 선생이 “문체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짐작된다.”라면서 “글을 지나치게 다듬는 스타일리스트의 글을 읽으면 피곤해진다.”라고 지적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된다.
좋은 수필에는 대개 작품 전반에 걸쳐 따스한 인간미나 인격적인 정겨움, 또한 소박한 인간적 체취 같은 것들이 숨결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들의 마음속에 전해져 은은한 감동과 공감을 안겨 준다. 또한 이것이 수필이 지닌 가치요 특성이다. 수필이란 본래 따뜻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마음이나 정情에 바탕을 둔 문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는 어린이집에는 2.3세 새싹반과 4.5세 푸른 하늘 반이 있는데, 새싹반에 먼저 들어간다. 아이들이 우르르 품에 안긴다. 칠팔 명 다 안아주고 배꼽 인사하고 막 시작하려는데 한 아이가 무릎의 작은 상처를 보여 주면서 아프단다. 나는 “호” 하면서 “할머니 손이 약손이다.”라며 상처를 손으로 가볍게 쓸어 준다.
그러면 새싹반 아이들 전부가 팔, 다리 전부 보여 주며 모두 “호” 해달란다. 옛날에도 그랬듯이 할머니 약손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어디 동화 들려주는 일만, 할머니 일인가 다시 분위기 겨우 잡고 동화를 시작한다. 새싹반이 끝나면 2층 푸른하늘반으로 간다. 제법 크다고 글을 읽을 줄도 알고 능청도 떨고 할머니 옷에도 관심을 보인다.
한 아이가 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아니나 다르랴. 아이들 전부가 병원에 갔다. 피자를 먹었다. 놀이터를 갔다. 완전 보고회다. 아이들 일주일이 눈에 그려지고 소통이 쉬워진다. 한 어린이집에 한번은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갔더니 낮잠 시간이었다. 잠이 없는 예림이가 베개를 들고 자는 친구들에게 “꼬끼오 일어나라” 하면서 깨운다. 어찌나 귀엽던지 나도 모르게 웃으며 안아 준다.
며칠 전에 혁이가 갑자기 배가 아파 실수했다. 선생님과 나는 빨리 처리하고 옷을 갈아입혔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다른 친구도 배 아프면 실수할 수 있다고 달랬다. 그래도 내 품에 안기어 한참을 훌쩍이던 혁이의 따뜻한 체온이 지금도 느껴진다.
한 번은 시간을 마치고 나오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은지 엄마가 반갑다고 손을 잡는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은지가 집에 오면 엄마 아빠 앉혀 놓고 할머니처럼 동화를 들려준다고 한다. 둘이 한참을 웃었다. 내 일에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 「동화 할머니」 중 일부 -
오늘 지하철 안에서의 일이다. 경로석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간다. 손에는 껌 통을 들고 비틀거리며 가다 좌석에 주저앉는다. 보기가 영 불안하다. 연세는 설핏 보기에 나보다 네댓 살 위로 보인다.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지갑을 찾느라 지체하는 동안 할머니는 일어나 저만치 가고 있다. (중략)
할머니가 비틀거리며 지하철 안에서 승객에게 바란 것은 기껏 껌값, 천 원 한 장의 관심이나 도움이었을 것이다. 다른 때였으면 찾아가서라도 드렸을 것인데 옆 손님의 눈치를 보느라 외면하고만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속이 상한다.
오후가 되어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지하철을 탔다. 다리가 불편한 젊은이가 도움을 청하는 작은 전단을 승객 무릎에 놓으며 지나간다. 팔에도 상처의 흔적이 크다.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해서 얼른 전단지와 천 원을 함께 건네고는 내릴 채비를 한다. 오늘은 작은 사랑을 나눌 기회를 한 번은 놓치고 만 셈이다. (중략)
오늘 지하철에서 본 할머니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사정이 있어 그 나이에 껌 통을 들고 반 구걸을 해야 했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해보았자 껌값 정도 도움인데 그것도 소신껏 하지 못한 내가 너무나 못나 보이고 부끄럽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남에게 도움을 주거나 봉사할 때는 '얼마나 많이 주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 「이럴 때는」 중 일부 -

수필가 정국대는 누구보다 넓은 치마폭을 지닌다. 그 치마폭 속에는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는 자애 정신이 있다. 「동화 할머니」 「이럴 때는」 「외손녀와 밤바다」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 「꽃 필 날 기다리며」 「느티나무 가을 물들다」 「한 줌의 잣을 위하여」 등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수필은 읽는 이로 하여금 훈훈한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 나라 사랑과 역사의식이 뚜렷한 작가 정신

2000년도에 프랑스 《빠리장》지가 프랑스 민족의 최대 위인이 누구냐. 하는 설문 결과를 낸 적이 있다. 전쟁 영웅 나폴레옹이 겨우 9위를 차지했지만, 압도적인 다수로 제1위를 차지한 사람은 과학자 파스퇴르였다. 파스퇴르는 프랑스가 낳은 세균학자요, 화학자이다. 그는 산소의 연구로 젖산균을 발견하고, 포도주의 산화를 막기 위한 저온 살균법을 고안하여 프랑스의 포도주 제조고를 5억 프랑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광견병의 예방 접종은 그의 최대 업적이다. 파스퇴르가 그렇게 국민에게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은 그의 업적보다 만년에 프랑스 과학원에서 연설한 다음의 한마디 말 때문이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심어준 이 한마디는 프랑스 국민의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는 애국심의 용광로가 된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서간집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태어난 조국을 위해서 재능과 정열을 바칠 기회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국경이 있고, 조국이 있다.

1992년 10월 2일 광양제철소 종합운동장에서 25년 동안의 건설 여정을 마무리하는 준공식이 열렸다. 청암은 준공식 다음 날 국립묘지의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라고 영전에 보고했다.
“각하. 이제 마쳤습니다.”
故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사진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4반세기 동안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모든 임직원의 집념과 땀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져 와 가슴이 뭉클했다. 집념의 여정이란 전시에는 하와이 구상, 로멜 하우스, 종이 마패, 우향우 정신, 내 사전엔 '부실'이란 단어가 없소, 철의 오케스트라, 품질과 목욕론 등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박태준 회장의 철학과 신념 그리고 대장정을 이끌며 완수한 그간의 노고와 땀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따뜻함과 화목한 가정의 가장의 면모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철강왕 박태준이면서도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신념으로 인재 양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들이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는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포항공과대학과 산업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데 앞장섰다. 동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그리고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는 베세머 금상 수상, 훈장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반짝이고 있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청암을 만나 나눈 일화가 있다.
“여보, 박 사장, 당신의 신앙은 무어요?”
“네, 저의 신앙은 철鐵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청암의 대답을 듣고 참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저런 사람이 우리 삼성을 이끌어야 하는데. 박태준이 철을 신앙으로 알고 일하듯이 삼성을 신앙처럼 알고 헌신할 인재가 없을까.“
철이란 신앙을 가진 확고한 신념에 머리가 숙어진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철을 기반으로 한 모든 산업이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기념관을 나서는데 하늘과 바다가 더욱 푸르고 바람 한결 청량하다, 기념관 바로 앞 그분 생가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수정원 개잎갈나무에 기대어 사색하는 과묵하고 선이 굵은 그분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 「저의 신앙은 철입니다」 중 일부 -

정국대 작가는 「저의 신앙은 철입니다」 「국립김해박물관에 가다」 「봄비 내리는 수영사적공원」 「재한 유엔기념공원을 다녀오다」 등 애국심을 고취하고 우리나라 역사 사랑을 실천하는 작품을 썼다.

▣ 경험과 사유로 그린 그림들

수필은 전체적으로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추억담,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중에서 정국대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라는 생에 주기적 삶의 가치를 비교적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인간이 최종적인 그리움은 바로 죽음이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듯한 죽음이요 지금 죽는 것처럼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에서 절망이면서 희망이요, 둘이면서 하나일 수밖에 없다.

수년 전 일이다. ○○복지관에서 주관하는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첫 모임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자기소개와 참가하게 된 동기, 프로그램의 취지와 진행 과정에 대한 강사의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모두 낯설어 서먹했지만, 현재를 잘 살아야 누구나 닥칠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다니 모두 교육에 열중했다. (서두)
마지막 시간은 저녁에 있었다. 장소는 광안리에 있는 올리베따노 수녀원 성분도 은혜의 집 지하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장례지도사의 지도로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시간이다.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면 이런 체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강의가 끝나고 방석과 작은 탁자 위에 백지와 볼펜 그리고 초 하나가 놓여 있다. 지도사가 나누어 주는 허리까지 오는 삼베 적삼을 한쪽 팔은 끼지 말고 입어라는 지시다. 옷을 입는 사이 봉사자가 다니며 초에 불을 켜 주고는 강의실 전등을 모두 꺼 버린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유언장을 쓰라고 했다. 모두 긴장감으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탁자 위 촛불만 일렁인다. 옆에서 작은 탄식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모두가 술렁인다.
앞에 자리한 작은 무대 위에는 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전깃불 아래서의 관 모습과 분위기는 그리 무겁지 않았는데 촛불에 비친 관 모습은 어둡고 무겁다. 막상 유언장을 쓰려고 하니 살아온 지난 시간이 영화 필름처럼 생생하게 순서 없이 지나간다. 눈물이 난다. 옆에 사람이 눈치를 챌까 가까스로 진정하고 볼펜을 잡고 눈을 감으니 마음이 열린다. 쓰기를 마치자, 앞줄부터 한 사람씩 관에 들어가 누우면 관의 뚜껑을 닫는다. 한 5분쯤 경과했을까 지도사가 관의 뚜껑을 열면 나온다. 드디어 내 차례다.
아무리 체험이라 하지만 관에 들어가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만약, 탕탕 뚜껑에 못을 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어릴 적 죽음을 상상하다 무서워 어머니 품을 파고들었던 생각이 난다. 갑자기 어머니가 그리웠다. 뚜껑이 열리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긴 한숨이 나왔다.
전등을 켜자 표정들이 심각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과연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죽음,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이 분명한 사실 앞에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자.
아름다운 삶 끝에 아름다운 마무리, 그리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실천에 옮겨야겠다.
-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중 일부 -

위 인용 글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생에 관한 통찰력이 묻어있다. 사실 생사의 공존은 삶의 손처럼 분리할 수 없는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관계이다. '내 속에 사는 죽음'이라는 표현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의 손이요 동거라는 표현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의 영안靈眼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진다.

3. 나가면서

첫 수필집은 여러 가지를 담으려는 의욕으로 부산하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정국대 수필은 책장에 꽂힌 책처럼 정돈되어 가지런하다. 그가 수필 등단 11년 만에 내보이는 책은 화려한 색깔이기보다 은근하고 느긋하다. 내 수필집을 갖겠다는 꿈은 허황하지 않았다. 조급하게 달려오지도 않았고, 치열하게 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써온 결과물이다. 글의 소재는 일상적이며 문장은 난해하지 않다. 별스러운 체험으로 독자를 유혹하거나 내밀한 구성력, 현란한 수사적 기교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의 수필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반듯하게 한 시대를 살아 온 인품과 친화력이 아닐까. 수필집 편 편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다 거론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정국대 님 수필집 『십 원 동전의 항변』 출간을 축하드리며 앞으로 수필의 길에 행복이 충만하길 기원한다.

벌써 늦가을을 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변하지 않는 내 안의 나를 보는 것 같다. 좀 더 깊게, 넓게 인생을 살며 그런 글을 쓰고 싶었는데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지라 매우 부끄럽다.
늦게 시작한 글쓰기라 좀처럼 늘지 않은 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살아오면서 있었던, 그리고 느꼈던 일을 정리하였다. 글을 묶어 보니 앞뒤가 없다. 간곡한 마음으로 양해를 구하며 앞으로 더 많이 감사하고 비우고 살기를 다짐한다.
수필로 등단한 지 십여 년이 지나서야 이제 책을 내게 되었다.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이 책을 내놓는다. 책이 나오도록 도움 주신 모든 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2023년 처서를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며
망미동 집에서 정국대

차례

작가의 말 ‥ 정국대 _ 3

제1부 / 내 이름을 생각한다
° 그곳에는 _ 11
° 나의 어린 시절 _ 16
° 설 대목장 풍경 _ 21
° 손녀와 밤바다 _ 26
° 시래기 _ 31
° 내 이름을 생각한다 _ 35
° 인자 씰 데가 없습니더 _ 39
° 흰머리 _ 45


제2부 / 저의 신앙은 철鐵입니다
° 어느 노부부 사랑 이야기 _ 51
° 이럴 때는 _ 57
° 일탈을 꿈꾸며 _ 62
° 농암 종택에서의 하룻밤 _ 67
° 커피가 커피답다 _ 73
° 십 원 동전의 항변 _ 78
° 저의 신앙은 철鐵입니다 _ 83
°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_ 89
° 공범 _ 95


제3부 / 진달래 화전花煎
° 꽃 필 날 기다리며 _ 103
° 난？ 축제 _ 108
° 느티나무 가을물 들다 _ 113
° 와룡매 _ 119
° 진달래 화전花煎 _ 124
° 꽃다발 _ 128
° 한 줌의 잣을 위하여 _ 133
° 솔밭에 수국 _ 138


제4부 / 넉 점 반
° 넉 점 반 _ 145
° 동화 할머니 _ 150
° 내가 만난 심훈 _ 155
° 박목월 생가를 가다 _ 160
° 음치 탈출을 꿈꾸며 _ 165
° 어물전 기억 _ 170
° 가을 나들이 _ 175
° 아무르 _ 180


제5부 / 아우라지와 정선
° 국립김해박물관에 가다 _ 187
° 아우라지와 정선 _ 192
° 주남저수지의 코스모스 _ 197
° 맥도생태공원 _ 201
° 봄비 내리는 수영사적공원 _ 205
° 재한 유엔기념공원을 다녀오다 _ 212
°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_ 223
° 솔뫼 성지 _ 229

서평 ‥ 차달숙 _ 235
° 탄탄한 내공으로 지은 '수필집' 한 채

십 원 동전의 항변


나는 십 원짜리 동전입니다. 어쩌다 세월에 밀려 돼지 저금통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노랗게 반짝이며 대접받던 시절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이제 내가 길에 떨어져 있어도 눈길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없이 누군가의 발에 밟히기 예사입니다. 내 위로 자동차라도 지나가면 내 꼴이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아픈지 때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별로 쓰임새가 없어지기는 사람들이 카드를 많이 사용하고부터입니다. 그리고 큰 마트에는 포인트라는 제도가 있어요. 얼마 안 되는 거스름돈은 포인트로 결재하기도 하니 편리하기는 하겠지요. 어쩌다 거스름돈으로 동전을 받으면 사람들은 책상 서랍이나 아무 곳에나 두고 찾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은행에는 십 원도 아무 곳에나 흘리지 말고 넣으라고 동전통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오십 원, 백 원짜리 언니 오빠들이 많이 들어 있으면 나도 한결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백 원짜리 오빠들은 그래도 커피 자판기 등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도 대접을 받는 편이지요.
거북선 도안에 황동으로 만들어진 오 원짜리 동생이나 무궁화 도안에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일 원짜리 막냇동생도 있었지요. 언제부터인지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장부상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십 원짜리인 나는 그 유명한 거북선 도안이고 오십 원짜리 언니는 고개 숙인 벼 이삭 도안입니다. 도안이 아무리 가치 있고 멋있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십 원짜리인 나나 오십 원짜리인 언니 하나로 무엇 하나 살 수도 없고, 내어놓기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는지 한심하답니다. 편의점에는 봉툿값이 이십 원이지요.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살 경우가 있습니다. 백 원을 내고 거스름으로 받는다면 오십 원짜리 언니나 십 원짜리인 나도 제법 필요하겠군요. 그래서 한국은행에서는 계속 만들어 내나 봅니다
같은 십 원짜리라도 1966년 처음 발행된 친구는 그래도 인기가 있답니다. 몇 년도에 발행되었느냐에 따라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나는 2006년도에 발행, 원가를 줄이기 위해 크기도 작게 재질은 알루미늄과 구리로 만들었답니다. 제작 원가는 약 이십오 원 정도라네요. 1966년 처음 발행될 때 십 원짜리 동전 하나 제작 원가가 삼십일 원 칠십육 전이었는데 구리를 대부분 수입하다 보니 적자 생산이었습니다. 요즘은 구릿값이 많이 올라 지금 시세로는 약 오십 원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전에 방송을 통해 들어서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십 원짜리 동전을 녹여 구리로 팔아먹은 일당이 검거 되었다는 소식 말입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어느 날 길 가던 할머니가, 길에 떨어진 내 친구 십 원짜리를 만났습니다. 아픈 허리를 굽혀 주어서는 떨어뜨린 사람이 혹시 없나 주위를 살폈습니다. 그러고는 소중히 호주머니에 넣는 걸 인상 깊게 보았지요. 내 자존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은 참 슬픈 이야기가 있답니다. 바로 이 할머니가 베란다에서 시들어 가는 꽃을 아파트 화단에 심으려고 호미질합니다. 몇 번 하지 않아, 내 친구 십 원짜리 동전이 자꾸 나왔습니다. 흙이 묻고 녹이 슬고 삭아 어떤 친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십 원짜리 언니도 몇 있고, 백 원짜리 오빠도 몇 있었습니다.
알루미늄이 들어간 작은 십 원짜리 내 친구가 제일 비참했습니다. 또래인 내가 보아도 부식 정도가 심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누가 왜 죄 없는 우리를 생매장 했을까요. 까닭을 알 수 없는 할머니는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꽃 심는 것도 잠시 잊었습니다. 수돗가에서 흙을 씻고 수세미로 닦아도 동전 노릇하기는 영 글렀습니다. 이걸 어쩌나 신문지를 깔고 말리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생각이 많으신지 내내 우울한 표정입니다. 나도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동전을 화단에 묻은 사람이 작은 돈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전 액수는 부스러진 십 원짜리도 있고 해서 셀 수는 없지만 큰 종이컵 하나는 될 정도입니다. 전부 쓸 수 있다면 라면 몇 개는 살 수 있습니다. 적은 돈이라고 허투루 하는 사람이라면 배가 고파보아야 돈 귀한 줄 알겠지요.
특히 생산 원가를 생각하면 십 원짜리 동전 하나쯤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적은 돈도 알뜰히 모으면 큰돈이 되겠지요. 그 시작은 바로 나 십 원짜리 동전입니다. 쓰지 않고 있는 내 친구들 잘 챙겨서 필요한 곳에 써 주십시오. 그 한 닢이 돌고 돌아 사랑을 전하고 생활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서랍 속에서, 어느 구석에서 잊혀 가는 십 원짜리 동전 그 가치가 빛나도록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의 신앙은 철鐵입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여름을 재촉하느라 날씨가 궂더니 오늘은 명징한 하늘에, 바닷물 색도 짙푸른 북 청색이다. 기장읍 임랑해안길에 있는 박태준 기념관을 친구 셋이 방문했다. 특별기획전 〈피와 땀의 결정結晶, 쇳물〉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올해가 대한민국 첫 용광로에서 쇳물이 터진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제철산업의 긴 여정을 되새겨 보기 위해 기획된 전시회이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니 '쇳물. 쇳물, 쇳물'이란 굵직한 글씨 사이에 피와 땀의 결정 쇳물이라고 쓰여 있다. 읽는 순간 쇳물이 나오기까지 어려웠던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에 감동이 인다.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표시된 관람 순서를 따라간다. 복도가 고요하고 정갈하다. 가다 보니 수정원이라 표시되어 있어 밖으로 나가 보니 뜻밖의 공간이 나온다. 새소리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기념관과 별개의 작은 공원 같은 느낌이 드는 이름처럼 아늑해 당장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정원에는 마을의 오래된 나무와 연못을 그대로 살려서 만들어 낸 곳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나무는 곰솔 두 그루인데 수령이 약 200년, 형제처럼 어깨를 나란히 서 있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니 솔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얼비친 하늘은 높고도 푸르다. 건너편에는 생가에서 옮겨 심었다는 개잎갈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박태준 회장이 사색을 즐기며 시간을 함께했다는 나무라고 적혀 있다. 수형이 멋지다.
연못이라기에는 너무 얕다. 크기가 비슷한 자갈이 깔려 있고 맑은 물이 흐른다.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고 나무 그림자가 그림 같다.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소리에 울림이 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우리 일행 셋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멋진 무대다. 일행의 권유로 애송시 한 편을 낭송했다. 수정원과 함께 오래 기억될 순간이다.
기념관 1층에는 독서와 휴식이 필요한 북 카페와 자율학습 공간인 교육실과 세미나실이 마련되어 있다. 그분의 평소 남다른 교육에 대한 열정을 반영했다는 생각이 든다. 2층 전시실로 향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입구에서처럼 피와 땀의 결정 쇳물이다.
정부는 가난으로 벗어나 '제철산업'을 토대로 산업 발전의 내실을 다지고자 하였다. 1964년 말 '철강공업육성계획을 발표하고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대한중석광업 사장이었던 청암 박태준을 제철산업 추진 책임자로 맡겼다.
청암은 1967년 포항을 제철산업의 입지로 선정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구체화했다.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 창립식을 가졌다.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착공식이 열렸다. 이때부터 영일만에는 힘찬 굉음이 울리며 대역사의 막이 올랐다. 문제는 자금 마련이었다. 청암은 하와이 구상에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대일 청구권 자금 일부를 종합 제철 건설 자금으로 쓰자.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를 자립경제의 초석으로 삼자.”
1973년 6월 8일 고로 화입식이 거행되고, 6월 9일 쇳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1973년 6월 제철 일관 공정에 필요한 22개 공장과 설비 건설이 모두 완료하였다. 이어서 7월 3일 포항 1기 종합준공식을 했다. 39개월 동안 총 1,204억 원으로 조강 연산 103t 체제를 갖춤으로 철강 한국의 시작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1992년 10월 2일 광양제철소 종합운동장에서 25년 동안의 건설 여정을 마무리하는 준공식이 열렸다. 청암은 준공식 다음 날 국립묘지의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라고 영전에 보고했다.
“각하. 이제 마쳤습니다.”
故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사진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4반세기 동안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모든 임직원의 집념과 땀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져 와 가슴이 뭉클했다. 집념의 여정이란 전시에는 하와이 구상, 로멜 하우스, 종이 마패, 우향우 정신, 내 사전엔 '부실'이란 단어가 없소, 철의 오케스트라, 품질과 목욕론 등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박태준 회장의 철학과 신념 그리고 대장정을 이끌며 완수한 그간의 노고와 땀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따뜻함과 화목한 가정의 가장의 면모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철강왕 박태준이면서도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신념으로 인재 양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들이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는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포항공과대학과 산업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데 앞장섰다. 동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그리고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는 베세머 금상 수상, 훈장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반짝이고 있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청암을 만나 나눈 일화가 있다.
“여보, 박 사장, 당신의 신앙은 무어요?”
“네, 저의 신앙은 철鐵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청암의 대답을 듣고 참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저런 사람이 우리 삼성을 이끌어야 하는데. 박태준이 철을 신앙으로 알고 일하듯이 삼성을 신앙처럼 알고 헌신할 인재가 없을까.“
철이란 신앙을 가진 확고한 신념에 머리가 숙여진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철을 기반으로 한 모든 산업이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기념관을 나서는데 하늘과 바다가 더욱 푸르고 바람 한결 청량하다, 기념관 바로 앞 그분 생가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수정원 개잎갈나무에 기대어 사색하는 과묵하고 선이 굵은 그분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의 어린 시절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운 초겨울 밤이다. 쉬 잠들 것 같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인다. 마음 깊숙이 숨겨둔 그리우면서도 슬펐던 순간들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왜 이리도 마음이 아린지 모를 일이다. 칠순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들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네다섯 살 무렵의 일들은 아버지와 관련된 일들로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들이 일어난 시기이다.
나는 작은 면 소재지에서 위로 오빠 둘, 언니 셋에 막내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며느리를 보신 후였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며느리 보기 부끄러워 출산의 뒤처리도 제대로 못 하시고 이불속에 밀쳐 두었다고 한다. 해산 소식에 달려온 올케언니가 씻기고, 젖이 모자라 어렵게 구한 우유를 먹고 자랐다는 얘기를 들었다.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막내라고 보살핌을 많이 받고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식사 때에 아버지는 독상을 차려드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둥근 상에 같이 밥을 먹는다. 아버지상에만 놓여있는 갈치나 고등어가 먹고 싶어 칭얼대면 아버지는 곁에 앉히시고는 뼈를 발라 주셨다. 다른 식구들의 눈총을 받으며 키가 작아 베개를 의자 삼아 아버지상에서 밥을 먹으며 의기양양했던 그 시절이 어제만 같다. 아버지께서 대문에 작은 그네를 매어 주셨는데 대문에서 멀지 않는 곳에 동네 공동 우물이 있었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아버지는 우물에 빠진다고 멀리 가게 밀어주지 않으셨다. 나는 항상 그것이 불만이어서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언니들에게 멀리 밀어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이 있어 두루마기 차려입고 출타하실 때 신작로까지 몰래 뒤따라가면 아버지가 아시고는 번쩍 안아다 집까지 데려다주셨다.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나는 소꿉놀이며 그 어떤 놀이도 재미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신작로에 나가서 흰 두루마기 자락이 보이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즈음 나는 걸핏하면 팔이 잘 빠졌다. 누가 팔을 조금만 잘못 당겨도 어깨에서 팔이 빠져 고생했다. 마침 길 건너 변전소 아저씨가 운동하신 분이라 어깨뼈를 잘 맞추어 주셨다. 아저씨도 무척 나를 귀여워해 주셔서 그 댁에 가는 심부름은 내가 하고 같은 나이의 친구와 놀기도 했다.
아버지가 편찮아 자리에 눕게 되셨다. 그 당시 간식으로 쌀로 튀겨 만든 강정을 자주 사 오게 하시고는 절반은 꼭 내게 주셨다. 그러나 그 심부름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버지 병세가 점점 나빠졌다. 한겨울 그 추위에 어머니는 다 큰 나를 업고 새벽 샘물을 길어 찬물에 머리를 감으시고 온갖 정성으로 아버지를 간호하셨다. 조용한 가운데 많은 어른이 침울한 표정으로 들락거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설을 사흘 앞둔 몹시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까지 어렸던 나는 그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관을 붙잡고 몸부림치며 울던 어머니와 친척들이 우는 것을 보고 따라 울었다. 놀러 간 언니를 찾아가든 일이며, 아버지 상여 옆을 떡을 들고 따라가든 나는 다섯 살 철부지였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을 상실했는지 전혀 짐작도 못 할 나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분가해 살던 큰오빠 식구와 같이 살게 되면서 고모가 된 나는 귀여움을 받던 자리를 조카에게 내주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전 같지 않았으며 그때의 어머니들이 다 그랬듯이 경제력이 없는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짐을 지웠다는 자책으로 자식들 단속이 심하셨다. 어린 시절이 물론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섯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심으로 오는 생활의 변화며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그 시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6·25 때의 피난길과 피난처에서 있었던 일들도 잊히지 않는 일들이 많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를 어린 시절이라 한다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도 멀지 않는 날 한번 정리해 볼 생각이다.
어린 시절 생각이 끝없이 이어져 만감이 교차하는 사이 시간은 벌써 자정이 지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더욱 그리운 밤이다.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뵈면 생전의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버린 막내딸을 알아보실까. 오늘 밤 꿈에 아버지를 뵙고 그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응석을 부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