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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를 맞이하며

십여 년 전 고희 기념으로 발간하려던 책이 팔순이 넘은 지금에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내의 죽음과 긴 병원 생활의 사사로운 일상사로 늦어졌습니다. 크나큰 세계전쟁 속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 8.15광복, 6·25전쟁, 4·19혁명 등 높은 파도 거센 물결로 바쁜 걸음의 숨결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정열과 욕망과 갈등으로 속세의 때가 묻었고, 어두운 시대에 살았던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파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땀을 흘리며 논밭을 갈아야 하는 마음의 빚을 가졌기에 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순이 지나고 고희를 거쳐 팔순에 이르러서야 나무를 보면 숲을 볼 수 있다는 자연의 순리를 알았습니다. 알면 보이고 멈추면 좀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요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작은 나’에서 ‘큰 나’로 옮겨가는 마음의 길이요, 인생의 길이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이런 길을 따라가는 나그네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마음의 길은 곧 ‘생각의 숲’이요, 생각의 숲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도 생겨납니다. 그런 마음의 길을 적어 본 것이 이 책의 얼굴입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아름다운 마음이 일어나는 생각의
숲을 걷고 싶습니다. 서두르는 시간, 서두르는 마음이 아니라, 머무르는 시간 머무르는 마음에서 숲길은 열립니다.

이 책은 숲길을 따라 걸었던 마음의 여정을 가려 뽑은 것입니다. 다소 난해하고 어색한 표현이 있더라도 틈이 나시면 한 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해 주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2023년 가을을 맞이하며
박 광 익

책의 숲길을 따라

미수를 맞이한 박광익 시인이 시와 산문집을 펴냈다. 1부에는 1900년대, 2000년대, 2010년 이후에 쓴 시를 연도로 나눠 실었고 2부에는 산문집과 문화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그간 연재해왔던 글들을 묶어서 함께 실었다. 3부에는 수필 세 편을 실었다.

책의 숲길을 따라 걸으며 나뭇잎처럼 떨어진 글감을 하나하나 모아 하나의 책으로 묶어낸 시집 『생각의 숲을 걷다』에 담긴 여러 글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인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참으로 귀한 시집이다. 미수를 맞이해 나온 이 시집이 많은 독자에게 읽히길 고대한다.

책을 내면서 ----- 4

제1부, 시집
1960년대에 쓴 시
밤을 잉태한 전추라 ----- 13
원시를 산다 ----- 18
가족 ----- 20
연가 ----- 22
여름 바다 ----- 24
실향기 ----- 27
달력 ----- 30
고독 ----- 32
가교 시대 ----- 33
역 없는 도시 ----- 36
공간의 벽 ----- 38
여정 ----- 40

근작 : 2000년대까지 쓴 시
별이 내리는 봄밤 ----- 45
청사포에서 ----- 48
눈이 내리면 ----- 50
나 ----- 53
너 ----- 54
석모도 ----- 56
봄에게 ----- 58
사랑 이야기 1 ----- 60
사랑 이야기 2 ----- 62
시인의 마음 ----- 64
동반자 ----- 65
불씨 ----- 66
고향 ----- 68

최근 작 : 2010년 이후에 쓴 시
탁족부 ----- 71
광나루 ----- 74
삶이란 ----- 76
아리랑의 고향 ----- 78
나의 빛깔 ----- 83
첫사랑의 회심가 ----- 84
전통시장 ----- 86
납골당 ----- 88
베틀 노래 ----- 90
창가에서 ----- 93

제2부, 산문집
책 속에 얽힌 이야기
머리말 ----- 97
제1화 : 인피장정서 ----- 100
제2화 : 세계 최대형 도서, 세계 최소형 도서 ----- 104
제3화 : 세계 최대 귀중서, 세계 최고 목판서 ----- 109
제4화 : 수서가 · 장서가 ----- 117
제5화 : 책을 왜 읽는가? ----- 125

문화 이야기
언어와 예절 ----- 131
베짜기의 현대적 의미 ----- 138
우리네 사회는 왜 웃음이 필요한가 ----- 142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마음을 심는 것 ----- 147
맛의 문화 ----- 152
휴가 문화 ----- 156
결실의 문화 ----- 161
공간의 문화 ----- 166
결혼의 문화 ----- 170
놀이 문화 ----- 176
세수의 화두 ----- 181
상춘의 문화 ----- 185
조락의 문화 ----- 189
꽃의 문화 ----- 193
한의 문화 ----- 198

제3부, 수필
고향 유정 ----- 206
산책 풍경 ----- 209
고독과 외로움 ----- 211

고독

살과 살이 맞닿는 욕망의 빈 그릇을 그리도 쉽게 채워버리는 외로움 허나 외로움은 고독이 다니다 꽃이 지닌 생명과 그 의미를 삼키며 침묵의 벽을 뚫고 어떤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너의 몸부림 너와 내가 이야기를 잃어갈 때 내 마음은 바다가 되어 심연의 숨겨둔 마음을 지성으로 노래했던 고된 분신, 흩어진 구름과 비가 스쳐 간 해탈한 마음에서 한결 더 갈증을 토하고 싶은 대지의 훗훗한 열기로 바람이 인다. 거목은 푸른 나이를 잃어가고 뿌리가 시들어 버린 너의 오백 년 삶은 아직도 인고의 의지를 사랑으로 노래하는가? 괴테가 버리고 간 파우스트를 낙엽처럼 불태우던 사람들. 아직도 시계탑 초침이 열두 시 오 분 전을 가리키는데 장미 가시마다 짙푸른 피가 묻은 꽃을 들고 있는가, 영원에의 갈망 때문에 시간에 머무는 우리들 구만 리 긴 하늘에 머리를 들기 어려운데 오직 천지가 알고 서 있는 베틀을 희롱하는가. 고독은 우리들 모두에게 흰옷을 입히고 숙명의 가교架橋를 건너게 하는가.

- 32쪽 ‘고독’ 전문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
동심이고 싶다

골목길 개구장이들이
우스꽝스럽게 만들던
눈사람 입가엔
아직도 함박꽃웃음이 맴도는가

초롱불 깜빡이던 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 따다
무명옷 깁던
어머니
가슴을 적시고
세월을 여미어
억세게 키워낸
자식의 얼굴엔
순수가 있다


- 50쪽 ‘눈이 내리면’ 일부


시인의 마음

한 번 읽으니 어렴풋이 알겠고
두 번 읽으니 대충 알고
세 번 읽으니 깊게 알고
읽고 또 읽으니 시인의 속뜰을 알고
거듭 여러 번 읽으니 화원이 된
시인의 속뜰에서 꽃이 핀다

“시를 읽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이 풍진세상의 인심은 당신을 비웃을 것 같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웃음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아직은 살만한 곳을 찾지 못했지만 주어진 목숨이 허락된다면 살만한 곳 한 곳은 있을 것 같다. 비록 그곳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 64쪽 ‘시인의 마음’ 전문

창가에서

비 오는 날
낡은 기와집 창틀에서
눈물 자국이 얼룩진 얼굴의
젊은 여인의 입가엔 가냘픈 웃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차라리 청상의 한 많은
눈물이었음은 좋았을 걸
이리도 아름답고 슬픈지
슬픔 속에 아름다운
인생은 어떤 것일까
- 93쪽 ‘창가에서’ 전문

책을 왜 읽는가?

서적은 어떠한 종류를 막론하고 저자 자신의 체험과 상상력
또는 추리력을 근거로 삼아 저작했기 때문에 무한한 노고와 오
랜 세월의 연마를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서적은 어두운 거
리의 등불이 되는 것이며, 험한 나루에 훌륭한 배가 된다.”고 일
러온 것은 서적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된 경구라 할 수 있
다.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로 (즉 공간을) 생각해 볼 수 있
고, 태양계 생성의 초기에서부터 지구 냉각의 말기까지도 (즉
시간을) 생각해 보려 하고 또 할 수도 있으니, 인간의 생각이란
참으로 굉장한 작용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같은 생각의 범위를 어떻게 넓히고 높이고 깊게
하겠느냐 하면 별 수 없이 남의 지식을 빌려오는 도리밖에 없
다. 빌려오되, 한 사람의 지식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의 지식을 대량으로 거둬들여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지식
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지식도 빌려와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고작용의 도를 넓
히고 늘리고 하여 그 활동을 활발하고 왕성하게 할 수가 없다

- 125쪽 ‘책을 왜 읽는가’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