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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숙 시인의 작품은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서사구도를 지닌다. 조곤조곤 일러 주는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성미 급한 오라버니가 후딱 일러 주고 눈앞을 획 지나가버린 산업사회 속의 바쁜 현대인들의 이야기다. 할머니 이야기가 가랑비나 는개의 속성을 지녔다면 오라버니의 이야기는 소낙비이거나 폭우의 속성으로 쏟아지는 정서를 지녔다. 천천히 스며드는 은근한 정서가 아니라 일거에 쏟아지는 정서여서 말릴 새도 없이 금방 흠뻑 젖고 마는 속시원하게 터져 나는 함성이다. 이런 속성을 지닌 박혜숙 시인의 작품에는 현실성 깊은 스토리가 전개된다. 사전 분위기 묘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직행한다. 무대장치가 없는 연극과도 같다.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을 속 시원하게 터주는 시원함이다.
이런 모습은 박혜숙 시인과 함께해 본 사람이라면 시인의 삶을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박혜숙 시인의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현실이며 리얼리티다. 리얼리티는 개별적 시점을 나타낸다. 리얼리티는 의미를 은폐하고 내면적으로 숨긴다. 자연은 은닉을 사랑한다. 순수한 시점의 창조는 부분적으로만 창조된다는 것이다.

박혜숙 시인은 별도의 시적 소재를 가지고 있는 유형의 시인이 아니라 만나는 대상이나 사연들에서 순간 포착으로 시적 영감을 얻고 시를 구축해 나간다. 일상에서 쉽게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박혜숙 시인의 대상도 일견 치열한 내부 검증을 거쳤을 것이다. 어떤 시인이라도 대상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 간직해 온 항아리 금이 간 날
어깨에서 모래바람이 분다
조금만 각이 틀어져도
날갯짓은 폭풍우가 된다
차갑게 굳은 바위로 뭉쳐진 목덜미와
삐딱한 어깨가 허물을 벗긴다
갈라진 틈에 아픔이 보인다
휘갈겨 쓴 글자처럼 뭉그러진 자판
비바람 속에 홀로 서 있다
흔들리는 껍질 안의 실금들로
중심 잃은 어깨는 어디로 가는지
날 수 없어 비척거린다
내 항아리는 낯선 얼굴이다

-「바람 속 어깨」 전문

금 간 어깨를 두고 몸이 망가져 가는 걸 한탄한다. 소중하게 간직해 온 내 항아리에 금이 간 날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에서 모래바람이 분다. 항아리와 몸이 하나임을 느낀다. 금 간 내 몸은 조금이라도 각도가 틀어지면 내 날갯짓은 폭풍우가 되어 고통을 불러온다. 차갑게 뭉쳐진 목덜미와 기울어진 어깨가 허물을 벗으며 드러난다. 항아리의 갈라진 틈으로 아픔이 보인다. 그 항아리는 휘갈겨 쓴 글자판 같이 뭉그러져 있다. 껍질 안의 실금들로 중심을 잃어버린 항아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날개 다친 몸은 비틀거리고 내 어깨는 낯선 얼굴이 된다.
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타자로 인식한다. 그래야만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사물과 친하다. 돌멩이 하나까지 시인에게 있어서는 친구다. 또는 그 이상이 되어 돌멩이의 생각을 듣는다. 그리고 돌멩이에게 우주를 부탁하기도 한다. 이것이 시인의 사랑이다. 시인은 사랑 없이는 옳은 시인이 될 수 없다.
톰슨이 악마는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일갈한 것처럼 해변에 널려있는 자갈돌에게까지 생명력을 부여한다. 박혜숙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사물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뜯어 먹을 듯이 사물에게 다가간다. 수동적인 관계로 만나는 사물이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로 사물에게 접근한다. 그러기에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쉽게 시로 풀어낸다. 박혜숙 시인의 시가 된 대상은 쉽게 만나는 일상 주변이다. 아침저녁 산책에서 만나거나 동네를 오가면서 일상으로 만날 수 있는 현상들이다. 어찌 보면 쉽게 쓰인 작품으로 인식될 수 있다. 아니다 그렇게 작품으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시인의 내면에서 서서히 어떤 형상이 용암으로 축적되어 왔던 것들이다.

시인의 말…3
목차…4

제 1 부

노을을 입다…11
떨어지다…12
나를 검색한다…14
눈을 맞추다…16
매화 날씨…17
청동부처의 미소…18
생선가시…19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마르코 품다…20
파일에 빠지다…21
오동나무 아래 빈자리…22
객잔에 눈뜬 별…24
벌노랑이꽃…26
해안 초소에서…28
빨간 구두…29
저녁 여덟 시에 꽂히다…30
시를 쓰는 낙타에게…32
바람 속 어깨…34

제 2 부

동네를 수선하다…37
타인의 섬…38
푸른 안개는 걷히고…40
들꽃 단풍…42
토요일에 빠지다…43
생선구이집…44
빈 감나무 그림자…46
구월, 동백섬…47
카타르 코리아…48
사십계단 앞에서…50
젖은 길 현수막…51
낮을 삼킨 밤…52
내 슬픔의 안쪽 먼나무…53
접속…54
곡자…55
아버지 자전거…56
불경기…58
눈에 빠지다…60

제 3 부

여름비…63
꿈꾼다…64
구름을 뜨다…65
인형 뽑기…66
우포늪에서…68
말랑한 연두는 순천만에 숨는다…69
봄을 입다…70
바이킹 타다…72
노란 흔적…74
푸른 밤에…76
조개구이…78
젖은 동백꽃…80
탄생…82
옥수수 밭에서…84
봄에 서다…85
눈물 양심…86
서천에는…88
겨울 동상…90
꽃자리…92

제 4 부

풍진 바닥…95
가을을 먹다…96
문광저수지길…98
해조음을 꿈꾸다…100
산으로 가는 길…101
연대도 몽돌해변…102
내 사랑 장미…103
사문진나루…104
바람이 되어…106
남항 묘박지…107
몰래 먹은 밥…108
국화 축일…110
승학산에서…112
회갑 타올…113
비틀거린 오후…114
발등을 깨뜨리다…116
2030년…118
젖은 사막에서…119
등대…120

？ 해설/리얼리티로 가는 소확행-강영환…122

노을을 입다


출렁거리는 붉은 강물이 나를 홀린다 강변도로 지나다 노을에 이끌려 삼층‘루프탑’비상카페 문을 밀친다 빨간 옛 차에 산타할아버지와 장식된 나무가 이색 분위기다 노을을 안으려 루프탑으로 오른다 변해가는 붉은 빛을 나는 흥정한다 유리창 가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은 고요하다 바람은 이따금 창문을 두드리고 또다른 풍경을 데리고 떠난다 낙동강은 다른 얼굴로 화장을 한 하늘을 품는다 가창오리 떼가 하늘을 날고 청둥오리 자맥질하는 여유를 내려놓는 시간 뒤편으로 내 노을도 드나든다 통창문에 펼쳐진 떨림의 파노라마가 황혼을 지날 때 루프탑이 일어나 눈물 젖은 박수를 보낸다 노을을 입은 연극이 눈앞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해는 강물 속으로 자맥질하기 시작하고 남아있는 빛은 오묘한 방중술로 남녀를 가둔다


떨어지다


옥룡설산 깊은 균열에
헛디딘 발이 빠지고 있다는 메시지가
새벽에 나로 부터 왔다
뚫린 구멍 그 깊은 틈으로
편안한 침묵이 하강하고 있다

견고한 빙하가 나를 에워싼다
벗어나려 애를 쓰는 몸부림뿐
명징한 생각만 혼란스럽다
사지에서 블랙홀로 빠져드는 시간
울음이 부풀려 나를 가둔다
미라가 되고 있다

날아오르고 싶은 날개는 마비되어
포박한 나를 놓아 버린다
바닥에 떨어지자 고요하다
무너지지 않는 바닥에 고개를 둔다

가슴 졸인 슬픔 너머에는
또 다른 고요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추락한 시간을 감싸 쥔 손에
발버둥 친 눈물이 고여 있다


나를 검색한다


전화벨이 오후를 끌고 간다
문자가 왔다

'보는 즉시 전화 바람,
웹에서 네 이름 발견하고 반가워서 그래’

업무 창을 접어두고 검색한다
알 듯 모를 듯 기억 반추하며
얼굴도 못 본 평창 사진작가 시인,
십년 만에 안부 묻는 사이
시집 발간 축하한다며 시집 제목을 말한다
다른 시인이라 말하고 끊었다

내 이름을 검색해본다 탤런트, 영화배우, 출판인, 대학교수, 시인, 기초의회 의원, 의사, 산업디자이너, 변호사, 의료기관, 전 행정공무원, 묵은지김치점 사장, 돼지국밥집 사장, 왜 이리 많은지 땅콩 캐듯 줄줄이 엮이어 나온다 웹에 칠 할이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배우다

내가 숱하다
그러나 내가 아닐 때가 더 많다
다음daum에는 내가 간혹 출연한다
내 얼굴, 내 시, 내 사연 반갑다
혼자서 부르는 노래 들켰다
네가 아닌 나로 불리다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으로 때론 묻힌다
불러야 하나인 이름 석 자
다른 너와 나 반갑다


눈을 맞추다


몇 시간째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다 무의식 속에서 손가락만 왔다 갔다 한다 화면이 아른거려 머리도 따라가지 못하는 오후 세 시, 흐릿해진 눈에 손이 자주간다 스크린이 돌아가면 모니터도 피곤한지 돌아앉는다

안과를 찾았다 검사 후 염증이라 약만 넣으면 된다
면서 뒷말 꼬리가 길다 다른 포스로 다가오는 낯선 그림자
“좌측 백내장이 조금 심해요 수술하던지 더 익으면
다시 오세요”
의사가 툭 내 던진 말

지금 안개 속, 눈은 맞추어야지


매화 날씨


김해공고 매화가 봄을 열었다고
유튜브에 떴다
셔터 누르는 사진 작가 생각에
매화 웃음소리가
세상 밖으로 튀어 올랐다

내일 비에 매화 웃음 떨어질까
‘놀러 와라 매화 두고 밥 먹자’
사진작가 연숙이가 문자 왔다
매화를 사랑하는 카메라
매화가 피는 날이면 학교에서 산다

밝았던 길에 어둠이 내릴까
흩어지는 봄을 어떻게 모을까
매화 웃음소리 어떻게 나눌까
일 년 기다리던
친구 입술에 매화가 피었다


청동 부처의 미소


산국 수줍은 미소 짓는 시간
걸망만 걸친 채
일주문 들어서는 노모
대불 앞에 엎드려
석가모니불만 찾는다

보살 내려다보는 미소에
가슴속 올라온
높아만 가는 독경 소리
언제 봄이 올지 모른다며
마음속 갈증을 독송하는 노老 보살

‘일체유심조’

청동 대불 미소에 산국이 환하다


생선 가시


아버님 기일에 올린 조기 가시가
아들 목에 걸렸다
눈물에 기제사가 들썩거리니
식탁에 온 식구가 아프다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어주며
씹지 말고 바다를 삼키라고 주문한다
아들은 콧물까지 삼키며 밥을 넘겼다

어릴 적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에 간 적 있다
어머니가 김치 둘둘 말아 밥을 주었다
삼키란 말에도 잘 삼켜지질 않았다
따라다니는 가시 하나 식탁에 앉아 있다
내가 바다를 업고 헤엄쳐 나간 그늘은
아들이 해맑게 웃던 시간이다
한동안 먹지 못하던 생선은
검은 수평선을 한 입에 털어 삼켜서
푸른 식탁에서 웃는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마크 로스코 품다


'지하철' 화폭에 빠졌다 붉다가 검다가 노랗게 다가와 비밀스런 눈빛으로 나를 가둔다 길쭉한 걸음으로 다가온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눈썹이 흔들리다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비뚤어진 네 시선에 눈을 마주칠 수 없어 돌아서야만 했다“가느다랗고 길쭉한 것은 내 스타일 아니야 난 그래도 단단한 꿀벅지야”매섭게 손사래 치고 멀리 한 오 년이 지났다 잡스가 당신의 '오렌지 레드 옐로 블랙'을 사랑한다기에 지난 사랑 들추다 붉어지는 내 심장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절해고도에서 스스로 아파한 아픔에 목이 멘다 당신을 두고 돌아선 눈물이 나를 끄집어냈다가 밤을 향한 포옹, 어둠을 향해 열어둔 창문을 닫은 내 감정을 모르고 길을 잃고 헤맨 내 가난한 그대를 향한 사랑 어둠을 흡수한 마지막 화폭에 남긴 심장박동은 붉은 아픔 남긴 당신의 뜻 내 뜻으로 이해한다

어둠을 지우는 부드러운 키스
그대가 낳은 오렌지 레드 옐로 블랙
나에게 보내준 마지막 선물
이젠 당신을 보낸다


파일에 빠지다


기침하는 컴퓨터
붉고 푸른 가로줄이 울어댄다
컴이 스톱이다
자료 생각에
컴을 들고 컴퓨터 상가에 갔다
부팅이 되어도 인터넷이 안 된다

‘새로 좋은 것 장만하세요
용량도 소프트도 다 구식이군요”

둘러업고 동네 컴퓨터 수리 점에 갔다
가까스로 구동을 한다
파일 하나 사십 년 전 사진첩
긴 머리 S자 허리
할머니 할아버지 식구들 얼굴
눈에 넣고 한동안 컴 앞에 앉았다
다 옮기고 너를 놓아줄게

09. 추천사

옥룡설산 깊은 균열에
헛디딘 발이 빠지고 있다는 메시지가
새벽에 나로부터 왔다
뚫린 구멍 그 깊은 틈으로
편안한 침묵이 하강하고 있다

견고한 빙하가 나를 에워싼다
벗어나려 애를 쓰는 몸부림뿐
명징한 생각만 혼란스럽다
사지에서 블랙홀로 빠져드는 시간
울음이 부풀려 나를 가둔다
미라가 되고 있다

날아오르고 싶은 날개는 마비되어
포박한 나를 놓아 버린다
바닥에 떨어지자 고요하다
무너지지 않는 바닥에 고개를 둔다

가슴 졸인 슬픔 너머에는
또 다른 고요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추락한 시간을 감싸 쥔 손에
발버둥 친 눈물이 고여 있다

-「떨어지다」 전문

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발이 옥룡설산 크레바스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자신으로부터 받는다. 자신의 위험을 자신이 알려 준다. 깊은 골짜기를 벗어나려 애쓸수록 몸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날아오르고 싶은 날개는 마비되어 포박한 나를 놓아버린다. 바닥에 떨어지고 바닥은 오히려 고요하다. 바닥에 머리를 두자 슬픔 너머에는 또 다른 고요가 누워있다. 누군가 눌러대는 초인종 소리에 잠을 깬다. 아직 추락한 시간을 감싸 쥔 손에는 발버둥 친 눈물이 고여 있다.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압박감을 주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현실은 크레바스와 같은 얼음 감옥으로 상징되고 탈출구는 없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져 새로운 꿈을 날게 하지만 날개도 사라져 버린 절망에 든다. 현실에서 받는 무게감을 꿈이라는 환상을 빌어 형상화 시켜낸 가작이다. 좀처럼 부정적인 시선을 갖지 않는 박혜숙 시인에게서 발견하는 다소 낯선 부류에 속하는 작품이다.
옥룡설산을 여행한 경험이 이런 가작을 건질 수 있었으리라. 여행을 좋아하는 박혜숙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는 여행시가 많이 눈에 띤다. 여행에서 만난 낯선 풍경을 눈으로 보고 쓴 서경시다. 여행 목적이나 사진 출사를 가서 만나는 풍경을 묘사해 낸다. 그 풍경을 그려낸 작품에는 내가 빠지고 객관만 남아 발언을 한다. 위 작품에서는 내가 나의 위험을 메시지로 알려 준다는 설정이 이 작품을 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