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김석류 작가의 수필집 《삶을 나누는 시간》이 말그릇출판에서 출간되었다. 교직 생활하며 세 자녀를 양육하고 명예퇴직한 작가는 누구보다 삶을 열정적으로 경작한 열매가 작품 곳곳에 깃들어 있다. 고등학교 때 좌우명이 “열심히 살자”였던 만큼 벽이 막아도 좌절하지 않은 작가의 삶이 표지화의 자두 빛깔처럼 따뜻한 감동을 준다. 박사학위까지 받아 대학에서 강의한 작가는 이젠 자연과 가까이하며 “어떤 길도 꽃길이라 생각하고 걷겠다”고 서문에 밝혔다. 5부로 구성된 《삶을 나누는 시간》에는 47편의 수필이 실렸다. 문장을 끌고 가는 호흡과 힘이 놀랍다. 산문이지만 행간마다 단락마다 경쾌한 물소리가 들리고 무청같은 하늘이 보일 만큼 운율이 있다. 시원시원하게 풀어간 문장에 빠져들어 밑줄을 긋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읽기를 멈추고 가만히 여백의 시간을 갖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산에 올라 자연물 하나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작가의 살뜰함과 성찰에 어느 결에 ‘삶을 나누는 시간’에 함께 스며든다. 글은 곧 그 사람이기에 믿음 안에서 감사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담백하고 깊은 웅숭깊음이 책장을 넘길수록 빠져들게 한다.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란다”는 저자의 바람처럼 어느 독자가 이 책을 만나더라도 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여행 가기도 좋고 책 읽기도 맛있는 계절, 위안과 새 힘을 충전하고 싶으면 《삶을 나누는 시간》을 만나보길 바란다.

여는 글_4
1장_ 울지마 워킹맘
울지마 워킹맘_12
외할머니_16
기린봉의 추억_20
봉천동 새마을시장_25
길을 만들라_29
깔딱고개_33
불이야_38
새벽송_43
행운의 숫자_48
2장_ 서울시민
서울시민_56
나전칠기를 바라보다_61
서천에 가면_65
논산_70
위도 상사화_74
아녜스 바르다 시네마와 시간여행_79
하사미동_84
곰배령 정상에서90
빛나는 한글 이름_94
3장_ 두 여인
두 여인_100
남산에서_104
청계천 연가戀歌_109
록펠러의 회심_114
세평 하늘길 체르마트 경계를 넘어서_119
미우라 아야꼬 문학관_124
마침내 수필_129
홍도야 울지 마라_134
장성 치유의 숲_144
4장_ 빛이 나는 여자
빛이 나는 여자_150
꼬돌개_155
한국의 카프리 소매물도_159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나요?_163
동검도예술극장 7주년_169
장 미쉘 바스키아_174
거문도 해밀턴항구_179
두분동재 분주령_183
버킷리스트 지리산_188
버킷리스트 태백산_193
5장_ 또 하나의 행복
또 하나의 행복_200
대학생이 된 말괄량이 삐삐_204
영호의 편지_208
복건토루 객가인_212
환상의 섬 조도와 관매도_220
풍도楓島 붉배_225
해남 달마산 도솔암_229
한국의 갈라파고스 굴업도_234
전사 그리스도, 체 게바라_239
원추리꽃과 노고단_244
닫는 글_250

지대가 높아서 물이 귀했다. 우물이 있는 부잣집이 낮 동안 세 시간 대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양동이를 들고 살금살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행여나 두레박이 우물 벽에 부딪히며 소리가 날까 조심스럽게 물을 퍼 올렸다. 가난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것이구나 어린 가슴에 슬픔이 일렁거렸다. 이 정도의 물로는 여섯 식구가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기린봉 아랫마을 피란민촌에 옹달샘이 있었다. 밤중에 조금씩 고이는 물을 양동이에 담아서 날랐다. 산길을 밝혀주는 보름달은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집과 언덕을 몇 번 오르내리면 등줄기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함께 사는 사람들 모두 겪는 일과여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p.21)

-〈기린봉의 추억〉 중에서

서울에 많은 학교 중에서 산 너머 산동네 작은 학교로 발령이 났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노량진 사육신묘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다. 흑석동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매서운 한강 바람이 불어오면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산길을 붉은 흙먼지를 맞으며 올라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교통이 불편해서 선생님들과 봉고차를 렌트해서 출퇴근하기도 했다. 아침에 산동네에 태워다 주고 저녁에 산 아래로 데려다주니 마치 유배지에 온 것 같았다. 교실에서 한강의 유람선이 떠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외롭고 처량하기까지 하였다.(p.27)

-〈봉천동 새마을시장〉 중에서

꽃잎을 살짝 들어 올린 수줍은 보라색 얼레지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산괴불주머니는 유채꽃처럼 노란색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흥부가족처럼 올망졸망 노란색으로 서로 붙어 피어있는 한계령풀은 한계령을 생각하였다. 바람의 신이 사랑한 아네모네가 꽃의 여신 플로라의 질투에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이 전설의 꽃이 꿩의바람꽃이다. 꽃말이 금지된 사랑, 덧없는 사랑, 사랑의 괴로움이다. 하얀 망사 천에 값진 진주 모양으로 둘러싸인 고고한 자태는 꽃말처럼 외로워 보였다. (p.211)

-〈곰배령 정상에서〉 중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한강의 윤슬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동쪽 잠실벌판에 답답하게 늘어선 아파트 사이로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바벨탑처럼 우뚝 솟아 있다. 붉게 물든 노을의 태양은 무척 지친 모습이다. 압구정동 아파트 사이에 잠시 기대어 있더니 이내 사라진다. 그러자 금세 날이 어둑해진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걷는다. 성수대교에 불이 켜지면서 검붉은 모습으로 장관을 이룬다. 프랑스 센강변의 다리보다 더 웅장하고 황홀하다.(pp.96~97)

-〈서울시민〉 중에서

내 생애에서 이런 신비스러운 숲길을 얼마나 자주 걸을 수 있을까? 이곳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야생화의 천국에 들어섰다. 하늘말나리는 코랄 색깔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둘째 딸의 이름을 닮아서 더 정이 갔다. 속단꽃은 옛 어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수공예품처럼 아기자기하였다. 꿀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진 꿀풀은 여러 장의 보라색 잎이 봉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의 작품이었다. 큰까치수염은 하얀 구슬 같은 모양이 촘촘히 박혀있고 별꽃 모양이었다. 노루오줌은 핑크 꼬리털 모양이 줄기를 따라 올망졸망 피었다. 꽃망울 맺힌 일월비비추의 군락지는 어린아이들이 소풍을 나와 모여있는 모습 같았다. 혼자 걷는 길이 익숙해질 때쯤 저 멀리 사람들이 보였다.(p.183)

-〈두분동재 분주령〉 중에서

꼬돌개 오솔길을 지났다. 꼬돌개의 뜻은 배가 고파서 한꺼번에 꼬꾸라졌다는 지역 방언이다. 두 차례의 흉년과 괴질로 마을 주민이 몰살되었다. 지금은 2차 정착민들이 새로운 삶을 일구고 생명의 땅이 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매물도 최고의 풍광으로 뽑힌다고 하였다. 마치 굶주림에 죽어간 영혼들이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찾아 안식하는 평화로운 모습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p.157)

산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세 아이의 워킹맘으로 체력은 항상 바닥이었다. 동료들과 산에 오르는 날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나에게 주어진 달콤한 휴식 시간이었다.
외손녀는 외할머니가 여행한 장소를 모두 다니는 게 꿈이라고 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 규암 김약연이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유언을 당부하는 후손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훗날 나도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pp.23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