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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또 하나의 같으면서도 다른 삶을 마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책의 첫 장을 넘기는 그 순간 떨림의 무게와 같다. 동시대든 전시대든 어느 시대든 삶은 불연속적이면서도 연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컷 사진을 이리저리 보다보면 어느 순간 동영상으로 보인다. 이 시집이 그렇다. 모든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이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문희봉(시인·평론가)
임 시인은 특급호텔의 주방장이다. 언어요리사이다. 일상의 재료들로 최고의 요리를 해내는 사람이다. 그리움을 시에 담아내는 능력과 서정의 개성적 표현,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심도 시를 통해 튼실하게 살찌운다. 삶의 풍경과 굴곡을 읽어내는 투명한 시선이 돋보인다. 섬세한 시어가 감당하는 시 세계의 투명성이며, 사물 앞에서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려는 열정이 평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잔잔하고 단단하게 고랑을 파고 일궈내는 감수성이 빛난다. 시의 리듬이 율동으로 나타나고 독특하며 참신한 발상이 매혹적이다.


「조선문학」으로 등단한 지 10여 년 만에
첫 시집을 세상에 내민다.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제 졸시를 만나시는
모든 독자에게 조금이나마
감동과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이 시집을 나의 삶에 진정한 멘토인
두 분에게 바친다.
어머니이신 故 오병숙 권사,
동반자인 이종란 권사이다.
아울러 장수출판사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2023년 9월
임자운

■시인의 말·09

제1부
어찌하리·19
경적警笛·20
빈방·21
아버지·22
금이 간 항아리·23
묘소墓所에서·24
큰형의 눈물·25
요양병원에서·26
순연順緣·27
부부·28


제2부
그대·31
오래된 재즈·32
비오는 날이면·33
summer wine·34
고우영의 삼국지三國志를 보고·35
오늘 만큼은·36
오늘따라·37
남선공원·38
수통골 1·39
수통골 2·40


제3부
2월의 바람·43
한여름·44
폭우暴雨·45
폭염暴炎·46
매미 곡哭·47
여름의 끝·48
초추初秋·49
보문산 중턱에서·50
첫눈의 해후·51
겨울 밤·52
산거일기山居日記·53

제4부
교방敎坊춤·57
만월滿月·59
흐린 날·60
물안개 1·61
물안개 2·62
눈빛·63
겨울비·64
강가에서·65
늦사랑·66
자귀나무·67
인연·68
제5부
세월·71
뚝방에서·72
꿈 속은·73
표적標的·74
개꿈·75
저 편便과 이 편便·76
자리·77
침묵沈默·78


제6부
더 좋으신 예수님·81
오! 주님이시여·82
노숙자의 일기·83
강경역에는·85
봄날에·86
봄꽃·87
어머니의 빈대떡·88
곰지·89
꽁치구이·90
천둥소리·91

작품 평설
독특한 휴머니즘으로 축조한
그리움의 성城 -문희봉·93

■어찌하리


꽃길을 오르려는 절벽의 눈물을 보았다 칡넝쿨 휘말리는 숨소리를 대지 위에 내려놓으며 들풀 날리는 바람이 되어 고운 빛 따라나서는 어머니의 꽃신을 보았다 해진 젖가슴으로 한 세월의 발걸음을 다하고 하늘 연기로 사르는 육신 기도하듯 당신을 안아드렸다 식어가는 살과 따뜻한 살의 이별 마지막을 지키려는 호롱의 불꽃 아가의 단잠에 머문 젊은 아낙의 미소가 소멸한다 오랜 동행의 오열이다 뒷동산 수채화 속에 쥐고 있던 철부지 중년의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의 눈물이다 어둠 끝에 매달린 새벽 달빛의 구름 조각이다 이제는 기다리는 오동나무의 향이 더하는데 황토 광목의 손길이 가까이 오는데 아! 우리의 어머니가 겹겹한 어둠을 걷어내며 하늘 꽃길을 오르려 하는데 어찌하리…



■교방敎坊춤

조선 여인의 붓끝이다
어제였던 것과 오늘의 것을
손부채 하나에 담고
먼 꽃잎에서 날아온 한 마리 나비
온몸으로 먹을 친다
보라색 치마
연노랑 저고리의 걸음으로
휘몰아 바람이 고이면
분홍색 속치마 한 접 내려놓고
그 속치마의 옥색이 눈부시다
어머니, 할머니의 시절들…
꽃잎으로 드리운 그녀의 숨결
새벽 달빛에 기우는 속울음이
버선 마루의 솟아있는
깨문 입술의 선혈인가
세월을 움켜쥔 오동나무의 현絃
오랫동안 단련된 소리는
오늘도 세월을 내려놓고 있다
흰 목덜미에 기절한 달맞이꽃
가뿐 두 가슴이 서럽기만 하다

끝내는 당신 곁으로 오지 못하는
벙어리의 교방춤이여!

■산거일기山居日記


깊은 밤에 드러내는
함박눈이 떠나간
산골 마을의 흰 속살
한겨울이 허락한
당신만의 호젓한 외출이다
부엉이 눈동자에 맺혀 있는
시린 달빛을 받아 마시며
눈 덮인 사방은
푸른 빛깔에 염색된
대지 위에 잠이 든 들숨이다
한동안 걸음했던 사람의 숨소리
산짐승도 기척 없는
달빛 정적
아궁이 불씨 내리듯
산중 눈길을 다독거린다
새벽이 기우는
겨울 달빛이 무거웠을까
숲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순면의 향설이
지독한 산거의 고독을 깨운다
한 줄기 선혈이 되어 흐느끼는
얼어있는 그리움
당신만의 아픔을 거두면서
금이 간 세월 속으로 잠행하며
다시 초막문 문고리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