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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 봐도 될까요』는 〈내 마음의 벤치〉, 〈내 사랑 토파즈반지〉, 〈노란 스웨터〉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내 마음의 벤치 … 14
여운(余韻) … 18
내 사랑 토파즈반지 … 23
노란 스웨터 … 27
안아 봐도 될까요? … 31
아인슈타인과 변호사 … 36
11월 단상 … 41
늙어보고 싶어요 … 44
그날이 오면 … 49
근시의 바람 … 54
내 글밭에 뿌려진 씨앗 … 59
오월의 꽃바람 속에 … 64
동백꽃 이야기 … 69
남겨진 종이 한 장 … 75
살아있는 ‘처음’ … 80
준비된 직업 … 85
추임새의 역동성 … 91
콩나물 송(頌) … 96
파란 눈의 아이들 … 101
다리 … 107
손 그리고 손 … 112
순간, 그 긴 여운 … 117
열두 살에 흘린 눈물 … 121
침묵으로 다스리기 … 128
텃밭을 일구며 … 132
밀어(密語) … 138
숲의 신비 … 143
폭설과 동전 협상 … 147
한 삼 년의 의미 … 151

■年譜 … 156

내 마음의 벤치
아름드리나무들이 듬성듬성한 공원 한쪽에 낡은 벤치가 하나 있다. 나는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 이 벤치에 몸을 맡긴다. 철 따라 색채가 변하는 경관에 마음을 뺏기고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나 또한 그 속에 파묻혀 심신이 나른해지는 평안을 맛보면서 찰싹거리던 삶의 잔물결이 고요한 호수가 된다.
바스락, 나뭇잎 하나가 대지에 입 맞추며 수줍은 듯 몸을 꼰다. 가지에 매달려 이를 내려다본 잎들이 일제히 수런수런 석별의 박수를 보낸다. 눈을 깜빡이며 지켜보던 살찐 다람쥐는 쪼르르 나뭇등걸을 타고 내려와 쏜살같이 이웃 동네에 전령사로 달려간다. 어디선가 박자에 맞춘 새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으면 밖으로 향한 마음의 창문이 닫히고 침묵 속에 미세한 소리까지 귓가에 맴돈다. 모든 소리에는 뜻이 있다고 했던가? 하면 이 소리는? 잔디를 뚫고 나온 민들레의 웃음에 보내는 이웃의 환호일까. 아니면 저만치 핀 들꽃이 또 하나의 꽃잎을 여는 속삭임인가. 행여 철새 따라 밀려온 바람이 쉬어가고 싶다고 부리는 투정은 아닐지. 자연의 신비로운 숨소리가 안온한 화음으로 나를 감싼다.
벤치는 이른 아침부터 온갖 감정의 무늬와 삶의 무게를 받아낸다. 산책하던 노인은 가쁜 숨을 고르고 일어서면서 생명 있음을 감사하며 하루 일을 꼽는다. 고달픈 아내는 남편의 낭비벽 때문에 다툰 앙금을 삭이려고 털썩 앉아서 맺혔던 가슴을 풀어낸다. 그의 다짐을 한 번 더 믿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아이들의 점심을 위해 부스스 엉덩이를 턴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젊은 가장은 입담 좋은 장사치의 속임수에 손해 본 억울함에 넋을 잃고 허망하게 앉아 있다. 연신 한숨을 내뿜으며 처지는 어깨 위로 기우는 해가 살포시 어르고 간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소녀는 벤치 가장자리에 어설프게 걸터앉는다. 얼마 후 먼발치에 친구 모습이 보이자 달려가면서 기다리길 잘했다며 입술 끝이 올라간다. 지식과 미모를 갖추어 오만했던 여인은 얕보았던 동료에게 사랑을 뺏기고 배신감에 몸을 떤다.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가여웠는지 저녁 안개가 얼룩진 눈물 자국을 지워준다.
삶의 갖가지 체취가 묻어있는 벤치의 한가운데는 나뭇결이 곱게 닳아 윤기가 난다. 말다툼 끝에 등 돌리고 떠난 한 쌍의 남녀는 쓸쓸한 냉기를 남겼지만, 사랑을 확인하고 손잡고 떠난 뒷사람의 따뜻함이 그 썰렁함을 걷어 갔으리라. 뛰놀던 아이가 지쳐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자리에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이 배어 있을 터다. 잡힐 듯싶었던 시상을 놓치고 허공을 응시하던 시인은 미세한 자연의 숨결에서 번뜩이는 영감을 얻어 벌떡 일어섰으리라.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햇살 한 줌 받아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집 떠난 아들을 위한 오랜 기도가 하늘에 닿아 뜻을 이룬 노모는 고개 깊이 숙이고 뜨겁고 깊은 감사를 실어 높이 띄웠으리라.
하늘이 열려있는 자연의 쉼터에는 처방전 없이도 구할 수 있는 묘약이 숨어있나 보다. 수많은 이들이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생각이 바뀌고, 현실을 해석하는 지혜에 눈 뜨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신비한 묘약. 거기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도 많은 영혼이 위로받는 것은 사람에게 감정을 불어넣기 전에 풍성한 자연을 만드신 분의 섭리가 아닐까.
계절을 이어가며 벤치는 사람들이 내려놓은 사연들은 깔고 앉아 삶의 무게를 덜어주고자 팔을 벌린다. 푸른 가지에 정기를 싣고 의젓했던 한때, 봄이면 햇잎을 뿜어내고,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엔 물감을 풀어 잎마다 고운 옷을 입혔다. 그러다 어느 날, 늙은 나무는 벤치로 다듬어져 세월의 탁한 바람을 들이마시고 있다.
요 며칠 날씨가 끄물거리더니 예보대로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다. 꽃잎인 듯 흰나비인 듯 사뿐사뿐 쌓이고 또 쌓였다. 갑자기 벤치가 궁금해졌다. 나는 발목까지 젖어오는 눈길을 헤쳐 찾아갔건만 벤치는 하얀 담요를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행여 깨울세라 살그머니 돌아서는 바람결에 설핏 그의 잠꼬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보아라. 이 눈 덮인 아름다운 세상을. 고민하는 일도 빛을 찾는 일도 사람들만의 특권이지. 그들이 공원 모퉁이 낡은 벤치에 앉아서 새날의 꿈과 힘을 얻었노라고 일어설 때 나의 마른 결들은 기쁨으로 뿌득거린다네.”
아, 나도 가슴속 가장 정결한 곳에 빈 벤치 하나 두고, 아늑한 마음의 쉼터를 품고 살고 싶다.
[추천사]
저자 김학인이 수필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가 남달리 겪은 삶의 고난과 역경을 통해 얻은 주옥같은 삶의 진실들은 허공중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고 작가 자신은 그 많은 삶의 고뇌와 한을 쏟아놓지 못하고 삶의 보람과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수필은 구구절절이 삶의 비애와 간곡한 인간애를 품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움과 갸륵함, 극복을 위한 인내와 용기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슬픔과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의 어려웠던 인생역정은 아름다운 진실을 축적했고 그의 글은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잔잔히 가슴을 적신다.
끝으로 그의 문장기법은 생래적인 소질과 문학에 대한 부단한 염원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생동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강석호 「김학인의 수필세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