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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아침마다 나는 춘봉 씨 만나러 간다》는 윤연희 작가가 2016년 첫 수필집 출간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수필집이다. 이 책에는 4부의 챕터에 모두 32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윤연희 작가의 수필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뒷받침되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깃들어 있고,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좋은 내용과 그것을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문장을 갖추고 있다. 또한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겪은 생과 사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생활에 활력을 되찾아 가는 모습과 무엇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윤연희 작가의 긍정적인 시선은 우리에게 위안과 희망을 준다.

정희승(수필가)
작가의 가슴에는 세상을 정화하는 맑은 샘물이 있는 것 같다. 그 샘물로 목마른 이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리라 믿는다. 아름다운 삶과 글이 늘 작가의 곁에 머물기를.

오순자(수필가)
〈노을에 서면〉을 읽으면 마치 영상을 따라가듯 현장감이 살아있다. 신변잡기에서 살짝 벗어난 작품이며 끝까지 자기 숨기기, 자신을 숨기는 수법으로 쓰였다. 무엇보다 드라마틱하고 섬세하다.

윤온강(수필가)
우리는 글을 씀으로써 이미 외치는 것이다. 주장을 직접 담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더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것이 현실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수필적인 접근이다. 〈나의 먼 이웃〉은 묘사적인 글이면서 동시에 사회비평적인 글의 성격도 겸하고 있다.

손유경(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박찬욱 감독의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장해준(박해일 분)이 송서래(탕웨이 분)에게 이런 말을 하는 빛나는 장면이 있다.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그래서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꼿꼿하다는 인상을 어떤 사람이나 식물이 아닌 누군가의 글에서도 받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글이 있다. “응달에서 버티는 잔설 같은 기질”(〈어느 날 새가 되어〉)을 지녔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문장 하나하나가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바르고 정확해서 아름답기조차 하다. 아니, 너무 아름다워서 바르고 정확하다는 감각까지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숨어 있는 상처를 덧나게도 하고 또 그 덧난 상처를 온전히 아물게도 해주는 것”(〈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 문학이라면, 작가에게 글쓰기는 고통이자 희열이며 응답이자 물음인 삶 그 자체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감히 해본다. 오늘도 작가는 호흡하듯 자연스레 글 쓸 궁리를 하며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이다.
“눈부신 꽃도 보고 열매도 보고 색색이 물든 낙엽도 주워 오고 뒤처지는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길.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환히 웃는 춘봉 씨가 있는 길. 아침마다 나는 춘봉 씨 만나러 간다.”(〈아침마다 나는 춘봉 씨 만나러 간다〉)
그 꼿꼿함이라니!

작가의 말 4

1. 산국 한 묶음 안고

어느 노병 이야기 12
노을에 서면 20
아침마다 나는 춘봉 씨 만나러 간다 26
사랑초,？꽃말만 남기고 34
태항산, 조선족 가이드 41
산국 한 묶음 안고 47
나의 먼 이웃 53
복수의 기회, 사라지고 말 것인가 60

2. 분천역 엘레지

어느 날 새가 되어 68
분천역 엘레지 80
안 아프면 되는 거야 83
토지박물관대학 시절 92
돌려막기 부도나던 날？ 98
빛과 그림자 104
흐르는 강물처럼 112
벨몬트에서 생긴 일 120

3. 한 마리 콘도르가 되어

사진 속 이야기들 130
사막,？바하리야의 붉은 노을 138
한 마리 콘도르가 되어 147
내가 만난 러시아 164
외상 여행에서 얻은 것 173
조수석 손님의 자격 181
죽전 간이역 188
김칫국 먼저 마시다가 193

4. 졸혼 불사

옹달샘 202
졸혼 불사 209
내가 글을 쓰는 이유 218
그의 목소리에 빠지다 224
지금 안 하면 230
그래서, 어쩌라고! 234
구십이 뭐가 어때서 239
겉모습에 취한 세상 살기 242

나의 산책 마무리는 대운동장 네댓 바퀴를 더 도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게 거의 매일 하던 운동을 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부터였다.
두어 절기를 그렇게 보낸 후, 밤새 눈이 그친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다시 산책에 나섰다. 찬 숨을 들이키며 간만에 들어선 대운동장, 새 발자국조차 하나 없는 온통 눈의 세상이었다. 인적 없고 적막한 산 아래 시간마저 멎은 듯, 축구 골대만 서로 멀거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갑자기 불끈 솟아나는 힘, 나는 설원을 휘젓는 정복자가 되고 싶었다. 곧장 양팔을 내저으며 축구 골문을 향해 걸었다. 내게 정복당한 운동장은 나의 왕국이었다.
골문 앞에 거의 닿아 좀 크게 눈덩이 하나를 만들었다. 신성한 마음으로 한 해 소망을 담아 ‘한방’ 날렸다. 그러나 눈덩이는 골 문전에서 박살이 나버렸다.
‘어째…. 올해 신수 다 망치는 거 아니야?’
눈(雪) 무게도 거리 조준도 무시한 때문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건강에 자만 떨다가 지금 죽살이치고 있다, 모든 일 자성하며 살겠다.’고 나는 바로 반성했다.
이어 주먹만 한 눈뭉치를 우리 가족 수대로 다시 만들어 던졌다. 모두 성공이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떠들어대며 혼자 빈 운동장 눈 위를 마구 휘달렸다. 마치 대학 합격자 명단에서 큰딸 이름을 확인하던 그 겨울 새벽처럼.
산책길 오며가며 지금도 나는 춘봉 씨를 본다. 그곳이 내가 쉬는 자리다.
-〈아침마다 나는 춘봉 씨 만나러 간다〉 중에서

잊혀도 좋을 이런 기억은 야속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생생해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면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억이란 때로 천상의 구원처럼 내려와 혼자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건져주기도 한다.”
고인의 낡은 장갑 한 짝을 보고도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처럼 그날 분천역 푸른 솔숲에서, 그 하늘에서, 갓 서른 넘긴 내 엄마의 슬픈 눈을 보았다. 그 후 오래오래 엄마는 말을 잃었다.
어느 해인가, 중년 친구 다섯과 돌아오는 여행길에서 잊고 살던 분천역에 들렀다. 그 옛날 석탄가루로 더께가 꼈던 시커먼 역 마당에는 초가을 볕에 눈이 부신 하얀 모래가 깔려 있었다. 한참을 둘러보아도 역 모퉁이 초가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떨어져 한적한 철로 옆에 섰다.
역 모퉁이 한 뼘 꽃밭에 코스모스는 바람에 한들거리고, 버려진 듯 볕에 바랜 파스텔톤 나무 의자, 거기 기대어 가을바람 같은 사람 하나 기다려 보고 싶던 곳.
지금도 나는 가끔 열 살짜리 단발머리 계집아이가 되어 분천역 대합실 낡은 의자에 앉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이미 지나가버린 내 어린 날을 슬퍼하고 있다.
-〈분천역 엘레지〉 중에서

나의 글 한 편은 마치 조각보를 이어 만든 듯하다. 어쩌다 배색이 조화로워 보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럼에도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다. 적으나마 한 세월 비축된 자양분이 나의 글밭에 싹을 틔게 해주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미술, 문학적 재능에는 천부적인 면이 강하다.’는 글을 읽었을 때, 왜 엄마 생각이 났는지도 알게 되었다. 팔순이 넘도록 책을 옆에 두고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곤 하던 엄마가 아버지 회갑 날 잔칫상을 물릴 즈음 난데없이 읊은 즉흥시 한 수.(…)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물려받은 우성유전자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이만큼의 글재주는 물론, 늦가을에 들고도 염색을 모르는 머리카락, 그리고 엄마를 빼다 박았다는 나의 목소리.
‘문학의 기능’이란 숨어 있던 상처를 덧나게도 하고 또 그 덧난 상처를 온전히 아물게도 해주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