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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총 71편의 시를 7부로 구성하였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읽는 속도가 더디어진다. 많은 생각을 끄집어내고 불러일으킨다. 몇 번이고 반복해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남다른 관찰과 깊은 성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작품 평설 중에서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 생각은 서로 너무 많이 닮아 있다. 그러면서 또 개별적으로 만나면 또 그렇게 다를 수 없다.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삶이라 늘 물결이 일렁이고 출렁거린 지 모르겠다. 삶의 물결은 때때로 거칠게 요동치며 생사의 기로 앞에 사람을 줄 세우기도 한다. 끝내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삶은 타자로부터 받는 영향보다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결국 인생은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닌가 싶다.
-권기택(시인)

009 세 번째 시집의 개정판을 내면서
014 서시 알로에 꽃대

1부 기록, 기억
017 세월 2014
019 오르더라도
020 사월 품은 오월이 열리고
022 행복할 나라
024 죄의 근원
026 4월
028 원시적인 힘
030 존재
031 세상의 일상
033 기록, 기억
035 4.16

2부 말의 유효기간
039 그런데도 말은
042 말은 불쌍하다
043 소화되지 않는 말
044 속말
045 말의 유효기간
046 메시지
048 의사소통
049 빵의 의미
051 꼬마
052 기다림

3부 꽃이 아니다
055 꽃갈이
057 마로니에
058 동반자
059 꽃이 아니다
060 나사못
061 천도복숭아
063 나무 정도야
064 억새군락
066 사랑니나 그렇지
067 어머니의 세탁기

4부 표피의 삶 속
071 씨앗의 노래
073 애송이를 변호합니다
075 무궁화꽃은 항상 나 모르는 새에 피어났다
076 표피의 삶 속
078 거울의 세상
079 생각의 우물
081 안개
082 나의 충성스러운 삶
084 삶의 충실한 강아지
086 덜 컸다는 거야

5부 빙하시대
089 모형 사회의 고양이
090 주름
092 늑대와 인간과 개의 사이
094 빙하시대
095 엎드린 시대를 통과한다
097 사물함
099 계단
100 눈의 정체
101 터널
102 시간이 가는 길

6부 비행기의 노래
107 사이에서
108 무소음 시계
109 현생의 운전
110 길 없는 길
113 상실감
114 여행
116 대파밭 풍경
118 건더기
119 공허
120 비행기의 노래

7부 삶의 물결에 대하여
125 앨범
126 그게 세월이었다
128 동그란 외로움
130 난방
131 작은 뚝배기
133 삶의 물결에 대하여
134 한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136 좋은 아침
138 연민을 굽는다
139 내 집
141 마무리

작품평설
145 삶의 물결, 내 안의 나를 찾아서·권기택

서시
■알로에 꽃대


알로에가 최대한의 에너지를 모아서
달을 넘겨 가며 정성스럽게 꽃대를 올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꽃을 날마다 순서대로 피워낸다
꽃은 피어난 순서대로 시들어간다
무엇을 위해 저리 힘들게 꽃대 올리고 꽃을 피울까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면

당신이라면,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해도
그저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당신의 꽃대는 당신만이 올릴 수 있는 것이기에
그리고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기에

의미도, 소용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소중하듯이


■의사소통


골목 끝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주홍색 담, 초록 나무, 파란 하늘이 예뻤다
누군가가 흥정하고 있었다
호박 세 개에 얼만데 얼마에 달라고
흥정이 가능하다면 임의로 판다는 거고
그럼 나는 한 개만 살 수도 있겠구나
호박 한 개만 달라고 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1,000원이라며
호박이 아닌 가지를 한 개 집었다
그것도 서비스 차원이라면서 손질해 주었다
껍질을 둥글게 싹 벗기고 속만 주었다
아니 가지가 그 껍질 때문에 좋다는 건데
그걸 벗기고 속만 주면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주인은 속은 안 주고 껍질만 주었다
아니 속이 탄력 있고 맛있는데 껍질만 먹으라고요?
속이든 껍질이든 그것만 1,000원에 살 일은 아니에요
주인은 속과 껍질을 다 주었다
언제 먹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해서 주면 곤란하죠
그럼 달라고 해서 잘해 주었는데 이걸 어떻게 하라고요?
우리는 의사소통이 안 되었고 서로의 입장만 있었다


■삶의 물결에 대하여


그때 어느 가지에서 피어난 꽃
소리 없이 기억에서 옅어지던 중
느닷없이 그 가지도 아닌 데서 꽃을 보았다
꽃은 꽃이지만
그게 그 꽃일까
알 수는 없었다
갸웃갸웃한다고 해서 옅어지던 기억이
아닌 꽃을 그렇다고 해 줄까
꽃에게 물어보는 것도 예의는 아닐 것이다
모르는 그대로 지나쳐 간다
모르는 그대로 조용히 간다
달리 어쩔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더라도
뭔지 짜르르 아픈 듯하더라도
사람은 살면서 조용히 지나가야 할 일이 많다
강물이 흐르고
다른 풍경이 이어지고
다른 곳에 다다르면 슬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리라,
삶에 대하여 삶의 물결에 대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색이 시작되는 것이니,
삶에 대하여 삶의 물결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