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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키코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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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주하림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22년 07월 27일
  • 쪽수 : 144
  • ISBN : 978895469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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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손에선 늘 소금 마늘 레몬 냄새가 나고
이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어”

기괴하고 아름다웠던 지난 여름을 허물고
그 잔해로 지어 올리는 새로운 여름의 시

문학동네시인선 176번으로 주하림 시인의 두번째 시집을 펴낸다. “말하려는 바를 이미지로 변환해내는 능력과 의지가 돋보인다”(심사위원 박형준 진은영 신용목)는 평과 함께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 2013)을 통해 “말 씀씀이가 재미있고 어조의 재빠른 선회에 늘 재치가 가득”한, “맨몸의 아름다움”(문학평론가 황현산)을 지닌 언어로써 “길들여지지 않는 다중적인 욕망”을 “생생한 자기의 드라마로 만들어 내놓았”(시인 박형준)다는 성취를 이룬 바 있다. 그런 시인이 9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써내려간 시들 가운데 44편을 선별해 묶은 『여름 키코』는 기존에 시인이 축조한 욕망과 감각, 이국과 이종(異種)의 시세계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이는 동시에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변해”(「스웨터 침엽수림」)가는 것임을 알리듯 시인이 지나온 시간을, 변해온 궤적을 가늠해보게끔 한다.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레드 아이」,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던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촉을 관망하는 대신 그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노라 외치며 새로운 계절을 그려 보인다.

출판사 서평

테이블 위 케이크
케이크가 난방에 녹고 있다
동그란 어깨뼈를 드러낸 사촌 여자애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긴 흑발의 언니와 동생들
그만 먹자 키코, 크림은 몸에서 녹지 않아
왜 크림은 입에서 녹잖아 의자에 앉아서 먹자
여름에는 남자가 도망간다 멀쩡하게 같이 살던 남자가

그후로 의자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점점 좋은 의자를 모았고
언니는 의자를 쌓아놓고 의자 꼭대기에서 창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_「여름 키코」 부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 그 자체이다. “한 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덴마크 입국소에서」)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써 감각되는 주하림의 시 속 여름은 생명이 약동하고 파도가 너울대는 ‘지금 이 순간’의 계절이 아니다. 여름은 지난날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피로 얼룩져 끈적거리고 썩어가는 것들로 가득차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조금 기괴한 분위기”(「컬렌 부인, 끝나지 않는 여름밤 강가에서」)의 계절이다.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그 여름에 그들이 겪었던 사건을 다시금 가져와 증언한다.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여름 키코」), “그가 여자를 죽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Port of Call」), “집안 물건들이 부서졌고 그녀 날개도 피투성이가 되었죠”(「팔월 모래 무덤」) 등의 구절에서 짐작되듯 사건이 인물들에게 끼친 세기가 만만치 않아 보임에도, 그들은 그 기억에 잠식되지 않고 사건 이후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짚어 보인다. “긴 흑발의 언니”는 이제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으며, 졸업식 사진의 프레임 너머로 하반신을 잘려나가게 했던 “종아리 화상”은 “벚꽃 잎처럼 보인다”(「여름 키코」). 미술학교에서 ‘정신병자’로 불렸던 또다른 ‘언니’는 그럼에도 끝내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고(「덴마크 입국소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이 잘린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왔던 ‘나’는 자신과 같은 시간을 보냈던 이를 데리러 고통이 묻어 있는 거리로 나선다(「비간 시티 거리에서」).

창이 그리워 생트샤펠성당에 갔어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굴절된 빛들이 창을 통과하고 갑자기 유리들이 와장창 머리 위로 쏟아진대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왔던 일을 그것이 쏟아지는 것을
_「모티바숑motivation」 부분

그러므로 “희미하지 않게 아름답게 용기 내어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고맙다”라는 ‘시인의 말’은 더욱 귀중하게 느껴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떠올라/ 다른 이의 힘을 더해 육지에 이를 수 있었”(「심연의 아침」)다고 말하는 주하림의 화자들은 “주어진 곳에 머물지 않고 더 먼 장소로 나”(문학평론가 양경언)아갈 것이며, 여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색색의 빛 색색의 타일”(「론드리」 「July」)이듯 『여름 키코』를 통해 주하림이 만들어낸 새로운 여름은 지난 여름이 허물어진 자리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이제 살길을 행복하게 갈구할 거야
역경이 오면 그땐 다시 떠돌이 개처럼 뜨거운 침을 흘리며 잠깐 경련하겠지만
그전까지 나는 모든 행복한 시간을 통틀어
그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여름이 되어 있을 테니

공원에서 터진 입안을 헹구고
어두웠다 천천히 빛으로 가득해지는 장면처럼
초여름,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네가 평온하게 돌계단 아래에 기댄다
_「천엽벚꽃」 부분

「여름 키코」의 ‘키코’는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연의 아침」에서 ‘나’ 또한 키코와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일들”에 “끝장을 내자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과 다른 편에 선다. ‘나’는 여전히 “끔찍했던 일들”의 이후를 겪어내는 중이다. 그 일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게 만들지만, ‘나’는 ‘나’가 가라앉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나’ 는 심연에서 “내 힘으로” 떠오름으로써 어떻게든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결코 멍청이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히고 서서히 부패하게 만드는 외압을 뚫고 “목구멍 깊숙이 숨은 나”를 건져올리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시에서 ‘나’는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우스꽝스럽게 짚고 올라갈” “벽”으로 다가가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기로 한다. 지나간 일과 내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짊어지기로 한다. 날로 희박해져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섭도록 정직한 방식으로.
_양경언, 해설에서

◎ 주하림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안녕하세요, 첫번째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이후 구 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하셨는데요.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시를 쓴다고 말해도 제 시를 자세히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제 시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으리란 절망 속에 십 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럼에도 어떤 날은 제 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거나 인터넷에서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어요. 시집을 묶으면서 제 시를 기다려준 그들을 떠올렸고 용기를 내어 이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준 분들께 처음이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Q2. 두번째 시집 『여름 키코』는 제목에서부터 첫번째 시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해요. 이번 시집에서 첫번째 시집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웃음) 다만 이제는 조금 더 제 색깔이 분명해지고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첫번째 시집에서는 무국적, 연극적 소재를 활용해 어둡고 이질적인 세계를 그렸어요. 존재의 충동이나 욕망을 인터뷰, 편지, 대화 형식 등으로 끌어와 표현하고자 했고요. 이번 시집에서는 조금 더 미니멀한 방식으로 그 안의 정서들을 확장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웃음) 화자들의 광기어린, 폭주하는 목소리가 첫번째 시집에서보다는 조금 조용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첫번째 시집이 분열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면 이번에는 그 목소리들을 통일하는 데 집중했어요. 그러면서 시적 에너지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면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Q3. 산뜻한 빛깔의 표지 뒷면에는 아이스크림이 새겨져 있어요. 제목뿐만 아니라 시어들도 많이 부드럽고 밝아진 듯하고요. 지난 시간 동안 시 외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을까요?

시를 쓰기 시작하고 십 년 동안은, 특히 등단 이후 몇 년간은 정말 악몽과 같았어요. 나를 온전히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죠.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독자에게 외면받은 적도 있었고, 문단에서는 시 외적인 측면에서 평가받는 일이 잦았어요. 지치고 괴로웠죠. 그럴수록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거기에 불타 죽어가면서도 지금까지 써온 것들을 뛰어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했어요. 그 파토스가 제 이십대를 갉아먹었죠. 지금은 쓰는 것보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더 신경쓰고 있어요. 이제는 데카르트보다 데드리프트에 더 가까워졌죠. (웃음)

Q4. 이번 시집에는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무척 많아요. 작가님에게 있어 여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제게는 이 질문이 제일 어렵네요. (웃음) 왜냐면 제가 생각하는 여름의 의미가 시집에 거의 다 담겨 있어서요. 사실 저는 여름 외의 계절은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 시에는 여름에 대한 예찬보다는 기괴한 여름 풍광이 더 많이 등장해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하는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어렴풋이 따라가다보면 제 시에 더 빠지실 수 있지 않을까요. (웃음) 모쪼록 제 시를 읽은 분들이 어떤 여름을 마주하게 됐을 때 ‘아, 주하림의 시에서 봤던 여름이 이런 거였나?’ 하고 생각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Q5. 마지막으로, 『여름 키코』를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에 시집을 내게 되어 저를 잊으신 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를 잊으셨대도 상관없어요. 저는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나러 왔으니까요. 저는 절망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곳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는 행복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절망이 두려운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희망을 말하는 시인은 아니에요. 세상이 살 만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요. 독자들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건 너무 흔하고 많으니까. 그리고 대개 위로의 탈을 쓰고 진실 뒤에 숨어 있으니까요. 다만 살 만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개인이 어떻게 시대와 직면하는지. 혹은 왜 직시하지 않는지. 고통에 함몰된 채로 고통을 향해 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인지. 늘 나의 진실을 심판받으면서 그렇게 살아 남겨지는 말들에 대해 생각했고 잊어도 남겨지는 말들에 대해 떠올렸어요. 문학은 누구에게나 하는 따스한 위로가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이 문득 마주친 섬광이라고 생각해요.

‘위대한 결과는 운명을 건 도전에서 나오고, 모든 영웅은 심판의 순간에 탄생한다’라는 조던 피터슨의 말을 좋아해요. 저는 이십대 내내 제 전부를 쏟아내 도전했지만 다른 분들, 특히 어린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망치면서까지 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온전히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시를 쓰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진짜 천국은 천재성도 뭐도 아닌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거예요. 나 자신에게 미안할 일을 덜 만드는 것, 그것들이 지켜질 때 자기가 하는 사랑에 대한 답이 온다고 생각해요.

목차

1부 그을린 우주
여름 키코/ 베케이션 빛/ 가까운 내면/ 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 덴마크 입국소에서/ 론드리

2부 한 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July/ 언덕 없는 이별/ 이스키아 이스끼아/ 붉은 유령/ 스웨터 침엽수림/ Port of Call/ 검은 겨울/ 쇼스타코비치의 숲

3부 빨래가 타는 장면
발로-v에게/ 컬렌 부인, 끝나지 않는 여름밤 강가에서/ 밝은 방/ 오로라 털모자/ 료, 메멘토 트램Memento Tram/ 뮤리얼 벨처 양, 세 개의 습작/ 아웨나무에 부쳐

4부 함께한 여름의 사진을
사랑의 알브트라움Albtraum/ 여름의 화음/ 거미숲/ 모국의 밤/ 비 오는 동유럽, 신체의 방/ 블랙 파라다이스 로리/ 올리브나무 랑랑Ⅰ/ 올리브나무 랑랑Ⅱ/ 로스트 밸런타인/ 천엽벚꽃/ 팔월 모래 무덤

5부 프런트front
물에 비친 얼굴/ 모티바숑motivation/ 수분/ 옆자리 약혼자 키나/ 심연의 아침/ 흔들리는 의자에 앞치마를 걸어두면 푸대의 장미들이 하늘을 물들이지/ 요정극/ 해변 아닌 곳에서/ 낙선전 후 테오 군에게/ 가죽 교향곡/ 비간 시티 거리에서/ 물에 비친 얼굴

해설_진실의 코
양경언(문학평론가)

본문중에서

하지만 이번엔 무엇이 되기 위해 바다를 찾은 것은 아니야
우리가 바다 앞에 컨테이너와 노점상을 지어놓고
여름을 나는 건 바다에서 들려오는 무르가 무르가 때문에
손에선 늘 소금 마늘 레몬 냄새가 나고
이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어

무한히 아름다운 날들, 물냉이 향, 서퍼들이 먹고 난 그릇들, 설거지하다 생긴 상처는 곪고 마르지 않고
해가 지면 너는 모닥불과 치킨 춤으로 시끄러운 비치 파티에 갔고
때론 롱보드 대신 다른 것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지
_「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 부분


햇빛, 크고 뾰족한 붉고 푸른 돌
여름은 사라지고 색색의 빛 색색의 타일
수영장 바닥은 연하고 갈수록 짙어지고
바다에 누워 있는 나
동양인은 나 혼자가 될 때까지
여자는 나 혼자가 될 때까지
내가 다시 그때가 될 때까지
수영장 타일 위로 떠오르는 물방울 빛
망각도 훈련이야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그의 유언
_「July」 부분


해변의 이층 방
창을 열면 멀리 흰 포말이 이는
낮은 담장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는 너
잠수 장비들이 그을린 어깨에 걸쳐져 있고
팔다리에 달라붙은 모래알이 슈거처럼 빛나고
담장 아래 잠든 고양이들
그날의 대화 길어진 여름의 대낮
우리 뒤를 따라오던 젖은 유령
_「붉은 유령」 부분


나는 행복하지 않게 살 수 있다 독일어 수업을 듣고 발레 배우는 여자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아이에게 유태인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 젖은 낙엽과 은행잎이 어떻게 세상 어딘가에서 부서지는지 고국의 환각을 잊지 않기 위해 망명자들은 어떻게 세상을 거부하는지

좋아하는 나라를 물으면 당신은 내가 있는 곳이 국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도 당신이 내 국적이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말실수로 이방인들은 전쟁 포로가 되니까
_「검은 겨울」 부분


숲에서 길을 잃으면 우리가 벤, 떡갈나무 집으로 향하면 되지
붉고 싱싱한 독버섯이 핀 동화집을 뜯어먹으며
구름들 콜라비 파라솔 발음이 새는 단잠 고문용 철 마스크
정신을 잃더라도 제일 어두운 이름 중에 내 이름이 있어
허연 입김을 씩씩 뿜는 개를 만져주며
돌다리에서 만나
철 계단에서 만나
우리는 다시 꿈에서도 붙잡지 못할 사람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글과 과일주와 흘러나오는 목소리, 거기에 흩어진 주근깨 같은
침대에 묻어둔 이야기
침대가 되었듯
침대의 먼지들이 침대가 되었듯
_「오로라 털모자」 부분


일흔여덟 개의 선율이 당신이 살던 바다와 마을을 지나

열매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의 여자로 태어나
남프랑스 해변에서 아침마다 수영을 하거나
축제 연주에 맞춰 커다란 가슴을 흔들며 춤추는 삶이 당신을 기다리길
국을 푸다 손을 데는 일도
도박에 빠진 남편을 섬 끝까지 쫓아가는 일도 없겠지
판이 있다면 다른 세계의 판에서 그녀의 일들이 무궁무진했으면
상처보다 하늘을 자신이 길러온 장미들로 온통 유일하게 물들이는 일들이었으면
_「흔들리는 의자에 앞치마를 걸어두면 푸대의 장미들이 하늘을 물들이지」 부분


영원에 대한 감정은 영원을 빚을 수 없고 영원에 대한 기대는 영원만을 향할 테니 그저 너를 지켜본 시간들, 기억에 간신히 남은 희미한 여행객 같아 생각 속에선 모든 것이 흔들렸어 푸른 물감을 떨어뜨리면 퍼져가는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_「물에 비친 그림자」 부분

저자소개

주하림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전북 군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제9회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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