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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시인』 『황제를 위하여』를 잇는 이문열의 대표 장편소설

한국 문학사의 거목이자 살아 있는 전설 이문열.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인 그는 놀라운 필력으로 문학계를 흔드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선택』은 조선후기 한 집안으로 시집가 가문에 순종하고, 지아비를 향한 정절을 지키며, 자식 키우는 데 헌신한 안동장씨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문열은 역사 속 우리 삶에서 한 본보기가 될 만한 여인상을 발굴해 낸다는 의도로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실제 소설에 등장하는 안동장씨는 이문열의 직계 조상이자 실존 인물로 『규곤시의방』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을 남기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안동장씨는 어렸을 적 학문에 재능이 있었지만 시 짓고 글씨 쓰는 일이 여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라면서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는 것을 여자의 본업으로 여겼다. 오늘날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 키우면서 좋은 청춘을 다 보냈다고 탄식하는 여성들에게, 안동장씨는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남편에게 순종함은 우리 시대의 철칙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내 행동 원리가 되기를 바랐다. 강요에 따른 굴종이 아니라 스스로 한 선택이기를 원했다.”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 부부간 예의를 지키는 법, 제사를 대하는 마음가짐, 태교하는 법,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나이 드는 법 등 여자로 태어나 딸, 아내, 엄마로서 지녀야 할 삶의 지혜를 충고와 조언으로 현대 여성들에게 전한다.
그러나 『선택』 은 90년대 후반 당시 연재라는 발표 양식과 선동적인 매스컴의 속성 덕분인지, 연재 첫회부터 반페미니즘 작품으로 낙인찍혀 그 방면의 논객들로부터 집중적인 포화를 받았다. 이문열은 시대가 반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에 편승하기보다 정작 작가로서 고민해야 할 일, “세련된 현대 소설의 표현 양식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얘기해야 하는 점과 요즘 사람들의 근거 없는 반의고적(反擬古的) 경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 집중했다.
『시인』 『황제를 위하여』가 옛 문장을 본떴으나 오늘날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소설화했듯이 『선택』도 그 맥을 이어 이문열의 대표 장편소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1부 비구름 걷힌 뒤의 달을 보며
제2부 자미화 그늘 아래서
제3부 현빈의 꿈
제4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사백 년 세월을 거슬러 내 대단찮은 한 살이를 되돌아보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삶을 덧없어하는 너희 한숨 소리와 그 속절없음에 쏟는 너희 넋두리였다. 한 인간으로서 삶의 덧없음에 한숨짓고 그 속절없음을 하소연하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낙관주의로 유명한 철학조차도 삶의 그러한 본질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허망감과 무력감이 오직 여성이기 때문이라면 나는 실로 이해할 수 없다. _p.17

오늘날의 너희 눈에는 처녀의 몸으로 상처한 홀아비의 재취가 되는 일이 마땅치 못하게 비칠는지 모른다. 더구나 그때 군자께는 이미 광산 김씨 소생의 어린 남매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도로는 아무것도 흠될 일이 아니었고 나도 당연히 그 법도를 받아들였다. 젊어 죽은 김씨는 무덤까지 함께 쓸 수 있는 또 다른 나였으며 그녀가 끼친 남매는 바로 나의 자식이었다. _p.75

피할 수 없는 강요에도 선택의 여지는 있게 마련이다. 맹목적인 순응과 적극적인 수용은 다르다. 우리 시대 여성들에게 가문은 피할 수 없는 강요였다. 그러나 나는 맹목적으로 순응한 게 아니라 그런 나름의 논리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이념을 껴안았고, 그런 뜻에서 감히 가문을 내가 결혼 뒤에 첫 번째로 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_p.119

그런데 요즘 똑똑한 여인네들 중에는 제례의 의미를 승인하면서도 불평등한 노동의 분담을 들어 안주인에게 맡겨진 의무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이가 있다. 아마도 의미와 관계하는 의식의 측면은 남자들에게 독점되고 여인네들에게 주어진 몫은 다만 제물의 준비라는 노동적 측면뿐이라는 점에 착안한 듯하다. _p.146

살이가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필요가 늘어나면 그만큼 도움이 필요한 그늘진 곳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어른들은 나의 시대보다 훨씬 보살피고 거두어야 할 아랫사람이 많다. 그런데 남은 삶의 외로움과 무료함만 한탄하는 이 시대의 할머니들을 보면 나는 묘한 엇바뀜을 느낀다.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베품을 받아야 할 자리로 물러나 앉은 격이다. _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