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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독립신문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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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러두고 싶은 이야기

삼십삼인중의 한분 만해 스님이 만년에 기거하시면 성북동 심우장 주변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날로 포악해져서 어쩌다가 한번 찾아뵙고 자해도 여간 용기를 요하는 일이 아니 였었다.

그런 어려운 중에서 선생의 생계를 도움 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련만 광복 사십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어느 철 어느 누구의 숨은 뜻 이었던지 아는 이가 없다.

독립신문완질을 이만큼 완전하게 보전해 오신 분 역시 그 이름 밝히기를 한사코 마다하신다.

상해임시정부가 이 신문을 창간할 당시 그 첫 호 부터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챙겼음은 물론

그때 그때 발행된 「호외」며 정부사업과 관련한「선전」 · 「배달상보」 ·「화요보」ㆍ「유예대회특간」

· 「대동민보」 둥 이사이사이 제자리에 삽입 되어 있어서 그것이 임시정부와 더불어 운명을

갈이 할 귀중한 기록적 신문철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거니와 본부가 상해에서 남경으로 그리고

중경으로 자리를 옮기던 북새통에서도 이 독립신문은 오히려 의지할 바가 있었다고나 할까

전정한 수난의 시기는 광복과 더불어 꿈에도 못잊을 환국이 후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백범선생이 어느 몹쓸 인종의 흉탄에 쓰러지고 육이오 동란은 많은 임정요인들을 북으로 앗아

갔으며 성재·해.:몽둥이 차례로 하염없이 쓰러져 갔다. 두 뭉치 묵직한 신문철이 내게 건내

졌 을때 온통 기름 땅이 배어서 누렇게 저려 있었다. 품안에 움켜잡고 모전수난을 이겨낸

무서운 집념이 거기 있었다.

나는 생각 한다 소임의 한계를 느끼고 그것을 우리 교육기관에 넘겨주면서 굳이 이름

밝히기를 거절하시면 그 뜻 그 마음 평소는 참참 한 것 같으면서 때로 불기둥이 되어 지축을

흔들고 솟구칠 수도 있는 땅속 몇 천 길의 마그마를 나는 생각한다.

일구팔오 년 십일 월 삼십 일

연세대학교명예교수

민영규

출판사 서평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지역의 한글신문을 통해 독립을 논하다
1919년 ~ 1926년

1 개요
상해독립신문은 1919년 8월 21일에 안창호의 주도로 창간되어 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했다. 1926년 말까지 총 198호가 발간되었다. 상해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담아 발행된 한글 신문이며, 상해 지역의 한국인들의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의 운영진은 주로 안창호의 측근으로 구성되었으며, 시기에 따라 독립운동방략에 관해 논조가 변화했다.

2 독립신문의 창간 배경과 발행
1919년에 3·1 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중국의 상해(上海)로 많은 독립운동가가 모여들었다. 이미 상해에서는 3월 28일자로 『독립신보(獨立新報)』라는 신문이 창간되었다. 한국인들이 상해에서 신문발간에 관심을 보인 것은 3·1 운동의 소식과 한국독립의 당위성, 그리고 일본의 만행을 국내외의 인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선전 활동을 위한 신문의 중요성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강조되었다. 『독립신문(獨立新聞)』은 1919년 8월 21일 『獨立』으로 창간되었고 이는 『獨立新聞』 또는 『독립신문』·『독립』으로 제호가 바뀌며 1926년 말까지 198호가 발행되었다. 1922년 8월부터는 중문판 『독립신문』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독립신문사의 설립과 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것은 안창호(安昌浩)였다. 안창호는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언론 및 선전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성과가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의 편찬과 『독립신문』의 창간으로 나타났다. 『한일관계사료집』은 국제연맹회의에 한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자료로서 편찬된 것이다.

한편 『독립신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안창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 역할을 맡았다. 안창호와 함께 신문 창간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김석황(金錫璜)·최명우(崔明宇)·홍이관(洪利寬)·이유필(李裕弼) 등이었다. 이들은 신문창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대부분 안창호와의 친분이 있거나 서북지방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도 자금을 댔다.

초기 『독립신문』의 부수는 약 2,000부 정도였다. 상해에서 500-600부를 배포하였고, 나머지는 미주, 만주, 러시아, 조선으로 보냈다. 독립신문사에서는 단행본도 출판하였다. 중국 『대륙보(大陸報)』의 기자로 국내의 3.1운동을 취재한 페퍼(Nathaniel Peffer)의 글을 신문에 연재한 다음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으로 간행했다. 또한 이를 중문으로 번역하여 『한국진상(韓國眞相)』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3 독립신문의 운영진
안창호는 자신의 주변 인물을 『독립신문』의 직원으로 기용했다. 당시 출신지역은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안창호는 ‘서북파’ 또는 ‘서도파’라 불리는 평안도 지역 출신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듬해인 1920년 즈음에 안창호는 상해에서 비밀리에 흥사단 단원을 모집하였으며, 독립신문사 직원의 상당수가 흥사단에 이미 입단했거나 가입을 권유받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에서 이에 대해 경계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재무차장 윤현진(尹顯振)은 안창호를 찾아가서 기호세력들 사이에서 안창호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음을 전했다.

이에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한 외연 확장의 일환으로 『독립신문』의 주필이자 흥사단원이었던 이광수(李光洙)와 주요한(朱耀翰)이 그만둔 후 윤해(尹海)와 박은식(朴殷植)이 그 자리를 이었다. 윤해는 1922년 7월부터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그는 이미 1910년대 초반 블라디보스토크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주필을 맡은 경험이 있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國民代表大會籌備委員會) 세력으로서 안창호와 입장을 같이 했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윤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새롭게 창조하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입장을 취하며 ‘개조파(改組派)’였던 안창호와 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 후 윤해는 『독립신문』의 주필을 그만두었다.

한편 박은식은 원래 1922년 8월부터 『독립신문』의 중국어판 주필이었으나, 윤해가 주필을 사임한 뒤, 국문판 『독립신문』도 맡게 되었고 1924년 12월에 이르러서는 독립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총괄하게 되었다. 그 외에 1926년부터 『독립신문』은 주간 최창식(崔昌植), 편집 김이대(金履大), 경리 김붕준(金朋濬) 등의 새로운 경영진을 내세웠다. 최창식은 1926년 시점에 안창호의 세력으로 평가되었던 인물이며, 김이대와 김붕준 모두 흥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독립신문』의 운영진은 대체로 안창호의 측근 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립신문』은 경영난으로 인해 1926년 11월 제198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긴 후 1943년에 복간되어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4 외교론에서 독립전쟁론, 그리고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로
한국의 독립 자체가 『독립신문』의 주요 창간 이유였던 만큼 『독립신문』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바로 독립에 관한 방법론이었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론에 관한 논조도 크게 세 단계를 거쳐 변화했다. 첫 번째는 ‘외교 우선’의 입장이었다. 이는 『독립신문』이 창간한 후 1919년 11월 3일 이동휘(李東輝)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통합정부가 출범하기 이전 시기다. 이 시기의 화두는 1919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릴 국제연맹((LN, League of Nations)을 위한 회의였다. 이 당시에 『독립신문』의 한 사설에 따르면 외교와 군사가 병행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평화회의가 끝나기 전까지는 외교가 주(主)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독립신문』은 '즉각 개전'을 반대했을 뿐 독립달성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외교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제연맹회의가 연기되자 기존 외교방식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외교는 독립운동의 부분적 활동이며,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열국과 국제연맹회의를 맹신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두 번째는 독립전쟁론이다. 이는 1919년 11월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한 뒤 1921년 5월 안창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에서 퇴장하는 시기에 주장되었다. 이동휘·안창호·이승만(李承晩)의 통합정부 출범은 『독립신문』의 논조 변화로 이어졌다. 『독립신문』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다. 이는 외교를 중시하던 이전과 상반된 입장이다. 논조가 변한 이유는 국제연맹회의가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며, 독립전쟁론을 주장해온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오면서 연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독립전쟁론의 전환은 국제사회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전권(交戰權) 확보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3·1 운동으로 일본과 국제사회는 한인의 독립 요구를 인식했으나, 일본은 탄압을 통해 한국에 대한 주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차 세계대전 뒤 일본과 주요 교전국 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을 이용해 독립전쟁 전략을 구상했다. 주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교전 당사국으로부터 전쟁에 합법적으로 분명한 가치를 기여하였다는 것을 인정받을 때 가능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의 갈등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를 논하는 국민대표회 옹호였다. 『독립신문』은 1921년 5월 안창호의 연설을 인용하여 국민대표회의소집을 촉구하며 이듬해까지 지속해서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촉구하는 기사가 실렸다. 1923년 1월 3일 각 단체 대표 62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지를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라졌다. 안창호는 개조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독립신문』의 사장이었던 박은식 역시 개조파의 입장에 있었다. 반면 『독립신문』과 논조가 대립된 『신대한』의 주필 신채호(申采浩)는 박용만(朴容萬)과 더불어 창조파였다. 『신대한』은 『독립신문』에 비해 이승만에 대해 더 비판적이었다.

『독립신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이자 안창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다. 시기에 따라 내용이 변화했지만 전체적으로 독립운동의 당위성과 그 방략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중국어판을 발행하면서 한중연대에 대한 관심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침략을 널리 알리며 상해에서 한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목차

창간호 ∼ 1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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