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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모임을 통해 만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글을 썼고, 서로가 쓴 글을 낭독하는 시간을 통해 각자가 가진 생각과 마음을 조금씩 알아갔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면서 그렇게.
그러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그러다 문득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한 번쯤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생각을 이야기로,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은 흔히 우리가 내뱉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기라는 단어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혼자 했다면 포기란 녀석에게 굴복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럴 순 없었다. 이대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서로를 독려했다. 우리는 여름의 한낮에 동네책방 비북스로 모였다. 오후 2시의 여름 속으로 우리 자신을 몰아넣었다. 그렇게 격려하고 응원하며 한낮의 태양이 조금씩 힘을 잃어갈 때 우리들의 글은 조금씩 다듬어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온몸에 힘이 빠져나갈수록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만의 언어가 초록 잎사귀처럼 무성하게 돋아났다. 숨쉬기 버겁도록 뜨겁고 특별한 여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우리는 원고를 마감했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여름 오후를 가장 아름다운 두 단어라고 했던가. 오후 2시의 여름이 초록잎사귀를 우거지게 했다면, 우리의 영혼은 좀 더 짙어지게 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삶의 이야기. 누군가는 말하고 싶었던 그것을 우리는 〈그해여름 오후2시〉에 담았다. 8명의 작가가 지금껏 살아오며 느꼈던 상실과 아픔, 상처, 사랑, 삶을 살아가는 힘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품어본다.

추천의 글 : 우리가 사랑한 오후 2시의 여름
불확실에 대하여(김희연)
사탕 부케(신설희)
그림 속으로 들어간 여자(이경숙)
어항(이솔)
열여섯 살의 선택(서완)
눈보라(박성미)
명상(진선)
춤(마스)

죽음 직전까지 간 나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담장 밑 아스팔트의 빈틈에 뿌리를 내린 작은 민들레, 우산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샤워할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물의 느낌, 갓 지은 밥의 윤기와 혀에 닿는 밥의 맛, 팔뚝에 닿는 시원한 바람, 밤공기가 실어 나르는 풀냄새, 발가락 사이로 비집는 바닷가 모래 알갱이들,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 나는 민감해지고 있었다. 나의 삶은 비로소 깨어났다. 모든 것이 기적 같았고 감사했다. 눈물이 났다.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죽음은 결국 나를 살아있게 했다. (32쪽, ‘불확실에 대하여’ 중에서)

불빛에 가닿지 못하고 힘없이 날개를 꺾는 하루살이들이 무수했다. 도저히 그려보고 싶지 않았던 서영의 마지막 모습이 그곳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이제는 서영과 작별해야 했다. 그리고 다혜 뱃속에서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아기와도. 다혜는 노란 사탕을 하나 뜯어 그것들 앞에 굴려주었다. 사방에서 곤충의 다리가 사탕을 껴안았다. 죽어가는 와중에 힘을 발휘하는 거겠지. 아직도 남아있는 식욕이 태아가 자신에게 호소하는 공포처럼 여겨졌다. 그 밤, 병원 침대에서 자신으로 하여금 소리를 내지르게 했던 공포. 삶의 빛과 색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열망. 다혜는 팅커벨 곁으로 작은 빛 덩어리 하나를 또다시 굴려주었다. (66쪽, ‘사탕부케’ 중에서)
결혼 전 나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며 사는 것은 못할 일이었다. 결혼은 불행하지만 꼭 해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무난한 사람과 결혼해서 상처를 줘도 크게 마음 아프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결혼 상대자로 적격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고 난 한참 뒤에 친지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결혼했다. 적당한 키에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와 책임감이 강해 보이는 첫인상이 맘을 편하게 했다. 그래선지 남편에 대한 서운함은 크게 없었다. (74쪽, ‘그림 속으로 들어간 여자’ 중에서)

아이는 식탁 의자에 올라가 웅크려 앉아서 하루 종일 멀찍이 있는 금붕어만 바라보고 있었다. 공포 어린 아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아니면 이전 어항이 커다랬는지 금붕어는 자꾸만 작고 동그란 어항에 머리를 박았다. 아이는 금붕어가 이 좁고 투명한 우리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뛰쳐 나올까봐 두려운 마음에 고정난 시선에 금붕어는 점점 눈에 익어갔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한 금붕어는 흰색과 주황색 점박이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며칠 뒤 금붕어가 완전히 눈에 익은 아이는 금붕어에게 구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집에 계속 있을 것만 같은 금붕어를 조금이라도 마음에 두려는 시도였다. 구름이라는 이름은 아이가 구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마치 지옥 같은 일상처럼 금붕어가 금방이라도 사라지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113쪽, ‘어항’ 중에서)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회장도, 옆 반 반장도,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는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도, 배신자가 될 수도 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 내 처지를 동정하는 듯 바라보는 눈. 나는 그들이 뿜어내는 눈빛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136쪽, ‘열여섯 살의 선택’ 중에서)

희미한 붉은 빛에 동이 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뜨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믿는 어린아이와 같이, 고집스레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진실을 외면한 자리에는 죄책감이 남았다. 내 양심이나 정신은 모두 망가져 엉망인데 단 한 줌의 미안함이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되살아난 의혹도 밤잠을 설치게 했다.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세은이를, 이 괴로운 마음을 완전히 잊었을까? 밤새도록 뒤척였지만, 마음은 다시 익숙한 체념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뾰족한 지붕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는 보이지 않아도 이미 하늘은 검은빛을 털어내고 있었다. (187~188쪽, ‘눈보라’ 중에서)

지금 있는 곳을 자각하는 게 명상의 목적이었다. 명상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을 자각하는 연습이었다. 생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 혹은 자신의 내면에 깊게 자리한 마음을 바라보는 연습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무의식을 일깨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며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는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모습 끝에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몰랐다. (220쪽, ‘명상’ 중에서)

사람 발에 매달려 있는 그림자는 어떤 존재일까?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발에 매달린 그림자도 사라지니까 결국엔 그림자도 살아 있는 존재와 다름없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골목 안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마치 그림자가 토해내는 진득한 아픔 같았다. (243쪽, ‘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