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오하룡 시집 『그 너머의 시』는 『시집 밖의 시』를 펴낸 지 4년 만에 나왔다. 시인의 말을 빌려보면, 증언적 관찰자로서의 사명을 감히 지향해 왔으나 어림없는 비겁하고 허약한 간극만 드러냈다는 자기 검증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시를 경력이나 나이로만 가늠할 수 없을 테다. 시인의 정의는 현재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러한 견지가 아니더라도 오하룡은 시인으로서 또한, 출판인으로서 외길을 걸으며 올곧게 시와 삶이 하나로 일관되게 시를 찾아 갈무리하는 시인의 길을 걸어온 시인이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력과 시안(詩眼)은 원숙하면서, 대상에 대한 질문과 그것을 끌어안는 서로 간의 교통은 불교의 원융무애와 연대하고 있다. “거기 외진 곳 돌 하나이기를/ 있는 듯 없는 듯 돌 하나이기를/ 그러나 있으나 마나 하지 않고/∼/돌아보면 거기 있었는지 어쨌는지/ 흔적 없는 돌 하나이기를”(「돌 하나」 부분) 바라는 시인의 간절함은 유지여무(有之與無), 즉 ‘있음’과 ‘없음’이 하나이며 시인의 심상에 있는 따뜻한 정(情)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나무꾼(출판의 불가결한 게 종이이고 종이는 나무; 출판인)으로 살아온 시인이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각별하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전복하는 ‘없음’으로서 화두는 ‘흔적 없는 돌 하나’로 존재하지만, 부재의 상황으로 무화하는 것이다. 결국 존재의 대상을 비우고 지움으로써 있음과 없음이 하나로 합일하면서 새롭게 시쓰기가 탄생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하룡 시인의 시의 도정에서 눈여겨볼 대목 가운데 존재라는 의미가 크게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존재마저 지우는 작업이 그의 심상에서 작동하는 건 경계인의 자세일 것이다. 어느 한쪽에 경도하지 않고 중용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국외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세상살이와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이지만, 무리를 지어서 뭉쳐야 힘을 쓰는 세상에 그는 잡다한 무리들에 편입하지 않는 방랑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시인의 길처럼 시인은 혼자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의 길을 간파하고 단독자처럼 시와 함께하는 시인이다.


유의미 시에 싫증 난 시인
무의미 시를 등장시켜
한 시대 풍미했던 시절 기억하지

유의미, 무의미에 싫증 나면
어떤 시 쓰기로 넘어갈까

그 너머 시 쓰기는 어떤 것일까

그 누구도 실현 못 한, 대단할는지
그렇지도 않을
천하 없는 어떤 길은 있을는지

이런저런 얼핏 스치는 것은
유의미 무의미를 왔다 갔다 하는
그 짓의 반복 같은데

그 너머 시 쓰기는 어떤 것일까

*‘이 저녁’ 일부 개작

_「그 너머 시 쓰기」 전문

위의 시 「그 너머 시 쓰기」는 의미로서의 관점이나 실제는 ‘있음’과 ‘없음’의 존재론에 대한 부단한 탐색과 숙고의 발현이다. 일종의 시 쓰기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있지만, 시를 통한 시인의 시와 삶에 대한 전체적인 화두이며, 심상에 아로새겨지는 시의 흔적이다. 그의 시 쓰기는 일반적이고 상식선에서 타협하는 언어가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세상을 배회하는 언어이며, 보이지 않는, 태어나지 않은 시를 찾아가는 도정인 것이다. “유의미 시에 싫증 난 시인/ 무의미 시를 등장시켜/ 한 시대 풍미했던 시절 기억하지// 유의미, 무의미에 싫증 나면/ 어떤 시 쓰기로 넘어”가는지에 대한 타자적인 의문은, 결국 시인 자신의 시 쓰기와 직결되어 있다. 타자적인 관점에서 들어오는 대상에 대한 시선의 각도의 편차는 차지하고, 주목할 점은 ‘유의미, 무의미에 싫증 나면’ 어떻게 되는지 대한 앞으로의 고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싫증’이다. 시에서 느끼는 ‘싫증’은 시를 읽는 이가 느끼는 ‘식상’가 통한다. 다른 측면에서 고려한다면, 시 쓰기로의 과정에서 일종의 전복이며 새로움에 관한 갈망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오하룡의 시 쓰기는 시인의 물리적인 나이를 극복하고 어떻게 시가 새롭게 태어날지 기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부

낯설다·14
부끄럽다·15
안부·16
회전·17
동전·18
그 이름들·19
노송 그늘 밑 저기·20
어떤 칭찬 - 유자효 시인·21
신 부잣집·22
잊혀진 애국자·23
공과 과·24
노산 이은상 선생 단골·25
그 너머 시 쓰기·26
손 안 가는 시·27
이 버릇 - 여든의 길목·28
영정엄마·29
인내·30
해변의 다른 이름·31
면회·32
골짜기의 다른 이름·34

2부

지금 이곳·38
어떤 무엇이 작용하여·39
가야, 가락국이 온다·40
어떤 지역 전설·41
재미를 위하여·42
이 아침 비노니·44
둥근 지구·45
정규화 묘비·46
한여름 한때·47
나직이 묻는다·48
일제 잔재 돌 두 개·49
그 이름 낡았으나 - 가수 윤심덕 연극인 김우진·50
한글날·51
대통령 두 사람 - 작곡가 윤이상 독일 산소 푯말·52
우리 이름 서양식 쓰기 바른길은?·54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56
제주 4·3사건에게·58
몽상의 배 한 척 - 세월호 영령들에게·59

3부

애·62
적폐·63
문신로를 걸으며·64
마음속 사진 한 장·66
구형왕릉에서·67
불경 소리·68
종치기에 대하여·69
갑갑네 답답네 - 남북에게·70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71
강화 광성진에서·72
어재연 어재순 형제여·73
동지, 동무에 대하여·74
가야시대 순장자殉葬者에게·75
어떤 공포·76
울산 슬섬에서·77
백두산 서파에서·78
바닷속 나라, 이어도·80
이어도 어디 있나·81
아버지·82
어떤 영상 - 피사체·83

4부

미망迷妄·86
허망에게·87
식食과 향?의 가르침·88
어색한 시간 - 여든의 시·90
생일날 - 여든의 시·91
죽음에 대하여·92
희비·93
잠행 - 임진각에서·94
목례·95
할미꽃·96
돌 하나·97
따지지 말자·98
질문·99
마음 배 - 시인 정진석·100
알츠하이머·102
섬 배·104
밥 미안하다·105
어떤 한 모습 - 한국작가회의·106

5부

인간의 길 - 알랭 로베르·108
장미 몇 송이·109
추억의 자리 - 상남역·110
이선관 창동 허새비 시비·111
시인 백석 생각·112
사랑·113
양념·114
치죄 - 윤해영 시인·115
남명 조식 어른·116
네가 본 지리산 내가 본 지리산·117
아스라한 그·118
가고파 노래·119
키득대는 소리·120
연당 전의홍 시인·121
금혼식·122
황희 정승·123
무엇이 모자라·124
의사 문한규·125
고성에서 생각나는 사람들·126
옛 그곳·127

6부

고 방창갑 시인·130
고얀 수작·131
내 고향故鄕은 모향母鄕이나니·132
싱거운 짐작·133
한 무명을 위하여 - 대구 10월사건에 부쳐·134
바깥을 나선다·135
이제라도 - 여든의 길섶·136
너와 나·137
지금 저문 문턱에·138
경주에 가면·140
자유·141
시에도 답이 있구나·142
그런 날은 올 것이다·144
통일 병·145
독재자·146

오하룡 시인 연보·148

1부

낯설다

살 만큼 살았는데
볼 만큼 보았는데
겪을 만큼 겪었는데
저 길
왜 낯설지?

그런 적 있었나 싶고
저런 한창 적 있었나 싶고
생전 처음 같은
저 지나온 길
왜 낯설지?

부끄럽다

가만있으면
가만있어서 부끄럽다

가만있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아서

돌아보면
돌아보아서 부끄럽다

돌아보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아서
부끄럽다

안부

안부는
묻는 것이다

알고도 묻고
모르고도 묻는다

대답 혹은
답신 역시

알고도 묻고
모르고도 묻는다

회전

나는 돌고 돌았나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뭐가 뭔지 모르고
때로는 도는 줄도 모르고
어지러워도
나는 돌고 돌았나니
용하게 쓰러지지 않고

동전

동전 한 개를 던져
어느 한쪽이 나오게 하는 것은
놀이고 재미다
나도 하고 너도 하고
점심 내기 막걸리 내기도 하는,

그런데 그 동전이
던질 때마다 어느 한쪽만
신이 붙은 듯 계속 나온다면
그건 재미가 아니다
너도나도 불행한

그 이름들

누구라고 그 이름
꼭 집어 부르고 싶을 때가 있구나
노산 선생 불명예 만든 사람들
그 불명예 씻어 줄 사람들
그 이름들 또렷이 부르고 싶을 때 있구나
그들 생각 고쳐먹으면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금방 바로잡아지고
노산 문제 일거에 풀릴 수 있는 그 이름
지극히 강하면서 지극히 미약한 이름들
도저히 부끄러움과 겸손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
한쪽으로 기울어져
도저히 평형이 이뤄지지 않을 위험한 사람들
책임 있는 일 다 한 양 교만한 사람들
틀림없는 그 이름들
또렷이 부르고 싶을 때 있구나
이렇게 벼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불러버리면 될걸

노송 그늘 밑 저기

이쪽도 저쪽도
저 너머도
등짐 풀고 혹은 지게 받쳐놓고
더러는 땀 닦고
더러는 다리 죽 뻗고
쉬는 사람 보인다

더러는 벌렁 드러누웠다
더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한숨 내쉬고 있다
저기 노송 그늘 밑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
지금도 보인다

언제까지 보일러나

어떤 칭찬
-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의 마산문협 강연을 듣고
이날 축하 노래를 한 테너 정태성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 성악을 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습니다.” 한다
달필 달변의 수필가 윤용수는,
“많은 강연을 들었으나 졸지 않고
들은 시간이었습니다.” 한다
다수 마산문협 회원들에게서는
방송인답게 미성美聲에 미남美男이라는
즉석 찬사를 듣는 유자효 시인

신 부잣집

마산의 원로 기자
김용복(1937-) 시인에게 이끌려간
마산 중성동 옛 신 부잣집* 현장

선명한 도로명 표시
‘오동서7길 18’
〈돌담 주차장〉 간판 달고
늙은 돌담이 지키고 있다

돌담만큼 나이든 배롱나무가
무슨 의미인지
주차된 자동차들 사이로
힘없이 웃는지 우는지 애매하다

* 신 부잣집: 근대 마산어시장 무대로 이름났던 부자. 김용복, 『마산사랑, 향기로 남다』, 196쪽, 2017.

잊혀진 애국자

그는 고난의 한평생
애국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한 시도 나라를 생각하지 않은 적 없이

그런 그는 불행히도
후손은커녕 어디 묻혔는지 흔적도 없다
이 밤, 그가 원통해서 잠 설치고 있다

아니 그들이 원통해서 잠 설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