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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우리 사회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건축물은 기능적 쓸모를 갖는 공간들의 단순한 집합일까? 건축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자 우리 모두의 기억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사건과 역사를 장소나 건축물을 통해 기념한다. 장소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되새기고 발전적 미래를 그리는 일이다. 이런 차원에서 ‘초현실부동산’은 하나의 건축물에 응집된 기억과 이야기를 헤집어 새로운 사실과 의미를 발굴하는 집단이다. 『초현실 디렉토리』는 이런 작업의 성과를 묶은 책으로, 그 첫 번째로 과거 한국YWCA연합회관이었던 ‘페이지 명동’을 조명한다.

한국YWCA연합회관에 녹아든 무지개 빛깔 이야기
건물에는 많은 기억이 녹아 있다. 특히 1967년 한국YWCA연합회관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한국 시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시민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운동과 캠페인이 전개된 곳이다. 이를 사회혁신기업 더함이 장기 임차하고, 장소의 사회적 건축적 가치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커뮤니티타운 페이지 명동으로 리뉴얼해 2021년 오픈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리모델링과 프로그램 리뉴얼을 계기로 이 건물이 갖는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정치, 문화, 종교, 예술, 경제, 디자인, 출판, 사진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면서 이 건물의 생애 이력을 추적하였다. 회관 건립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과 육영수 여사가 참석한 기공식의 풍경, 잘 알려지지 않은 설계자 차경순에 대한 추적, 한국 최초의 여성조각가로 불리는 김정숙 작가의 작품 기록까지. 특히 건물의 쓰임새를 연합회관에서 페이지 명동으로 바꾸는 일련의 기획과 설계 그리고 시공과정을 2년여에 걸쳐 촘촘하게 기록하고, 새로운 건축적 변화를 사진과 드로잉으로 수록하였다. 이런 내용들을 위해 『초현실 디렉토리』는 사전식 구성을 취하며 각 키워드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담담하게 이어간다.

공간이 변해야 사회가 바뀐다
이런 건물의 변화에는 이곳을 장기 임차한 사회혁신기업 더함의 의지와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공간과 사람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플랫폼’을 지향하는 더함은 국내 부동산 시장의 문제를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풀어보고자 위스테이(WESTAY)와 같은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을 짓고, 서울 도심인 명동에서는 페이지 명동을 조성해 사회적 혁신가들의 플랫폼과 교류를 도모했다. 2000년대 들어 관광객 중심의 상업지역으로 급속히 변해버린 명동에 문화의 씨앗을 심고, 과거 풍요로웠던 지역의 일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기록과 기억들은 새로운 미래를 그려가는 명동의 문화적 토양이 되는 것이다.

Association 연합회
Building 건물
Block 블록
Cha Kyung-soon 차경순
Construction 시공
Drawing 도면
Deoham 더함
E
Fact Sheet 건축개요
G
Heritage 미래유산
I
J
Kim Chungsook 김정숙
Louver 루버
Landscape 조경
Myeongdong 명동
Newspaper 신문
O
Page Myeongdong 페이지 명동
Promenade 프롬나드
Q
Remodeling 리모델링
Rooftop 루프탑
Site & Page 사이트앤페이지
The SAAI 더사이
Typography 타이포그래피
U
View 전망
Woman 여성
X
YWCA 와이더블유씨에이
Zoom In 줌인

『한국 YWCA 회관 봉헌식 및 개관』에 따르면 대한YWCA연합회는 1966년 6월 10일 제1회 건축기성회를 소집했고, 건축가 차경순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차경순은 1967년 4월 7일 설계를 완료했고, 대한YWCA연합회는 6월 5일 삼양공무사를 시공자로 정해 계약을 체결했다. 대한YWCA연합회는 건축 기금을 모금하고자 후원을 요청하는 홍보물을 만들어 국내외 단체에 배포하거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등에게 대외서신을 보내 회관 건립의 취지와 뜻을 전달하며 후원을 도모하기도 했다.
〉 9쪽, ‘Association 연합회’ 중에서

우연히 「건축사」에서 차경순의 부고 기사와 함께 그의 작품 목록을 대거 발견했다. 이 목록을 보며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차경순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멋진 옥탑을 갖고 있으면서 벽돌과 조화롭고 디테일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노출콘크리트 건물을 발견하면 혹시 차경순의 작품이 아닐지 의심할 것 같다.
〉 36쪽, ‘Cha Kyung-soon 차경순’ 중에서

한국YWCA연합회에서도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건물의 쓰임에 대해 고민하던 차였다고 하시더라고요. 계속 고민하던 숙제가 있었는데, 저희가 그때 마침 제안을 드렸던 것이죠. (웃음) 저희가 그동안 마실에서 행사하던 모습을 봐 오셨던 터라 같은 방향을 볼 수 있겠다고 믿어주신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이전까지 공익변호사와 비영리단체와의 관계였다면 그때부터 혁신적인 공간사업을 하는 기업가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어요.
〉 65쪽, ‘Deoham 더함’ 중에서

한국YWCA연합회관은 시민운동의 거점으로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를 지나서는 오랫동안 일반 임대용 건물로 사용되었다. 저층부에는 금융기관이나 판매시설 등이 입점했고, 2020년 리모델링 공사 전까지 카페와 문고, 여러 은행 지점과 교역 사무실 등이 입주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이 건물의 정체성과 YWCA라는 태생을 온전히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건물 정면 현관 옆에 위치한 조각가 김정숙의 부조 작품 ‘여신상’이었다.
1968년 화강암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재료와 컬러의 명확한 대비를 보여준다. 가운데 날개 달린 천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두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인데, 세 여인은 한국YWCA연합회 창설자인 김활란, 유각경, 김필례를 상징하고, 이들이 들고 있는 횃불은 영, 비파는 지, 향유는 체로서 YWCA 이념을 상징한다.
〉 77쪽, ‘Kim Chungsook 김정숙’ 중에서

상업지역이라면 대규모 실내 쇼핑몰부터 만들고 보는 대한민국에서, 명동은 보기 드문 세장형·소규모 필지 중심의 상업가로 지역이다. 지가가 높아짐에 따라 오히려 필지를 분할해 세장한 필지를 만드는 방식이 성행했고 이 때문에 조밀한 다양성을 담는 도시조직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합필에 의한 대규모 계획처럼 기존 도시조직을 손상하며 진행된 서울 대부분의 진부한 도시 재개발사의 어휘와는 판이한 구조를 띤다. 그래서 귀하다.
〉 93쪽, ‘Myeongdong 명동’ 중에서

‘페이지’는 모든 것을 담을 만한 단어였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종이의 앞뒤 면을 가리키는 ‘장’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타동사로는 사람을 찾거나 말을 전하는 안내방송, 연락, 호출의 의미도 있다. 또한 숙어로 ‘on the same page’라고 하면 여러 사람이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었고, ‘turn the page’에는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장을 넘긴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이름 자체에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페이지 명동(PAGE MYEONGDONG)을 이 공간의 브랜드명으로 정하게 됐다.
〉 106쪽, ‘Page Myeongdong 페이지 명동’ 중에서

페이지 명동이 산책감각을 내세운 또 다른 인문적 배경은 발터 벤야민이 근대적 지식인의 상징으로 제시한 산책자의 개념에 기대고 있다. 이 공간을 운영하는 더함은 이곳을 시민사회의 역량과 에너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혁신가들이 모이는 플랫폼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도시의 심장부에서 지금의 문화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새로운 산책자들이 이곳에 모이고, 영역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사유할 수 있는 공간. 이것이 페이지 명동의 산책감각이다.
〉 113쪽, ‘Promenade 프롬나드’ 중에서

3층을 거쳐 페이지 명동 7층에 도착하면 명동성당과 남산이 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독특한 패턴의 옥탑을 만날 수 있다. 루프탑은 기존에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공간이고, 옥탑 역시 물탱크를 보관하던 숨겨진 공간이었다. 3층 루프탑이 명동과 나란히 서 있는 듯한 느낌이라면, 7층은 명동을 품에 안은 듯한 느낌을 준다. 처음 이 공간을 발견했을 때가 떠오른다. ‘명동에서도 이런 뷰를 볼 수 있구나’ 하며 감탄했고, 7, 8층 옥탑을 만났을 때 ‘명동에서도 힙지로 감성을 느낄 수 있구나’ 하며 감동했다.
〉 126쪽, ‘Rooftop 루프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