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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서사와 시

2005년 《문학춘추》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주명숙 시인의 디카시집 『아직, 조금 간절합니다』가 시인동네에서 출간되었다. 한 컷의 사진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애환과 비의(悲意)를 몇 줄의 짧은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발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주명숙 시인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그것을 감히 혜안(慧眼)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그 두께와 깊이를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했다.

이제 스며들 즈음이다.
천천히 깊숙이 시(詩)의 본성에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2021년 가을
주명숙

신병은(시인)
주명숙의 시의 자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마음 길을 건너는 암행이다. 직선의 직유와 곡선의 은유를 잘 버물려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나게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 하는 길이다. 하루 중 가장 순한 새벽길이고 햇살 한 줌 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들리는 길, 물결에 꽃의 지문을 찍는 봄의 길이다. 그런가 하면 백일을 죽어라 견디면서 한 번 묻고 여러 번 답을 한 흔적이면서, 제 안을 들여다보는 속 깊은 성찰로 허투루 보지 않고 허투루 발설하지 않은 언어의 풍경이다. 작고 짧은 이야기를 통해 긴 공명의 숨결에 젖어들게 하는 시, 그래서 이번 디카시집이 지닌 함의는 간절하면서도 놀라운 재발견이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의 원형을 듣고, 익숙한 것들의 문화적 편견을 깨는 행복한 폭소노미(forksonomy)다. ‘진심 닿다’는 말과 ‘마음이 움직인다’는 말의 사이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자연을 바라보는 공감으로 아이덴티티를 찾게 해주는 체험적 은유, 의미를 시의 가슴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하는 주명숙의 시는 이제 우리가 기꺼이 건너야 할 즐거운 암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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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슴베의 꿈
동행ㆍ12/길ㆍ15/공양ㆍ16/독백ㆍ19/멍, 이라는 말은ㆍ20/문ㆍ23/봄ㆍ24/사리ㆍ27/산사의 발효법ㆍ28/슴베의 꿈ㆍ31/썰물ㆍ32/쉼표가 필요해ㆍ35/염화미소ㆍ36/응시ㆍ38/퇴근길ㆍ40/집착ㆍ43/푸른 날ㆍ44/해빙ㆍ47/기도ㆍ48/회한ㆍ51

제2부 조금 뒤쳐져도 괜찮아
가시장미ㆍ55/가족ㆍ56/간절ㆍ59/골다공증ㆍ60/그리움ㆍ63/사랑의 습성ㆍ64/늙은 큰애기 유치원 가다ㆍ67/마음의 두레박ㆍ68/비 그친 오후에ㆍ71/비양도 돌탑ㆍ72/사위 사랑ㆍ75/쌈짓돈ㆍ76/안부ㆍ79/짝사랑ㆍ80/팔불출ㆍ83/망부석ㆍ85/지독한 사랑ㆍ87/길냥이 급식소ㆍ88/성혼선언문ㆍ91/자식농사ㆍ92

제3부 아직은 꽃인 줄 알았어요
거리 두기ㆍ97/권태기ㆍ98/비상구ㆍ101/마스크 전성시대ㆍ102/반칙의 주체ㆍ105/사춘기와 갱년기ㆍ106/실직 1ㆍ109/실직 2ㆍ110/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직했다ㆍ113/어느 별에서 왔니ㆍ114/우화 1ㆍ117/우화 2ㆍ118/이정표ㆍ121/청년주택에 입주하다ㆍ122/취업준비생ㆍ125/코로나 통치ㆍ126/희한한 갑질ㆍ129

제4부 당신의 하루를 기억합니다
가을 이야기ㆍ132/꽃 선물ㆍ135/노숙ㆍ136/뒤란ㆍ139/마루다리ㆍ140/무지개ㆍ143/바다를 타는 그네ㆍ144/산수유 시목지ㆍ147/설국ㆍ148/스며든다ㆍ151/여수ㆍ152/여행과 기억ㆍ155/여행의 정의ㆍ156/유월, 보리수ㆍ159/채송화ㆍ160/해바라기ㆍ163/휴(休)ㆍ164/물 위의 아이들ㆍ167/사람이 살고 있었네ㆍ168/세컨하우스ㆍ171

혼자서 놀 줄 아는 사람이 잘 늙어 간다고 한다

커피와 책과 창밖의 풍경이 어제보다 한 뼘 깊어졌다
- 「동행」 전문

한나절쯤 바라만 보고 싶을 때 있지요
두 눈이 시릴 만큼 서러워지면
시퍼렇게 날 선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지요

푸른 날이 있겠지요
- 「푸른 날」 전문

닿지 않았다고 진심이 아닌 건 아니지요
덩굴손이라도 뻗어 다가가고 싶었지만
곁 주지 않는 건 그대였으니
생각이 다 말라버린 나는
목탁처럼 그저 울리는 중이지요
- 「간절」 전문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의 사각지대는 자꾸 늘어나고

교차되는 감정을 미처 삭이지 못해
끼익,
접촉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 「권태기」 전문

너무 늦기 전에 다녀가세요

출입구는 따로 없어요
- 「여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