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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기묘한 소설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서 난 핏덩이를 맡겨 놓고 그를 찾아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그녀는 그곳에서 ‘스킨 모자이크 사건’을 일으키고 아이를 안고 산으로 들어간 남자는 20년 동안 산속에서 기른 딸과 함께 미국으로 엄마를 찾아 떠난다. 채령이라는 한 이름으로 불리는 딸과 엄마 사이에서의 사랑 이야기에 패션의 내면생활이 담겼다. 엄마에게 발현된 사랑이 딸에게 투사되고 딸을 맡긴 남자를 딸이 사랑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들이 동화작용처럼 싱그럽다. 내면의 치열한 탐색을 따라가는 문장력이 세다. 늙은 청년이라는 입소문 작가답다.

산속 양녀 양육기
무덤 굴을 부수는 생명의 부르짖음
딸의 파리유학 판타지
노동운동에 소외된 사랑
테러 수준의 까탈의 세계
신분상승으로서의 성의 정치학
우정과 동성애의 고뇌
석녀가 발명한 무두질
스킨 모자이크 사건
혼혈을 돌보는 조각보 사랑

[저자 후기]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예순 청년이었는데 다 쓰고 나니 일흔 노인이었다. 13년 전에 쓴 ‘초록드레스’의 개정판이다. 멋모르고 마구 써내려간 글을 버리기가 아까워 대폭 손을 봤더니 전혀 다른 글이 되었다. 처음 밥벌이를 하고 그게 유일한 직업이 되어준 것이 여자 옷 만드는 일이었다.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 때문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 때문에 일찍 그만두게도 되었다. 그 뒤로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적이 없고 새벽에 신문 배달을 마치고는 종일 도시의 방랑자가 되어 여기저기 기웃기웃 잡생각만 무성했다.
남들보다 일찍 은퇴한 셈이어서 농사부터 기초생활보장수급까지의 온갖 역사를 너절하게 더듬어 보았다. 옷과 농사는 생활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 기둥으로 손수 집도 지어보았고 글이라는 자랑질도 넘보았다. 옷이 글이 되기까지 무수한 역사를 소환해 보았지만 마땅한 지침도 없이 생각만 완고해졌다. 초월자의 패션인 피부색에 신분의 낙인을 찍어 인종을 차별하는 것도 옷 만드는 인간의 자유로울 없는 의지를 반영한다고 우겼다.
패션 소설을 쓰면서 별걸 다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옷 짓기가 적성에 맞지 않아 그 의미를 쫓다보니 글짓기 적성이 되었나보다. 생각 무성한 일화의 나열에 지나지 않지만, 옷에 대한 나름의 체험을 담았다. 경험 밖 길쌈하는 여인들의 애환을 담지 못해 아쉽다. 소설이 되기까지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의 옷깃이 스쳤다. 고마운 인연들이다. 체온을 입는다.

[본문 속으로]
나는 식량 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엄마들이 아이들의 울음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어 아이들의 눈치에 놀아난 육아의 역사를 잘못된 진화의 상징으로까지 생각했다.(7p)

아빠 말처럼 남자 없이는 내가 태어날 수도 없는데 남자가 다 화살이면 난 어쩌라는 거야.(25p)

한마디로 영화는 야단법석이잖아요. 야단법석에는 늘 소외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요. 야단법석을 떨어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또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도무지 뭐 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82p)

이처럼 VIP 고객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된 장치는 철저하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 어떤 기호로 보장받고 있었다. 내보다 부의 레벨이 낮은 사람이 나와 똑같은 질감의 옷을 입고 있으면 왠지 싼 값에 사기당한 느낌이 들어 다시는 그 가게에 가지 않거나 내보다 부의 레벨이 높은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왠지 그 옷을 맞춰 입은 가게에 신뢰가 가서 다시 찾게 되기 때문에 천을 들여오는 데부터 시작해서 디자인은 물론 바느질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94p)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물인 몸에다가 세상에서 가장 유연하고 유기적인 재질로 만상의 이미지를 찾아 옷 입히는 지고 지난한 일을 하면서 그 잘못을 족집게처럼 잡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원죄이자 원천오류로서의 악이었다.(97p)

인간의 자세는 누군가의 체온이 가꾸어 주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해도 흉물처럼 보여요.(116p)

인간의 조형물은 풀이 무성하면 흉물이 되고 옷도 생명이 왕성하면 추리해지긴 하죠.(117p)

도대체 인간에게 우정이라는 게 가능한가요? 질투와 생존이 버티고 있는데 가능해요? 일시적 협잡 아닌가요? 남자들의 우정은 패거리 감성이고 여자들의 우정은 그를 보필해오지 않았나요?(202p)

가자. 일어나 땀샘을 헤집고 솟아오르자. 보드라운 초록 살결에 잠든 친구들을 깨워 아침 패션을 알리자. 지렁이는 뭘 입을 거니. 따뜻한 염산보다 싱거운 눈물이 낫겠어. 눈을 뜨고 싶지만 얼음 궁전이 녹을까 두려워. 사랑의 눈빛을 들킬까 눈을 뜰 수가 없어. 겨울밤은 너무 가혹해. 외로움을 감금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잖니. 깨어나면 날아가 버릴 것을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리는지. 이슬 같은 이별은 너무 슬퍼. 영롱할수록 멀어지는 눈부심이 싫어. 희부연 안개 속 뜨거운 밀착만 한 감동은 없어. 짓궂은 햇살에 춤추지 않을 수 없는 이유지. 보내고 싶어. 까무러치도록 아름다운 율동의 나라로 이주해 살게 할 거야.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은 원시의 나신이 그리워. 신생아를 품에 안듯 엄마가 보고 싶어. 딸과 엄마 사이에서 낯선 남자가 춤추는 건 안 된대. 날개만 있으면 상관없어. 맑은 하늘로 도망치면 되니까. 여자 기저귀만 전문으로 가는 남자라서 괜찮대. 무수한 알들을 돌보다 죽는 수컷 물고기를 위해 기도해 줘. 그래 다시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마. 보고 싶으면 땀샘을 헤집고 들어. 보드라운 초록 살결에 미끄럼 타는 풀벌레 소리가 잠들게 도와줘. 풀쐐기야 너는 왜 옷을 입은 채 자니. 있는 듯 없는 듯 솜털의 혼잣말이 바람의 악기로 떨고 있잖아.(221p)

인종에 대한 선망과 동경은 문화적 본능이지 당신 개인의 일탈이 아니잖아요. 지능도 마찬가지예요. 내 말투는 지식인과 일반인을 용케도 구분해 저자세와 고자세로 톤부터 다른걸요. 그래서 모두가 현혹의 옷을 갈아입잖아요.(285p)

원주민의 삶은 인간에게 노출된 생물처럼, 남자에게 노출된 여자처럼, 보호라는 이름의 폭력에 노출돼 있어.(288p)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도 잘살면 못 사는 인종을 차별할 거라는 거다. 인간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가 하면 허름한 옷만 입고 있어도 자기도 모르게 함부로 대하잖니.(23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