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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창우의 시집 『어둠을 못질하다』. 이 시집은 천창우의 시 작품을 엮은 책이다. 책에 담긴 주옥같은 시편들을 통해 독자들을 시인의 시 세계로 안내한다.

│시인의 머릿돌│

오랜 침묵 끝의 변명

내 시의 화두는 ‘어둠’과 ‘바람’이다. 그것들은 담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내포한다. 내가 의도하는 그것들은 음습한 감성의 죽음이나 절망의 회오리가 아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창조적 근원인 생명이며 흔들림이다. 그것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상징물인 것이다. 어둠이 없이 어이 새벽이 오겠는가 죽음이 없이 어떻게 부활을 바라겠는가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등 뒤에서 곱더라. 이유는 묻지 마라. 화자에게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그렇다는 말이다. 햇수로 8년 전, 8월의 뙤약볕 아래 어머니의 관 뚜껑을 닫으며, 5년 전 급성 폐혈증으로 한 사리 고난한 삶을 접은 한없이 애련한 관속, 아내의 눈을 감기며 그렇게 나는 어둠을 못질했다.
그 망치질은 나의 간절한 사랑과 뉘우침이 육화된 소망이었다. 흑암의 깊음 위에 떠 있는 수면을 운행하시는 절대자의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는 나의 Logos였다. 씨뿌림이었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태양과, 이른 봄 마른 우듬지를 흔들며 기다리는 어둠과 바람의 변조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하얀 속울음 울며” “달을 삼키고” “태양을 재단”하여 “쓰러진 어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것들 “회색빛 그림자의 품에 안는다”.
이를 위해 나는 이 시간도 “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찾으려 헤맨다.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기 위해 고뇌한다.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라고 고백한 ‘질 들뢰즈’와 어깨를 내어주며 걷는다. 하여, 나의 속울음은 언제나 “매화꽃이파리보다 가벼운 날갯짓으로 푸석이는 대지를 치오르는 오색의 불꽃”을 피우고자 울음 우는 것이다. 더 이상 울음을 감당할 수 없어 오랜 침묵을 깨고 부끄러운 낯짝을 들이민다. 이 글집을 새벽마다 시골 교회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리셨던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무한한 헌신뿐이었던 아내, 그리고 불변의 격려와 사랑을 나눠준 독자에게 드리며, 미국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역설적인 노벨상 시상식 소감을 덧붙인다.

“나는 인간의 종말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될 뿐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정과 인내를 할 줄 아는 영혼이요, 정신이다. 작가의 의무는 이런 것에 대해 쓰는 일이다.”

2017년 盛夏 益松亭에서 천창우 큰절
│감상 평설│

‘어둠’과 ‘바람’으로 발신하는 소망의 메시지

시인 권택명

천창우 시인의 시는 음악으로 보면 모차르트보다는 베토벤, 시로 보면 이백 보다는 두보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가 빚어내고 변주하는 시의 세계가, 베토벤적인 장엄함과 두보적인 비장함을 더 크게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창우 시인의 시는 우선 삶의 진정성 또는 진실성(현실성)이 매우 큰 진폭의 울림을 주고 있다. 예컨대, 통상 서정적 제목이라고 볼 수 있는 「연꽃의 그늘」이나 「가을 찻잔」 같은 작품에서도, 천창우의 시는 비장미悲壯美를 더 진하게 발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가 말하는 어둠은 작품에서는 ‘그늘’ 또는 ‘그림자’라는 언어로 치환되어, 「연꽃의 그늘」, 「그늘의 노래」로 직접 그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고 ‘바람’의 경우는 작품 「자화상」에서, ‘내 영혼은 바람에 흔들리고’, ‘영혼을 잃은 바람’ 등으로 변주되고 있다.
시인이 ‘어둠’을 음습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창조적 근원인 생명이며 ‘흔들림’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를 연상하는 이 표현이, 결국 그의 시작의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흑암에서 빛이 창조되고, 흑암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바람으로 상징)하신 패턴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또한 ‘새벽이 오기 전의 필연적인 어둠’이다. 정진규 시인이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별」)고 한 것이나, 정호승 시인이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천창우 시인이 말하는 시적 화두로서 ‘어둠’과 ‘바람’(일렁임)이, 생명과 창조를 표상하는 건강한 시 정신과 연결됨을 알 수 있다. 평론가 황현상 선생이,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시의 용기이며 윤리이다’(「말라르메 시집」)라고 한 말 역시 천창우 시인의 시 정신과 상통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 월간『창조문예』통권 제225호 ‘시인 특집’에서

│詩評│

시의 넓이와 깊이
-천창우 시집 ‘어둠을 못질하다’

오 성 호
시인·순천대 국어교육과 교수

1. ‘어둠과 바람’ 사이를 채우는 소통에의 갈망

시인들은 왜 시를 쓰는가 이에 대한 답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그럴 듯하게 들리는 답변은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내적 충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시인 이규보는 이 충동을 ‘시마(詩魔)’에 들린 것으로 설명했다. 천창우 시인의 시쓰기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천 시인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를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들린' 상태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가 스스로 밝힌 시쓰기의 화두는 ‘어둠과 바람’이다. 전자는 그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모친과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것, 즉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어둠으로 표현한 것은 죽음이 신화 시대부터 줄곧 어둠과 연결되어 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부활의 계기’이자 “수태의 거룩한 마중물”(「봄날의 번제」)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거꾸로 삶의 욕망을 자극하고 강화하기 때문이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바람'은 그런 생명 충동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천 시인에게 있어 '어둠과 바람'은 상생(相生), 상극(相剋)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창조적 근원’이다. “어둠을 못질하다”는 시집 제목은 은연중 이런 인식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둠을 못질하는 행위는 관 뚜껑에 못질하는 행위, 즉 사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일상적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둠을 못질하는 것은 흔히 ‘흑암의 골짜기’로 표현되는 사자의 세계를 벗어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당연한 절차이자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타인, 그것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타자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실감케 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살아 있는 매 순간의 소중함, 그리고 살아 있는 자가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친인의 죽음 앞에서 새삼 산 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죽음의 검은 날개가 덮쳐오기 전에 자신의 삶을 최대한 즐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삶의 기쁨과 보람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사실 천 시인에게 있어 ‘어둠을 못질하는’ 행위는 종말로서의 죽음에서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둠과는 상반되는 밝은 세계에의 긍정과 갈망으로 이어진다. 시인이 말하는 ‘바람’이 지닌 이중적인 의미는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테면 천 시인이 말하는 ‘바람’은 “이른 봄 마른 우듬지를 흔드는”(「시인의 변명」)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바람인 동시에 겨우내 죽어 있던 가지가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위로서의 바람이기도 한 것이다. 바람은 그러니까 죽음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생명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삶, 동시에 그런 삶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굳이 요약하자면 그는 자기 존재의 근원인 어머니,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세상이라는 전장(戰場)을 함께 누벼온 전우인 아내의 죽음이라는 가슴 아픈 경험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 즐기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다른 것들과 그 기쁨과 보람을 나누는 것(「하얀 연탄」)이 살아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삶을 사랑하는 일에 생명을 왜곡하고 억압하고 부정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저항과 분노(「로드킬」, 「늙은 고로쇠나무 앞에서」) 그리고 극복의 의지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창우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시적 관심의 대상,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이 특히 두드러진 것은, 이런 생명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시적 상상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가 오래 믿어온 기독교 신앙이다. 하지만 그는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자유롭게 경직되고 고착된 신앙과 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적 상상력은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확장되어 간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안젤무스의 ‘보속론’ 같은 기독교 사상의 흔적(「독어론」)도 나타나지만, 다른 종교, 즉 불교의 가르침 (「선암사 와송」,「사성암 염불」) 등으로 자유롭게 확장되어 간다. 그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다양한 독서 체험과 거기서 얻은 교양도 (「봄날의 번제」) 곧잘 자신의 시 속에 끌어들인다. 그 범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 그리고 『아라비안 나이트』(‘램프거인’)를 거쳐 허먼 멜빌의 『백경』, 『가시나무 새』 같은 현대 소설에까지 걸쳐 있다. 또 때로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처럼 시적인 언어와는 거리가 먼 개념(소쉬르)을 차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뮬라르크(보드리야르) 같은 학술적 개념(「소스인간」)을 변주시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시적 관심사가 전통적으로 시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것을 넘어 계속 확장되고 확대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런 점들만 보면 그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이나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헤매고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결코 우리 삶의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점점 물신화되어 가는 현대과학 기술, 그리고 거기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잡스와 노벨, 퀴리부인을 끌어오기도 하고(「너희들의 신」) 바야흐로 신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던 분야까지 넘볼 정도가 된 유전공학의 발전 위험성― 이를테면 다양한 우성 유전자 조합을 통한 맞춤형 아기 생산이 평범한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미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아버지를 고르세요」) 케네디와 오바마 같은 미국 정치인의 이름을 끌어오기도 한다. 또 5.18이나 세월호의 비극(「떠나는 자들의 시」.「남겨진 자들의 시」)이나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수저론’(「흙숟가락 금숟가락」)처럼 우리 시대가 공유한 아픔에 이르기까지 ‘어둠과 바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그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런 현실인식은 “요런 촌 구석에 허구헌 날 뭔 고물이 나오겄소 잉 /요새 여의도에나 가면 고물이 쎄뿔었을 껏인디!” 같은 날카로운 풍자로 이어지기도 한다(「여의도 고물」). 이에 대한 고물장수의 답변은 “여의도 고물은 너무 삭아뿌려서 똥값도 안 쳐주지라!”이다. 이 통쾌한 답은 시인의 현실에 대한 인식적 변용일 수도 있고 실제 시인이 마주친 고물장수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시 속에 끌어들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원천이 어느 것이든 진짜 중요한 것은 그의 현실 비판과 풍자가 정치평론가의 눈을 빌리거나 사상가의 이론에 기댄 것이 아니라 고물장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제 삶에서 얻어낸 지혜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시선이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진 고전적 교양이나 독서 체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 자체,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까지 고루 미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시인의 관심사는 자신이 화두로 설정한 죽음, 부활 같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머무르는 대신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속적인 삶의 현장 깊숙이, 그리고 두루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지닌 모든 자산―그 자신이 쌓은 다양한 지적 교양, 또 그 자신의 사적 체험에서부터 동시대가 공유한 체험만이 아니라 유년기의 체험(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을 모조리 시적 자양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정력적이고 열정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창작에의 열정으로 인해 그의 시적 관심사는 전통적으로 시적이라고 간주되어온 것에 머물지 않고 계속 그 너머로 확장되어 간다. 이처럼 자신이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한 모든 것을 자신의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 놀라운 잡식성과 탐식성은 이번 시집에 다양함과 풍부함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 상상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관심사의 외연적 확장이 모두 긍정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그의 시에서는 다변(多辯)과 수사의 과잉, 다소 느슨한 언설 등이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또 그가 채택한 소재가 시 속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채 겉도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는 아마도 급격한 시 세계 확장이 가져온 부작용, 즉 확대와 확장의 관성 때문에 자신이 습득한 것들을 소화시키고 승화시킬 만한 시적,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2. 불초(不肖)의 사모곡

앞에서는 여전히 시적 관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애쓰는 천 시인의 노력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시인 자신의 원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들에 관해서이다. 필자가 보기에 시인 자신의 원체험, 그 중에서도 모친과 관련된 유소년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들이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돋보인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 시들을 통해 인간 천창우의 성장 궤적과 함께 그를 시의 길로 이끈 보이지 않는 힘들의 자취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삶과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력 또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들이 그린 세계는 시인의 내면에서 오래 숙성되어 온 것이고 그 세계를 그리는 시인의 언어 또한 깊고 묵직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와 관련된 다양한 기억을 그린 시들이 특히 돋보인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문득 ‘불초의 사모곡’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불초란 말은 “어버이의 덕망이나 유업을 이어받지 못함”이란 뜻이다. 그러니 부모 앞에서 자식이 스스로를 불초(자)로 낮추어 부르는 것은 예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나이가 들어 부모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자식들 스스로 자신의 불초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을 재생하고 있는 천 시인의 시편들을 지배하는 주된 정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자신의 불초함에 대한 자책과 회한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어머니는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 혹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리고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새겨야 할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준 삶의 스승이고 그는 뒤늦게서야 그 가르침의 참뜻을 알고 후회하는 ‘못난’ 제자이자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 시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지나간 시절 삶의 세부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기억, 그리고 그것을 재현해 내는 언어의 풍성함이다. 그것은 삶을 구성하는 세부와 세목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다. 무릇 사랑은 그 대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깊고 자상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런 만큼 삶의 세부와 세목에 대한 기억은 삶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시절 삶의 대부분은 무의식의 심부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졌을 때 비로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천 시인의 경우, 오래 잊고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은 대부분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존재로 인해 무의식의 어두운 지층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여과되고 발효된 경험들은 그의 시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앞에서 거론한 시들이 대부분 머리로 배운 경험과 언어에 의존하고 있었다면 유년기의 체험과 기억을 그린 시들은 대부분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그리고 삶 전체를 통해 배운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실로 오랫동안 발효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경험과 기억은 흔히 ‘걸쭉하다’고 표현되는 전남 방언, 그 중에서도 온몸으로 대지와 맞서 삶을 일구어온 농민들의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이 언어가 환기하는 삶의 흔적과 기억과 정서들은 대부분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는 시인으로 하여금 삶을 사랑하도록 만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도 그 삶의 세부와 세목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들어준 동력인 것이다. 다음 시는 어둠 속에 유폐되어 있던 기억들이 어떻게 되살아나고 있는지, 천 시인을 시인의 길로 이끈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참빗 같은 대밭 폐가를 파옥하는 중장비 굉음이 요란했다. 무너진 헛간에는 먼지처럼 가라앉은 시간들 베고 외겨리쟁기 한 틀 잠들어 있었어, 햇볕에 그을은 눈길이 참 따뜻했지. 썩은 쟁기술, 밑둥의 똥개는 떡 같은 녹이 슬었고, 날 부러진 보습은 꿈을 꾸고 있었어. 볏은 흔적만 못에 매달렸고, 한마루 코다리는 부러지고, 닳고 닳은 봇줄과 뱃대끈은 어느 소의 쇠털이 아직 시퍼런 시간의 잔해에 묶여 있었어.

목줄 끊어내고, 막새 코다리 빠진 멍에를 떼어내 씻고 기름칠 해 책장 위에 올려 놨지. 어느 영혼의 아팠을 형틀 거기, 워낭만한 두 눈 껌뻑이며 멍에 얹은 자리 부은 목 길게 빼고, 진종일 바윗덩이 같은 걸음 뚜벅뚜벅 내딛던, 우리 누렁이 프레스코 벽화로 찍혀 있었어.

딴은 내 힘으로 쟁기 끌어 일군 삶인 줄 알았어. 밤새 모다기비에 씻겨 묘봉 잔디 싱그러운 어머니 뵙고 돌아온 날 밤, 날카로운 못 하나 책장 위에 박혀 빠질 줄 몰랐지. 평생 어머니 가슴에 얹힌 나, 그 멍에 체념처럼 사신 어·머·니 ―
「또 하나 멍에」 전문

이 시에서 어머니의 고단한 일생은 폐가를 허무는 과정을 통해 복원된다. 폐가의 일부인 헛간을 허무는 과정에서 오래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외겨리 쟁기를 발견하는 데서부터 과거의 복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폐가를 허무는 일은 고분을 발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덤 속에 흩어진 유물 하나하나가 과거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어둠과 먼지 속에 묻혀 있던 낡은 쟁기와 녹슨 보습은 그것을 소 등에 매는 데 사용된 각종 장구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고 더 나아가서 ‘누렁이’와 어머니의 고달픈 노동에 대한 기억을 불러낸다. 녹슨 쟁기가 어머니의 고단한 일생에 대한 새삼스러운 재발견을 이끄는 것이다. 이 기억들은 모두가 그 농기구를 사용해서 삶을 일구어온 어머니의 노동(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특히 이 시에서는 농기계의 도입과 함께 사라진 각종 농기구와 장구들, 그리고 그것들의 이름들을 복원한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외겨리쟁기, 쟁기술, 똥개, 볏, 코다리, 봇줄, 뱃대끈, 막새 같은 용어들은 이미 농민들에게서조차 잊혀져가고 있는 낱말들이다. 이들을 하나씩 호명(呼名)하는 행위는 그것들 각각의 기능, 그리고 그와 연관된 서로 다른 노동 행위의 세부를 환기할 뿐 아니라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어떤 추상적 개념 속에 묻혀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해 그 이름들은 오랜 농경의 역사와 거기서 삶의 지혜를,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와 시인이 거쳐 온 힘겨운 삶의 세부를 환기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호명하는 행위는 마치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전몰자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 것과 같은 효과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추도식에서 이루어지는 호명 행위는 ‘전몰자’라는 일반명사의 추상성 속에 은폐되어 있던 개개인을 불러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색깔과 향기를 지닌, 따라서 결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 준다. 마찬가지로 헛간 속에 유폐되어 있던 농기구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는 동안 시인은 오래 잊고 있던 과거와 대면하고 특히 이 농기구를 사용해서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의 모습과 삶을 세세하게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해 농기구를 차례로 호명하는 행위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딴은 내 힘으로 쟁기 끌어 일군 삶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내 삶 전체가 어머니에게 얹힌 멍에였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된다.
「흑백 앨범 속 어느 추석」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어린 시절의 시인과 그런 자식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슬픈 모습을 그린 시다. 올개쌀밥, 송편, 고깃국, 밤 대추 고등어자반 등 평소 먹고 싶었던 먹거리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일년 삼백육십오일이 추석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소망을 이야기하는 철없는 어린 아들과 그런 소박한 바람조차 충족시켜줄 수 없는 처지 때문에 “화덕 아궁이 불섶 헤집던 부지깽이 두드리다” “무명수건 그늘에 숨은 엄마 얼굴”의 대조는 사실 어떤 특정 개인의 경험이라기보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경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절 어머니들에게 자식새끼 먹여 살리는 것처럼 소중한 일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절 어머니의 슬픈, 그리고 악착같은 모습은 “누런 양은 국자 주둥이”(「사다새(Pelican)」)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부리 아래쪽이 새끼에게 줄 먹이를 담을 수 있도록 진화한 사다새(펠리컨)의 모습과 중첩된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가난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어린 시절은 정신적, 정서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성장기의 경험을 통해 삶과 세계를 사랑하고 낱낱이, 그리고 속속들이 볼 수 있는 방법과 태도를 배우고 삶의 미세한 결에 반응할 수 있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단련했기 때문이다. 얼핏 백석 시의 열거를 연상케 하는 그의 표현수법이 주로 유년기 체험을 다룬 시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천 시인이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온 노동의 도구를 떠올리고 동시에 그것들을 부려 쓰는 방식 하나하나를 떠올린다. 그 결과 이런 삶의 세부와 세목들에 의해서 그가 그린 어린 시절의 삶은 생생한 구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처럼 삶을 구성하는 세부들을 깊이, 그리고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는 힘, 삶을 대하는 태도 그런 것들은 모두 어머니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삶 전체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가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의 불초함을 자책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삶의 방식과 지혜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급속한 현대화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서구, 근대, 문명 지상주의의 환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 현대적 제도와 기술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 그럴듯한 외양을 지니지 않은 모든 것은 흔히 미개와 야만의 흔적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육아 방식, 정확하게는 밥알을 씹어 아기에게 먹이는 아내와 이를 보고 질겁해서 아이 입에서 밥알을 훑어내는 며느리의 모습을 그린 「밥물림」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재미있지만 씁쓸한 느낌을 주는, 그리고 동시에 이른바 현대적,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것(문명, 과학, 위생 등)들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을 촉구하는 시로 읽을 수 있다.
교육과 매스미디어의 건강 방송 등을 통해서 위생 관념을 주입받은 현대여성(젊은 엄마)과 수천 년 이어온 전통적인 육아 방식을 고수하는 할머니(주로 시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사실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할머니들의 밥 먹이기 방식에 대해 젊은 엄마들이 보이는 맹렬한 거부반응은 위생(근대 의학에 기반을 둔)을 명분으로 한 것이지만 실상 이때의 위생은 ‘시’자 붙은 존재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덕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지만)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위생을 앞세움으로써 최소한 육아법에 관해서 시어머니는 더 이상 존경받고 대접 받아야 할, 그리고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무시하거나 멸시해도 좋을 존재, 즉 무지와 야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완고한 늙은이이거나 위험한 병균을 몸속에 담고 있는 보균자로 취급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숱한 낯선 병증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 지나치게 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해서 면역 체계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른바 ‘위생가설’을 생각해 보더라도 위생에 대한 이같은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위생적, 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은 그 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일례로 위생적 분뇨처리 방법으로 상식화된 수세식 화장실이 생태적 순환의 사이클을 인위적으로 단절시켜 심각한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일이나, 깔끔하고 산뜻한 포장과 외관으로 아주 위생적일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하는 각종 식품이나 과자류들이 얼마나 많은 유해성분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손자에게 ‘밥물림’하는 행위에 대한 젊은 엄마들이 흔히 보이는 맹렬한 거부감이 사실은 ‘시어머니’에 대한 모종의 불편한 감정을 표 안 나게 표출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앞서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새삼 타박 받는 ‘밥물림’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일상 속을 파고들어 전통적인 생활의 지혜, 그리고 우리 삶을 엮어온 정서적 유대의 끈과 우리 삶에 다양한 무늬를 새겨넣은 미세한 결들을 지워버리는 근대의 폭력성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위생(문명, 과학)의 환상에 사로잡힌 세대와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야유라고 할 수 있다. 시의 말미에서 시어머니가 걸쭉한 남도 사투리로 던지는 말을 한번 새겨 보시라. “니까짓게 암만 손꾸락으로 파내고 철쑤세미로 딱어내 봐라/내 새끼 뻬따구에 박힌 지 애비 도장밥이 어디 어진가”
이 진술에는 모질고 험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내 새끼’ 남부럽지 않게 키워낸 어머니의 자존심과 긍지가 담겨있다. 그것은 단지 손쉽게 남에게 배운 지식을 앞세워 자신을 뒷전으로 밀어내려는 세월에 맞서는 어머니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험하고 모진 세월을 살아낸 자신에 대한 이 믿음과 자긍심은 다시 한 인간의 죽음조차 가벼운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세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수의조차 기성복이 싫어 “가위로 오려간 보성포 조각조각” 손수 바느질해서 당신의 수의를 지으시는(「어머니 수의」) 어머니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상품 경제의 삭막함과 천박함을 꿰뚫어 보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연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에서 시인은 삶이란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입을 수의 한 벌/지 손으로 지어서 입고 가는 바느질감”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한 인간의 일생이 저승까지 걸치고 갈 수의 한 벌 짓는 일과 다름없다는 귀한 깨달음을 시인에게 전해 준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아들에게 값진 교훈을 남기고 있다는 뜻에서 시인의 어머니는 단순히 육신을 낳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세상과 인생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을 틔워 준 스승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 가운데 특히 사모곡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시편들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 사모곡 속에는 삶의 동지이자 전우였던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역시 어머니와 동일선상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함께 산 아내는 함께 자식을 기르는 동안 시인에게 모성(母性)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고 어머니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만들어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 시인의 사모곡은 동시에 사부곡(思婦曲)이라고 할 수 있다. 사별한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리움을 직접 토로한 「늙은 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언뜻 분간이 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삶에서 어머니와 아내가 지닌 의미와 비중, 그리고 감당해온 역할은 그만큼 동질적인 것이다.

3. 넓이와 깊이의 조화를 위하여

앞에서 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천창우 시인의 시가 가진 넓이와 깊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넓이와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시적 관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애쓰는 천 시인의 열정과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넓이에 어울리는 깊이를 얻는 데에까지 이르렀는가에 관해서 논했다. 그리고 깊이와 관련해서는, 천 시인의 내면에서 오래 저장되고 발효된 기억들, 즉 어머니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룬 시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특히 이 경우 천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풍부함과 다양함,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세부와 세목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 부분은 아마 다른 시인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득의의 영역, 천 시인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깊이 파고들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그런 것처럼 넓이와 깊이는 상보적인 관계를 갖는다.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가려는 천 시인의 부단한 노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넓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넓이 그 자체에 취해 진정으로 나아갈 바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넓이에 걸맞는 깊이를 얻기 위한 별도의 노력, 즉 시 세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경험에 대한 숙고와 성찰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천 시인이 보여준 꾸준한 의욕과 열정으로 미루어,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이해하고 그 삶을 포근히 껴안는 가슴 따뜻한 시들로 미루어 볼 때, 머지않아 다른 방식으로 넓어지고 깊어진 천창우 시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완(完)

제1장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길

고시리 14
선암사 와송臥松 16
너희들의 神 18
독어록獨語錄 20
자화상自畵像 22
아버지를 고르세요 24
봄날의 번제 26
황태꽃 28
소크라테스의 변명 30
연꽃의 그늘 32
마네킹의 봄밤 34

제2장 저 혼자 헤는 별

구제품 시 38
삼일절에 부친 편지 40
사성암 염불 42
지리산 가시나무 새 44
겨울개구리 46
또 하나 멍에 48
어느 공사안내판 50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51
하얀 연탄 52
꽃의 장례식 54
달개비꽃 도박 56

제3장 떠나는 자들의 노래 남겨진 자들의 노래

소스인간source human 60
1125호 새마을 열차카페 62
실존, 그물코에 걸리다 64
땅바닥에 쓴 詩 66
간음한 여인에게 68
떠나는 자들의 詩 70
남겨진 자들의 詩 73
죽은 참새의 일기 76
그늘의 노래 78
낡은 유모차 임종 80
황태 세레나데 82

제4장 길 위에서의 풍경

변신變身 86
꽃으로 덧난 상처 88
웬수놈의 이팝꽃 90
꽃무릇 겨울사랑 92
밤꽃의 현충顯忠 94
가을 찻잔 96
겨울비 소고 98
사랑과 죽음의 등식 100
늙은 시인의 사랑 102
섬진강변 하데스 104
빈 방하나 세놓습니다 106

제5장 빛과 어둠의 교차로에서

시지프스의 하루 110
부활초復活草 112
세한도歲寒圖를 걸다 114
지구메뉴는 골동반 116
달 뒤편에 서다 118
로드킬 120
여의도 고물 122
천년의 미소 - 바이욘 사원에서 123
늙은 고로쇠나무 앞에서 125
흙숟가락 금숟가락 127
흑백앨범 속 어느 추석 129

제6장 이 징그러운 육애의 환상은

사다새pelican 132
어떤 풍경 134
시간이 멎은 집 136
어둠을 못질하다 138
어머니의 수의壽衣 140
헛정 142
또 하나의 우화羽化 144
단풍잎 화장법 146
어머니 설 그림자 148
핏줄 150
밥물림 152

신은 자신을 위해 사랑을 창조했기에 피조물에게 그 사랑은 너무 버겁다. 그래서 아프지만 오늘도 나는 가슴에 박달나무 가시하나 품고 산다.
-「가시나무새」 시작노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