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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 마흔 백수 손자의 97살 할머니 관찰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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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긴 지켜봄이 아주 담담한 이해와 사랑에 닿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글을 읽는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작은 기적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 박서련 (소설가)

이 책이 더 특별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마음마저 돌봐주었다는 점이다. 가까운 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유대. 이 책이 고맙다.
- 이기호 (소설가)

"피 여사,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라고요?"
"두바이?"

염세주의 손자와 비관주의 할머니의 동거 일기
그 기적 같은 기쁨과 유대의 기록

‘백 살’ 할머니, 일흔 살 어머니, 마흔 살 손자, 모두 더하면 210살. 작가로 살던 손자는 코로나 시대를 맞아 느닷없이 ‘백 살’ 할머니 피영숙의 간병인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혼자 방에서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보내던 그는, 할머니가 살아온 백 년의 삶, 노년의 고통과 기쁨을 이야기로 기록한다.
이 책은 세상 바깥에서 살고 있다고 믿던 작가가 자신보다 작고 약한 할머니를 돌보면서 발견한 기쁨과 유대의 이야기다. 이인은 “이렇게 살 바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오래” 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텔레비전보다는 텔레비전을 보는 피 여사를 시청”하며 할머니 피 여사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피 여사는 야생동물 다큐멘터리와 격투기 경기를 좋아했다. 앵무새를 보면 눈을 떼지 못했고, 한일전 축구 경기를 보고 또 보았다. 이인은 피 여사와 삼시세끼를 같이 먹고, 거동을 돕고, 밤마다 자세를 고쳐주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기록”이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들처럼 된다. 노인이 되면 젊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들이닥치는데, 이 고통은 전 세계 공통이다. 외로움, 생계 곤란, 건강 악화, 배우자와의 사별, 자식 문제, 시대 변화 부적응 등등. 피 여사는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노후를 맞았다. (15쪽)

출판사 서평

긴 지켜봄이 담담한 이해에 닿는 순간
사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

피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인은 피 여사를 보살피며 한때 자신을 기른 한 여성의 삶을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글로 적는다. 작가는 한 여성이 살아온 백 년의 삶을 듣고 기록한다.
피 여사의 삶은, 가난한 여성이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은 기록이다. 피 여사는 1925년에 태어나 겨우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십 대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자 스무 살에 낯모르는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마약쟁이였고, 한 집에 첩을 두었고, 한국전쟁 때 학살당했다. 피 여사는 두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피 여사는 세 아이를 더 낳고 비참한 삶을 견뎠다.

어느 날, 피 여사가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여명의 새벽녘에 아흔을 넘긴 노파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피 여사는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피 여사의 주변으로 슬픔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글픔과 서러움으로 뒤엉킨 어둠이었다. 어둠을 걷어내려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설프게 손을 내미는 건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 같았다. 피 여사가 충분히 울도록 그저 바라보았다. (49쪽)

피 여사도 한때는 직접 거동하며 자식과 손자를 돌보았다. 하지만 피 여사는 삶을 혼자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눈이 침침해졌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잇몸에서 피가 나고, 이가 시렸으며, 밥 먹을 때는 입이 말라 음식이 영 까끌까끌했지만 잘 때는 침을 흘렸다. 골다공증이 생겼고, 근력이 약해졌고, 소화가 안 됐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고, 변비에 걸렸고, 요실금에 시달렸고, 오십견이 생겼다. 허리를 삐끗했고, 무릎에 염증이 찼고, 삭신이 쑤셨고, 팔이 저렸고, 목이 욱신거렸고, 호흡이 가빠왔고, 검버섯이 생겼고, 심장이 안 좋아졌다.
일흔 살 딸과 마흔 살 손자는 피 여사의 하루에 삶을 맞추기 시작한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피 여사를 위해 성인용 기저귀를 구입하고 외출은 한 번에 한 사람만 했다. 어느 날부터 손자는 피 여사가 낮잠을 자지 않고 밤에 푹 잘 수 있도록 몰래 두유에 커피를 타 넣고 낮에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피 여사와 함께 사는 법을 익혀 나갔다.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병 이름이 뭐라고 했죠?"
"보루네오."
뜬금없이 피 여사는 보루네오라고 답했다. 과거에 각인된 가구 브랜드 보루네오가 코로나와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으면 피 여사는 스리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 이름이 뭐라고요? 맞춰봐요. 코로 시작해요."
"코, 코, 코브라."
피 여사의 답에 웃지 않고는 못 배겼다. (289쪽)

손자는 할머니를 돌보며 비로소 작가가 된다. 삶을 이야기로 적는 사람이 된 것이다. 피영숙의 삶을 이해하며 작가는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을 한 가지 배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는, 단순하지만 놓치기 쉬운 사실.

피 여사가 밥 잘 먹고 침대에 누웠을 때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뜻밖에 피 여사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 여사와 내가 옆에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한 말이겠으나, 피 여사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답변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 (295쪽)

(* 제목에 쓰인 백수는 놀고먹는 사람을 뜻하는 백수白手가 아니라 아흔아홉 살을 뜻하는 백수白壽에서 가져왔다.)

추천사

일흔 살에 가까운 딸과 마흔 살이 내일모레인 손자가 백 살에 가까운 노인을 한 집에서 병간호하고 있는 풍경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아프고 눈물 난다. 다가올 우리의 미래와, 또 누군가에겐 이미 지나간 경험이 자연스럽게 공유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오래 돌본다는 일은 잠이 부족한 일, 눈물에 무덤덤해지는 일이다.
이인의 에세이 《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가 내 마음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묻는다면, 병과 간병과 고독 속에 드러나기 마련인 우리의 나약한 마음을 거짓 없이 묘파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웃기고, 아프고, 화나고, 부끄럽고, 서러운 마음들. 그 마음들과 함께 누군가의 곁에 있어 주는 일. 이 시대의 돌봄이란 우리의 성장을 묻는 일이자 가족, 가부장제, 개인의 방관, 여성의 삶을 다시 질문에 부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고통에도 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팬데믹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이다. 이 책이 더 특별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마음마저 돌봐주었다는 점이다. 가까운 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유대. 이 책이 고맙다.

목차

추천의 글
들어가며

1부 할머니와 손자

우리는 모두 늙는다 | 주저앉은 피 여사 | 보행기를 끌게 되다 | 그나이에 틀니가 가당키나 하냐 | 거울 앞에서 빗질하는 노인 |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 오랜만의 외출 | 노인들은 금세 친해진다 | 인절미와 시장표 김 |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거니? | 나 안 보고 싶었어? | 전화교환원과의 갈등 | 이웃집 노인의 자식 자랑 | 텔레비전이라는 은인 | 드라마에 몰입하다 | 사자와 하이에나 | 개와 고양이 | 보고 있으면 몸이 후끈후끈해져 | 비공식 국가 대표 응원단장 | 바보가 되는 것보다 무서운 것 | 은으로 만든 빗 | 층간 소음과 효녀 효자들 | 모두 각자의 노후 | 치즈에 눈을 뜨다 | 타인과 함께 먹는 법 | 암묵의 통행금지 | 비타민이 필요해 | 과일 사계절 | 골드키위와 그린키위 그리고 망고 | 최애 생선 | 연어라는 행복 | 배고프지 않으려는 인간 | 가깝지만 가장 먼 | 모녀, 해묵은 애증의 관계 | 가족끼리 잘 지내기란 | 장편소설 같은 파란만장

2부 피 여사

할머니 덕분에 살았다 | 학교에 가고 싶어서 | 일자무식에서 벗어나다 | 강제징용된 남동생 | 남자가 덩치가 있고 키가 커야지 | 예쁘고 아름다운 새색시 | 행복과 고통의 총량 | 연이은 조카들의 죽음 | 콩가루 시댁을 향한 원망 | 모난 성격은 모진 세월의 반영 | 똑똑지 못한 빨갱이 | 미우나 고우나 하나였던 | 이북 남자의 편지 공세 | 니가 도망가면 일본을 가겠냐 중국을 가겠냐 | 온전치 못한 환대 |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이 | 밑도 끝도 없는 폭력 | 승냥이를 피해 호랑이 굴로 | 눈 좀 밝게 해주세요 |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 젊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뼈가 붙었다 | 사돈어른과의 어색한 오후 | 사라진 손자 | 헐벗은 가슴으로 상처를 끌어안고 | 미래를 향해 쏜 화살 |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불화가 필수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 피 여사의 자식들 | 셋째 아들과 막내아들 | 내 처지가 지옥 같더라도

3부 가족

이유를 따지자면 핏줄 | 가족이라는 울타리 | 시커멓게 캄캄한 밤 |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려면 | 나이가 들수록 비보는 늘어난다 | 인간은 받은 걸 결코 잊지 않는다 | 단출한 장례식 | 미움으로 삶을 소진하지 않기를 | 엄마가 처음이라 | 말없이 눕다 | 어머니, 나 좀 데려가요 | 들리지 않는 신음과 절규 | 미장원에 가자 |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 전염되는 우울 | 마음에 드리운 장마전선 |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엉엉 | 오랜 병에 효자 없다 | 도둑맞은 하루 | 수렁으로 빠져들다 | 뼈만 남은 엉덩이 | 현실도피 | 백 세까지 살기를 바랐지만 | 심야의 불침번 | 악마의 히죽임 |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요하게 | 내가 언제 자는 거 봤냐 | 아기가 된 할머니 | 고통을 마주하는 힘 | 스스로 매듭짓는 일 | 내가 없는 날 | 지금 행복해요? | 내가 죽길 고사 지내는 거냐 | 코알라와 두바이 |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본문중에서

우리는 모두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들처럼 된다. 노인이 되면 젊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들이닥치는데, 이 고통은 전 세계 공통이다. 외로움, 생계 곤란, 건강 악화, 배우자와의 사별, 자식 문제, 시대 변화 부적응 등등. 피 여사는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노후를 맞았다. (15쪽)

나는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피 여사라고 불렀다. 처음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피 여사는 어느새 “피 여사”라고 부르면 “왜?” 라고 답했다. 나는 어머니도 “박 여사”라고 불렀다. (22쪽)

어느 날, 피 여사가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여명의 새벽녘에 아흔을 넘긴 노파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피 여사는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피 여사의 주변으로 슬픔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글픔과 서러움으로 뒤엉킨 어둠이었다. 어둠을 걷어내려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설프게 손을 내미는 건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 같았다. 피 여사가 충분히 울도록 그저 바라보았다. (49쪽)

“이게 이탈리아 음식이니, 피 여사는 이제 이탈리아 할머니가 된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한국 사람이지.”
“지금 먹은 이탈리아 음식 이름이 뭐라고 했죠?”
“몰라.”
“피 여사가 아프면 허리랑 어깨에 붙이는 파스 있잖아요? 파스가 불에 탔어요. 그럼 뭐예요?”
“음, 몰라.”
“파스타.”
“파스타?”
“이게 뭐라고요?”
“파스타.” (78쪽)

피 여사는 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불만이 많았다. 박 여사 앞에서는 뭐라고 하지 못한 채 눈치를 보다가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땐 불평을 했다. 피 여사의 말에 따르면, 아픈 애미를 놔두고 만날 밖으로 돌아다니는 딸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격분이 일어나 딸의 면전에서 성토하기도 했다. 물론 피 여사는 박 여사와 있을 때면 나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함을 토로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흉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았다. (103쪽)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일본은 패망으로 가고 있었고 막판에 발악하듯 수많은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전장으로 끌고 갔다.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 피복 공장 직공도 정신대에 갈 수 있다는 우려에 피 여사는 서둘러 시집을 갔다. 피영숙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123쪽)

피 여사는 시집을 오자마자 겪은 처참한 상황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어난 일들을 평생 잊지 못했다. 최근의 일들은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지만 스무 살에 겪은 결혼 생활은 단 하나도 잊지 못했다. (130쪽)

피 여사는 언니와 남동생에게 전화해서 몸은 어떠냐고 안부를 묻곤 했었다. 통화를 마친 뒤에 피 여사는 내게 큰집에 전화하라고 채근했다. 아버지 쪽 친척들과 왕래가 없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는 왜 전화를 해야 하느냐면서 그렇게 하고 싶으면 피 여사가 하라고 응수했다. 피 여사는 "네 핏줄인데 왜 내가 전화하느냐"라면서 맞불을 놓았다. 내가 되바라지게 피 여사의 사돈이니 사돈에게 전화 좀 하라고 대거리하면 "저놈의 새끼가 말도 안 되는 걸 우긴다"라고 신물을 냈다. 피 여사가 전화 좀 하라고 독촉할 때는 첫째 아들이 생각날 때라고 나는 미루어 짐작했다. (199쪽)

피 여사가 더 이상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위험신호였다. 자신을 함부로 방치하는 사람이 건강할 수 없었다.
"피 여사, 요즘 피부가 꺼끌꺼끌해진 것 같아요. 고왔던 예전으로 되돌아가야죠."
"내가 이 나이에 피부가 고와지면 뭐 하냐."
"피부가 고우면 좋잖아요."
"이렇게 누워만 있는데 피부가 고우면 뭐가 좋아."
"사람들이 피부에 감탄했었잖아요."
"귀찮아. 다 귀찮아."
피 여사는 천천히, 하지만 뚜렷하게 쇠약해졌다. 급기야 다시 병원 신세를 졌다. 피 여사는 몸 여기저기에서 탈이 났다. 자연스레 박 여사와 내가 병실을 지키는 일이 늘어났다. (233~235쪽)

나는 피 여사를 돌보면서 가상 사회관계망을 들여다봤다. 여러 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사진과 영상을 올렸다. 나는 그들을 구경했다. 그들과 나는 핏줄을 보듬고 보살핀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다만 그들이 돌보는 아기들은 슬슬 기어 다니다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기쁨을 주었다면, 내가 돌보는 늙은 아기는 걷기는커녕 기어 다닐 수도 없어서 슬픔을 안겨주었다. 아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놀라울 만큼 빨리 성장했다면, 피 여사는 하루하루 느리게 쇠잔해졌다. 육아가 성장하는 아이의 푸르른 미래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노인 돌봄은 암울한 미래의 죽음을 늦추는 일이었다. (272쪽)

"피 여사, 지금 행복해요?"
"몸뚱이가 이래서 어디 나돌아 다니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하냐?"
"음, 그럼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어요?"
"없어. 행복도 모르고 기쁨도 모르고 살았어."
피 여사는 한평생 행복했던 순간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피 여사에게 막연하게나마 뭔가를 기대하고 물었던 나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피 여사를 바라봤다. (284~285쪽)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병 이름이 뭐라고 했죠?"
"보루네오."
뜬금없이 피 여사는 보루네오라고 답했다. 과거에 각인된 가구 브랜드 보루네오가 코로나와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으면 피 여사는 스리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 이름이 뭐라고요? 맞춰봐요. 코로 시작해요."
"코, 코, 코브라."
피 여사의 답에 웃지 않고는 못 배겼다. 코로나19로 우울할 때, 나는 피 여사의 엉뚱한 대답을 들으면서 웃었다. (289쪽)

"피 여사,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라고요?"
"두바이?" (291쪽)

피 여사가 밥 잘 먹고 침대에 누웠을 때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뜻밖에 피 여사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 여사와 내가 옆에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한 말이겠으나, 피 여사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답변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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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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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은 '꺄르르'로, 웃으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타인들과 소통하고자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요즘 유행하는 유머, 화제가 된 영화, 사회적 이슈가 빠르게 올라온다. 그러나 그의 글이 유독 특별한 이유는 철학, 심리학, 경제학, 사회학을 넘나들며 통찰하는 자신만의 날카로운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블로그는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찾아와 함께 웃고 우는 소통의 장이 되었다. 그는 온종일 책을 읽는 탐색자이며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개척자이다. 요즘은 조금 덜 먹고 덜 노는 대신에, 조금 더 공부하고 한 줄이라도 더 글을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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