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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한서 라는 역사책 : 사계의 변화로 읽는 한나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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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조 유방부터 신나라를 세운 왕망까지, 『한서』에 담긴 인간군상과 한나라의 역사를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의 변화로 풀어 읽다!

사마천의 『사기』와 더불어 전근대 역사서의 투 톱으로 꼽혔으나, 어느새 우리에겐 이름도 낯설어진 반고의 『한서』를 새롭게 발견한 책. 『한서』 속 우리가 잘 몰랐던 한나라(전한시대)의 이야기를 한 국가의 생로병사·생장쇠멸의 큰 흐름 속에서 읽어내고 있다. 공부공동체에서 함께 고전을 공부하며 삶을 탐구하는 저자들은 “인간들이 얽혀 빚어내는 사건과 사고(事故)와 마음을 다각도에서 비추어 보여 주는” 『한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에는 흥미진진한 한나라의 역사 이야기가 영화처럼 펼쳐져 있다. 한고조 유방, 여태후, 한무제, 곽광과 왕망 등 한나라의 주연들뿐 아니라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대일통 사상으로 유학을 존숭한 동중서, ‘버닝썬’의 대환장 파티를 벌인 제후국 왕자들, 죽음의 목전에 있던 황증손을 극적으로 살린 병길, 흉노 출신의 충신 김일제, 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환관과 외척 등등 다양한 신스틸러들이 출연해 한나라 사계의 변화무쌍함을 보여 준다.

출판사 서평

?발견, 한서라는 역사책? 지은이 인터뷰

1. 이 책은 우리가 잘 몰랐던 『한서』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자 분들이 보는 『한서』의 매력을 얘기해 주세요.

길진숙 : 『한서』는 전한 시대 즉 중국을 두번째로 통일한 한나라의 생사고락을 이야기한 역사책입니다. 『한서』를 집필한 후한 시대의 역사가 반고는 제도나 문화나 업적 중심으로 혹은 사건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지 않습니다. 반고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관계 속에 놓인 인간이요, 마음을 모으는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반고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한나라의 시공을 보여줍니다. 반고는 한나라의 생성과 성장과 쇠락이라는 특정 조건 위에서 200여 년의 시간 동안 명멸해간 인간들의 말과 행위에 주목합니다. 『한서』라는 이 길디긴 역사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인간들이 얽혀 빚어내는 사건과 사고(事故)와 마음을 다각도에서, 증층적으로 비춰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인물의 진면목은 여러 인물의 관계 속에서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씩 다층적으로 드러납니다. 『한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서』 의 페이지를 열면 열수록 인물과 사건의 면모 또한 새롭게 펼쳐집니다. 그리하여, 반고가 해부한 인물들을 읽으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시공을 뛰어넘어 인간이 넘어야 할 문턱은 무엇인지, 이 드넓은 천지와 교감하는 한 생명체로 돌아가 삶의 기본과 그 심연을 묻고 또 묻게 됩니다.

강보순 : 역사를 한 인간의 업적이라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는 영토를 넓히고 전쟁에서 승리한 정도에서 그칠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간다 해도 한 인간의 삶을 조망하는 범주를 넘어서진 않겠죠. 동아시아 최고의 정사(正史)라 일컬어지는 『한서』에도 분명 이러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서』에는 이와는 다른 범주의 역사들 또한 있는데요. 황제로부터 황금 70근을 퇴직금으로 받은 ‘소광’이 그 황금을 마을 사람들과 연회를 베풀며 다 써버린 이야기나, 그 어떤 덕도 쌓지 않은 ‘외척’들이 갑자기 득세하여 과한 복락을 누리게 될 때 어떤 마음이 야기되어 자기 삶을 위험에 빠트리게 되는지와 같은 이야기 등, 『한서』에는 우리가 역사에서 흔히 기대하는 업적 중심의 사실(史實)과는 달리 일상에 가까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일상이 역사라니?!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잘 다스리는 문제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요? 갑자기 생긴 로또 같은 퇴직금은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요.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쾌락을 누리는 정도? 자본주의적 소비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에겐 이것 이상의 상상력이 없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로또처럼 주어지는 권력은 또 어떻고요. 그런 권력이 자주 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자신과 주변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한서』의 저자 반고는 바로 이런 인간의 마음을 조명합니다. 역사를 한 인간의 업적이라 본다면, 그런 업적이란 한 인간을 드러내는 하나의 단면일 뿐, 어떤 면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면도 업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반고가 황금 70근을 받은 것이 아닌 그 황금을 모두에게 베풀어 자기를 지키고 가문을 지킨 것에 주목하여 기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반고에게 역사란 일상을 잘 다스리는 문제와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죠. 어떻게 일상을 다스리는 문제가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궁금하지 않나요?^^

박장금 : 팬데믹 이후, 우리는 기존의 가치나 기준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한나라 또한 진나라 멸망 이후 전혀 다른 방식의 통치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막막했던 바로 그때 그들은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Who am I?’ 그들은 절실한 질문 속에서 자연과 소통하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고, 자연의 원리를 따라 만물이 스스로 하도록 돕는 ‘무위 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하여 한나라는 진나라가 14년 만에 끝낸 운명을 400년으로 펼치는 가히 기적 같은 일을 해내고야 맙니다. 『한서』는 한나라가 지속가능할 수 있었던 운명의 용법이 담긴 책으로, 운명을 사랑하게 하는 매력적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장금)


2. 중국 고대 역사서 하면 보통 『사기』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사기』와 『한서』를 비교해 보았을 때 『한서』만이 갖는 특색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장금 : 일본학자 야스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기』가 ‘우주의 시선’이라면 『한서』는 ‘땅의 시선’으로 옮겨 왔다고 말합니다. 『사기』는 신화시대인 황제부터 한나라 무제까지 장장 3천 년의 시공간을, 그에 반해 『한서』는 전한 200년에 주목합니다. 먼저 『사기』가 다루는 3천 년의 통사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사마천은 하늘은 공평해서 착한 사람을 돕는다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가라고 질문합니다. 쉽게 말해 못된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고, 좋은 일을 해도 그닥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하늘이 공평한 게 맞냐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이런 의심이 협소한 시야에서 비롯된 것임을 펼쳐 보입니다. 자연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있듯, 자연의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은 황제, 제후, 장사꾼, 재주꾼 심지어 선인과 악인까지도 다양한 삶일 뿐입니다. 마치 돌, 나무, 물, 불을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금수저, 흙수저 구분에 골몰할 게 아니라, 각각의 운명을 발견하고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내는 게 중요해집니다. 이것이 『사기』가 주목한 우주의 시선이고, 그 시선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과 정면 돌파하는 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제 『한서』가 다루는 200년의 단대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 이후 안정된 통일국가입니다. 가장 문명화되었고 풍요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제 우주의 시선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즉,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만큼 인간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연결된 생명의 세계에서 한 사람의 이익이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드는 일입니다. 이 때 한서는 이익과 함께 명멸해가는 순간들을 연결해서 보여줍니다. 풍족한데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남보다 더 잘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번뇌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상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한정된 파이를 함께 나누는 지혜야말로 살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줍니다. 이것이 『한서』의 렌즈가 땅의 시선으로 내려온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기』가 천명을 알고 그것을 향해 묵묵히 살아간 자를 조명했다면 『한서』는 인간들의 욕망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해부함으로써 공존으로 나아가는 지도를 그려줍니다. 반고가 강조한 건 배움으로,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사기』가 운명을 사랑하게 만드는 텍스트라면 『한서』는 탐진치를 해체시켜 생명의 스토리를 쓰게 만드는 텍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3. 이 책은 한나라를 쥐락펴락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향연입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반전매력을 보여 주는 인물들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길진숙 : 인생 도처 반전이란 말을 실감케 해주는 인물은 단연코, 한나라의 세번째 황제인 문제(文帝) 유항입니다. 한고조의 넷째아들 유항은 황제가 될 것이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유항의 어머니 박희는 유방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고, 어쩌다 유방의 동정심으로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고조가 죽고 천하를 차지한 여태후는, 척부인을 비롯하여 유방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과 그 자식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운 좋게 박희와 유항은 유방의 사랑을 받지 않았던 ‘덕분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흉노족의 땅과 인접한 한나라 변방의 대땅을 다스리며 살았습니다. 사랑받지 않아 살 수 있었던 역설!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권을 장악했던 여태후가 죽고 다시 유씨들이 천하를 차지합니다. 혜제의 후사가 없었던 까닭에 유방의 살아남은 아들 두 명 중, 나이 많고 어진 유항이 황제로 추대됩니다. 두두둥! 최고 반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놀라운 일은, 한나라가 운이 좋은 것인지 어쩌다 황제에 오른 문제가 한나라의 상황에 딱 맞는, 무위 청정의 정치를 현실화했다는 것입니다. 긴 전쟁으로 헐벗고 지친 백성들을 그냥 두고 괴롭히지 않는 것, 무엇을 하려고 애써 도모하지 않는 것, 노자의 무위정치가 치국의 원리로 실행되다니, 경이롭지 않나요? 황제는 소박하게 근검절약하며 살 뿐,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법도 되도록 시행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삶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는 반전! 이토록 반전 매력이 넘치는 황제를 본 적이 있나요?

강보순 : 저는 무제의 신하 장건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장건은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군으로 유명한데요, 그가 무제의 명을 받아 실크로드를 개척하기까지 걸린 세월이 무려 ‘13년’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13년간 하나의 임무를 수행한 사나이, 장건! 뭔가 대단해보이는데요, 하지만 이 시간의 반전은 그 중 10년 남짓이 흉노의 포로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임무 수행 때문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 있던 세월이 10년이었던 것이죠. 심지어 장건은 그 기간 동안 흉노 여인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잘 살기까지 합니다. 대체 이런 삶 위에서 어떻게 실크로드를 개척했을까요? 미스터리하지 않나요? 바로 여기에 장건의 반전이 있습니다. 과연 장건은 무제의 명을 어떻게 완수했을까요? 궁금하신 분은 책을 참고해주세요.^^

박장금 : 한무제는 한나라를 가장 번성하게 만든 업적 제일의 황제입니다. 그는 탁월한 능력, 정치적 리더십, 영토 확장, 최고의 인재풀,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곁에는 사심 가득한 자들만이 남았고 그들의 아첨으로 인해 무제는 자신의 아들까지 잃고 맙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랄까, 무제 곁에는 신하는 많았지만 ‘친구’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보다 능력을 중시했던 자의 이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제의 삶을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이야말로 외로움과 위태로움을 불러들이는 화근이란 생각이 듭니다. 권력을 계속 휘둘렀다면 끝내 파멸을 맞았을 텐데 다행히 무제는 막판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반전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위태로웠던 무제를 구한 건 화려한 업적이나 능력 있는 신하가 아니라 ‘경청과 성찰의 힘’이었습니다.


4. 이 책은 한나라 역사를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로 구분한 점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구분해서 한나라 역사를 보여준 계기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계절 구분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을까요?

길진숙 :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어김없이 반복되듯, 태어나고 자라고 거두어지고 사라지는 과정 곧 생로병사의 과정이 모든 생명체의 주기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국가 또한 태어나면 죽는 것, 영원한 나라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수명이 다르듯 여러 나라들 또한 수명이 다를 뿐, 지구상에 세워진 모든 나라들은 시작되고 성장하고 거두어지고 사라지는 과정을 겪습니다. 『한서』의 저자 반고는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라고 보았습니다. 사계절의 변화가 반복되는 것이 우주의 역사인 것처럼, 한 국가의 역사 법칙 또한 생로병사의 변화인 것입니다.
이런 이치에 입각하여, 반고는 한나라가 “고조(유방)에서 시작하여 효혜제, 고후(여태후), 효문제, 효경제, 효무제, 효소제, 효선제, 효원제, 효성제를 거쳐 효애제 때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곤경에 처해 꺾이고 흉해지다 효평제 때 천하를 상실하기까지의 12대, 230년 동안”(반고 저, 진기환 역주, 「서전」 하, 『한서』 10, 명문당, 478-479쪽) 살았다고 요약합니다. 반고가 한나라의 역사적 흐름에서 중시한 것은 생장과 쇠멸의 역정입니다. 말하자면 반고는 한나라의 봄·여름·가을·겨울의 변곡점이 언제이며, 각 계절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적이고 계획적이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게 역사입니다. 자연의 역사에 정해진 방향은 없습니다. 환경과 조건과 생명체들이 조우하면서 그저 그렇게 매 순간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생성할 때가 되면 생성하고, 성장할 때가 되면 성장하고, 쇠락할 때가 되면 쇠락하며, 소멸할 때가 되면 소멸합니다. 이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무용지물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완전한 상태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나라 때 사람들은 요순시대가 가장 완전하고 좋은 때라 여겼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완전하다. 역사는 뒤로 갈수록 타락한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의 시대가 모든 시대의 완성이거나 혹은 거의 완성에 가까운 때라 여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오로지 지금 이 시대의 완성을 위해 존재하는, 불완전하고 미숙한 상태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반고에게는 완성의 때와 미완성의 때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은 머무르지 않고 흘러 서로 다른 상태를 빚어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흐름에 몸과 마음을 실을 뿐입니다. 봄에는 살려야 하고, 여름에는 성장하게 하며, 가을에는 정리하고 변화시켜야 하며, 겨울에는 마무리하고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흐름을 차례로 밟아 나가야지, 때를 건너뛰거나 때에 맞지 않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매 국면을 직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반고는, 때는 자연스럽게 오며, 오는 때를 막을 수 없으니 한나라의 사람들이 그때를 어떻게 맞이하고 행위했는지를 따라가면서 보여줄 뿐입니다. 이 때문에 『한서』를 읽을 때마다, 때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나라의 봄·여름·가을·겨울에 일어난 일을 관찰해서 얻는 지혜입니다.


5.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길진숙 : 한나라는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장하고 소멸했으며, 한나라의 역사는 운명임을 보여주는 역사가 반고! 그는 성장과 발전에 대한 환상이나 업적에 대한 망상이 없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변화와 운명에 주목하는 것은 결과나 업적이 아니라 과정과 행위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반, 그 자리 그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반고가 강조한바, 하늘을 따르고 사람에 통하는, 응천순민(應天順民)입니다.
『한서』를 읽으면 공적이 아니라 공덕을 쌓아가는 과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는 결과만 보고 황홀해합니다. 사실 어떤 결과든 무수한 계기들이 축적된 뒤에 온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서』는 삶을 위한 책이요, 마음을 닦는 데 필요한 책입니다. 반고는 한나라가 겪어낸 현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온갖 경험과 인간 군상들을 통해, 기억상실에 걸린 우리들을 일깨웁니다. 어느 때고 상관없이 빨리 성과를 내고, 언제 어디서나 인정받기를 원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역사는 그렇게 흘러온 적이 없음을 상기시켜줍니다. 미몽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나라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우리 또한 차이 나게 반복하고 있음을 환기하기! 이것이 반고가 한나라 역사를 후대에 전하고자 한 이유일 것입니다.

강보순 : 처음 『한서』를 읽게 되었을 때의 카오스가 떠오르네요. 한나라가 어느 시대인지도 모르는 것은 기본이요, 인물과 사건은 또 어찌나 많은지. 과연 『한서』 열권, 장장 5500페이지 달하는 분량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올라왔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서』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누구든 이런 막막함과 마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한서』에는 말이지, 어쩌고저쩌고” 하며 쉼 없이 『한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으니까요. 인간 군상의 끝없는 욕망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온갖 기상천외한 음모와 술수, 게다가 그런 행동들이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가문을 지켜내는 무수히 다른 샛길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한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누구든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힘! 아마도 이런 점이 지난 2천년 동안 사랑받은 『한서』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힘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긴 어려웠을 테니까요. 모쪼록 이 책이 저희가 느꼈던 『한서』의 감동이 전달되길, 나아가 『한서』라는 거대한 여정을 걷게 될 독자분들의 공부 길에 자그마한 도움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박장금 : 바야흐로 전지구가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시대입니다. 우리 또한 시대에 걸맞게 변신해야 하지만 근대 교육을 받은 탓에 여전히 개체에 묶여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유는 디지털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즐거움에 취해 그 이상의 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의 핵심은 연결입니다만, 지금까지 우리는 분리를 통한 소유를 중시했습니다. 이제 연결과 소유의 대격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명적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고, 많은 사람들이 중독뿐 아니라 정신과 약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혀 다른 시선이 필요합니다. 놀랍게도 『한서』에는 디지털이 전 지구를 연결하듯, 연결된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습니다. 하여 『한서』는 자연의 원리가 적용된 자들의 삶이 생생하게 담긴 ‘임상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한서』를 통해 내 안의 자연과 만나게 되시길! 그리고 ‘디지털 신체’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시길!

목차

머리말: 『한서』라는 역사책이 있었나니!

프롤로그: 『한서』가 들려주는 한나라의 사계
한나라의 봄·여름·가을·겨울 | 역사는 운명이다! | 삶을 위한 역사, 마음을 닦는 역사책


1부 한나라의 봄: 고조 유방부터 오초칠국의 난까지

1장 한나라 탄생의 활기와 열망
유방, 때를 만나다! | 유방을 선택한 인재들: 소하, 조참, 장량 | 천하 인재들의 열망, 한나라의 안착

2장 혜제 유영의 재발견
내쳐지는 아들, 유영 | 태자 모친의 조건, 태후의 품격 | 감독 여후, 시나리오 장량, 주연 상산사호 | 혜제의 참을 수 없는 고통 | 무위(無爲)의 군주, 혜제 | 혜제가 봄의 기운을 쓰는 방식

3장 여태후의 재발견, 잔인하게 너그럽게!
정치적 야망을 가진 여태후 | 유씨의 싹을 제거하라 | 고후의 죽음, 여씨 일족의 몰락 | 권력은 잔인하게! 정치는 너그럽게!

4장 한나라의 봄, 시련을 겪으며 온다
공신들의 봄, 살기 위해 기다리고 구부려라 | 개인과 가족을 넘는 ‘생명 비전’을 향한 활동 | 변치 않는 한나라 비전 | 봄은 시련을 겪으면서 온다

5장 한나라를 감싸는 훈훈한 ‘양생’의 바람-문제 유항
유방의 넷째아들 유항, 변방의 제후에서 황제로! | 양생 정치의 끝판왕 ‘문제’를 기억하라!

6장 안정 속의 위기, 제후들을 다스려라-경제 유계
문경지치, 아버지의 원칙을 계승한 경제 | 동성의 제후를 경계하라!

7장 오초칠국의 난, ‘게임’이 불러온 ‘대재앙’
도화선, 게임과 원한 감정 | 조조가 건드린 뇌관, 건드리면 폭발한다! | 조조에 대한 엇갈린 시선 - 사마천 VS 반고


2부 한나라의 여름: 한무제

1장 무제 유철은 어떻게 절대군주가 되었나
해를 품은 유철, 황제가 되다! | 리더십은 시대를 타고 | 무제의 3가지 문제 | 유학이 정착할 수 없는 형세 | 제국을 다스리는 수성의 정치학, 유학 | 동중서의 유학, 무엇이 다른가

2장 한무제, 흉노를 몰아내고 세계제국을 건설하다!
흉노의 무엇이 두려운가? | 유목군대와 싸운다는 것 | 유목군대보다 더 유목스런 무제의 장수들 | 실크로드를 장악한 반전의 사내, 장건 | 무제의 후회! 「윤대죄기조」를 반포하다

3장 한무제, 제국은 어떻게 여름을 맞이했는가
인재 만발, 운빨 최고의 한나라 | 한무제, 신하와 제후들을 장악하다 | 황로학의 힘, 도덕적 자기 수양

4장 혹리를 만드는 사회
성과주의가 만든 혹리 | 법대로! 가혹하게! | 가혹함이 지나치면 적을 만든다 | 성과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자, 예관

5장 왕자들의 ‘버닝썬’, 그들은 왜-경제 후손들의 이야기
버닝썬, 21세기 신종 아귀들 | 한나라의 왕자들, 환락을 향한 질주 | 살인마 광천왕과 그 왕후, 소유욕이 빚어낸 대참사 | 악마는 풍요와 안정 속에 있다

6장 일 없는 왕자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하인이로소이다! | 무엇이 왕자다움인가? | 나는 수행자로소이다!

7장 무제, 한나라의 화려한 여름은 간다
원하는 것은 다 가졌지만 불안한 무제 | 무고의 화와 태자의 죽음, 강충와 무제의 합작품


3부 한나라의 가을: 소제부터 선제까지

1장 말년에 뉘우친 무제, 가을의 문을 열다
한무제의 다른 듯 비슷한 역사적 평가 |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은사의 힘 | 외로운 무제, 시골 노인네를 승상으로! | 말년에 변한 정치, 가을로 가는 문을 열다

2장 가을녘의 한제국을 지키는 법, 오직 믿음뿐-소제 유불릉
황혼 무렵, 무제의 결단 | 어린 황제의 믿음, 흔들리지 않으리! | 소제와 곽광의 콜라보, 나라를 살리다!

3장 기원전 81년의 시국대토론회, ‘소금·철·술’ 전매 논쟁
수구세력과 신진세력의 대격돌 | 부국강병이 살길? | 문제는 이익이 아니야!

4장 창읍왕 유하, 한나라 최단기 황제의 탄생과 몰락
느닷없이 오른 황제 | 환락의 파티, 27일간의 천하 | 곽광과 신하들의 민첩한 폐위작전 | 천운을 날린 유하

5장 선제 유병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황제에 오르다
병길, 유병이의 목숨을 살리다 | 부모 역할을 자처한 장하 | 장안세, 억누르고 반대하여 유병이를 살리다 | 인연과 더불어 만들어진 천운 | 힘이 없는 군주가 살아남는 법 | 조용히 자기 목소리를 내다 | 곽씨 가문의 만행, 힘의 중심이 선제에게로! | 선제, 드디어 칼을 뽑다 | 공부, 나아가고 물러가고 말하고 침묵하는 힘

6장 리더의 요건, 제가는 필수!
한눈팔지 않는다 | 위태로움의 싹을 자르다 |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7장 한나라의 가을, 공정한 신상필벌이 필요한 시대-선제
공정한 법의 핵심, 선량한 2천 석이 필요해 | 노온서, 옥리 개혁의 필요성을 외친 자 | 황패, 공감을 통해 법을 적용하는 자 | 우정국,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판결의 대가 | 선제의 정치 노하우, ‘참된 인재’가 먼저


4부 한나라의 겨울: 원제부터 왕망의 등장까지

1장 한나라의 쇠락,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원제 유석
아버지 선제의 탄식! | 반성하는 황제, 그럼에도 연속되는 재해? | 의존적이고 나태한 황제, 환관에게 빠지다

2장 도긴개긴, 오십보백보들의 세상
황제 눈에 들면, 금시발복! | 도긴개긴들의 경합, 억울하면 출세해 | 승리하면 장땡?

3장 ‘환관’이 가니 ‘외척’이 오네-성제 유오
오! 비겁한 정의 : 끈 떨어진 권력 탄핵 | 외척 왕씨 집안의 등장 | 황제 위에 외삼촌, 왕봉의 국정농단

4장 성제 유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군주
왕씨 천하, 세습되는 최고권력 | 왕씨 너머 인재 기용, 그 밥에 그 나물 | 돌직구 신하가 살아 있다, 그럼에도! | 조비연, 성제를 유혹하다! | 허황후와 반첩여, 현숙한 부인들의 몰락 | 조비연을 황후로 만든 순우장 | 조소의, 성제의 후사를 끊어내다

5장 몰락의 시대, 신하들이 사는 법
정의를 외치고 비리를 저지른, 승상 적방진 | 두흠, 외척 왕봉의 조련사 | 책까지 써가며 끝까지 극간한, 유향 | 몰락을 받아들이고 양생을 택한, 매복

6장 애제, 외척의 늪을 피하려다 꽃미남에게 빠지다
점점 깊어만 가는 외척의 늪 | 지독한 사랑에 빠진 동성애 황제 | 국가를 사지마비 상태로 만들다

7장 왕망, 윤달의 운명을 타고난 자
‘애제와 동현’이 가고 ‘왕망’이 오다 | 태후의 마음을 잡아라 | 은밀하게 교묘하게 | 해를 가린 달의 등장 | 황제가 되기 위한 최후의 발악 | 윤달의 운명을 타고난 자

부록1. 『한서』와 반씨가문
부록2. 『한서』, 우주의 눈에서 지상의 눈으로 ‘욕망을 해부하다’

본문중에서

한나라 역사를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 유방에서 혜제·여태후·문제·경제 때까지의 한나라는 시작하고 살리는 봄의 시간을 보낸다. 무제 때의 한나라는 봄에 만들어 놓은, 안정된 기운을 열정적으로 발산하고 팽창시키면서 화려하게 성장하는 여름의 시간이다. 확대와 성장이 극에 달하다 보니, 무제 말년 동안은 부실해지고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해진다. 이 뒤를 이은 소제와 선제 때의 한나라는 버릴 것은 버리고 내실을 다지는 가을의 시간을 겪는다. 기존의 성과를 정리하고 변화하려 애쓰던 시절이다. 한나라의 말년, 원제·성제·애제·평제 때는 『주역』 택풍대과(澤風大過)괘의 기둥이 흔들리듯 병이 깊게 들어 멸망하는 겨울의 시간에 해당한다.(「프롤로그 『한서』가 들려주는 한나라의 사계」, 21쪽)

반고는 역사로써 우리 몸에 새긴다. 성장 뒤엔 반드시 쇠락이 있으며, 소멸 뒤에 반드시 새로운 탄생이 이어진다는 그 어김없는 사실을. 그러니 성장한다고 들뜰 것도 없고 쇠락한다고 온 세상이 무너지듯 절망할 것도 없다. 때에 맞게 처신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삶임을 반고는 이야기한다.(「프롤로그 『한서』가 들려주는 한나라의 사계」, 32쪽)

혜제와 고후는 달랐다. 팔짱을 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백성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다. 덕분에 백성은 휴식을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 한나라의 봄은 오고 있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잔인하게! 그리고 기다리고 구부리면서! 이렇게 온 초봄은 드디어 늦봄에게 그 바통을 넘겨주려고 한다. 태평성대로 이름난 ‘문경지치’(文景之治)라는 만춘은 그냥 온 게 아니다. 초봄의 꽃샘추위를 혹독하게 겪으면서 왔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1부 4장 한나라의 봄, 시련을 겪으며 온다」, 106쪽)

문제와 경제의 시대, 천하는 안락했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안락과 풍요 뒤에 늘 위태로움이 뒤따른다. 개인도 그렇지만 한 나라의 역사도 그런 것 같다. 아무 일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정말 어렵다. 모든 게 편안하면 몸이 근질거려 기꺼이 일을 만들고 위태로운 상태로 가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가?
한나라도 그랬다. 전쟁의 시기 항우라는 공동의 적을 합심해서 물리쳤으나 정작 통일이 되자 초나라의 회음후 한신韓信, 회남의 경포?布, 양의 팽월彭越, 한왕韓王 신信, 조나라의 장오張敖, 연나라의 노관盧?, 대나라의 진희陳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건국 후 10여 년에 반란이 9번이나 있었다. 그후 여씨를 물리치고 이성 제후들이 일으킬 분란의 씨앗이 완전히 제거되어 천하가 안정되자, 이제는 종실의 제후들이 들썩였다. 그래서 문제 때의 정치인이자 문사였던 가의賈誼는 한나라 초기의 역사에 의거하여 하나의 명제를 만들어 냈다. “이성 제후는 위험하고 동성 제후는 틀림없이 분란을 일으킨다.”(「1부 6장 안정 속의 위기, 제후들을 다스려라- 경제 유계」, 127~128쪽)

무제는 죽기 2년 전이 되어서야 군사들의 죽음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만의 군사들이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무제가 그제야 비로소 그들의 죽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무제는 「윤대죄기조」를 통해 자신의 대외정벌이 실패했음을 천명한다. 그리고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남은 시간 동안 ‘백성을 휴식케 하며 백성을 부유하게 양생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백성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사방만리의 영토보다 전쟁 없는 하루가 백성에겐 더 절실했던 것이다.
반고는 사마천이 주목하지 않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했다. 황제의 자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쉽지 않은 위치다. 게다가 나이 든 황제라면 더더욱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내 고집을 부려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망국으로 치달은 사례가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노년의 무제는 달랐다. 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해 왔던 45년간의 정치행로를 바꾼 것이다. 무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끝끝내 변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끝내 변할 수 있었기에 위대함으로 남은 것이다.(「2부 2장 한무제, 흉노를 몰아내고 세계제국을 건설하다!」, 187쪽)

반고가 주목한 병길의 위대함,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생불념은’(一生不念恩)에 있었다. 우리는 흔히 조금의 선행도 미담으로 회자되길 원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병길은 큰 은혜를 베풀었으면서도 일생 동안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울고 있는 황증손을 보고 연민을 느껴 도와주었을 뿐, 처음부터 그 어떤 계산과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심 없는 용기와 생색 없는 마음. 병길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유병이를 살릴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마음에 있었다.(「3부 5장 선제 유병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황제에 오르다」, 289쪽)

반고에게 글쓰기란 누군가의 인정을 얻기 위해 써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육가나 양웅처럼 글쓰기로 인정받아 명예를 누린 문사도 있었지만, 평생 글을 썼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공자와 같은 이도 있었다. 해서, 칭찬에 기뻐할 것도, 비난에 뜻을 굽힐 필요도 없었다. 반고가 보기에 문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명예·칭찬이 아니라 성현의 뜻을 하늘과 땅에 가득 채우려는 마음에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인의 뜻을 전하는 일이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일 아닌가. 세상에서 유용하다고 칭송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 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의 빛이 되는 것! 반고에겐 그것이 글쓰기였고, 자신이 황제에게 올리는 문장 역시 그런 차원의 글쓰기였다. 문장에 대한 이런 자부심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20년 동안 한나라의 역사를 쓰는 작업에 매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고에겐 ‘역사 쓰기’ 그 자체가 역사적인 과업이었던 것이다.(「부록1 『한서』와 반씨가문」, 459쪽)

『한서』는 전한 시대의 욕망을 해부하면서 후한 시대를 열고 있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왜 『한서』를 읽으면서 열광했는지. 『한서』는 사건이라는 장 속에서 자연과 우주가 펼쳐내는 에너지의 장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내게 우주적 렌즈를 제공하여 뭉친 자의식을 녹여 흘러가게 하는 성찰의 과정이기도 했다. 단언컨대 전한 후에 이어진 후한 200년 또한 『한서』의 힘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한서』는 전한의 무거운 욕망을 해체하는 우주적 바다 역할을 했고, 거기서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력으로 그 다음의 장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부록2 『한서』, 우주의 눈에서 지상의 눈으로‘ 욕망을 해부하다」, 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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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숙, 박장금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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