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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 오래된 집 : 근대건축에 깃든 우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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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잘생긴 집 앞에 서면 이 집에 누가 살까, 이 집을 누가 지었을까가 궁금해진다. 이유 없이 지어지는 집은 없고 집 안의 모든 요소는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은 사람을 닮는다.

오래된 집의 안부를 묻는다

길을 걷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오래된 집 한 채를 만나면 누가 지었을지, 누가 살았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집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를 위해 집은 그제[야 “흠흠, 우리 주인은 말이지….” 하며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작가는 책에서 “나는 낯모르는 이가 살아온 집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들이 선택했던 삶의 항로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듣고 싶었다. 그 이야기가 우리 시대의 《나목》이 되고 《그 남자네 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집을 보고 난 후, 우리 모두의 집은 이 시대를 채우는 귀중한 유산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길모퉁이 오래된 집》은 이처럼 오랜 세월을 견뎌온 전국 31곳의 근대건축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 작가 최예선의 인문 에세이다. 오래 전 건축가 남편과 함께 떠났던 프랑스 유학시절 백 년 넘는 건물에서 별 탈 없이 살아본 뒤 오래된 집이 불편하고 쓸모없다는 보편적 생각에 의문을 가졌던 작가는 이후 우리의 근대건축은 어떠했는지 직접 찾아가서 취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고 근대라는 특별한 시기에 세워진 옛 건물들에서 그 이면의 이야기를 찾아내 총 320페이지 분량에 170여 장의 사진과 함께 살뜰히 담아냈다.

출판사 서평

전국 31개 근대건축에 깃든 ‘사람의 이야기’
《길모퉁이 오래된 집》은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서울 성북동 최순우 옛집과 소설가 박종화의 평창동 고택, 애국지사 김구 선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경교장, 일제강점기 ‘조선의 건축왕’이라 불리던 정세권에 의해 개발된 가회동 ㆍ 익선동의 한옥마을 같은 서울의 근대건축물이 등장시켜 즐거운 인문 답사의 첫걸음을 인도한다. 작가에 의하면 우리가 아는 한옥의 이미지는 대부분 전통적인 조선한옥이 아니라 192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형태의 개량한옥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몰려드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서울에서 더 빨리, 더 많은 집을 필요로 하던 시절로 돌아가 집 구조나 건축양식의 변화가 달라진 생활방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명한다.
“이때 한옥은 흥미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격자형 필지에 딱 맞게 지으려면 안채를 ㄱ자 형으로 배치하고 사랑채를 없애는 대신 문간채를 도로에 면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네모난 마당과 함께 세를 줄 분리된 공간이 생긴다(중략). 방이 많을수록 분양에 도움이 되었다. 부엌 위는 낮은 다락과 찬방 등을 두어 수납에 신경 썼다. 집은 남향을 선호했고, 유리문을 달아 추운 겨울을 견뎠다. 전통의 주거양식이 그대로 담겨있으면서도 변화된 도시의 삶에 어울리게 세심하게 조율된 이런 집을 ‘도시형 한옥’이라고 부른다.”

2부에서는 평생을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던 두 오스트리아 간호사 마가렛과 마리안느가 머물던 집, 사위인 김지하 시인이 투옥된 후 시댁인 원주로 내려간 딸과 손주를 가까이서 돌보기 위해 이사까지 감행했던 소설가 박경리의 집, 화가의 소탈한 성품을 빼닮은 용인 장욱진 가옥, 부동산 개발논리에 밀려 안타깝게 허물어진 음악가 채동선 가옥 등 집에 깃든 시대의 희로애락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3부에서는 누군가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치유의 공간이 소환된다. 학병에 끌려간 윤동주의 시 원고를 몰래 숨겨두었던 광양 정병욱 가옥, 염부들의 땀과 눈물의 흔적인 인천 소래포구 소금창고, 눈 밝은 독지가의 애정으로 되살아난 인천 대화조 사무소, 식민지 청년 의사의 애환이 서린 군산 이영춘 가옥, 3대에 이어 다른 이의 손길로 재건될 수 있었던 진천 덕산양조장 등 저마다의 사연과 의미를 좇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4부에서는 오래도록 마음이 머물고 싶은 집에 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일제강점기 고등어 떼를 찾아왔다가 구룡포에 정착해 살았던 오카야마현과 가가와현의 어민들,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무덤 위에 지은 판잣집으로 시작됐던 부산 아미동과 감천동의 문화마을, 철도원들의 애환을 기억하는 대전 소제동의 철도관사촌, 건축가 김중업이 살았던 서울 장위동 건축문화의 집 등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진한 여운과 감동을 남긴다.

사람은 집을 닮고, 집은 사람을 닮는다
낡음의 흔적을 가릴 순 없지만 오래된 집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가만히 눈을 맞추고 두 번 세 번 들여다보면 집들은 비로소 생경하고 기이한 것들을 꺼내 보인다. 누군가에겐 날카롭고 아픈 기억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겐 오랫동안 방치해둔 곪은 상처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 곁의 오래된 근대건축물은 역사의 비극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으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사람과 함께 늙어간다.
“그 사연이 좋건 나쁘건 이상하건, 삶의 모양이 각인된 집은 그 자체로 역사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마음에 깊이 남은 집들을 《길모퉁이 오래된 집》이라는 제목으로 모아보았습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가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품고 서있는 집들이지만 그 가치를 명쾌하게 말하지 못했던 근대 시기의 건축물들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살아온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이 집들은 변화와 위기에 있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서 가꾸어온 집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집들, 고치고 복원했지만 그전만 같지 않은 집들…. 그 오래된 집들의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 - (작가 서문 중에서)

사람이 집을 닮듯, 집도 사람을 닮는다. 집을 둘러보면 그 집 주인들이 취향과 가치관, 시대의 변화와 한 생애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의 부침 속에 존재마저 잊히고 있던 길모퉁이 오래된 집들은 이처럼 애써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기억에 남은 옛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봉인된 시간을 가만히 어루만지면 비로소 저 멀리 ‘길모퉁이 오래된 집’이 눈에 보인다.

목차

1. 시간을 품은 서울 옛집 구경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_ 최순우 옛집/ 실험실의 한옥_ 가회동 ㆍ 익선동의 한옥마을/ 비어 있는 뜰, 홀로 남은 사람_ 백인제 가옥/ 시대를 놓쳐버린, 시대가 잊어버린_ 장면 가옥/ 되돌아온 역사_ 경교장/
세월을 낚다가, 사람을 낚다가_ 박종화 가옥/ 영단주택 이야기_ 문래동 영단주택/ 최소한의 주거_ 이화동 국민주택

2.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어요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_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집/ 생의 이면_ 원주 박경리 가옥/
집, 그리움의 다른 말_ 강화도 고대섭 가옥/ 막 그린 그림, 막 지은 집_ 용인 장욱진 가옥/ 이름은 기억을 남긴다_ 순천 선교사 주택/ 시절인연_ 서울 보안여관/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어요_ 서울 채동선 가옥/ 유년의 숨결을 기억하나요_ 영천 임고초등학교

3. 치유하는 건축, 사려 깊은 유산
윤동주의 시를 숨기다_ 광양 정병욱 가옥/ 시대의 그늘_ 부산 정란각/ 소금창고를 보러 가다_ 인천 소래염전 소금창고/ ‘카페 팟알’의 이유 있는 복원_ 인천 대화조 사무소/ 은목서와 벼 이삭_ 군산 이영춘 가옥/ 시간과 세상을 연결하는 문_ 거창 자생의원/ 할아버지의 맛_ 진천 덕산양조장/ 물의 역설_ 익산 익옥수리조합

4. 떠도는 집에 마음이 머물다
길 잃은, 잠들어 있는, 꿈꾸는_ 서울 벨기에 영사관/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_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_ 인천 삼릉사택/ 집, 비탈에 서다_ 부산 아미동 ㆍ 감천동 문화마을/ 우연히 벌교에서_ 벌교 보성여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기를_ 대전 철도관사촌/ 일상을 복원하기 위하여_ 서울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

본문중에서

‘서울 옛집’ 하면 최순우 옛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옥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덤덤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한옥은 오래 보아야 좋다. 흰빛은 그냥 희지 않고 따스한 빛이 스며있다는 것을, 검은 빛은 그냥 검지 않고 본연의 단단함이 바탕이 된다는 걸 오래 보아야 알게 된다.
한옥은 첫눈에 아름답기가 매우 어렵다. 덤덤하고 슴슴한 구조에 눈에 띄는 디테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뻗어 나온 처마선에 걸린 햇빛이나 나지막한 툇마루에 앉았을 때 보이는 마당 풍경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며 ‘참 좋다!’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해도,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 생각에 한옥의 아름다움은 집이 아니라 공간에 있고, 손맛에 있다. 뒤란으로 가는 좁은 길의 단정함이라던가, 처마와 기둥의 선이 매끈하게 잘 빠지다가도 살짝 틀어진 부분이라던가, 반질반질 윤나는 마루에 비친 맑은 광이거나 툇마루에 햇살이 내리쬘 때 느껴지는 따스함 같은 것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이라고 할까? 최순우 옛집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 p.13~14,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 _ 최순우 옛집’ 중에서

가회동은 경치가 좋고 학교가 가까이에 많아서 지방의 유지들이 고향 외의 머물 곳을 찾거나 자제들을 유학시킬 목적으
로 집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적당히 큰 규모의 잘 지어진 한옥이 들어왔다. 집은 모양새를 달리해서 지어졌지만 대부분이 ㄱ자, ㄷ자 형이다. 최승희무용단의 수석 무용수였던 김민자와 김백봉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
좋은 입지에 가성비가 좋은 집을 빨리 지어 대량 공급했던 건양사의 업적으로 인해 정세권은 ‘조선의 건축왕’으로 불렸다. 건양사에서 공급한 주택촌은 가회동, 익선동, 체부동, 삼청동, 계동, 재동, 봉익동, 창신동 등에 퍼져있었는데, 지금도 한옥들이 꽤 남아있는 곳들이다. 정세권의 활동은 문화주택단지의 범위를 넓혀가던 일본주택개발회사들에 제동을 걸고 한국인들의 생활 공간을 지켜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요즘 핫한 동네로 불리는 익선동 166번지 한옥촌도 공교롭게 정세권의 작품이다. 2,570평에 달하는 이곳은 철종의 생가이자 그의 형제들과 그 후손들이 살던 누동궁이 있던 자리다. 정세권이 이 지역의 주택 개발을 시작한 건 1930년대 초로, 익선동은 가회동보다 앞서 실행된 실험적인 계획주거지라 할 수 있다
- p.27~28, ‘실험실의 한옥 _ 가회동 ㆍ 익선동의 한옥마을’ 중에서

조선주택영단을 이어받은 대한주택영단은 적극적으로 주택사업을 시행했다. 불광동, 우이동, 상도동, 도림동, 안암동, 보문동, 정릉동 등지에 찍어낸 듯 똑같은 양옥집들이 들어섰다. 집들은 9평의 기준 평면으로 지어졌다. 당시 유엔 세계주택통계를 보면 가구당 평균 규모가 6평이었는데, 여기에 50%를 더해 9평으로 결정되었다.
다급하게 지어진 집이었기에 집의 품질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당을 가진 양옥집은 서민들의 희망이었다.
누구나 ‘9평의 집’을 꿈꿨다.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 운크라주택, 국민주택, 시험주택, 시범주택, 외인주택, 인수주택 등등 당시 주택 사업은 이름도 다양했다. 해외 긴급지원자금이 투입되면 재건주택, 적산불하적립금이 투입되면 국민주택, 건축자재만 영단에서 배정하고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들이 부담하면 희망주택이었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과 함께 한양도성이 지나는 낙산의 서쪽 사면, 통칭 이화동 9번지에 그 시대의 희망을 보여주는 집들이 있다. 높은 옹벽을 세우고 그 위에 작은 이층집을 연결해서 앉힌 형태로 닮은 꼴 집이 빼곡하게 경사지를 채웠다. 작고 좁은 집이지만 경사지의 장점도 분명 있다. 앞집 지붕 너머로 환한 전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건축사에서 이곳은 ‘이화동 국민주택단지’라 불린다.
- p.84, ‘최소한의 주거 _ 이화동 국민주택’ 중에서

장욱진이 살았던 집을 찾아가본 뒤에야 화가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집과 그림이 똑같구나, 이런 감상평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용인 마북동의 조용한 동네에 자리잡은 옛집을 그저 전형적인 경기 지역 가옥이라고 하면 반만 본 셈이다. 그림과 집, 화가 이 셋을 함께 탐구해야 이 집의 이유가, 저 그림의 이유가 분명해진다.(…중략…)
장욱진은 집을 자주 그렸다. 온 가족이 복닥복닥 들어앉은 장욱진은 집을 자주 그렸다. 온 가족이 복닥복닥 들어앉은 집도 그렸고, 누정처럼 마루와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도 그렸다. 초가삼간 작은 집인데도 땅과 하늘을 모두 담은 듯 광활하다. 그 집엔 새가 앉았다 날아가고, 황소와 수탉과 호랑이가 들락날락한다. 부처도 아이들처럼 슬며시 미소 짓고 있다. 화문석 한 장으로, 방 한 칸으로 세상과 맞먹는 그림도 있다. 그림 속은 모두 평등하다. 나무 한 그루가 긴 강물처럼 하염없이 깊어지고 도인의 이상향처럼 순수하고 맑다.
수많은 ‘집’ 그림은 화가가 살아온 여러 ‘집’에서 그려졌다. 장욱진은 특별한 화실을 여러 곳에 두었다. 남한강가 덕소에 화실을 짓고 혼자 생활하기도 했고 한때는 가족들이 사는 명륜동집 근처 한옥을 아틀리에로 꾸민 적도 있지만, 곧 가족을 떠나서 화실 생활을 고집했다. 예순을 넘긴 뒤에도 그는 수안보로 가서 농가를 고쳐 아틀리에를 꾸미고 그림을 그렸다. 장욱진의 집은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위한 집이었다.
- p.127~129, ‘막 그린 그림, 막 지은 집 _ 용인 장욱진 가옥’ 중에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그간 쓴 시들을 출판하려 했으나 스승인 이양하 선생은 엄혹한 시절에 한글시집을
냈다가 위험에 처할까 봐 만류했다. 후일을 기약하며 윤동주는 열아홉 편의 시를 골라 세 권의 원고집을 정서하여 선생과 후배에게 한 부씩 증정하고, 자신도 가졌다.
수상한 시절이 흐르는 동안 스승과 윤동주 자신의 원고집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육필 원고는 살아남았다. 〈서시〉, 〈별 헤는 밤〉이 모두 들어있었던 그 육필 원고는 1948년에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읊을 수 있는 건 팔 할이 후배 정병욱의 몫이다.
섬진강이 지나는 광양 망덕포구의 낡은 집은 혼자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1925년에 세워진 작은 민가로선 긴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바깥으로는 여닫이문이 달린 상점이 있고 뒤로는 살림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당시로선 넉넉하지 않을지언정 아침저녁 따뜻한 식사를 하며 알뜰살뜰 가족들이 커나갔을 집이었다. (…중략…) 이 집은 한 가족이 버텨낸 시대를 증언하는 집이기도하다. 남도와 부산을 오가며 장성한 청년 정병욱이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했을 때 부모는 기뻐했을까, 마음이 무거웠을까?
1944년에 졸업을 앞둔 그가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동주의 원고를 맡아달라고 내밀 때 부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병욱은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독립된 세상이 오면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아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원고를 집안의 중요한 물건들과 함께 항아리에 담아 가겟집 마루를 뜯어낸 그 아래 묻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원고부터 꺼내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원고는 무사하다고.
- p.175~176, ‘윤동주의 시를 숨기다_ 광양 정병욱 가옥’ 중에서

인천 개항장 골목길에 자리한 삼 층짜리 목조 가옥은 첫눈에도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집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흐트러지지 않게 매만지며 살아왔음이 분명했다. 페인트칠 외에는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외관으로 미루어 보건대 내부도 손을 많이 대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되었다.
이 집이 팔려 수복 과정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빨리 움직여준 것이 고마웠다. 나처럼 문화유산에 깊이 매료된 어느 개인이 사들였다 해서 반갑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왕이면 자산 가치를 높이는 장소가 되어 경제적 손실 없이 이 낡은 장소를 운영해주길 바랐다. 염원과 바람이 가득한 기대였다.
나중에 이 낡은 집의 새 주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전 주인은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여태 살아온 노인이었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오랫동안 가꾸고 매만지며 살아왔던 노인은 어정쩡한 개발업자에게는 이 집을 팔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집은 꼭 잘 보살펴서 남겨야겠다는 마음이었던 그는 노인을 거듭 만나 설득한 끝에 집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고치는 일만이 남은 상황. 현재의 모습을 남기면서 도 적절히 아름답게 손을 보려던 계획은 집의 역사를 파악하던 중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만다. 이 동네에 흔히 보이는 1920~30년대의 일본식 민가인 줄 알았던 집이 인천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근대건축물 중 하나라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 p.199~200, ‘카페 ’팟알’의 이유 있는 복원 _ 인천 대화조 사무소’ 중에서

‘물 따라 오가는 사람들의 역사’라면 구룡포를 빼놓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동해안을 대표하던 어항 구룡포는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정착한 곳이었다. 일본 바다에서 경쟁적인 남획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어부들이 한반도로 눈을 돌렸고 고등어가 풍어를 이루는 구룡포를 만난 것이다. 가가와현과 오카야마현에서 온 어민들은 기동 선박과 각종 기계 장비를 이끌고 한갓진 어촌에 들어왔다.
일본인들은 해안가를 정비해서 도시를 만들고 고등어 황금시대를 열었다. 구룡포 앞바다에는 배들이 가득 찼다. 선주가
어부들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조업했는데, 600여 척의 어선 중 500여 척이 일본인 소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다가 2003년 프랑스로 떠나 미술사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일분일초도 아깝지 않게 치열하고 뜨겁게 살아야 한다고 믿던 그녀가 프랑스에서 배운 것은 느림의 미학, 바로 인생에 대해 유쾌하게 관조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인생에서 함께하면 좋을 두 가지, 예술과 홍차를 얻었다. 여러 매체에 미술, 건축, 여행, 문화와 관련하여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작업실을 겸한 작은 홍차가게 ‘레나의 티룸’을 열어 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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