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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걸음 :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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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 리베카 솔닛의 청년기 걸작 『마음의 발걸음』은 솔닛만이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인 아일랜드 여행기다. 솔닛은 어머니 쪽의 아일랜드 혈통 덕에 아일랜드 국적을 얻게 되고, 새로 생긴 여권을 “조상의 나라로 눈앞에 나타난 낯선 남의 나라”에서 정체성과 기억, 풍경 같은 개념을 탐구해볼 기회로 삼는다. 이 탐색의 여정은 아일랜드를 두 발로 밟아가는 여행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학을 읽고 책을 써나가는 여행, 이렇게 두 차원의 여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우리는 ‘유럽 속의 제3세계’라는, 특이한 나라 아일랜드를 배경 삼아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강단철학에, 문학사의 정전들에 솔닛이 어떻게 도전하고 그 권위를 유려하게 무너뜨리는지 목격할 수 있다.
『마음의 발걸음』에 담긴 여행을 만들어준 것은 뿌리 뽑힌 땅 아일랜드에서 마주친 장소와 사람들, 곧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솔닛의 여행지는 영어를 공식어로 사용하고 총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백인이지만 ‘유럽 속의 제3세계’라 불리듯, 낯선 장소로나 탐구 대상으로나 고유한 성질과 복잡한 맥락을 지닌 나라다. 사람이 최대 수출품인 나라, 시인과 트래블러의 안식처, 영혼·천국·기도를 믿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 몇 가지 수식어만 나열해봐도 이 나라의 역설적인 흥미로움, 그리고 이 나라가 처한 어려움이 무엇일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청년기 솔닛의 날카롭고 감각적인 글쓰기를 완연히 느낄 수 있다. 때로 맨스플레인을 당하고, 젊은 여성으로서 폭력과 추행의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에도 솔닛은 온몸으로의 경험과 만남을 포기하지 않으며, 기록된/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대화의 능력을 키워간다. 지금처럼 먼 곳, 낯선 세계로 나아가기 어려워진 때, 그것이 우울과 혐오, 배척을 부추기고 있는 때에 집에서 여행하기를 위한 책이 되어줄 것이다.

출판사 서평

“삶은 여행이 될 때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우리를 낯선 풍경과 이야기, 다른 운명으로 이끄는 여행의 경이


이처럼 지적이고 매혹적인 여행기라니! 이건 아일랜드 여행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찾아 나선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아일랜드의 자연과 역사와 인물에 익숙해졌을 무렵, 리베카 솔닛은 여행이라는 것, 떠돈다는 것, 이주한다는 것의 의미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움직이는 한, 세상과의 대화는 계속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 김연수 / 소설가

솔닛의 글은 아일랜드에 대한 이야기이자 세계사, 영문학, 여행에 관한 최고의 문장이다. 읽기로서의 여행, 여행하기 위한 읽기의 정석이다. 이 시대, ‘집’에서 여행하고 싶다면 이 책 이상이 없다. 여러 번 읽고 필사할 책이 있다는 기쁨. 역시 솔닛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 정희진 / 여성학 연구자

리베카 솔닛의 청년기 걸작!
솔닛만의 감각과 사유로 쓰인 본격 여행기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작가이자 《유튼리더》가 꼽은 ‘당신의 세계를 바꿀 25인의 사상가’, 깊은 사유와 매혹적인 글쓰기로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리베카 솔닛의 청년기 걸작 『마음의 발걸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솔닛만이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인 아일랜드 여행기다. 솔닛은 어머니 쪽의 아일랜드 혈통 덕에 아일랜드 국적을 얻게 되고, 새로 생긴 여권을 “조상의 나라로 눈앞에 나타난 낯선 남의 나라”에서 정체성과 기억, 풍경 같은 개념을 탐구해볼 기회로 삼는다. 이 탐색의 여정은 아일랜드(특히 아일랜드 서해안 지역)를 두 발로 밟아가는 여행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학을 읽고 연구하며 책을 써나가는 여행, 이렇게 두 차원의 여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 헤맴, 모험을 품고 있는 여행은 항상 솔닛의 한 테마였지만, 이 책은 낯선 곳에서 다른 이야기와 다른 자아를 상상할 수 있는 뛰어난 여행자로서 그의 면모가 더 폭넓게 펼쳐지는, 한 나라에 관한 본격적 여행기다.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의 초기 주저이자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걷기의 인문학』의 전작으로, 내밀한 경험과 내면의 풍경을 포함한 수많은 재료들을 밀도 높게 엮어내며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솔닛의 인문학적 에세이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이후 솔닛을 세계 지성으로 자리매김해주는 작업들을 예비하는 지적 야심과 비전이 돋보이는 저작인 것이다. 독립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30년 가까이 지켜온 솔닛은 자신의 비주류성을 지적 자산으로 바꿔냈다. 『마음의 발걸음』은 청년 솔닛이 이러한 지적 자산을 어떻게 일구어냈는지 보여주는 더없이 적절한 사례다. 우리는 이 책에서 솔닛이 ‘유럽 속의 제3세계’라는, 아일랜드라는 특이한 나라를 배경 삼아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강단철학에, 문학사의 정전들에 어떻게 도전하고 그 권위를 유려하게 무너뜨리는지 목격한다.
한편 서구(Western) 중심 역사와 철학, 정치, 문학사에 관한 솔닛의 급진적이면서도 독특한 비판적 관점은 주로 미국 ‘서부(west)’라는 주제에 대한 고유한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부는 『걷기의 인문학』을 비롯한 이후의 주요 저작들에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테마다. 『마음의 발걸음』에서 솔닛은 자신에게 서부가 어떤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자연적, 상징적 장소인지 아일랜드, 또는 멕시코, 콩고, 페루 푸투마요, 또는 미국, 유럽과 마주 놓으며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로써 동부 중심의 미국사와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동시에 문제 제기한다. 이 책은 장소들(친숙한 장소와 낯선 장소) 간의 상호작용이 솔닛의 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우리에겐 어떤 가능성을 제공하는지 선명히 보여줄 것이다.

은유와 아이러니의 나라 아일랜드를 경유해 유럽을 넘어서기
이 책에 담긴 여행을 만들어준 것은 뿌리 뽑힌 땅 아일랜드에서 마주친 장소와 사람들, 곧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솔닛의 여행지는 영어를 공식어로 사용하고 총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백인이지만 ‘유럽 속의 제3세계’라 불리듯, 낯선 장소로나 탐구 대상으로나 고유한 성질과 복잡한 맥락을 지닌 나라다. 셀 수 없이 많은 침략과 약탈을 겪은 아일랜드를 두고 솔닛은 “침입은 아일랜드 역사의 주요 모티프가 되어왔고” “더블린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지금까지 침입자들의 도시였”으며, “더블린을 뺀 나머지 아일랜드에서는 아직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사람이 최대 수출품인 나라, 시인과 트래블러의 안식처, 영혼·천국·기도를 믿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 몇 가지 수식어만 나열해보아도 이 나라의 역설적인 흥미로움, 그리고 이 나라가 처한 어려움이 무엇일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아일랜드 역사와 문학, 자연의 장면들을 은유와 아이러니의 키워드로 서술한다. 5장 「걸인의 길」은 흑사병에 비견될 만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루는데, 이 역사적 사건은 밤늦도록 이어진 솔닛과 아일랜드 지인들의 대화 속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거기엔 식민지 아일랜드가 감자역병으로 대기근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본국에 작물을 보내야 해 대기근 내내 식량 수출국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한편 이 시기 장례식도 제대로 된 관도 없이 죽어나갔던 사람들 틈에서 다리를 잃고 살아남은 아이는 걸인이 되어 이런 질문들을 불러낸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구가 되고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구한 사람은 누구일까? 항상 같은 곳을 떠도는 떠돌이는 누구일까?” 이 걸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질문한다. “한 사람의 기억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는 150년 정도가 아닐까?”
그런가 하면 4장 「나비 수집가」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아일랜드의 퀴어 독립영웅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다. 솔닛은 아일랜드에서 케이스먼트의 흔적을 더블린 자연사박물관의 유리 상자 안에 박제돼 있는 나비에서 발견한다. 케이스먼트는 본래 영국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오지 탐험대로 아프리카 콩고를 찾았지만, 그 여행을 통해 원주민과 가까워지고, 원주민 편에서 열강이 저지른 폭력과 고문을 기록해 보고서를 남겼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콩고강 유역의 풍경과 페루 푸투마요 열대림의 풍경에서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키워갔다. 박물관의 나비는 케이스먼트가 푸투마요에서 벌어진 참상의 조사를 위해 찾은 밀림에서 수집한 것이었고, 솔닛은 이를 “연약한 기념비”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참상 속에 나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아가 그가 침묵당한 존재에 목소리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 덕분인 것 못지않게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덕분이 아니었을까?”라고 묻는다. 또한 10장 「총알 1파운드가 더 무거운가」에서는 자연과 풍경, 시를 다룬다. 영국 시인들이 아일랜드의 자연과 시골을 배경으로 많은 낭만주의의 목가시를 남긴 데 반해, 조너선 스위프트 등의 아일랜드 문학가들은 반(反)목가를 썼다. 그 이유에 대해 솔닛은 이렇게 반문한다. “아일랜드에 풍경시가 없는 것은 아일랜드의 풍경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잖은가?”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한 이런 이야기들은 아일랜드라는 풍경과 정치적 실체의 독특하고 전복적인 맥락을 드러내준다.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유럽, 백인, 제1세계, 원주민과 같은 개념, 그리고 이 개념들과 그것의 대립항인 비유럽, 비백인, 제3세계, 침입자·외부인의 구분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아일랜드가 겪은 대기근은 기존 유럽사에서 보이지 않던 것을 말해주며, 로저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이 담아내지 못한 사례다. 아일랜드 반목가는 문학사 정전에 대한 비판을 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제기한다. 이처럼 유럽이면서 유럽이 아닌 아일랜드를 통해 유럽 중심주의의 구분선을 흐릴 수 있었던 것은, 솔닛이 움직이는 사람(여행자)과 움직이지 않는 풍경(여행지)의 통상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풍경이 정체성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 개인 또는 집단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기억 못지않게 망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여행으로 탐구했던 덕분이다.

타인의 문화를 탐색하는 균형 감각
우울과 배척의 시대에 집에서 여행하기를 위한 책

이 책에서 우리는 청년기 솔닛의 날카롭고 감각적인 글쓰기를 완연히 느낄 수 있다. ‘프로패셔널 아이리시맨’에게 맨스플레인을 당하고, 젊은 여성으로서 종종 폭력과 추행의 위험에 노출되는 경험은 시니컬한 유머로, 때론 “묘한 신경질”로 곳곳에 흩어져 있어 읽기의 긴장감을 낳는다. 이는 동시에 독자에게 “솔닛의 육체적 현존”을 느끼게 하며, 내면과 외부, 몸의 자리와 상상의 자리, 정치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유럽 중심성과 같은 거대한 문제에 대한 비판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에피파니와도 같은 통찰의 순간이 수시로 교차하고, 그럴수록 솔닛의 목소리에는 더 깊은 울림이 실린다. 때때로 뒤따르는 위험에도 솔닛은 온몸으로의 경험, 실제적 마주함을 포기하지 않으며, 기록된/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대화의 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마음의 발걸음』의 솔닛은 타인의 문화에 다가가 그것을 탐색하고 관계 맺는 탁월하고 훌륭한 하나의 모델을 보여준다. 혈통을 상징하는 족보와 문장 기념품을 사러 아일랜드로 몰려드는 수많은 (아일랜드계) 관광객들과 관광객을 만나면 아일랜드계냐고 꼭 한번 물어봐주는 현지 주민들을 정형화하지도 미화하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그 예시일 수 있다. 좀 더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20세기 말 유행한 미국발 뉴에이지가 “정신으로부터 정치를 격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일랜드인 등 서로 다른 “문화들 사이의 중대한 차이를 외면”한다고 지적하는 경우이다. 지금처럼 먼 곳, 낯선 세계로 나아가기 어려워진 때, 그것이 우울과 혐오, 배척을 부추기고 있는 때에 집에서 여행하기를 위한 책이 되어줄 것이다.

추천사

이처럼 지적이고 매혹적인 여행기라니! 이건 아일랜드 여행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찾아 나선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대기근에도 살아남은 아이의 부러진 다리에서 한 사람의 기억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는 150년 전 정도라고 추측하거나, 고문과 절단과 고통의 몸과 사랑의 몸을 함께 기록한 한 남자의 삶을 뒤쫓으면서, 그가 수집한 나비를 떠올리며 이렇게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전율했다. “참상 속에 나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일랜드의 자연과 역사와 인물에 익숙해졌을 무렵, 리베카 솔닛은 여행이라는 것, 떠돈다는 것, 이주한다는 것의 의미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움직이는 한, 세상과의 대화는 계속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 김연수 / 소설가

나는 아일랜드는커녕 유럽도 가본 적이 없지만, 늘 지인들에게 버킷 리스트로 아일랜드 여행을 권한다. 이 책은 나의 주장을 증명한다. 솔닛의 글은 인구 350만 명에 연평균 관광객 300만 명인 아일랜드에 대한 이야기이자 세계사, 영문학, 여행에 관한 최고의 문장이다. 읽기로서의 여행, 여행하기 위한 읽기의 정석이다.
이 시대, ‘집’에서 여행하고 싶다면 이 책 이상이 없다. 여러 번 읽고 필사할 책이 있다는 기쁨. 역시 솔닛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 정희진 / 여성학 연구자

목차

초판 서문
재판 서문

1장 동굴
2장 침입의 서
3장 노아의 ABC
4장 나비 수집가
5장 걸인의 길
6장 길 위에 내려진 닻
7장 떠도는 암초들
8장 신앙고백
9장 깃털 1파운드가 더 무거울까
10장 총알 1파운드가 더 무거운가
11장 혈액 순환
12장 암초 수집
13장 새와 나무 사이의 전쟁
14장 기러기 사냥
15장 은총
16장 트래블러
17장 녹색의 방

감사의 말
역자 후기

본문중에서

여행은 마음의 발걸음이기도 해서, 다른 장소에 가면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이 여행에서 내 마음의 발걸음도 한번 뒤따라 가보고 싶었다. 내 주관적, 개인적 경험을 적어나갔지만 내 평범한 삶을 미화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의 땅을 걸어가는 것이 어떻게 마음의 구석진 곳들을 탐험하는 것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내 경험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이 책의 장르는 통상적 의미의 여행서가 아니라 여행을 계기로 구상되고 배열된 연작 에세이다. 이 책의 글 한 편 한 편이 다양한 모양의 구슬이라면 이 책의 계기가 된 여행은 그 글들을 한데 엮는 실이었다.
(/ p.7)

하나의 장소는 한편으로는 고정되어 있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힘들이 모이는 곳이다. 예컨대 아일랜드 국립자연사박물관에서 열대의 나비 앞에 있다 보면, 어느새 그 나비가 날던 페루의 푸투마요 정글에 들어서게 되고 그 나비를 잡은 퀴어 독립영웅 로저 케이스먼트와 마주치게 된다. 나를 어딘가로 이끄는 것들이 뭐든지 간에, 그곳에 가면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또 다른 곳들 (다른 장소, 다른 시간)로 이끈다.
(/ p.11)

해결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solution의 어원은 묶인 것을 풀거나 뭉친 것을 녹인다는 뜻이다. 고체화가 아니라 액체화다. 어떤 장소에서 원주민이 된다는 것이 먼저 그 장소에 들어와 있었던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이듯, 여행의 완성은 과거에 맺었던 관계들을 끊어버리는 일이다. 원주민 되기를 뜻하는 귀화는 적응한다는 것이 그렇게 잊어버리고 끊어버리는 과정임을 일러주는 용어다. 먹구름과 분리됨으로써 생겨나서 땅에 흡수됨으로써 사라지는 빗방울 같은 정체성에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임을 일러주는 용어인 것 같기도 하다.
(/ p.28)

여행이 몸의 위치뿐 아니라 기억의 위치, 상상의 위치를 바꾸어놓는다는 것, 처음 가본 곳들, 몰랐던 곳들이 주로 망각 속에 묻혀 있는 묘한 연상들과 욕망들을 끄집어내준다는 것, 그러니 여행자가 가장 많이 걷게 되는 길은 마음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실감했다. 여행은 내가 나라고 생각지 않았던 나를 발견할 기회가 되어준다. 나의 무너지는 정체성이 내가 가보고 싶은 땅으로 이어지는 것이 여행이기에.
(/ p.32)

작고 매력 있고 가난한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서도 관광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어서 총인구가 350만인 이 나라에 연평균 관광객은 300만 명이다. 오코널 스트리트 중앙은 아일랜드의 과거사를 기리는 구조물들, 기념비들, 조각상들로 가득하지만, 길가의 상점들 (패스트푸드 체인, 기념품 가게 등등)은 외국 방문객을 위해 열려 있다. 관광객들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침입자들이 미친 것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다 해도 어쨌든 문화에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침입자들과 마찬가지다. 관광지에 가는 공식적 이유는 이국적 문화, 상이한 문화, 예전의 문화를 구경하는 것이지만, 관광지가 된 곳에서는 새로운 경제가 출현하고 결국은 관광객 문화라는 림보가 만들어진다.
(/ p.47)

아일랜드 관광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들이 있다.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침입의 역사에 대응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해외 이민(아일랜드라는 가난한 섬나라를 떠나 전 세계 영어권 지역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람들)의 역사다. 아일랜드 방문객 중 연평균 50만 명 이상이 미국에 살면서 조상의 나라를 찾아오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자손인데, 아일랜드는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관광으로 창출하는 나라이니만큼 그들의 입맛은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소형 문장 (紋章)을 비롯해 성씨와 문장이 담긴 여러 기념품을 판매하고, 아일랜드 국립도서관에서는 가문의 혈통을 조사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관광객을 만난 대부분의 현지 주민들은 한번은 꼭 아일랜드계가 아니냐고 물어보고, 상대의 조상이 이민을 떠났던 막연한 정황을 경청해준다.
(/ p.50)

영문학 그 자체가 영국 시골저택 같다. 영국 문학은 고색창연한 중앙 건물이고, 영어권의 다른 문학들은 헛간이나 신축 부속 건물이다. 서사시, 서정시, 소설은 중앙 건물의 중심 공간을 차지하는 익숙한 가구들이고, 에세이는 사이드 테이블들과 캐비닛들이다. 내가 영문학 전공생일 때 읽은 교과서들을 보면 아일랜드 문학도 섞여 있었지만, 가장 비중 있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익숙한 작품은 거의 항상 영국 문학이었다. 밀턴은 어두운 왕좌였고, 셰익스피어는 파티장이었고, 시드니에서 셸리까지의 소네트는 파티를 장식하는 부케였고, 영국 소설은 커다랗고 희고 푹신해 보이는 깃털 침대였다. 반면에 스위프트의 작품은 통로에 놓여 있는 딱딱한 의자이고 (그곳에 앉으면 벽면의 틈새를 통해서 바깥의 전망이 보인다.), 조이스의 작품은 하인의 방에 걸려 있는 거울이다. (“금이 간 하인의 거울”이 “아일랜드 예술을 상징”할 수 있다는 스티븐 디덜러스의 말은 거울의 예속된 상태를 암시할 뿐 아니라 거울에 비치는 균열된 모습, 의외의 모습을 암시한다.) 물론 조이스는 밖으로 나가서 새 집을 지은 작가였고, 그 집에 들어가보면 더블린을 기리는 기념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 p.57)

아일랜드에 와서 로저 케이스먼트 (Roger Casement)의 나비를 발견한 곳은 자연사박물관이었다. 부활절 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몇 달 뒤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로저 케이스먼트에게 매력과 경이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일랜드에 오기 전부터였다. 그는 아일랜드의 영웅들 중에서 가장 사려 깊은 영웅이었고, 그를 기념하는 청동이나 대리석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복잡한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기념하는 유일한 물건이 아닐까 싶은 나비 표본을 발견한 것은 자연사박물관 1층 유리 상자에서였다. …… 세월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생생한 표본이었다. “로저 케이스먼트 경이 자연사박물관을 위해 수집한 남아메리카 나비. 1911년 전후.”라는 설명이 달린 연약한 기념비였다.
(/ p.85)

밀림의 케이스먼트를 상상해본다.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정부가 있었고, 그의 마음에는 양심이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더없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푸투마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느꼈을 책임의 무게, 죽음과 고통의 무게를 상상해본다. 열대림, 수풀과 진흙의 수렁, 습한 공기, 강력한 중력에 짓눌리는 느낌, 아니면 어느 거대하고 낯선 행성 위에 불시착한 느낌과도 비슷했을 그의 세상을 상상해본다. 바로 그런 세상에서 너무나 가볍게 공중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상상해본다. 언젠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참상 속에 나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을 맛보면 안 되는 것일까? 혁명가들과 활동가들이 줄곧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케이스먼트는 대답한다. 좋은 것을 맛보자. 청옥색과 유황색 나비를 잡으러 다니자. 강에서 수영을 즐기자. 일기를 쓰자.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끝없는 과업에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 pp.103~104)

특히 남성 동성애는 주류 사회의 현상태 (status quo)에 위협이 된다. 남성이 욕망의 주체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라는 사실, 남성이 꿰뚫는 존재인 동시에 꿰뚫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권력과 젠더가 일방향으로 작동하리라는 주류 사회의 상상을 무너뜨린다. 남성성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종이나 제국이라는 요소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것, 남성성 개념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재정의가 가능하리라는 것을 케이스먼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당대의 반응은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는 공무와 성애를 통해 권위 스펙트럼의 양극, 곧 제국의 권위와 침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동시에 남자라는 생물체를 다양성을 가진 존재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혹하면서 더 취약한 존재로, 더 달라질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하고 있었다.
(/ pp.116~117)

시간 그 자체가 탄력적이라서, 똑같이 먼 과거라고 해도 어떤 과거는 이야기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고 어떤 과거는 침묵 속에 묻혀 있다. 한 사람의 기억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는 150년 전 정도 (노인이 아이였을 때 만난 누군가가 겪은 일까지)가 아닐까. 걸인의 이야기는 내게 기억이 얼마나 먼 과거까지 가닿을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가르쳐주었다.
(/ p.132)

아일랜드의 진짜 트라우마, 곧 아일랜드인이 침묵 속에 묻은 경험은 해외 이민 그 자체였다. “아일랜드 근대사에서 식민화 다음으로 중요한 독특한 경험은 해외 이민이었다. 해외 이민 그 자체가 아일랜드의 독특한 현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해외 이민은 성격 면에서 그리고 영향 면에서 독특한 현상이었다. 해외 이민이 사회구조와 신분제도 유지의 필수조건이 된 나라는 유럽에서 아일랜드밖에 없다. [……] 농가의 부모가 가산을 보존하고 싶을 경우, 또는 노동자의 자녀들이 살아남고 싶을 경우, ‘잉여’ 자녀의 해외 이민은 대기근 이후로 필수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해외 이민은 공동체의 오점 같은 것, 국민을 부양할 능력이 부족한 국가의 부끄러운 낙인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 모종의 국민의식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
(/ p.143)

유년기가 처음 느껴본 감각들, 처음 당해본 고통들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우리에게 유년기는 잃어버린 세계일 수밖에 없다. 유년기가 집이라면, 우리는 집을 잃은 난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한번 뿌리내린 집은 영원히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몸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물체라는 식의 생각은 내면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집을 은폐하는 픽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집은 최초의 판단 기준이다. 다른 모든 대상의 가치는 집을 기준으로 가늠된다. 우리가 간 곳이 더운 곳인가 추운 곳인가, 붐비는 곳인가 조용한 곳인가, 윤택한 곳인가 각박한 곳인가는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에 좌우된다.
(/ pp.174~175)

아일랜드가 식민지였다면 내가 유년기를 보낸 미국 서부도 식민지다. 단 아일랜드가 실제적, 구체적, 정치적 의미에서 영국의 식민지였다면, 미국 서부는 문화적 의미에서 유럽과 미국 동부의 식민지다. 식민지란, 한마디로 이곳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라는 생각을 주입당하는 곳이다. 기억과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식민지 주민은 역사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을 주입당한다.
(/ p.197)

걸음은 몸 전체를 깨어나게 한다. 쉴 때 깨어 있는 곳은 피부뿐이니, 쉴 때 할 수 있는 일은 감각뿐이다. 몸을 움직일 때 비로소 몸속을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라면 몸속 또한 여행을 통해 탐험할 수 있는 곳들 중 하나다.(보이는 피부 밑에 보이지 않는 뼈와 근육과 장기가 있다는 말은 몸이 쉬고 있을 때는 그저 신앙고백일 뿐이다.) 하지만 여행은 나라는 존재를 내 피부까지로 좁히는 면도 있다. 여행하는 나에게는 내 피부 바깥의 모든 것이 내가 알 수 없는 낯선 대상, 낯선 타인들의 세계로 느껴진다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세계, 나의 것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세계로 넓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서 비로소 배울 수 있었다.
(/ p.210)

아일랜드는 정치적으로 신대륙과 제3세계를 닮은 곳이었고, 아일랜드의 전통적 부족사회는 문화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는 상업적, 도시적 국민국가들과의 공통점보다는 전 세계 피식민지들과의 공통점이 많은 곳이었다. 아일랜드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닮았다는 말은, 유럽인 (European)은 이런 존재이고 원주민 (Native)은 이런 존재라는 정의가 자의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 아니, 모든 정의가 자의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이 사람은 유럽인이라는 말, 또는 이 사람은 원주민이라는 말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만 할 수 있는 말, 유럽인이라는 용어와 원주민이라는 용어가 온갖 이질적인 속성들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온갖 연결되는 속성들을 나누기도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 p.254)

망각이 기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려면 켈트족이 항상 아일랜드인이었던 것도 아니고 아일랜드인이 항상 켈트족이었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해야 하고, 옛날에는 목축 부족이었던, 그리고 그 후에 몇 번이나 크게 변해온 아일랜드인들에게 지금의 보수적이고 완강한 전통은 임의의 선택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야 한다.
(/ p.304)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는 고정과 기억과 문학이 중요한 나라인 것 같았는데, 이 나라에 와서 만난 사람들은 과거가 역사로 고정되는 것을 막아온 이들이었고, 이 나라에 와서 경험한 문화는 조이스의 작중인물 ‘떠돌이 유대인’에서는 물론이고 가톨릭 공화국 아일랜드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문화였다. 이 나라를 떠나가는 것도 이 문화가 열어놓은 한 가능성이었다. 고정과 유동, 기억과 망각, 순종과 혼종, 뿌리와 날개는 그 후로도 풀리기와 얽히기를 되풀이했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 불안한 현재의 상태를 자축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결(presolution)이란 불가능한 동시에 불필요한 목표다, 평생 이런 미완의 상태들 사이를 떠돌게 된대도 상관없다, 나는 돌아다니는 게 좋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게 좋다, 결론을 내리면 판결 후의 법정처럼 침묵이 흐를 뿐이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런 기분이었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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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1~
출생지 -
출간도서 17종
판매수 3,537권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다. 특유의 재치 있는 글쓰기로 일부 남성들의 ‘맨스플레인’man+explain 현상을 통렬하게 비판해 전세계적인 공감과 화제를 몰고 왔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어둠 속의 희망』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멀고도 가까운』 『걷기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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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영문학 석사학위를, 소설과 영화의 매체 비교 연구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발터 벤야민 평전』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자살폭탄테러』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슬럼, 지구를 뒤덮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걷기의 인문학』 『감정 자본주의』 『미국 고전 문학 연구』 『3기니』(근간) 『프닌』(근간) 『센티멘털 저니』(근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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