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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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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홍병화
  • 출판사 : 민족사
  • 발행 : 2020년 08월 31일
  • 쪽수 : 232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91189269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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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국내 최초,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정리한 책!
전통건축 전문가가 쓴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출간!


지금까지 불교건축사를 한 호흡으로 정리한 책이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다. 일부 유명한 사찰만을 한정하여 다루거나, 불교건축에 대해 개괄하거나,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시기의 불교건축에 대해 다루는 책은 몇 권 있지만,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처럼 한 시대의 불교건축사를 통으로 다룬 책은 처음이다.
우리나라의 건축사는 불교건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불교건축사가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건축사가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의 출간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저자는 조선 후기 불교건축의 성격과 의미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지 10여년 만에 조선시대 불교건축사 전체를 다루는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전국 전통사찰 전수조사에 참여하고,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건축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등 전통사찰과 관련된 다양한 조사에 참여하고, 전통건축 관련 현업에 종사해 온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불교건축사를,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억불숭유의 사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 시대야말로 불교가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였고, 이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불교건축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진정한 종교로 거듭난 불교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조선시대’와 ‘불교건축’은 잘 연결되지 않는 주제처럼 보인다. 고려시대까지 국가의 지원을 받고 승승장구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는 척결의 대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대형 사찰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부를 축적하기 바빴던 불교와 그런 불교로부터 비롯되었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조선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이들에겐 시급한 목표였고, ‘억불’은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그래서 조선사회를 ‘억불숭유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불교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없어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받았다는 것은 불교가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을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이전 국가권력이 부여했던 사찰에 대한 특혜를 거둔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동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방적 지원과 비호 속에서 성장한 것을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고 본다면, 비로소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단순히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받았다고 이해하면, 그 시대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정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는 불교가 이 시기를 통과하면서 하향평준화가 되었다고도 하고, 철저하게 표리부동한 종교가 되었다고 하는 등 혹독한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살아남으면서 불교는 진정한 종교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기존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저자의 이런 평가가 불교건축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귀족 종교에서 백성과 함께 호흡하는 종교로 거듭난 불교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담고 있는 조선시대 불교건축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단순히 조선시대 불교 건물의 역사가 아니다. 저자는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는 이 땅에서 민중이라는 주체가 어떻게 역량을 키우고 결집해 왔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라고 본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는 그냥 건물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축이 탄생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을 헤쳐 나온 주체들의 역량이 결집되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건축을 통해 불교가 500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다.
―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두 번의 큰 전쟁, 일상적인 비하와 배고픔에 직면하였던 불교가 때로는 스스로, 때로는 백성들과 함께 호흡해 가면서 복전(福田)으로서의 사찰, 즉 삶이 녹아 있는 불교건축을 남긴 것에 의의를 둔다. 상대적으로 서원 등과 같은 유교건축이 당시의 상류층의 문화를 보여준다면, 불교건축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민중들의 조직적 · 의식적 활동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사찰에 대중들이 모이고, 모이면 그 대중이 결국에는 각성을 하고, 그렇게 각성을 하고 나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게 되는 과정이 불교건축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조선시대의 모든 불교건축이 대중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도 모든 조선시대 불교건축이 민중들의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런 건축은 불교건축에서는 오히려 드문 편이죠. 사찰에서도 크고 좋은 건축은 당시 왕실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니, 조선시대에 있는 고려시대적인 건축인 것이지요.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은 시대적 흐름이라는 경향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일 거예요. 즉, 세상의 중심이 상류층에서 중·하류층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을 찾는다면 아마 상당수는 불교건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유교건축과 대비한다면 말이죠.
이런 게 바로 역사잖아요. 지나보니 결과적으로 민중들이 그런 건축을 원했던 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흐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저 같은 연구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 인터뷰 중에서

저자는 조선시대의 중심이 상류층에서 중·하류층으로 옮겨지는 과정의 시대정신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이 아마 불교건축이었을 거라고 본다. 불교가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이 불교건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 시대적 흐름을 읽고, 기존의 해석과 다르더라도 불교건축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낸다.
저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각되는 존재는 민중들이었고, 그런 주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불교건축이 요구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불교건축은 번듯하고 화려한 외형보다는 부처님의 법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화려한 상류사회의 일부였던 불교건축은 조선시대에 비로소 대중 속으로 들어가 백성과 함께 호흡하면서 불교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억불숭유의 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새로운 불교건축사다.

성리학 사회인 조선은 자신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리학만을 강조하며 형해화되어 갔다. 대신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지배를 당한 불교는 아직도 자신의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성리학은 이제 더 이상 종교가 아니고 단지 학문의 대상일 뿐이지만, 불교는 적어도 아직은 종교이다. 이 차이는 바로 지금까지 그 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사에서는 비교적 유사한 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는 일면 승리의 역사인 것이다.
―머리말 중에서

저자 인터뷰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저자 홍병화 선생님 인터뷰

질문 1. 선생님의 경력을 보면, 전통사찰 발굴 조사 등에 많이 참여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 전통사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요, 이 중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력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공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제 출입국 기록을 보면, 금강산을 들어갔던 횟수가 80회가 넘더라고요. 금강산은 북한이라 외국에 나가는 것처럼 출입국 기록을 남기거든요.
또 ‘전국 사지조사 사업’과 ‘전통사찰 전수조사 사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 조사입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라 단순히 개별유적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 시기별 · 지역별 양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연구자에게는 전통건축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요. 전국 단위 조사에 참여하면 보통 약 3~4년 정도씩 걸리는데요, 그동안 연구자로서 많은 공부가 됩니다.
이외에도 몇몇의 발굴조사와 사찰문화재일제조사도 참여했는데, 이러한 사업들은 인접 학문 분야와의 소통에 대한 기회가 마련되어 하나같이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질문 2. 다른 시대도 아닌 조선시대 불교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 우선 박사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가진 시기가 바로 조선시대입니다. 그리고 서문에서도 밝혔듯, 조선시대야말로 불교가 권력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낸 첫 번째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또한 남아 있는 사찰건축이 대부분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기도 하구요. 이렇듯 조선시대에 대한 관심이 여러모로 많았던 거지요.

질문 3.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 사회에서 불교건축이 갖는 의미는?

* 조선시대 불교건축이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권력의 관심에서 멀어진 건축이 바로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 더욱 애착이 가요. 귀족적인 고려시대 건축과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조선시대 불교건축은 정말 무지렁이 백성들의 이해와 요구에 능동적으로 순응해 간 건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조계종의 종지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잖아요. 하화중생의 건축이 바로 조선시대 불교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은 계획적인 활동의 산물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모든 조선시대 불교건축이 민중들의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런 건축은 불교건축에서는 오히려 드문 편이죠. 사찰에서도 크고 좋은 건축은 당시 왕실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니, 조선시대에 있는 고려시대적인 건축인 것이지요.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은 시대적 흐름이라는 경향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일 거예요. 즉, 세상의 중심이 상류층에서 중·하류층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을 찾는다면 아마 상당수는 불교건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유교건축과 대비한다면 말이죠.
이런 게 바로 역사잖아요. 지나보니 결과적으로 민중들이 그런 건축을 원했던 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흐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저 같은 연구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 4. 우리나라에서 불교건축사가 한 번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이유는?

*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불교건축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감소도 큰 이유일 것이고, 초기 한국 건축역사의 연구가 비교적 불교건축에 집중되어 지금은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 그리고 동시에 불교건축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면서 불교건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있을 겁니다.
즉, 민가와 같은 주거건축에 대한 연구의 증가, 근대건축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 등이 불교건축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좀 주관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불교 스스로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지금 불교의 모습과 오버랩해서 성찰해 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꼽아보자면 주인이 있는 건축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일 수 있어요.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조계종’이라는 주인(또는 맏형)이 불교에는 있는 셈이죠. 국가나 지자체를 상대로 전문적이며, 조직적인 대응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경계를 받게 된 것으로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궁능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궁능에 들이는 예산을 보면 참견하는 사람이 없는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불교문화재에게는 예산을 지원하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자꾸 만들어지니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겠지요.

질문 5. 자료가 별로 없는데, 책을 집필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 시간의 누적은 현재의 모습을 만들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최후의 모습이지요. 즉, 여러 레이어가 겹쳐져 있지만, 그 레이어를 차근차근 벗겨본다는 것은 여간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조선전기는 자료의 부족에 시달리고, 조선후기는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죠. 하지만 역사의 서술은 분량에 있어서도 균형감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조선전기를 서술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전기는 다른 분야의 연구나 기록에 중심을 두었고요, 조선후기는 남아 있는 건축에 방점을 찍은 묘한 차이를 잘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6.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가 갖는 의의에 대해.

* 불교건축사에 대한 첫 개설서라는 의미겠지요. 최근 정병삼 선생님의 《한국불교사》를 읽고 있는데, 불교건축사도 언젠가는 그렇게 전 시대에 걸쳐 한 번에 쭉 써내려가는 글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불교건축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이 많이 나와서 활발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천사

개인적인 인연으로 저자를 알고 지낸 지 20년이 되어 간다. 불교건축을 전문적으로 조사·연구하는 업무를 하고, 금강산에다 신계사를 짓는 일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전공과 관심과 일이 일치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를 쓰기 전부터, 쓰고 있을 때에도 그리고 쓰고 난 지금까지도 계속 저자와 교류하고 있다.

건축역사학에서 불교건축학이 차지했던 그간의 위상을 볼 때, 아직까지도 불교건축의 역사를 한 시대를 개괄하면서 써내려간 책이 없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와도 벌써 몇 권은 나왔을 텐데, 내가 몰랐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는 달리 불교건축의 역사에 관한 책은 이 책이 정말 처음이었다. 이것이 연구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저자와 불교건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이런 책이 나오지 못했던 그동안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이 글을 탈고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불교건축을 크게 성리학과의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는 불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성리학은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 책은 성리학을 신념으로 따르던 학자층이 주도하던 사회에서 냉대 받던 불교가 어떻게 온전히 백성들의 종교로 자리매김했는지를 건축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 개창에서부터 멸망까지를 한정하여 불교건축을 볼 때, 초기에는 고려의 여운이 남아 화려하고 장대한 귀족문화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상류사회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서서히 한쪽으로 밀어 놓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변해 가는 시대적 상황을 불교의 입장에서는 낙담도 하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조금씩 적응하며 백성의 생활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불교가 상류사회의 일부로 소수와 함께 하던 화려한 종교에서, 점차 낮은 자세를 취하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삶 속에 완전히 안착하는 종교로 거듭난 것이다. 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불교는 백성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과 바람에 관심을 갖고 손쉬운 신앙적 실천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정치된 신념과 화려한 이상보다는 일상 속에서 생활과 실천의 종교로 엮여 마치 처음부터 백성과 하나였던 것처럼 섞여 버린 것이다.
조선시대는 후기로 갈수록 법당까지도 화려하더라도 어색함을 숨길 수 없었으며, 번듯한 외형보다 몰려드는 백성을 한 명이라도 더 수용할 수 있는 한 치라도 넓은 공간을 우선으로 삼았다. 세련된 장식보다도 한 자라도 방을 넓히기 위해 울퉁불퉁한 기둥과 구불거리는 서까래를 사용하는 것을 창피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불교건축은 더 이상 보여주기 위한 장엄의 건축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의 법을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담아야 하는 그릇, 즉 반야용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사찰의 주인이 될수록 이러한 선택은 일상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불교건축에 대해서 시대가 갈수록 생명력을 잃어가며 퇴락하는 건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조선시대 불교건축은 불교의 중심으로 새롭게 부각된 기층대중인 백성의 등장과 이들의 요구에 의해 강제되는 새로운 불교건축의 형식은 역사적 필연이었음을 방점 없이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불교건축사를 서술하는 것은 기존의 관점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조금 놀랍기도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조선시대에 대중이 등장하여 불교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견인하였다는 인식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저자에게 고려시대 불교건축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 기대해 본다.

서울시 전통사찰위원, 조선건축사사무소
윤대길

목차

추천사 / 윤대길(서울시 전통사찰위원) ― 4
머리말 ― 8

15세기 불교건축 ― 18

- 명분으로서의 억불과 전통으로서의 불교

• 외유내불, 명분과 습관 ― 18
• 불교와 유교의 연합, 외유내불의 불씨 ― 20
• 효와 능침사 ― 24

15세기의 배치 계획 : 능침사의 부상 ― 28

• 고려 말 남중국 간화선풍의 유행과 회암사 ― 28
• 조선 초 왕실원찰의 보편성 ― 35
• 태조의 흥천사 창건과 고려의 유습 ― 36
• 진관사의 수륙사 ― 38
• 조선 초 왕실원찰의 두 종류 ― 39
• 조선 초 왕실원찰의 대표성 ― 44
• 안마당에 면한 요사의 성격 ― 49

15세기의 구조적 건축형식 : 새로운 시대의 공포, 익공 ― 52

• 건축형식을 구분하는 방법 ― 52
• 공포의 독자성과 가구법의 통일성 ― 56
• 공포의 다양함은 활발한 생명력이 원천 ― 62

16세기 불교건축 ― 69
- 성리학의 완고함과 불교건축의 잠재력

• 사림의 등장과 기신재의 퇴조 ― 69
• 산릉제사의 두 가지 성격과 기신제의 정착 ―71
• 과거의 지위는 잃었지만 생활 속에서는 건재한 불교 ― 72
• 문정왕후와 보우, 그리고 불교 ― 74
• 수륙재의 성행과 불교에 대한 새로운 경험 ― 75
• 조선을 전후기로 구분하는 역사적 사건,
임진년 왜구들의 침략 ― 77

16세기의 배치 계획 :사라진 시기, 미지의 공간 ― 78

• 청평사와 기신재 ― 78
• 사대부들의 원찰, 분암 ― 82
• 수륙재의 유행과 중심사역 ― 88
• 문루의 초기 형식 ― 90

16세기의 구조적 건축형식 : 부족함 속에 감춰 놓은 완성된 건축 ― 94

• 익공과 다포의 각축, 주심포의 퇴장 ― 94
• 동아시아 건축에서 최고의 발명품, 익공 ― 102
• 공포형식과 가구법의 상관성 ― 104

17세기 불교건축 ― 108
- 후원 세력의 교체와 사회의 보수화

• 새로운 전기를 맞은 불교계 ― 108
• 재조지은의 강조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 ― 110

17세기의 배치 계획 : 능침사의 복구와 수륙재의 대유행 ― 113

• 재현되는 능침사의 건축 계획 ― 113
• 기록으로 본 17세기의 대형 사찰 ― 120
• 기록으로 본 17세기 산중소찰 ― 123
• 현존하는 17세기 산중소찰 ― 128
• 대형 불전의 유행 ― 131
• 천왕문의 성행 ― 133
• 명부전, 나한전의 유행 ― 139
• 정문의 일반화 ― 141

17세기의 구조적 형식 : 새로움의 수용과 전통의 고수 ― 146

• 불교건축과 관영건축의 공포 차이 ― 146

18세기 불교건축 ― 153
- 문중불교의 강화와 대중불교의 심화

• 각종 역의 전가와 원당의 유치 ― 153
• 백성의 경제적 성장과 후원자의 증가 ― 157
• 법통의식의 강화와 향촌사회의 하위 파트너 ― 158
• 동원되는 승려, 충신이 된 승려 ― 160
• 화엄 공부와 불교계의 결속 ― 163

18세기의 배치 계획 : 중창의 시대 ― 167

• 임란 이후의 첫 중창 ― 167
• 문루의 대형화 ― 169
• 문루와 합쳐지는 정문 ― 173
• 요사의 대형화 ― 176
• 요사의 종류 ― 180
• 새로운 대중공간의 등장 ― 183
• 안마당에 면하는 또 다른 법당들 ― 186

18세기의 건축형식 : 화려함의 극치, 날개를 닮은 공포 ― 187

• 익공의 전성시대 ― 187

19세기 불교건축 ― 193
- 사회적 혼란과 불교의 선택

• 극심한 혼란과 불교의 신앙적 역할 ― 193
• 활발한 보사활동과 사찰계 ― 195
• 하삼도에서 서울·경기 지방으로 ― 199

19세기의 배치 계획 : 사람들이 모이면 힘이 쌓인다 ― 201

• 불교건축의 빛나는 성과, 대형요사(대방) ― 201
• 산문체계의 위축과 신중도의 유행 ― 208
• 수행보다는 신앙의 가람 ― 211
• 대중의 새로운 선택과 불교건축 ― 217

19세기의 건축형식 : 마감과 시작 ― 219

• 의장보다는 공간의 건축 ― 219

찾아보기 ― 226

본문중에서

성리학은 신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전의 훈고학적 유학과는 달리 우주의 순리와 인간의 심성이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사유체계로서, 종교보다는 학문에 더 가깝다.
고려가 성리학을 수용하던 시기는 불교계에서도 화두를 잡고 참선하는 간화선이 유행하였는데, 사람의 마음을 공부의 대상으로 한다는 면에서 성리학과 간화선은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비판하였는데, 불교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종교적 비판이라기보다는 불교계가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면서 저지른 적폐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츰 불교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져 불교계가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자체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 ( /p.19)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와 외적에 맞서 백성의 신뢰를 얻은 신흥무인 세력은 조선의 개국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연합을 하였지만 성리학자인 신진사대부와 불교 신자인 무인 세력은 종교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종교적 차이가 결과적으로 전혀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아니었던 것을 보면 결국 조선의 억불은 명분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과 같이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쓰는 등 불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는 성리학자도 있었지만, 당시 상당수의 성리학자는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으며, 그 폐해를 경계하는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억불숭유 정책이란 이전 왕조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친불교적인 정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건국 직후 불교를 탄압했다기보다는 불교를 우대했던 이전 왕조의 정책을 하나씩 철회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처럼 공공의 영역에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던 정책을 철회하는 것은 바로 불교의 생존환경을 악화시킨 것이며, 결과적으로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편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 /p.21)

조선이 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는 것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예제에 따라 국가 체계가 확립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국과 동시에 습관처럼 지속되어 오던 불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과 나라가 치러야 하는 기본적 의례의 종류 및 그 절차를 정한 『국조오례의』가 편찬되면서 조선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불교에 영향 받은 여러 의례들을 유교식으로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로도 불교에 대한 왕실의 실질적인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유력 가문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왕실의 경우 실록을 통해 그 기록이 전해져 불교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만, 사대부들은 왕실에 비해 전해지는 기록이 부족해 그 현황이 상세하지 않을 뿐이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사대부들도 문중 차원에서 특정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상의 제사는 물론 글 읽고 휴식하는 공간으로 사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조선 초는 물론 후기까지 끊임없이 발견된다.
왕조를 개창하고 안정되기까지의 과정은 변화가 불가피한 과도기이다. 특히 조선과 같이 명시적으로 불교에 대한 반대를 전면에 내세운 왕조에서 불교건축의 경우는 과도기를 넘어 위기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 /p.23)

왕조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왕실은 고대부터 능(산릉)·왕릉 옆에 사찰을 세우고 그 사찰로 하여금 능주(능에 묻힌 사람)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산릉도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찰을 능침사라 하였다. 능침사의 시작은 적어도 고구려의 동명왕릉과 정릉사의 관계로부터 이어지는 것으로 중간에는 주춤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줄곧 이어지며 조선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태조도 왕위에 오르면서 전례에 따라 자신의 4대조까지를 왕으로 추존하였으며 능호를 지은 다음 재궁(齋宮)을 세웠다. 여기서 재궁이 어떤 형식의 건축이었는지 모르지만 세종 6년 4월 21일 각 능마다 승려들을 상주케 하고, 이 중 의릉(조선 태조의 조부인 도조의 능)의 예에 따라 각 능의 승려들에게 삭료(朔料: 급여)를 지급하라고 한 것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 /p.24)

이처럼 조선 초 사찰 건축을 표현한 기록은 모두 합쳐야 10개 사찰을 채우지 못하지만,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사찰의 수는 1,657개에 이른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 시기 왕실원찰의 배치 계획이 당시 전체 사찰을 대표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원찰들은 조선 초에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고,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지어진 사찰로서 수준 높은 건축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는 않아도 당시를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 ( /p.35)

최근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배치 계획에 따라 복원된 모습에 의하면, 문정왕후와 보우의 관계에 의해 중창된 청평사가 세조~성종 연간에 지어진 능침사와 같은 배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뒤 정황으로 유추해 보면 사림이 국정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문정왕후라는 강력한 호불적 인물의 등장으로 다시 친불교적인 왕실의 태도가 강화되어 가는 상황인 것으로 보아 청평사 극락전을 1557년 중창한 후 회암사에서 지내던 기신재를 이곳으로 옮겨와 설행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발굴 조사를 바탕으로 최근 복원해 놓은 당시의 배치 계획을 보면 청평사는 현존하는 회전문과 소실된 능인전을 주불전으로 하는 중심사역과 능인전 북서편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극락전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p.80)

이처럼 16세기 불교건축의 배치 계획을 탐구할 만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면 전혀 짐작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봉정사의 배치처럼 고려 중기쯤부터 이어져 조선 후기까지 운영되면서 여러 세기에 해당되는 많은 건축을 가지고 있는 사례를 보면서, 이 중 16세기에는 어떤 배치 계획을 하고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 ( /p.89)

16세기 다포는 가앙의 대부분이 가까운 이전 시기보다 길어지면서 휘어 오르듯 하지만, 앙취(昻嘴: 가앙의 마구리)는 바로선 오각형(⌂)의 형태를 또렷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살미나 첨차의 공안직교 하면서 이루어진 은출심두(隱出心枓)를 유지하는 사례는 여말선초처럼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은출심두란 살미와 첨차가 교차하는 중앙에 공안 때문에 마치 소로가 놓인 것처럼 보이는 표현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영조법식』에 나오는 용어이다.
- ( /p.98)

고흥 수도암 무루전과 정수사 법당의 전면 공포, 청평사 회전문의 공포는 앞에서 언급한 다포식 공포와 완전히 다른 계통의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미 16세기라는 시기는 목조건축 계통 간의 상호 영향과 정체성 고수라는 대별되는 경향이 수도 없이 반복된 이후라서 계통이 다른 건축 간에도 공유할 것은 공유하고, 그렇지 않
은 요소들은 이후로도 각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완전하게 자리 잡은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5세기가 익공이 생성되던 시기라면, 16세기는 완성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무루전의 공포나 정수사 법당 전면 공포를 보면 이미 장식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완벽한 상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루전의 경우 창방 위치에 첨차를 구성하고 주심첨차와 일체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공포의 표현과 구조적 기능에 있어서 16세기 익공식 공포는 이미 다양한 응용을 충분히 거쳤음을 알 수 있다.
- ( /p.102)

16세기는 사찰건축 사례가 많지 않아 건축형식의 특징을 짚어 내기 어렵지만 17세기는 이와 분명히 다르다. 지어진 시기가 분명하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축도 많은 편이라 본격적인 건축형식의 시대적 특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17세기다.
이 시기 국가가 주도하는 건축에서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면서 새로운 건축이 시도되는데, 공포 형식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익공식 공포를 사용하는 건축이다. 알려지기로는 전쟁의 피해를 일시적으로 복구해야 하는 필요성이 제기된 시기에 비교적 경제적이면서 건축적으로도 효용이 충분한 익공식 공포가 주로 보조적 역할을 하는 건축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소박함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취향에 바탕을 둔 사림은 화려하기보다는 간결하고 정제된 형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익공의 성행에 한몫했다고도 한다.
- ( /p.146)

불교건축 역사의 관점에서 18세기는 17세기 후반에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가 심화되어 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형성된 주자가례를 강조하면서 형성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18세기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으며, 승군을 동원하여 산성을 쌓고 산릉을 조성하는 것까지, 그리고 개별 사찰들에는 종이를 만들어 상납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역(役)이 지속적으로 강요되고 있었다.
- ( /p.153)

19세기가 되면서 대방의 위치는 다양해지는데, 내소사 설선당과 마곡사 심검당은 모두 안마당의 측면에 위치한다. 하지만 서울 성북구에 있는 흥천사 대방이나 남양주와 고양시의 흥국사, 파주 보광사를 보면 주불전과 마주하면서 마치 문루의 역할을 하듯 위치하고 있다. 이럴 경우 ㅁ자형 평면보다는 중앙의 큰 방을 가로막지 않는 ㄱ자나 H자, 또는 _자형 등 중앙에 위치한 큰 방과 주불전 간의 시야가 유지되는 평면을 선택하는 공통점이 있다.
p- ( /pp.204~205)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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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학교를 나오고 명지대학교 산업대학원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나왔다. 1995년부터 체육관, 백화점, 아파트 현장 등을 전전하였으며, 2000년부터 조계종에서 일을 하였다. 금강산 신계사를 조사하고 복원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이 외에도 건축문화재에 관한 업무를 하였다. 이 외에도 몇몇의 발굴조사와 사지(寺址) 조사사업에도 참여하였으며 현재는 전통사찰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학위논문으로는 "조선시대 산문체계를 통해 본 일주문 연구"(석사)와 "조선후반기 불교건축의 성격과의미"(박사)가 있다. 기타 연구논문으로는 "건축역사연구"에 "일본, 중국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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