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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자 시인이 첫 시집 『꽃뱀, 굴을 나오다』는 삶의 허물을 벗고 구태(舊苔)를 닦아, 사물ㆍ자연ㆍ사람 관계 속에서 빚어낸 시들이 담겼다. 1부ㆍ2부에서는 시인 자신이 투영된 시를, 3부ㆍ4부ㆍ6부에서는 자연을 사유(思惟)하는 시를, 5부에서는 여행하며 떠오른 감상(感想)을 읊은 시를, 7부에서는 가족의 사랑이 담긴 시로 엮었다.

이 시집의 표제인 〈꽃뱀, 굴을 나오다〉의 시에서 ‘어두운 굴이 우연히 무너져/ 환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온 날/ 드디어 세상 밖이 궁금한 나는/ 굴을 나오게 된다’(10, 11, 12, 13행)라고 한 행간 속을 보면, 꽃뱀의 생(生) 가운데 어떤 일 벌어졌음을 읽게 된다. 지난 삶을 이어왔던 굴이 허물어진 사건은 빛을 만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그 한 줄기 빛을 따라 굴 밖으로 나오게 된 꽃뱀의 이야기. 이 꽃뱀은 곧 화자로 치환되어 경계 밖의 다른 차원으로 전환을 꿈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삶은 사유할수록 생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고, 보다 나은 차원으로 나아가길 갈구함으로 내면의 굴을 벗어나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의식의 탈피와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게 된다. 그 허물이 흉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음은 허물 벗은 삶에 달려있는 건 아닐까.
구 시인은 삶의 중심부터 언저리까지 두루 사유하며 사람, 자연, 사물과 유대를 시로써 촘촘히 이어나가고 있다.

★서평
구신자 시인의 참 인간적인 자기 성찰, 자기 고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 「경계선」에서 평소 다니던 등산로 산과 산 사이에 포클레인으로 경계 울타리를 치고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안내문을 보고 “너와 나/경계선을 긋고 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팥죽이 먹고 싶어 팥을 삶아 앙금을 내는 과정에서 “용서한다고/이해한다고/화해한다고/없었던 일로 하자고/조용해진 밤이면/다시 가라앉는 알갱이들”(「앙금으로 가라앉아」)을 통해 한 삶이 때로는 용서, 화해, 없었던 일로 되지 않음을 고뇌하기도 한다. 이 고뇌는 단순한 고뇌에 그치지 않고 참회로 이어진다.
-평설 중에서 / 허형만 시인(목포대 명예교수)

*시인의 말 …5

1부
꽃뱀, 굴을 나오다 …16
할머니의 초상(肖像) …18
봄꽃, 트럼펫을 불다 …19
청둥오리떼 보고 싶다 …20
칡이란 놈 …22
어느 농성 …23
돌성리 낚시터에 봄을 훔치다 …24
행운목, 꽃이 피다 …26
호박꽃은 고향을 품고 핀다 …28
봄이 진다 …29
쐐기풀은 폭군이다 …30
삶은 …31

2부
자화상 …34
최말다 여사님 …36
경계선 …38
목욕탕 사람들 …40
섬에는 그리움이 산다 …42
벌거벗은 나무들 …43
가을 산에 올라보니 …44
종묘상 앞에서 …46
꽃과 나비와 나 …48
돌솥비빔밥 …49
미라가 된 소나무 …50
쑥 …51

3부
앙금으로 가라앉아 …54
바다 …56
바람은 카멜레온 …57
국화호수에서 …58
느티나무의 고백 …60
대파와 쪽파에 대하여 …62
장마 중 …63
사랑이 늙어가네 …64
봄볕에 앉아 …66
혼자 걷는 길 …67
사랑한다는 것은 …68
욕심 …70
손톱을 깎으며 …71

4부
숲길을 걷다가 …74
고추잠자리 …76
참새에게 …78
가시나무 …80
모감주나무 …82
왕거미를 바라보며 …83
고양이는 수행 중 …84
잠 못 드는 밤 …85
가로등 …86
삼백 살 할머니 돌배나무 …88
외포리 갈매기 …90
풀벌레 소리 …91

5부
혈구산 정상에서 …94
곶자왈에서 …96
선암사에서 …98
설악산 울산바위 …100
남해의 아침 …101
광성보에서 …102
오월의 순천만 …104
평창 하늘 …105
비 오는 봉은사 …106
양평 골동품 시장 …108
위대한 유산 앙코르 와트를 다녀오다 …109

6부
개미취꽃으로 …114
할미꽃 …115
때죽나무꽃 …116
백일홍의 유혹 …117
고개 숙인 해바라기 …118
한여름 능소화 …120
유월이 오면 …121
예순 두 송이 장미 …122
감국 …124
코스모스처럼 …126
함박눈 꽃이 되다 …127

7부
아들에게 …130
며느리에게 …132
떡국 …133
우리 할머니 …134
학예회 날 …135
요술 거울 …136
프린세스 발레리나 되고 …138
모녀 삼 대가 옥수수 먹던 날 …139
밥 한 숟가락 …140
전국 가장 좋은 외가상 …142
쿠키야, 미안해 …144

*評說 몸에 관한 성찰과 생명의식 / 허형만 …146

[서문]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겨우 조그만 창 하나를 내었다 /내 창으로 내다보이는 뜨락엔 /무슨 꽃이 피고 있을까/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게 두려워 /창을 내지 못하다가 /용기를 내고 나니 /가볍고 홀가분한 심정이다/ 내 시가 구태여 /밥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지나친 욕심은 아니겠지. /창가에 따스한 햇살이 찾아와/ 이야기꽃 도란도란 피어나면 /사랑하는 이들 모두 모여 /축배를 들고 싶다
- 시인의 말

★시집 속으로


꽃뱀, 굴을 나오다


아침햇살에 활짝 핀 호박꽃을 친구하던
어린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작은 굴을 파고, 꼭 닮은 아이 둘을 낳고
바깥세상은 궁금해 하지도 못하고
빠져나올 궁리도 없고
아이들은 호기심이 자라서
세상 밖으로 튕겨나가고
넓어진 굴에 덩그러니 남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두운 굴이 우연히 무너져
환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온 날
드디어 세상 밖이 궁금한 나는
굴을 나오게 된다
독도 없이 무늬만 고운 꽃뱀이었어라
알록달록 고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춤추는 듯 까치발을 하고 날고 있지만,
한사코 땅에 붙어 기어 다니고 말지
뱀은 굴을 나와야 제 길이를 안다지만,
길가에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꽃뱀에 대하여 수군거린다
나는 그저 웃고 있다.
-16p


앙금으로 가라앉아


팥죽이 먹고 싶어
팥을 삶아 앙금을 냈다.
앙금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윗물은 분리되고
아래로 가라앉는 미세한 알갱이들
다시 분열이 일어난다.
용서한다고
이해한다고
화해한다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조용해진 밤이면
다시 앙금으로 가라앉는 알갱이들
팥죽으로 되기 전엔
수없이 중얼거려도
다시 앙금으로 남고
팥죽이 되기 전에는
얼굴을 마주 보고
팥죽을 먹기 전에는
앙금으로 씹힐 뿐이다.
없었던 일이 되지 못하고
팥죽은 이미
어릴 적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54p

바다


네 그리움이 철썩이면
내 그리움은 뒤척이고
맨발로, 맨발로.

네 그리움이
내 그리움을 받아 안고
처얼썩, 처얼썩.

그리움에 엉킨 가슴일랑
예다 풀고 가라고
쏴아아, 쏴아아.
-56p


손톱을 깎으며


또, 손톱을 깎는다.
한 달에 대여섯 번은 깎아야 한다.
귀찮은 일이다.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건 결벽인가.
손톱의 길이만큼 살아난 야성으로
가까운 누군가를 할퀴고
꼬집는 짓이 본성인가.
손톱을 잘라내며
맘에 자란 미움도 싹둑 잘라버린다.
후련해진다.
단정해진다.
온순해진다.
제때 손톱을 잘라내서 다스리지 못하면
제 맘대로 자라서 제 몸을 해하고,
남도 해하여 우울의 우리에 갇힐 일이다.
슬픈 외톨이를 원하지 않으므로
오늘도 단호하게 손톱을 잘라낸다.
-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