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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정본 징비록+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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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품의 분류

    책소개

    임진왜란을 겪은 유성룡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

    [징비록]은 영의정, 도체찰사 등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자리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유성룡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이다. 임진왜란에 관련한 기록으로는 국내의 [선조실록]과 [난중일기]를 비롯해 각종 [용사일기]가 있고, 중국과 일본에도 몇 가지 기록이 있으나, [징비록]처럼 임진란을 대국적으로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기술해 뒷세상에 전해준 중요한 문적은 없다. 또 유성룡은 당시 정국의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그의 이야기는 다른 누구의 기록보다도 신빙성이 높다.

    출판사 서평

    탁월한 경륜으로 국난을 극복한 지혜의 소유자, 유성룡의 기록!
    임진왜란 연구의 핵심이 되는 국보 『징비록』을 국역정본으로 만나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군국정무의 중책을 짊어지고 외교·군무·민정 등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국난을 극복하게 한 서애 유성룡의 기록인 『징비록』은 우리 역사에 드물게 보존되어온 기록문학으로서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징비록’이라는 말은 『시경』에서 따온 것으로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에 서애 유성룡의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임진란 당시의 실상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도록 『국역정본 징비록』을 펴냈다. 임진란 이전 국내의 정세에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과 전쟁 후의 상황까지,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구성된 최고의 경세서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살펴보며 이 기록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들을 되새겨볼 수 있다.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구한 대정치가 유성룡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기는 고뇌의 기록!

    유성룡은 전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의 중추기관에 참여해 난국을 처리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정국에서 물러나 지난날 성패의 자취를 세밀히 고찰, 반성하여 국가의 큰 계책을 강조했으니, 그의 애국자다운 모습이 이 책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특히 그의 유창한 필치와 탁월한 견식으로 전후 7년 동안의 조선·중국·일본 세 나라의 외교관계와 전쟁의 추이를 명쾌하고 간결하게 기술하여, 우리에게는 다시금 지나간 일을 징계하여 뒷일을 조심해야 한다는 결의를 더 한층 환기시킨다. [징비록]은 중요한 사료인 동시에 전쟁 문학의 가치도 지니고 있어,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관련 문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평생 역사 연구에 매진한 이재호 교수가 번역한 국역정본!
    충실한 번역, 상세한 설명, 다양한 사진 자료 수록!


    『국역정본 징비록』은 역사학자이자 문학박사로 평생 역사 연구와 저술, 번역에 매진해온 이재호 교수가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내용에 원문까지 그대로 실어 정본으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또 400개가 넘는 각주를 실어 기록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과 사건, 당시의 행정기관과 직책, 각종 사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본문은 『징비록』의 서문에 해당하는 ‘자서’와 ‘징비록 1, 2권’, 왜란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기록인 ‘녹후 잡기’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으로 ‘징비록 관련 연표’와 ‘서애 유성룡 연보’, ‘임진왜란 관련 지도’를 넣었다. 또한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그림, 현존하는 유적과 유물 등 다양한 사진 자료 등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징비록의 주요 내용

    1) 전쟁 전 조선·일본 두 나라의 관계
    우리나라는 일본과 2백 년 동안 국교를 계속해왔다. 선조 19년에 일본의 사신 귤광강(다치바나 야스히로)이 평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는데 인동 고을을 지나다가 창 잡은 사람을 흘겨보고 조소하며 “너희들 가진 창의 자루가 몹시 짧구나”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예조판서가 잔치를 준비해 대접했는데, 광강이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놓으니, 기생과 악공이 서로 다투어 줍느라 좌석의 질서가 없어졌다. 광강이 숙소에 돌아와 탄식하며 통역관에게 “너희 나라가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것은 전쟁 전에 우리나라의 무비가 소홀하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함을 적국의 사신이 이미 탐지하고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2) 관군의 붕괴와 민중의 분기
    선조 25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니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은 임무를 지켜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수신·진장들은 모두 소문만 듣고서 도주했으니, 관군은 총 붕괴의 상태에 이르렀다. 전란이 일어나자 민심은 극도로 동요해 서울에서는 장례원과 형조 등의 관아와 모든 궁궐을 불살라버렸고, 지방에서는 곳곳에 난민이

    조선 최고의 재상 서애 유성룡의 삶을 통해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의 모습을 재조명하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당쟁이라는 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유성룡의 삶을 통해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의 모습과 400년을 이어온 그의 인생철학을 재조명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여러 가지 사료와 유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유성룡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밝혀내고,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또한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유성룡의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를 대신해 정치, 행정, 병법, 경제 등 전란 내내 국정 전반을 책임진 리더로서의 역량을 제시한다. 이 밖에도 ‘양명학은 왜 비판받았는가?’ ‘의혹에 쌓인 정여립 사건’ ‘수수께끼의 일본 사신 귤강광’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 등 왜곡되어 있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놓았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따라 유성룡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戶布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유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으며,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포기해가면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민생정책을 실시한다.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군주는 정조다. [홍재전서] "일득록(日得錄)" ‘인물’조를 보면 정조는 유성룡을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 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시대에 왜 우리는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란 평가를 받은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정적으로 여기던 선조는 3일 동안 정사를 중지시킨다. [서애선생 연보]에는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대부들이 성남(城南)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하며, 시민들이 조정에서 정한 일자보다 하루를 더 철시하면서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에서 “선생의 충성과 갈력(竭力)과 주선이 없었다면 위험에 처해 쓰러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선조조의 중흥을 이룩하고서 부자, 형제 등 국민들이 서로 삶을 유지하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편안한 데 거처하며 직업에 종사하는 바가 진실로 선생의 힘이 아니고서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유성룡이 황해도에서 소금을 구워 전라도에서 쌀로 바꾸어 도성에 공급하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이 얼마이며, 그가 대동법(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들이 얼마나 됐겠는가.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타파하려 했던 유성 일어나 창곡을 약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민중은 침략자인 적군에게는 굴복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지방의 세가·대족들과 합세하고, 사족과 유생을 지도자로 삼아 이른바 ‘의병’이란 이름의 의용군을 형성하고, 이들이 조국 방위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3) 수군의 승전과 한산도해전의 의의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만을 침략한 양국 사이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동아 전국의 전쟁으로 파악하여 조선과 중국이 합세하여 공동의 적군을 격퇴시킨 방위전쟁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곧 이러한 관점에서 적군의 침범을 받은 즉시 중국에 사실을 보고하고 구원군을 보내주기를 요청했으며, 구원군이 오기 전에 자체의 힘으로 대항 방위했다.

    4) 전선의 교착과 강화 문제
    1592년 12월에 명나라에서 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제독 이여송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안주에 도착했다. 명나라와의 군사·외교 사무를 전담한 유성룡은 안주에서 이여송을 만나보고 평양 지도를 건네주면서 작전 계획을 협의했다. 이듬해 계사년 정월에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평양은 즉시 수복되었으나, 서울로 남하하는 작전은 벽제관의 패전으로 중도에서 좌절되었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는 강화 교섭을 추진했다.

    5) 강화 교섭의 실패와 정유재란
    조선 측이 강력하게 반대하는데도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추진하던 강화 교섭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대개 일본의 관백 평수길의 요구가 매우 커서 봉공뿐만이 아닌데, 명나라의 세객 심유경과 일본의 장수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은 서로 친숙하여 일을 임시변통으로 성사시키려는 실정으로, 명나라와 우리나라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오랜 시일에 걸쳐 추진하던 강화 교섭은 결국 실패해 일본은 재차 우리나라를 침범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우리나라는 즉시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사실을 알리니 강화 교섭을 추진하던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과 세객 심유경은 죄를 얻어 하옥되고, 명나라의 군대가 다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

    6) 적군의 철퇴와 수군의 최후 공격
    선조 31년, 7월에 왜적의 관백 평수길이 사망하자 조선에 있던 적장들은 모두 철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독 진린과 합세해, 순천에 있던 적장 소서행장을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기로 약속했다. 11월 I9일 조선 수군이 철귀하는 왜적을 격멸하는 최후의 결전이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유정을 달래어, 유정은 순천에서 소서행장을 공격하고,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해구를 지키고 핍박하니 행장은 사천에 주둔한 도진의홍(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도진의홍이 수로로 와서 구원하므로, 이순신은 이를 공격하여 크게 부수고 적선 200여 척을 불사르고 수없이 많은 적병을 죽였다. 이순신은 적군을 남해의 경계(노량진)까지 추격하여 몸소 독전하다가 날아오는 탄환을 가슴에 맞았다. 그는 조카 이완에게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내지 마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이완은 이순신의 명령으로 독전하여 적군에게 포위된 진린을 구원했고, 적병은 흩어져 달아났다. 이로써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은 멸적 구국한 이순신의 운명과 함께 종말을 맺었다.


    룡.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그가 임진왜란과 당쟁을 승전으로 이끈 원동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능력을 꼽을 수 있다.

    ① 위기돌파 능력 -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회피하거나 모른 체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② 비전제시 능력 -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③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④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⑤ 능수능란한 외교력 -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⑥ 유연한 사고방식 - 유성룡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⑦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목차

    징비록 서설序說 .... 4
    자서自序 .... 12

    제1권
    제1장_ 전란 전의 일본국과의 관계 .... 19
    제2장_ 우리의 국방 태세와 이순신의 기용 .... 39
    제3장_ 일본군의 침입과 서전緖戰의 붕괴 .... 53
    제4장_ 충주성의 패전과 수도의 위급 .... 87
    제5장_ 국왕의 피란과 구원군의 요청 .... 95
    제6장_ 수군의 승전과 전세의 만회 .... 167
    제7장_ 민중의 분기와 의병의 활동 .... 189

    제2권
    제8장_ 명군의 내원과 평양 수복 .... 211
    제9장_ 전선의 교착과 화의의 제기 .... 227
    제10장_ 수도 수복과 국민의 적개심 .... 257
    제11장_ 강화 실패와 정유재란 .... 271
    제12장_ 이순신의 하옥과 수군의 복몰覆沒 .... 285
    제13장_ 적군의 재침과 지방 의사의 분전 .... 299
    제14장_ 이순신의 재기와 전세의 정비 .... 305
    제15장_ 적군의 철퇴와 수군의 최후 공격 .... 321
    제16장_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의 인품 .... 335

    녹후 잡기錄後雜記
    제1장_ 전란 발생의 징조 .... 345
    제2장_ 전시 중의 각종 대비책 .... 353
    제3장_ 명·일 양국 강화 사건의 시작과 끝 .... 375

    징비록 관련 연표 .... 386
    서애 유성룡 연보 .... 393
    찾아보기 .... 401
    임진왜란 관련 지도 .... 416

    저자의 글

    제1부 전란의 시대, 칼끝에 서다
    1. 도주 길에 오른 선조 / 2. 당쟁의 시대(조선에서 양명학 서적을 처음 접하다/양명학은 왜 비판받았는가?/단숨에 승진한 배경/붕당의 조짐/의혹에 쌓인 정여립 사건) / 3. 전란의 그림자(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수수께끼의 일본 사신 귤강광/교꾼의 목을 벤 종의지/답서를 둘러싼 실랑이) / 4. 유성룡과 이순신(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이순신의 뒤늦은 출사/계속되는 이순신의 불운) / 5. 전란대비(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진관법으로 돌아가자) / 6. 임진왜란 발발(도체찰사가 되다/무너지는 조선군/운명의 탄금대 전투/패닉 상태의 선조/유성룡 파직되다) / 7. 풍전등화(연전연패/풍원 부원군에 제수되다/평양성 함락되다/무너지는 기강)

    제2부 통한의 시대, 나라를 다시 세우다
    8. 반격(계사를 올리다/평양성 패전과 탈환/배후 차단/삼도 도체찰사/행주대첩과 서울 탈환) / 9. 소강상태(강화회담과 유성룡의 반발/서울 수복의 명암/조선과 경략부의 갈등/훈련도감을 설치하다) / 10. 유성룡의 영의정 복귀(양명서를 다시 접하니/경략의 간계와 싸우다/경략 송응창을 실각시키다) / 11. 국방정책(진관체제로 복귀하다/양반도, 천인도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노비 충군에 대한 반발/벼슬길에 나가는 노비들/이몽학의 난/김덕령 연루되다) / 12. 민생정책(대동법을 실시하다/들끓는 반대론/상업을 장려하다) / 13. 정유재란 전야(기축옥사 연루자의 신원을 주장하다/강화교섭) / 14. 정유재란 발발(이순신 제거되다/원균 출진하다/파죽지세의 일본군/반격/조명연합군의 총공세) / 15. 유성룡의 실각(유성룡 공격받다/유성룡이 공격받은 이유/노량해전) / 16. 두문불출
    서애 유성룡 연보

    본문중에서

    의주로 가는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인데, 의주행은 곧 요동행을 뜻했다. 나라는 망해도 선조 자신은 살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선조의 뜻이 요동행에 있음이 분명해지면서 그대로 결정되려는 찰라, 말을 자르고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좌의정 유성룡이었다. (중략) 국왕과 대신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면 그것으로 조선은 멸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자른 것이다.
    ('1장 도주 길에 오른 선조' 중에서/ pp.18~19)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은 이해하지만 유성룡은 지금이 당파를 나누어 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쪽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열도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북쪽에서는 여진족 통합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림이 동서로 갈리고,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상황에서 운명의 해 임진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2장 당쟁의 시대' 중에서/ p.47)

    황윤길과 김성일이 계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드디어 풍신수길의 답서가 왔다. 답서가 온 것은 다행이지만 내용이 문제 투성이였다. 풍신수길의 「국서」는 통상적인 국서의 형식과는 사뭇 달랐다. 국서에 “나의 어머니께서 일찍이 나를 잉태하셨을 때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 점쟁이)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3장 전란의 그림자' 중에서/ p.65)

    이순신은 훈련원 근무 8개월 만에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좌천된다. 그러다가 선조 13년(1580) 7월 전라 좌수군 산하 발포(鉢浦, 전남 고흥군 도화면) 만호(萬戶, 종4품)로 승진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충무공 행록]은 “서애(西厓) 유 정승만이 같은 동리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로서 공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알아주었다”라고 전하고 있듯이 유성룡은 권력 실세들과 척이 져 지방으로 쫓겨난 이순신을 생각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4장 유성룡과 이순신' 중에서/ p.78)

    유성룡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해서 임란의 참화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는 김장생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장생이 만든 말은 이것뿐이 아니다. 김장생은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이발의 팔십 노모와 어린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4장 전란대비' 중에서/ p.100)

    유성룡은 서울 수복에 전쟁의 조기 종결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보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군량 확보에 많은 신경을 썼다. 명군은 군량이 준비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성룡은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공문을 보내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 중에서 전투할 수 없는 인원을 징발해 곡식운반을 맡기고, 평안도 세 고을의 관곡(官穀)을 배로 청룡포(靑龍浦)를 거쳐서 황해도로 옮겼다.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는 군사들이 행군할 연도(沿道)에 곡식을 비축해 제공하게 했다.
    ('8장 반격' 중에서/ p.190)

    선조는 유성룡이 광해군 편에 서면 자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 선조가 최선의 임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성룡은 지금 선조를 사퇴시킬 경우 국가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광해군이 즉위하면 ‘선왕파’와 ‘현왕파’로 나뉘어 극심한 정쟁이 벌어질 것이다. (중략) 유성룡은 선조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0장 유성룡의 영의정 복귀' 중에서/ p.246)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1.10.07~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출간도서 77종
    판매수 117,818권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제시하며 역사서 서술의 새 장을 열었다. 1차 사료를 중심에 두고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당대의 문제를 현재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뛰어난 강연으로 기업체를 비롯하여 중앙공무원교육원의 고위공직자 과정 최우수 강사로 선정되는 등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사학자로 평가받는다. 1차 사료 강독과 교양한국사 강의를 진행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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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월일 1542~1607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
    출간도서 28종
    판매수 10,305권

    조선 중기의 관료,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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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20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고 문학박사다. 저서는 『한국사韓國史의 비정批正』, 『조선정치제도연구朝鮮政治制度硏究』, 『한국사의 천명闡明』, 『창주산문집 滄洲散文集』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금오신화金鰲新話』, 『회재전서晦齋全書』, 『반계수록磻溪隨錄』, 『정다산문선丁茶山文選』, 『망우당문집忘憂堂文集』, 『논어정의論語正義』, 『맹자정의孟子正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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