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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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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일본 근대의 성취와 좌절의 상징

    “당신 작품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차분하고 시시덕거리지 않으며 자연 그대로의 우스꽝스러움이 점잖게 드러난 점에 고상한 정취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재가 무척 새로운 것이 눈에 띕니다. 문장이 요령을 터득하고 있으며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감탄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작품을 이삼십 편쯤 써보세요. 문단에서 견줄 이가 없는 작가가 될 겁니다. 그런데 <코>만으로는 아마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겠지요. 본다고 해도 다들 그냥 지나칠 겁니다. 그런 일에 개의치 말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세요. 대중은 안중에 두지 않는 편이 몸에 좋습니다.”
    - 나츠메 소세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한테 쓴 편지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 근대 단편 소설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스물넷의 나이에 나츠메 소세키로부터 <코>가 절찬을 받으며 일약 다이쇼 시대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 뒤 서른다섯에 음독자살로 생을 스스로 마감할 때까지 아쿠타가와는 150편이 넘는 단편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네 개의 문예지 신년호에 일제히 그의 신작이 실리기도 했다. 아쿠타가와가 선생님이라고 부른 유일한 인물인 나츠메 소세키의 안목과 격려에 부응해 그는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고 전국의 수많은 문학청년의 우상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번에 펴내는 선집은 아쿠타가와가 남긴 작품들 중 43편의 대표작을 엄선해서 연대순으로 배치해 그의 문학 세계의 변천 과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일본 고전 설화에서 제재를 취해 보편적이면서 현대적인 인간 에고이즘의 내면으로 재해석한 작품들, 에도 시대 그리스도교 박해를 다룬 기리시탄 작품들, 일상 속에서의 짧은 스케치들, 일본의 근대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 악화로 자살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의 삶을 무자비하게 조롱하고 야유하는 말년의 자전적인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아쿠타가와의 창작의 변천 과정과 작가 개인의 내면의 갈등과 불안 속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까지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쿠타가와의 단편들은 당대에도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당대에 국한되지 않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문학의 고전으로서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서양문학의 세례를 듬뿍 받고 동양 전통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던 아쿠타가와는 간결하면서도 평이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문학 창작이 세계성과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다양한 지역과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썼고, 옛 설화와 전승을 현대적인 감각과 심리주의적인 수법으로 재해석했다. 근대화에 뛰어든 일본이 맞닥뜨린 서양 문화와의 갈등과 문화적인 정체성에 대한 탐구 또한 아쿠타가와 작품의 주요 주제였다. 아쿠타가와는 인생의 아이러니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메이지 시대의 대표 작가라 할 수 있는 스승인 나츠메 소세키의 뒤를 이어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아쿠타가와가 호리 타츠오, 다자이 오사무 등의 후배 작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청년들에게 절대적인 우상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통해 그가 시대의 불안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 유명한 경구 ‘인생은 보들레르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에서 보이듯 예술과 현실을 별개로 놓고 예술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려 했던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에게 환기구의 역할을 했다.

    아쿠타가와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그의 자살은 단순히 호사가들의 취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자살은 특히 말년의 걸작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의 작품 세계 전체와 사상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도 불가결한 요소이다. 아쿠타가와의 자살은 단순히 한 작가의 자살이라는 사실을 넘어 관동대지진과 함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매진했던 일본 사회에 한 시대의 종언으로 느껴질 만큼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아쿠타가와의 자살에는 크게 두 가지 배경과 해석이 존재한다.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 자살하기 9개월 전에 쓴 <점귀부>란 자전적인 단편의 첫 문장에서 아쿠타가와는 자신의 정상적이지 않았던 성장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한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의 정신병이 발병했고 아쿠타가와는 이모의 손에 맡겨져 우유를 먹고서 성장했다. 광인의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쿠타가와의 불안과 콤플렉스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아쿠타가와는 광인이 된 어머니를 두려워하면서도 어머니한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말년의 그를 괴롭혔던 환각과 불안 증세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인 요소에 대한 공포가 주원인이었을 것이다.
    아쿠타가와는 화려한 그의 예술 속 세계와는 달리 도쿄의 서민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너저분한 거리에서 막과자를 먹으며 자란 소년이었다.’ 그곳은 ‘꽃을 피운 지붕의 풀이나 웅덩이에 비친 봄날의 구름’처럼 ‘뭔가 애처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늘 악취를 풍기는 도랑과 연중 진창이 아닌 적이 없는 길들과 그런 길 주변의 목공소, 고물상, 구멍가게 등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풍경 속에서 아쿠타가와는 성장했다. 아쿠타가와는 자신의 고향을 ‘사랑보다 연민에 가까운 것’으로 느꼈다.
    일본 교육 제도의 정점에 있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예술과 생활의 분리를 주장하며 예술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려 했던 창작의 세계 속에 그의 성장 과정과 에도 시대의 서민 정서가 짙게 남아 있는 그의 고향은 작품 속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가족과 자신의 성장에 대한 창작에서의 자기기만과 자신의 실존적 배경에 대한 배신은 말년의 자전적 작품들 속에서 갑자기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환멸과 조소가 주저음을 이룬다. 자신의 출신 계급을 날카롭게 의식했던 예민한 천재의 영혼은 예술과 생활, 근대와 전통이 교차하는 시간 속에서 균열하며 갈가리 찢기게 된다. 그리고 치명적인 자기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작가로서의 명성도 나날이 나락으로 치닫는 아쿠타가와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받쳐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자살한다.

    아쿠타가와가 남긴 자살의 이유인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근대화에 매진한 일본 사회가 한계를 드러내며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무기력하게 끝나고 파시즘으로 서서히 치닫기 시작하는 시기와 겹친다. 이후의 역사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쿠타가와의 자살의 이유를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쿠타가와의 단편들은 문학적 텍스트로서의 재미와 흥미 못지않게 비서구 세계의 한 지식인이 서양의 근대 문명과 전통 문화 속에서 어떻게 그것에 대응하고 균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그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읽어나감으로써 위태롭게 유지되던 조화가 급격한 붕괴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을 독자들은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쿠타가와가 우리의 근대문학에 끼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목차

    라쇼몬

    아버지
    참마죽
    손수건
    담배와 악마

    게사와 모리토
    지옥변
    거미줄
    개화의 살인
    그리스도교도의 죽음
    가레노쇼
    개화한 남편
    밀감
    늪지
    크리스토포루스 성인전

    요상한 노파
    마술
    무도회
    가을
    검은 옷의 성모
    난징의 그리스도
    두자춘
    아그니 신
    호색
    덤불 속
    신들의 미소
    광차
    보은기
    오긴
    시로
    아바바바바
    한 줌의 흙
    김 장군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
    점귀부
    겐카쿠 산방
    갓파
    신기루
    톱니바퀴
    어느 바보의 일생

    작가 연보
    역자 후기

    본문중에서

    하지만 이때만은 상대가 아이들이어서 얼마간 용기가 났다. 그래서 가능한 한 웃는 얼굴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놔줘라. 개도 맞으면 아프단다” 하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 아이는 돌아보며 눈을 치켜뜨고 경멸하듯이 오위의 차림새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말하자면 사무라이 대기소에서 고위 관리가, 말이 안 통할 때 이 사내를 보는 듯한 얼굴로 쳐다본 것이다. “쓸데없이 참견하기는.” 한 발 물러난 그 아이는 오만한 입술을 젖히며 이렇게 말했다. “뭐야, 이 딸기코 자식은.” 오위는 이 말이 자신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그것은 욕설을 듣고 화가 났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해서 창피를 당한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날 백모님 댁의 한 방에서 그 사람과 만났을 때 나는 한눈에 그 사람의 마음에 비치는 나의 추함을 알아버렸다.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부추기는 이런저런 다정한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한번 자신의 추함을 알아버린 여자의 마음이 어떻게 그런 말에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 여자의 일생은 이것 외에 무엇 하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대체로 인간 세상의 존귀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찰나의 감동 이상은 없다. 어두운 밤바다로 비유되는 번뇌하는 마음의 하늘에 하나의 물결을 일으켜 아직 뜨지 않은 달빛을 물거품 속에 담고서야 살아갈 보람이 있는 목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렌조의 최후를 아는 자는 로렌조의 일생을 아는 자가 아닐까.

    그녀는 열띤 눈빛으로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촌 오라버니는 대답하는 대신 구르몽의 경구를 읊었다. 그것은 “뮤즈들은 여자니까 그들을 자유롭게 포로로 삼는 자는 남자뿐이다”라는 말이었다. 노부코와 데루코는 동맹하여 구르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여자가 아니면 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건가요? 아폴로는 남자 아닌가요?” 데루코는 진지하게 이런 말까지 했다.

    헤이추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마침내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는 엷은 주황색 물이 절반쯤 넉넉히 담겨 있고 그 가운데 짙은 주황색 덩어리 두세 개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 정향나무 향기가 꿈처럼 코를 찔렀다. 이것이 시종의 변일까? 아니, 길상천녀도 이런 변을 볼 리가 없다. 헤이추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장 위에 떠 있는 두 치 정도의 덩어리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콧수염에 닿을 정도로 몇 번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냄새는 틀림없이 침향나무 냄새다.

    “너는 이제 돌아가. 우리는 오늘 저쪽에서 묵을 테니까.”
    “너무 늦게 돌아가면 네 집에서도 걱정할 거야.”
    료헤이는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벌써 그럭저럭 어두워졌다는 것, 작년 말에 어머니와 이와무라(岩村)까지 가봤지만 오늘 온 길은 그보다 서너 배가 된다는 것, 그 길을 지금부터 혼자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을 한꺼번에 깨달은 것이다. 료헤이는 거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울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료헤이는 젊은 두 인부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지체 없이 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야스키치는 여자를 뒤로 하며 자기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여자는 이제 ‘그 여자’가 아니었다. 배짱이 좋은 한 어머니가 된 것이다. 예로부터 일단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서슴지 않는 무서운 ‘어머니’가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물론이고, 여자를 위해서는 온갖 축복을 다 해주어도 좋다. 하지만 소녀 같던 아내 대신 뻔뻔스러운 어머니를 발견한 것은······

    오스미는 손자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중에 그녀 자신이 점점 무정한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또 그녀와 악연을 맺은 아들 니타로와 며느리 오타미도 무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순식간에 9년간의 증오나 분노를 밀어냈다. 아니, 그녀를 위로했던 장래의 행복조차 밀어냈다. 그들 세 사람 모두 무정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중 혼자 살아남아 수치를 당한 그녀 자신이 가장 무정한 인간이었다.

    그는 너저분한 거리에서 막과자를 먹으며 자란 소년이었다. 시골은, 특히 논이 많은 혼조 동쪽에 펼쳐진 시골은 그렇게 자란 그에게 조금도 흥미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추악함을 직접 보게 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혼조의 거리는 비록 자연이 부족했다고 해도 꽃을 피운 지붕의 풀이나 웅덩이에 비친 봄날의 구름에 뭔가 애처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런 아름다움 때문에 어느새 자연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젊은 그의 숙모는 새해 인사인가 뭔가로 집에 왔다가 젖이 불어 고통스러워했다. 양치질할 때 쓰는 놋쇠 사발에 아무리 짜도 젖은 나오지 않았다. 숙모는 얼굴을 찡그린 채 반쯤 놀리듯이 “신스케, 네가 좀 빨아줄래?” 하고 말했다. 하지만 우유를 먹고 자란 그는 물론 빠는 방법을 알 리 없었다. 숙모는 결국 옆집 아이, 즉 움막을 짓거나 목욕통을 만드는 목수집의 여자아이에게 딱딱한 젖을 빨게 했다. 유방은 부풀어 오른 반구 위에 푸른 정맥을 내비치고 있었다. 부끄럼을 잘 타는 신스케는 설령 빠는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도저히 숙모의 젖을 빨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역시 옆집 여자아이가 미웠다. 동시에 또 옆집 여자아이에게 젖을 물린 숙모가 미웠다. 이 작은 사건은 그의 기억에 울적한 질투만을 남겼다.

    실제로 그는 인생을 알기 위해 거리의 행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행인을 바라보기 위해 책 속의 인생을 알려고 했다. 그것은 어쩌면 인생을 아는 데 멀리 돌아가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리의 행인은 그에게 단지 행인에 불과했다. 그들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증오를, 그들의 허영심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초인적 연애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저런 가정의 모습을 보면 역시 부럽다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모순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톡은 환한 달빛 아래에 가만히 팔짱을 낀 채 그 조그만 창 너머를, 평화로운 갓파 다섯 마리의 저녁 식탁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기 있는 계란말이는 누가 뭐래도 연애보다 위생적이거든.”

    이 고명한 한학자는 이런 내 이야기에도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말하는 중에 점점 병적인 파괴 욕망을 느끼고 요순(堯舜)을 가공의 인물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춘추(春秋)]의 저자도 훨씬 나중의 한나라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한학자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전혀 보지 않고 거의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이 내 이야기를 잘랐다.
    “만약 요순도 없었다고 하면 공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네. 성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하지만 나는 잠시 후 내 왼쪽 벽에 걸린 나폴레옹 초상화를 발견하고 슬슬 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아직 학생이었을 때 그의 지리 공책 마지막에는 ‘세인트헬레나, 작은 섬’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말하듯이 우연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폴레옹 자신에게도 공포를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했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책등의 글자를 읽어나갔다. 거기에 늘어서 있는 것은 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기말 그 자체였다. 니체, 베를렌, 공쿠르 형제, 도스토옙스키, 하웁트만, 플로베르······
    그는 어둑함과 싸우며 그들의 이름을 헤아려 나갔다. 하지만 책은 저절로 울적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끈기도 다하여 서양식 사다리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러자 마침 그의 머리 위에서 갓 없는 전등 하나에 돌연 불이 켜졌다. 그는 사다리 위에 선 채 책 사이를 움직이고 있는 점원과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작았다. 뿐만 아니라 참으로 초라했다.
    ‘인생은 보들레르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나는 잠시 사다리 위에서 이런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자동차를 탄 후 그녀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신은 후회 안 해요?”라고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후회 안 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으며 “저는 후회하지 않지만”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런 때도 달빛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저자소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892~1927
    출생지 일본 도쿄
    출간도서 52종
    판매수 6,562권

    소설가. 도쿄 출신.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 영문과에 진학. 재학 중 교우들과 제3차 『신사조』를 창간. 「코」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격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1917년 제1창작집 『라쇼몬(羅生門)』으로 신진 작가로서 지위를 굳혔으며, 기교적이고 이지적인 방법과 형식으로 근대적 감각과 해석을 시도하였다. 작품의 제재도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다루었는데 「라쇼몽」, 「코」,「덤불 속」 등 고전을 근대적으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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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대학에서 강의하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을 비롯해 『환상의 빛』『십자군 이야기』『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세설』『말의 선물』『금수』 등이 있다. 2016년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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