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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의 길을 가다 :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일군 아름다운 200년의 외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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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서인범
  • 출판사 : 한길사
  • 발행 : 2018년 11월 30일
  • 쪽수 : 80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3566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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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조선시대 대일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통신사가 걸은 2,000킬로미터 길을 쫓으며 적국(敵國) 일본을 대한 그들의 지혜를 담아낸 역사답사기

    [통신사의 길을 가다]는 저자 서인범(동국대학교 교수, 사학과)이 총 길이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통신사의 길을 직접 따라가며 조선시대 대일외교의 본질과 지혜를 문학적 문체로 유려하게 서술한 ‘역사답사기’다. 철저한 사료 조사에 현장에서 만난 많은 이와의 인터뷰, 박물관 견학 등이 더해져 역사적 진실에 최대한 근접하면서도 생생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이 적국(敵國)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정상화하고 각종 문제를 풀어냈는지 집중적으로 다루어, 오늘 첨예하게 대립 중인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통신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부산에서 출발해 쓰시마(對馬島)와 세토나이카이(瀨戸內海), 오사카와 교토를 지나, 도쿄(에도)에 도착한 뒤, 닛코(日光)를 방문하기까지 통신사가 지나간 주요 경유지 58곳을 직접 답사해 통신사 관련 저서 중에서도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여행기로서도 충실해 400여 개에 달하는 현장 사진과 도판을 싣고, 통신사가 걸은 길을 인포그래픽 형식의 지도로 만들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출판사 서평

    연행사의 길에서 이어진 통신사의 길
    [통신사의 길을 가다]는 저자의 전작 [연행사의 길을 가다](2014, 한길사)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다. 연행사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으로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 중국 사이의 각종 외교 현안, 가령 압록강의 영토 문제, 왕세자 책봉 문제 등을 해결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한 위상을 생각하면 연행사는 굉장히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런데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도 파견되었으니 바로 통신사다. 당시 조선이 적국 일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통신사 파견은 전적으로 일본의 요청에서 시작된 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권력이 재편된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회복을 가장 중요한 일로 꼽았다. 조선과 일본을 중계하며 먹고 살았던 쓰시마의 노력이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 이에야스의 국제정세 판단이 한몫했다. 그는 조선과 관계를 회복하고 문물을 교류하는 게 일본의 국익을 위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관동(関東)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년의 일에 대해서 미리 알지 못했소. 지금은 히데요시의 잘못을 바로잡았소. 진실로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소. 화친하기를 바라오.” _ 23쪽

    1607년의 첫 파견 이후 200여 년간 통신사는 총 12번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의 요청으로 파견된 통신사지만 그들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을 대할 때보다 급을 낮춘 건 사실이지만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고려했을 때 상식적인 처사였다. 조선도 일본과의 관계회복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일본이 아우의 처지로 조선과 중국에 잘 대하길 바랐을 뿐이다. 물론 일본은 늘 조선과 대등하게 대접받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쪽이 사신 파견을 먼저 요청하는지, 호칭은 어떻게 정리하는지 등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이 끊이질 알았다. 두 국가의 이해가 부딪히는 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통신사는 국익을 위해, 또 두 국가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부단히 애썼다.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오는 데는 최소 반년, 길게는 1년까지 걸렸다. 따라서 당시 외교는 요즘처럼 비행기를 타고 가서 장관이면 장관, 총리면 총리, 대통령이면 대통령을 만나고 오는 방식과는 개념부터 달랐다. 통신사가 길에서 막부 관료와 일본인을 수없이 만나는 일 자체가 넓게 보아 외교였다. 당시 외교를 논하며 ‘길’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는 통신사의 길을 따라 40일간 총 2,0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단일 학자의 통신사의 길 답사로는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성과도 컸다. 몇몇 박물관의 수장고에 직접 들어가 통신사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촬영하는 역사학자로서 잊지 못할 경험도 했다. 그런 노력으로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여러 도판을 책에 실을 수 있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도 생생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통신사처럼 수많은 일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여전히 통신사를 기억하고, 통신사의 행차를 기념한 축제를 열고 있었다. 그들의 입이 아니었다면 기존 사료의 빈 곳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생하게 복원한 통신사의 외교 여정
    [통신사의 길을 가다]는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순간부터 화려한 에도성에서 장군을 알현하는 긴장된 순간까지 한 번 읽으면 잊지 못할 통신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제1부 떨리는 마음으로 닻을 올리다
    제1부는 부산에서 하카타까지 다룬다. 통신사는 쓰시마와 이키시마를 거쳐 일본 근해에 도달했다. 험한 바다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부산에서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쓰시마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중재자 역할을 한 쓰시마번주를 만났다.
    저자는 쓰시마번과 조선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쓰시마는 척박한 섬이었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할 수 없었다. 쓰시마번주가 조일의 관계회복을 앞장서 이끈 이유다.
    그렇다고 쓰시마번이 조선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린 건 아니다. 아주 당당히 요구할 건 요구하고 불만을 표할 건 불만을 표했다. 심지어 조선이 벼슬을 내리고 양식을 주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은 이런 쓰시마번의 행태에 불쾌해하면서도 일본과 조선 사이에 낀 그들의 중계자적 처지를 이해해주고 마치 동생을 대하듯 어울렀다.

    “쓰시마는 조선의 한 고을과 같다. 태수가 도장(圖章)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명령을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의 의리가 있다”(제8차 통신사 종사관 이방언의 기록). _ 89쪽

    - 제2부 외해를 건너니 내해가 펼쳐지다
    제2부는 시모노세키에서 고베(효고)까지 다룬다. 시모노세키의 격류를 지나면 일본의 내해, 즉 세토나이카이가 나온다. 통신사는 배를 타고 세토나이카이를 지나며 바닷가의 숙장들에서 휴식을 취했다. 저자는 통신사가 극진히 대접받았음을 생생히 묘사한다. 특히 일본의 유력자들이 앞다투어 통신사를 찾아왔는데, 조선인의 글과 그림이 귀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만남에서 조선은 일본을, 일본은 조선을 탐색하고자 했다. 통신사가 걷는 길 자체가 늘 외교현장이었던 것이다.

    “구름이 지나가고 달이 솟으매 만경창파가 비단을 펼친 듯하다. 수많은 돛단배가 언덕 아래에 정박하고는 점점이 등을 달아 곧 하계(下界)의 별빛이 되었다.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을 오르는 기분이 들게 한다”(제10차 통신사 종사관 조명채의 기록). _ 212쪽

    - 제3부 드디어 일본 땅을 밟다
    제3부는 오사카에서 세키가하라까지 다룬다. 오사카에 도착한 통신사는 얼마간의 수로 항해를 마친 후 드디어 육로를 걷기 시작한다. 통신사는 보통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걸었는데, 천년 고도 교토의 번화함과 비와호(琵琶湖)의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자는 교토에서 통신사가 묵은 여러 사찰을 답사했다. 특히 교토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찰이 많았는데, 규모가 큰 사찰이라면 대부분 통신사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중에는 이총(耳塚), 즉 왜란 당시 일본군이 벤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 있는 곳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이총을 만들며 이에야스의 자비로움을 찬양했으니, 통신사는 이총이 있는 사찰에 묵기 거부함으로써 항의의 뜻을 밝혔다.
    이후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를 지난 통신사는 나카센도를 벗어나 나고야로 향했다. 그 분기점에서 일본 역사의 변곡점을 몸소 느꼈으리라.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조선반도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패퇴로 끝났다. 이 이총은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에 전하고 있다”(교토 도요쿠니신사 근처의 이총 앞 안내판의 내용). _ 363쪽

    - 제4부 내처 걷는 발걸음에 관동을 가로지르다
    제4부는 오가키에서 미시마까지 다룬다. 저자는 통신사가 나고야부터 일본의 5대 가도(街道) 중 하나인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걸었음을 밝힌다.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은 이후 길을 닦기 위해 도카이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통신사는 소나무 그늘 밑을 걸으며 시원하게 에도로 향할 수 있었다. 길에서 후지산도 볼 수 있었는데, 압도적인 크기에 감격하면서도 금강산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드러낸 이가 적지 않았으니, 일본에 대한 경쟁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물론 통신사가 늘 풍경이나 구경하며 마음 편히 이동한 것은 아니다. 아라이관소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관소를 지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제1차 통신사는 장군에서 물러나 오고쇼(大御所)가 된 이에야스를 알현하기도 했다. 저자는 도카이도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도카이도53차]를 실었다.

    “이에야스는 관복을 갖추고 서협당(西俠堂)에 앉았다. ……예를 끝내고 나오는데 관복을 갖추고 외당(外堂)에서 문안드리는 왜관(倭官)이 얼마인지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형체는 장대했으며, 기력은 쇠로(衰老)하지 않았다”(제1차 통신사 정사 여우길의 기록). _ 532쪽

    - 제5부 에도에 들어가 장군을 알현하다
    제5부는 하코네에서 닛코까지 다룬다. 에도를 지키는 마지막 관문 하코네관소를 지난 통신사는 드디어 에도에 도착, 장군을 알현한다.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은 뒤 그 형식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을 마칠 때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장군이 요청한 마상재를 공연하고, 이에야스의 사묘가 있는 닛코에 참배하는 일 모두 외교전의 연장선에 있었다.
    특히 제4차 통신사가 파견되었을 때는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이 벌어졌다. 쓰시마번주가 조선과 일본의 관계회복을 위해 국서를 위작한 일이 폭로된 사건이다. 조선의 임금과 일본의 장군이 주고받는 국서의 내용에 손을 댔으니 양국에 어떤 후폭풍이 미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정사 임광은 쓰시마번주가 계속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그의 위신을 높여주려 각종 요구를 수용했다. 통신사의 닛코 참배도 이런 이유에서 성사된 일이다.
    저자는 그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놓칠까 부지런히 답사를 이어갔다.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통신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단청한 벽과 금칠한 기둥은 광채가 눈부셨다. 지극히 웅장하고 수려했다. 통신사는 국서를 정청에 봉안했다. 사찰이 거대해 일행이 모두 한 구내(構內)에 체재했다. 대소 수백 명이 기거했다. 잠자는 곳, 부엌, 측간 등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뜰에는 연못을 만들었고 못가의 작은 언덕에는 화초를 심었다”(제9차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의 기록). _ 641쪽

    - 제6부 우여곡절 끝에 귀환하다
    제6부는 통신사의 귀환 여정을 그린다. 대부분 통신사가 홀가분하게 돌아와 임금에게 복명(復命)함으로써 파견을 마무리했지만, 큰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일행의 죽음이었는데, 병에 걸리거나 해로에서 폭풍에 휘말려 죽는 이도 있었지만,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이도 있었다. 제11차 통신사의 도훈도(都訓導) 최천종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사 조엄은 간단히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먼저 부산에 보내는 동시에,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일본을 굉장히 압박했다. 결국 범인을 잡아 참수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된다.

    “통신사의 수행원을 죽인 것은 진실로 일본의 크나큰 수치다. 통신사는 장군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왔는데, 그 일행에게 이처럼 흉악한 일을 저지른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당연히 이 일로 쓰시마 사람 중에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인심을 잃은 자가 많았다”(저자). _ 723쪽

    ‘성’(誠)과 ‘신’(信)으로 관계를 회복한 조선과 일본
    답사 내내, 또 일본에 머물며 원고를 탈고한 반년간 저자는 조선이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는지 깊이 탐구하고, 이를 오늘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산적한 외교 문제를 푸는 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당시 통신사가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피로인(被虜人), 즉 왜란과 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다시 데리고 오는 일이었다. 조선의 요구에 일본이 바로 사과하고 그들을 보내준 것은 아니나 나름 성의를 보였다. 군대가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오늘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으므로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하니 400여 년 전보다 태도가 후퇴했다.
    저자가 일본을 답사했을 2017년은 위안부 문제에 북핵 문제까지 겹쳐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어느 때보다 안 좋았을 시기다. 그가 통신사의 길에서 만난 많은 일본인이 ‘계속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면 곤란하다’거나 ‘양국이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러던 중 NHK에서 방영한 한 다큐멘터리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고백: 만몽(滿蒙) 개척단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만주로 들이닥친 소련군이 만주 개척단의 일본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최전선에서 이끌었던 이들이 ‘성’(誠)과 ‘신’(信)을 강조한 이유를 찾는다. 정성과 믿음으로 인내하고 끈기 있게 상대를 대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풀지 못할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말한 것이다.
    누군가는 오늘 동북아를 화약고에 비유한다. 특히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이후 정치적인 교류는 완전히 멈췄다고 할 정도다. 당연한 얘기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 우리가 다시 한번 통신사의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다.

    목차

    통신사의 길 전체 경로
    답사길 전체 경로
    동조궁의 잠자는 고양이 | 머리말
    통신사는 누구인가

    제1부 떨리는 마음으로 닻을 올리다
    부산 → 하카타 구간 세부 경로
    1 부산에서 만난 통신사
    2 왜관의 자취는 사라지고
    3 해신제를 지내며 출항의 안전을 기원하다
    4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다
    5 물마루를 넘어 쓰시마로
    6 조선과의 관계를 생명처럼 여긴 쓰시마번
    7 조선인의 심성을 간파한 호슈
    8 조선과 쓰시마번, 좁혀지지 않는 거리
    9 원나라군의 흔적이 남은 이키시마
    10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 나고야성
    11 고양이의 천국 아이노시마

    제2부 외해를 건너니 내해가 펼쳐지다
    시모노세키 → 고베 구간 세부 경로
    12 시모노세키의 격류를 거스르다
    13 천혜의 양항 가미노세키
    14 통신사 기록의 보고 조코관
    15 시모카마가리지마의 진수성찬
    16 일본 제일의 경승지 토모노우라
    17 사람과 신이 공존하는 이쓰쿠시마
    18 일본의 에게해 우시마도
    19 산킨코타이의 거점 무로쓰
    20 일본의 국보 히메지성
    21 통신사의 객관을 찾아 고베를 누비다

    제3부 드디어 일본 땅을 밟다
    오사카 → 세키가하라, 다카쓰키 구간 세부 경로
    22 바다와 육지를 연결한 오사카
    23 활력 넘치는 관광명소 도톤보리
    24 마지막 물길 50리
    25 수로 항해의 종착지 요도천
    26 백성의 피와 땀이 서린 후시미성
    27 천년 고도 교토의 사찰을 둘러보다
    28 니조성에서 조선 호랑이를 만나다
    29 조선인의 한이 서린 이총
    30 선의후리를 고집한 오미하치만의 상인들
    31 가문을 지켜낸 천하의 여걸 나오토라
    32 호슈의 고향 다카쓰키정
    33 역사를 바꾼 세키가하라전투

    제4부 내처 걷는 발걸음에 관동을 가로지르다
    오가키 → 미시마 구간 세부 경로
    34 배 300척을 연결한 기소천의 부교
    35 성 중의 성 나고야성
    36 오카자키성에서 이에야스를 만나다
    37 후지카와숙에서 요시다숙까지
    38 금절하에서 보여준 조선 관원의 기개
    39 후지산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다
    40 건너려야 건널 수 없는 오이천
    •「도카이도53차」로 보는 에도시대의 풍경
    41 슨푸의 오고쇼는 건재하다
    42 통신사를 감동케 한 절경 중의 절경 청견사
    43 쓰나미가 요시하라숙을 밀어내다
    44 통신사 대접에 최선을 다한 미시마숙

    제5부 에도에 들어가 장군을 알현하다
    하코네 → 닛코 구간 세부 경로
    45 에도 방어의 최전선 하코네관소
    46 난공불락의 오다와라성이 함락되다
    47 오이소의 고려인 마을
    48 요코하마의 밤을 밝히는 랜드마크타워
    49 시나가와에서 관복으로 갈아입다
    50 풍악을 울리며 입성한 에도성
    51 장군을 알현하다
    52 금빛 찬란한 닛코의 동조궁
    53 장군이 사랑한 마상재
    54 나라를 뒤흔든 야나가와 잇켄
    55 장군은 일본국왕인가 대군인가

    제6부 우여곡절 끝에 귀환하다
    56 피로인의 슬픔을 누가 달래줄까
    57 오사카의 원혼이 된 최천종
    58 수행원의 다툼과 죽음
    59 임금 앞에 복명하다

    역사 해석의 간극 | 맺는말
    통신사의 길에서 만난 한·중·일 118인
    역사용어·역사지명 풀이 113선
    표로 정리한 통신사 파견
    통신사 관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목록

    본문중에서

    통신사는 ‘믿음을 통하는 사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p.28)

    윤안성은 임란 때 도굴당한 선릉과 정릉의 능묘에 심은 소나무에 아직 가지도 나지 않았는데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해냈다. 조정 대신들은 새로이 등극한 장군이 다이묘들에게 권위를 세우기 위해 통신사를 청한 것이라며 파견 중지를 극렬하게 아뢰었다. 마치 조선이 장군을 후원하는 것처럼 이용된 데 대해 원망하고 후회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향한 복수심을 해소했다며 자조하는 이도 있었다.
    길 떠나는 통신사에게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라는 부담 외에도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많은 이가 이를 두려워했다. 항법장치나 기상예보, 철선(鐵船)이 없는 시대였기에 당연했으리라.
    (/ p.46)

    숙종 33년(1707) 부장 송중만이 감옥(甘玉)이라는 조선 여인을 데리고 몰래 왜관에 들어가 일본인과 매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은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고 실제로 감옥과 송중만은 왜관의 문밖에서 사형당했다. 하지만 왜관 관리의 총책임자인 관수왜(館守倭)가 일본인의 사형을 거부했다. 동래부사가 외교 의례의 기본을 무시한 무례한 행위라며 강력하게 비난했으나 죄를 범한 일본인은 결국 쓰시마로 건너갔다. 그는 양국에 분쟁을 일으켰다는 죄명으로 벌을 받았으나 사형은 아니었다.
    (/ p.54)

    제사를 마치면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새벽하늘에 별과 은하수가 찬란했을 것이다. 그 아래 바다와 산이 아름다움을 다투었으리라. 뱃사람들은 오늘 제사로 신이 취하고 배불렀을 것이라며 떠들어댔다. 불안을 애써 억누르고 싶은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신유한이 해신제를 지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해신제를 준비하며 목욕재계한 신유한이 꿈을 꿨는데, 훌륭한 장부가 나타나 ‘유’(酉) 자를 크게 써 보였다. 잠에서 깨어난 신유한은 꿈이 괴이하다고 여겼다. 점치는 자에게 자신이 태어난 해의 간지干支가 ‘신유’(辛酉)인데 이런 꿈을 꿨다고 얘기하자 상서로운 징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 일행의 배는 공교롭게도 ‘신유(辛酉)일’에 순풍을 만나 출항했고, ‘계유(癸酉)일’에 오사카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 쓰시마에서 신유한은 동료들에게 정월 6일에 부산에 도착할 것이라고 은근히 얘기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순풍을 만나 정월 6일인 ‘계유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모든 동료가 신기해했다. 신유한은 용부(龍府)의 어른이 글자를 써서 자신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라며 특이한 일이라 여기고는 기록으로 남겼다.
    (/ p.66)

    지금이야 비행기든 배든 두 시간 정도면 일본에 도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길면 1년도 걸리는 길이었다. 중간중간 위험한 일도 많았는데, 특히 해로에서 나쁜 날씨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연히 통신사를 떠나보내는 가족들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통신사가 출항을 앞두고 부산에 체류하고 있으면, 아내와 자식은 물론이고 친척들까지 동래에 모여 배웅했다. 가족과 작별할 때 슬픈 마음을 억누르느라 힘들어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임금에게 부여받은 임무가 막중해 겉으로 괴로움을 드러낼 수 없었다. 더욱이 한 번도 배를 탄 적이 없는 삼사와 원역들은 험난한 망망대해를 건널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 p.73)

    해신제를 지내고 출항한 통신사의 배도 순조롭게 쓰시마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쓰시마에 도착하려면 북동풍이나 북서풍이 불어야 했다. 정사 필이 탄 배는 출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풍을 만났다. 바람이 크게 불어 배를 흔들고 거센 물결이 하늘로 치솟았다. 뱃사공이 중심을 잃어 배가 일순 기우뚱했다. 배가 솟을 적에는 하늘에 닿는 듯하고, 꺼질 적에는 구천(九泉)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배를 때리다가 부서지는 파도가 흩날리는 눈 같았고, 갑판으로 쏟아지는 격한 물결이 장대비 같았다. 얼마나 항해했을까? 키가 부러졌다며 난리가 났다. 준비해온 예비키로 대체했으나 얼마 못 가 또다시 부러졌다. 키 없는 배는 제자리를 빙빙 맴돌기만 했다. 배에 물이 차 갑판에 스밀 정도였다. 예물과 짐이 몽땅 젖었다. 그릇은 떠내려가 남은 것이 없었다.
    (/ p.79)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과 같다. 태수가 도장(圖章)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명령을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의 의리가 있다. 예조참의, 동래부사와 더불어 대등하게 문서를 교환하니, 즉 그 등급이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법에 경관(京官)으로 일이 있어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은 존비를 막론하고 번신과 더불어 한자리에 앉아 서로 경의를 표하게 되어 있다.”
    (/ p.89)

    신유한과 호슈가 갈등만 빚었던 것은 아니다. 한번은 호슈와 필담하며 신유한이 시를 지었다.

    오늘 밤 정을 둔 이 나를 전송하게 되면
    이승에 다시 그댈 만날 길이 없겠구려

    호슈는 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강심장의 그가 아녀자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신유한은 그가 작은 섬의 서기(書記)로 살다가 늙어 죽게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우는 것이라 여겼다. 자기 자신의 처지가 슬퍼 운다는 것이다.
    (/ p.112)

    이처럼 쓰시마번은 많은 부분, 특히 생존에 직결되는 물품을 조선에 크게 의존했다. 이러한 관계였는데도 조선과 쓰시마번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다. 쉽게 말해 쓰시마번이 조선에 그리 순종적이지 않았고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쓰시마번주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어 의심을 사는 일이 많다는 걸 이유로 들었다.
    (/ p.119)

    가쓰모토항은 이키시마의 최북단에 있는 항구인데 오징어를 집하하는 곳이다. 구사노 씨가 차를 몰고 가는 중에 길가에서 비석을 발견했다. 차를 멈추고 확인해보니 원구를 기록한 비석이었다. 첫 번째 원구는 1274년, 두 번째 원구는 1281년으로 원나라 쿠빌라이가 고려군과 연합해 일본을 공략했다. 전투는 규슈 북부지역에서 벌어졌다. 1274년에 원나라군과 고려군은 쓰시마를 거쳐 이키시마로 진출했다. 이키시마주는 100여 명의 기병으로 항전했으나 크게 패했다. [고려사]에도 고려군이 일본군 1,000명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격전지였던 이곳에 묘를 조성해 천인총(千人塚)이라 불렀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 p.124)

    여러 의문이 교차했다. 겐소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는데도 조선은 어째서 나고야성에 버젓이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가 축조되는 모습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을까?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우리나라 어부들조차 이들의 동향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까? 왜구의 해적질이 뜸해지자 근심이 아예 사라진 것이었을까? 조선은 기본적인 해안 방위태세도 갖추지 못했던 것 아닐까? 동래부사와 첨사는 어째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을까? 조선은 쓰시마번에 그 많은 곡물을 공급해주면서도 일본의 움직임을 엿볼 생각은 어째서 하지 못했을까? 여러 생각에 호흡이 가빠졌다. 최소한 쓰시마나 규슈 일대에라도 첩자를 파견해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고 준비했다면 백성이 그 오랜 세월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 p.138)

    작은 섬인 아이노시마는 통신사와 수행원 400~500명, 쓰시마번의 무사와 부하 400~600여 명, 후쿠오카번의 무사 등 대략 2,000여 명의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객관은 인부 3,500여 명을 동원해 통신사가 올 때마다 신축했다. 동서 117미터, 남북 126미터로, 크고 작은 저택
    24동, 대략 1,000칸의 규모였다. 정원의 대나무는 교토에서 공수해왔다. 객관에는 무려 시계도 있었다. 삼사는 객관으로 들어갔다. 웅장하고 화려함이 이키시마의 객관보다 몇 배나 훌륭했다. 병풍과 장막 등의 기물도 대단히 사치스러웠다.
    (/ p.145)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이곳의 요리사들은 조선인의 입맛에 맞게 조리하려 노력했다. 조선인이 좋아하는 해산물을 듬뿍 썼음은 물론이고, 통신사가 체재한 지역 중에서 유일하게 마늘을 사용했다. 조선의 육식문화를 고려해 돼지, 사슴, 토끼 고기 등도 사전에 준비했다. 통신사 수행원 중에 도우장(屠牛匠) 한 명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소를 잡는 이였는데, 격군이 겸직했다. 쓰시마번에서도 조선인이 고기를 먹는 사실을 알고 소를 내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해행총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 p.159)

    통신사가 가미노세키에 입항하면 조슈번이 총괄하고 이와쿠니번(岩国藩)이 보조해 접대했다. 정사 조태억이 행차했을 때 조슈번의 관선(関船), 통선(通船), 소조선(小早船) 등 배 650척, 백성 4,566명이 동원되었다.
    숙박은 오차야, 아미타사, 명관사(明関寺)에서 해결했다. 물품이 부족한 경우에는 오사카에서 구매해 가지고 왔다. 배와 백성은 무로쓰나 근처 마을에서 징집했다. 집을 짓는 재료인 나무, 대나무, 끈, 덩굴풀을 모으고, 매의 먹이로 비둘기 2,000마리, 참새 1,000마리, 메추라기 123마리를 장만했다. 통신사가 먹을 것으로는 닭 150마리, 계란 500개, 돼지 한 마리를 준비했다. 물이 부족해 히로시마의 미하라(三原)에서 식수를 길어 배 100척을 동원해 운송했다.
    (/ p.177)

    마침 점심시간이라 라면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면서 조코관의 개관을 기다렸다. 1945년에 준공된 조코관은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앞으로 냇가가 흘러 아늑했다. 마침 꽃축제가 열려 경치가 더 아름다웠다. 모란을 중심으로 50여 종류의 꽃이 만발했다. 사무실로 들어가 명함을 건네자 직원 두 명이 응대해주었다. 마쓰오카 토모노리(松岡智訓) 부관장과 가네다 카즈야(兼田和㢱) 학예사였다. 우리를 본관 옆의 건물로 안내했다. 창고이자 수장고였다. 그들은 이미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1748년의 아이노시마 지도, 가미노세키 오차야 도면, 통신사가 지은 한시가 적혀 있는 두루마기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바로 눈앞에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졌다. 마쓰오카 부관장은 사료가 혹시 손상될 까봐 신중하게 다루었다. 가미노세키 오차야의 도면은 생각보다 컸다. 몇 개의 책상을 이어붙인 끝에 완전히 펼칠 수 있었다. 한시가 적힌 두루마기는 더 길었다.
    (/ p.186)

    히로시마번은 정사 홍계희 일행을 시모카마가리지마에서 다음 행선지인 토모노우라(鞆の浦)까지 호위하기 위해 배 334척, 선원 2,781명을 동원했다. 삼사의 배에는 여러 종류의 배가 각각 여섯 척씩, 복선에는 네 척이 따라붙었다. 조선국왕의 증정품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배 83척, 선원 587명을 더 동원해 총 배 439척, 선원 3,508명의 거대한 선단을 이루었다.
    그렇게 많은 호위선과 인원이 붙었지만 항해는 여전히 위험했다. 정사 윤지완이 카마가리지마에 도착했을 때 험한 꼴을 당한 적도 있었다. 갑자기 조수가 여울같이 밀려와 사람의 힘으로 배를 제어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닻을 내리라고 소리쳤다. 종사관 박경준이 이를 따르지 않고 사공들을 격려해 노를 젓게 했다. 북을 치며 세 번 앞으로 나아갔으나 뱃머리가 빙글 돌아 배를 제어하지 못했다. 일본 배들이 황급히 노를 저어 구하러 갔다가 조선 배에 부딪혀 선체가 부서졌다. 결국 여울이 잦아진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포구에 도착하자 윤지완은 즉시 부사와 종사관이 탄 배의 선장과 도훈도(都訓導)를 불러들여 엄히 질책했다. 목숨을 걸고 거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 포구에 다다른 선원들이 한숨 돌리며 질서정연하게 배를 정박시키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p.198)

    토모노우라에 도착한 통신사는 1690년에 지은 대조루(対潮樓)에 묵었다. 대조루는 복선사(福禪寺)의 본당으로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면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했다. 정사 필의 말처럼 대조루로 가는 길에는 양탄자, 돗자리가 깔렸는데, 준비한 돗자리만 3,500매에 달했다. 등은 6,000개, 초는 4만 개를 준비했다. 길가에는 고급진 찻집도 즐비했고 주택도 화려했다. 인가는 1,000호에 달했다. 휘황찬란한 등불이 가미노세키에 버금갔다. 여러 지역에서 온 가신들도 모두 나와 통신사를 맞았다.
    (/ p.209)

    미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무더위를 식혀주는 원시림 사이로 난 샛길을 걸었다. 투명한 바닷물이 촉촉이 적신 모랫길이었는데 연녹색 나뭇잎과 철쭉이 그림자를 드리워 시원했다. 걷다 보니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왔다. 왕복 1,800엔으로 생각보다 저렴해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는 산의 계곡을 따라 올라갔는데, 세토나이카이와 히로시마의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발 535미터의 정상에 도착하니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에 걸리는 게 없었다. 탄성이 절로 났다. 세토나이카이의 섬들이 점처럼 보였다. 과연 이쓰쿠시마는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그대로 사람과 신이 공존하는 섬이었다.
    (/ p.222)

    1420년에는 조선 사절이 우시마도에 정박했고, 1467년에는 우시마도의 대관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조선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이 지역 최대 영주이자 해상(海商)이었던 이시하라(石原)가 우시마도를 거점으로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조선, 중국과 교역하기도 했다.
    (/ p.227)

    무로쓰의 유녀 무로노기미는 용모, 자태, 품격, 기예 등에서 발군이었다. 본명은 후키로 어떤 이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남편이 죽자 이곳에 머무르며 유녀가 되었다. 그녀는 절대로 팁을 받지 않았는데, 다만 죽은 아이와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여행객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향값만 받았다.
    (/ p.248)

    일정에 여유가 생겨 히메지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아이오이역으로 나가 히메지(姬路)행 특급열차를 탔다. 황금연휴인지라 인파로 붐볐다. 20여 분만에 히메지역에 도착했다. 무인 물품보관함에 짐을 넣고 천천히 성으로 걸어갔다. 곧게 뻗은 도로 저 멀리에서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도 성이지만 가는 길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넓은 차도 양쪽으로 상큼한 신록이 펼쳐져 있었다.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진 4단 등롱이 거리를 물들였다. 5월 12일부터 14일까지 축제가 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수각의 상징이자 상상의 동물인 샤치(鯱) 조형물도 길가에 설치해놓았다. 샤치는 호랑이 머리에 물고기 몸을 한 상상 속 동물로, 등에는 날카로운 가시 여러 개가 솟아 있고, 꼬리와 지느러미는 늘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샤치가 화제를 예방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중요한 건물에 샤치 조형물을 설치했다.
    (/ p.251)

    제술관 신유한은 번잡한 것이 싫어 밤이 되자 객관 밖으로 나갔다. 목판을 펼쳐놓은 항구에 나가 악공에게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도록, 동자에게는 춤을 추도록 했다. 그러자 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종이와 붓을 가지고 와서 글씨를 청하는 자도 있었다. 신유한은 흥이 나는 대로 글을 써주었다. 60년 뒤 북경과 열하(熱河)를 방문한 박지원(朴趾源, 1737~1805)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행동했다. 혹시 박지원이 문필이 뛰어났던 신유한의 글을 읽지는 않았을까? 시정을 드나들며 대화를 나누던 박지원의 행동은 신유한에게서 영향받은 것 아닐까?
    (/ p.264)

    대교를 건너니 오사카만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순 가슴에서 환희의 기쁨이 솟구쳐 나왔다. 부산에서 출발한 후 얼마 만인가? 쓰시마부터 쳐도 한 달 이상을 뱃길로 여행한 참이었다. 통신사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뱃머리로 나와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긋지긋한 뱃멀미와 소금에 찌든 옷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 멀리 고베와 아와지시마를 연결하는 대교가 희미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그 아래로 통신사의 배가 입항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 p.273)

    “남녀들은 비단옷을 입었고, 여자는 검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꽃비녀, 대모로 만든 빗을 꽂았다. 연지와 분을 바르고 붉고 푸른색으로 칠한 그림이 그려진 긴 옷을 입고 보배 띠로 허리를 묶었다. 허리는 가늘고 길어서 바라보면 불화(佛畫) 같았다. 수려한 동남(童男)은 그 복색과 단장이 여자보다도 더욱 예뻤다. 나이 8세 이상만 되면 보배 칼을 왼쪽 옷깃에 꽂지 않은 자가 없었다.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들도 모두 주옥(珠玉)을 걸치고 무릎에 안겨 있거나 등에 업혀 있었다. 그 형상이 수풀에 붉고 푸르고 누런 1만 꽃송이가 있는 것 같았다.”
    (/ p.288)

    숙장은 유녀가 있는 곳과 없는 곳으로 구분된다. 본래 막부는 공인 유곽 외에는 유녀를 두지 말도록 금령을 내렸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통신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히라카타에도 유녀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수로를 거쳐가는 귀인이나 선원, 여행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리라. 부사 김세렴은 유녀들이 손님을 끌어들여 잠자리를 같이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에도로 들어가던 지볼트도 히라카타는 오사카 사람들의 유흥가로 거리에는 매춘부가 많다고 기록했다.
    (/ p.298)

    식사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수로 항해의 종착지인 요도천의 숙장을 찾아 나섰다. 히라카타 숙장에서 요도천을 따라 50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데, 고대에는 지방영주에게 공납물(貢納物)을 바치러 가거나 서일본지역에서 교토로 해산물과 소금을 운반할 때 이용했다고 한다.
    (/ p.304)

    정유재란 때 피로인으로 잡힌 강항이 왜승(倭僧)을 따라 성안으로 몰래 들어간 일이 있었다. 그는 성을 살펴보고 이렇게 비판했다.

    “다섯 걸음에 절이 하나씩, 열 걸음에 누각이 하나씩 있었다. 이리저리 연결되어 어느 길을 따라 나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비록 귀신이 재목을 운반해준다 해도 한두 해에 공사를 끝낼 수가 없을 것 같은데, 1년이 못 되어 건축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니 왜노가 제 백성을 혹사한 것과 왜인들이 역사에 힘을 다해 일했다는 것을 족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p.318)

    지금이야 오사카가 교토보다 더 큰 도시라지만, 통신사가 행차했을 때는 교토가 훨씬 발달했다. 당시 교토 인구는 대략 35만 명에서 52만 명 수준이었다. 현재는 2015년 기준 147만여 명으로, 오사카보다도 120여만 명이 적다.
    (/ p.328)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할 때마다 매는 물론 호피, 표피(彪皮)를 예물로 보냈다. 장군과 장군의 아들, 노중 등에게 예물이나 선물로 주었다. 숙종 때는 일본이 산 호랑이를 요구해왔다. 만약 어렵다면 뼈 전부를 갖춘 죽은 호랑이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 정도로 일본인들은 호랑이를 좋아했다.
    (/ p.346)

    1659년에 간행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는 “대불전 앞에 무덤을 쌓아 승려들이 공양하며 애도하게 했다. 일본 말대까지 위광이 빛나니 코무덤 또는 귀무덤이라고 이름 짓자 아동들도 그 덕을 칭송했다. 조선인이 일본에 올 때는 나라를 위해 죽은 자들이라고 하며 제문을 짓고 곡하며 제사 지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승려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공양을 베푼다며 히데요시가 저지른 잔혹한 전쟁범죄를 미화한 것이다. 이보다 한술 더 뜬 이가 바로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한 상국사 주지 세이쇼 조타이(西笑承兌, 1548~1608)다. 그는 조선멸시관을 조장한 장본인으로 히데요시가 조선을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비를 베풀었다고 분식(粉飾)했다. 즉 히데요시가 귀와 코가 잘린 조선인들을 불쌍히 여겨 오산의 승려 400명에게 수륙재(水陸斎)를 실시케 해, 적군과 아군의 차별 없이, 절대평등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분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황당한 논리가 또 있을까!
    (/ p.359)

    일본은 기온이 습한 탓에 모기가 많다. 일본인들은 통신사가 머무는 객관을 깨끗이 청소해 모기가 최대한 꼬이지 않도록 했다. 부패한 어육(魚肉)은 즉시 땅에 묻었고 설은(雪隱), 즉 분뇨는 약간만 쌓여도 퍼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모기의 극성을 막을 수 없었다. 통신사는 입을 모아 일본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모기라고 했다. 날이 저물면 모기가 공중에 가득해 창문을 꼭 닫아도 틈으로 들어와 피를 빤다며 진절머리를 쳤다. 어찌나 괴로웠는지 부사 조경은 [모기장](蚊帳)이라는 제목의 시까지 지었다.
    (/ p.371)

    다음으로 히코네성을 답사했다. 히코네성은 이이가와 관련되는데, 특히 이이 나오토라(井伊直虎, ?~1582)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오토라는 가문의 존폐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이가를 지켜낸 여성으로, 우연히도 통신사의 길을 답사하는 동안 NHK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여자 성주 나오토라](おんな城主 直虎)라는 제목의 대하드라마로 각색해 방송 중이었다. 드라마는 그녀를 ‘성주’로 내세우지만 이는 고증 오류다. 나오토라의 아버지가 이이노야성(井伊谷城)의 성주인 것과 그녀가 가문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분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성주에 오르지는 못했다.
    (/ p.377)

    우리와 동행한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의 학예사가 호슈의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인격적 위대함도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학문은 사람됨을 배우는 까닭이다”라는 호슈의 격언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호슈는 죽을 때까지 공부를 놓지 않았는데, 80세가 되었을 때는 처음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와카(和歌)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정진하며 호슈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모두 마시는 술이 다르듯 생각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해야 함을 깨달았다.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상대의 문화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품은 것이다.
    (/ p.396)

    통신사가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진 곳을 지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도쿠가와막부가 귄위를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설이 있다. 통신사는 이처럼 수많은 인물이 비정하게 스러지고 배신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인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 역사민속자료관의 한 노인에게 당시 전투에 참가한 이 중 누가 가장 인기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녀노소,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느냐며 크게 웃는 것 아닌가! 가히 우문현답이었다.
    (/ p.405)

    저자소개

    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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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수 0권

    동국대 사학과 교수. 동국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일본 도호쿠 대 동양사연구실에서 [명대병제사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동국대학교에서 중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표해록 (한길그레이트북스)] 등이 있다.
    이메일: inbeom@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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