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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풍경 [반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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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정선
  • 출판사 : 포도밭
  • 발행 : 2019년 04월 05일
  • 쪽수 : 272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9118850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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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오후 네 시에, 우리는 ‘누구’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후 네 시’를 응시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어색한 이들에게 보내는 신호


    [동사의 맛]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의 저자 김정선이 5년간 쓴 60편의 에세이.
    저자는 ‘평생을 남의 삶을 살 듯, 시차 적응에 실패한 여행자처럼 살아온’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시간이 오후 네 시라고 말한다. 하루를 마감하기엔 이르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 살아 있으나 죽은 시간. 그런 오후 네 시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쓸 수 있을 때마다 한 자 한 자 썼다. 이 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후 네 시의 존재’인 그가 응시하는 세상의 이야기다. 그리고 오후 네 시면 어색하게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는, 문득 살아 있다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보내는 찌릿찌릿한 신호다.

    출판사 서평

    살아 있음이 어색한, ‘오후 네 시의 존재’들에게 보내는 신호

    사람들은 내게 혼자 일하니 외롭겠다고 말하지만, 혼자 일하긴 해도 그 때문에 외로운 건 아니다. (…) 저자나 번역자, 편집자는 물론 디자이너까지 자신의 창의성이나 아이디어를 책에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지만 교정 교열자인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일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니까. 마치 그 옛날 빈방에 홀로 앉아 까맣게 잊혔던 그때처럼, 나는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이 없어야 한다. 혼자라고 느끼기에 맞춤한 조건이 아닌가.
    —'홀로, 나와 함께' 중에서, 64쪽

    저자는 누군가의 원고를 서너 번 이상 꼼꼼히 들여다봐야 하는 교정 교열자로 일한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은 지독한 덤벙이임을 고백한다. 심장 수술 후유증으로 몸 한쪽이 자유롭지 않은 어머니 간병은 그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과다. 그는 왜인지 여럿이 함께 있을 때면 혼자라고 느끼고, 마침내 혼자가 되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 든다. 책과 타인의 문장들은 그에게 자주 소외감을 안기지만, 이제 그것들은 여러 의미에서 떠날 수 없는 거처나 다름없다.
    그는 오랫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살았다고 회고한다.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이 없어야 하는’ 교정 교열 작업처럼 자신의 정체성도 그렇게 닮아온 걸까. 늦게 잠들고 늦게 깨는 일상 탓에 그에게는 ‘오후 네 시’ 즈음이 특별하다. 오후 네 시는 어떤 시간인가. 하루를 마감하기엔 이르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 살아 있으나 죽은 시간. 그래서 어색한 시간. 하지만 가만 보면 의외로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작가는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시간이 오후 네 시라고 말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후 네 시에 나는, 너는 어떤 존재인가. 그것이 궁금한 작가는 이 ‘특별한 유형지’ 같은 오후 네 시의 풍경들을 응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 세상의 이야기를 발신한다. 오후 네 시면 어색하게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는, ‘오후 네 시의 존재’들을 향해.

    돌아보면 내게 집은 늘 어두웠고 거리는 필요 이상으로 밝았다

    돌아보면 내게 집은 늘 어두웠고 거리는 필요 이상으로 밝았다. 하여 나는 집에선 불행한 척해야 했고, 거리에선 행복한 척해야 했다. 나는 그게 내게 주어진 삶에 적응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집으로 가는 길' 중에서, 98쪽

    김정선 작가는 ‘아침형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낮에는 어머니 간병을 하고, 늦은 오후부터 교정 교열 일을 시작한다. 간병 뒷정리와 이런저런 집안일을 겸하며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찾아온다. 적막을 쫓으려고 때 지난 오락 프로그램 재방송을 소리를 낮춰 틀어두기도 한다. 자세를 고쳐 앉고 교정지 위로 시선을 떨구다 문득 시계를 보면 어느새 새벽녘. 늦게 잠들고 늦게 눈을 뜬다. 다른 생활을 선택할 방도는 잘 없다.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자신뿐이라서.
    그러다 2010년경에 인터넷 서점 블로그를 시작했다. 남의 삶을 살다가 비로소 자기 삶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드는 무렵이 ‘오후 네 시’여서일까. 블로그 이름은 ‘오후 네 시의 풍경’이라고 지었다. 오후 네 시. 일반적으로는 근무 시간의 말미. 뭔가를 끝내기도 뭔가를 시작하기도 애매한 느낌이 지배하는 시간. 작가는 ‘오후 네 시’를 창구 삼아 5년 가까이 차곡차곡 글을 썼다. 집의 어둠과 거리의 밝음, 그리고 그사이의 어스름을 응시하는 자신에 대해서.

    슬픔에 붙들린 자는 하염없이 나열한다

    슬픔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열하는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드는 오열로 슬픔을 처리하지 못하고 오랜 슬픔에 붙들려 있는 자는 무언가를 하염없이 나열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나열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나열한다. 그것은 의미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중심을 뺏는 것이랄까. 분노나 희열에 사로잡힌 자가 중심에 집착하는 것과 달리 슬픔에 잠긴 자는 그 중심이 버겁기만 하다.
    —'나열하는 자의 슬픔' 중에서, 176쪽

    쓰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오열로 슬픔을 처리하지 못하고 오랜 슬픔에 붙들려 있는 자’는 작가 자신이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나열하기’다.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고 나열하기. 하지만 이로써 버겁기만 한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슬픔에 잠겼을 때, 슬픔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행위로 작가가 글쓰기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26년째 교정 교열자로 살고 있지만 사실은 지독한 덤벙이

    워낙 멍한 채로 지내기 일쑤여서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게 장기 아닌 장기던 시절이었다. 실내화 주머니에 실내화는 물론 우산이며 필통, 장갑 등등 그 당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모으면 문구점 하나는 거뜬히 차렸을 것이다. (…) 물론 지금도 그러는 건 아니다.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글쎄, 그보다는 남이 쓴 글을 한 자 한 자 확인해야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지 싶다. 그사이에 다시 확인해보고 따져보고 점검해보고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를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일이 습관이 된 탓이리라.
    —'신발 한 짝' 중에서, 168~169쪽

    누군가 쓴 원고를 한 자 한 자 꼼꼼히, 못해도 서너 번 이상 거푸 들여다봐야 하는 교정 교열 일. 그 일을 26년째 하고 있으며 [동사의 맛]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등의 책을 내며 ‘교정의 숙수’ ‘문장 수리공’ 등의 이름까지 얻은 저자는 의외로 자신이 지독한 덤벙이라고 고백한다. 어릴 적 학교에 갔다가 어딘가 신발 한 짝을 벗어두고 맨발로 집에 돌아왔을 정도로. 밖에 나가면 무엇이든 잃어버리고 돌아오기 일쑤이던 아이. 그는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를 속으로 연발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한다.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뿐만 아니라 같이 신발 한 짝을 벗어버리고 나란히 터덜터덜 걸어보겠다고 한다. 본성대로 살지 못하고 가슴 졸이는 삶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 때문에.

    타인의 문장들 속 세상이 외롭고, 좋았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읽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나는 이런 문장과 만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기하게 만드는 것이 글인 줄 알았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거꾸로다. 모든 글은 신기한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신기한 것이다.
    —'소설 이야기, 둘' 중에서, 194~195쪽

    리베카 솔닛은 그의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라고. 언뜻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가는 행위가 다름 아니라 글쓰기다. ‘책’은 그 신기하고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독자이자 교정 교열자로서 김정선 작가는 많은 시간을 그 현장에 머문다. 그리고 스스로도 글을 쓴다. 외롭고, 어색하고, 좋은 순간들에 대해.

    추천사

    김정선 작가를 내 맘대로 하나의 표현에 집어넣을 수 있다면 ‘어색함’이라는 단어를 고르겠다. 그는 어색해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어색해서,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서, 모든 것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 자기 자신을 꼭 닮아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채로 어색할 뿐인 오후 네 시라는 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어색한 순간을 담아 놓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일은 생뚱맞지만 오후 네 시에 알람을 맞추는 것이었다.
    한동안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알람이 울리고, 알람이 울리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내 앞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는지를 살폈다. 출출해서 누룽지를 끓여 먹는데 알람이 울리기도 했고, 지하철 안에서 졸다가 알람에 깨기도 했다. 보통 알람은 대단치 않은 순간들에 울렸다. 그래도 그때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살아 있다’는 것이 되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시시한 순간에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자주 짓곤 했다.
    그러던 지난 일요일에는 ‘리스본’이라는 작은 책방에서 친구에게 선물할 시집을 고르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다. 고개를 드니 통유리 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였고 그 아래로 모처럼 화창한 오후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유하게 움직였다. 마침 손에 들려 있던, 친구를 위한 선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집 위로 고개를 떨구며 나는 ‘살아 있다는 거 너무 좋은 거네’라고 생각했다.
    김정선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을 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그가 무심한 듯 흘린 활자들을 그냥 천천히 따랐다. 이제 이 책은 다 읽어버렸지만, 하루 한 번 고개를 들고 나의 세계를 어색하게 바라보는 이 책이 남긴 규칙은 계속 이어가 보려고 한다.
    알람이 울린다. 고개를 들 시간이다.
    - 요조 / 뮤지션, 책방무사 대표

    목차

    여는 글

    1장 오늘은 우는 날

    탈장
    10초
    비는 사람의 마음과 부딪칠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왜 죽였냐고요?
    “하늘에게도 정이 있다면 하늘 역시 늙을 것이다”
    책 이야기
    총각무와 김 그리고 숭늉
    냅킨과 절편
    오늘은 우는 날
    홀로, 나와 함께
    찌릿찌릿 전파사
    중독, 그 교차로에 갇히다
    키키키
    악마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상의 한 점

    2장 깜빡 잊었다

    과연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세 번이나 살아야 한다고?
    머릿속의 벽돌
    집으로 가는 길
    달을 보았다
    나와 우리
    안과 밖
    우체국에서
    악마가 말했다, 내가 아니라
    깜빡 잊었다
    기억의 집
    수건 공동체
    가을 풍경
    잡스러움에 대하여
    어려운 일과 힘든 일

    3장 질문과 답

    엄지손가락
    우거지된장국
    문상
    이등병
    신발 한 짝
    메커니즘
    칠집 김씨
    나열하는 자의 슬픔
    치욕과 사랑
    소설 이야기, 하나
    소설 이야기, 둘
    소설 이야기, 셋
    우울한 편지
    질문과 답
    곤경에서 벗어나다

    4장 아름다운 구석

    사랑의 감수성, 하나
    사랑의 감수성, 둘
    사랑의 감수성, 셋
    고량주와 까마귀
    황두수 이야기
    낮과 밤
    국어사전의 사랑법
    “나는 휴일마다 죽을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서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문
    다른 것이 없지는 않다
    외주 교정자로 살아가기
    감자전과 김치죽
    어떤 것들
    아름다운 구석

    본문중에서

    성인이 되어서도 여럿이 함께 있을 때 오히려 혼자라고 느끼고, 마침내 내 거처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혼자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는 버릇은 여전했다. (…) 일을 하다가 쉴 때나 하루 일을 마치고 내 거처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혼자인 상태에서 벗어나 ‘나’와 단둘이 있게 되는데, 물론 이런 상황이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외로움이란 나와 단둘이 남은 상황을 어색해하는 정서고, 고독감이란 그 상황을 즐기는 정서라고 한다면, 외로움을 느낄 때도 적지 않으니까.
    ('홀로, 나와 함께' 중에서/ pp.64~65)

    나는 그 사내가 마치 세상의 멱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몸을 부여잡고 흔들며 묻고 싶어졌다. 어떻게 살면 되는 건데요, 대체 난 뭘 하면 되냐구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멱살을 내게 내어준 채로 외려 나를 흔들어댈 것만 같았다. 그걸 몰라서 물어?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고?
    ('키키키' 중에서/ p.81)

    어지간해서는 거짓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윤리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 말하자면 정직함이란,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눈들을 당당히 마주보는 것이다. 반면 솔직함은 내 안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단 하나의 눈과 마주하는 것이고. 이건 또 하나의 나인 경우도 있고 나조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저 시선 그 자체인 경우도 있다. 밖에서 나를 보는 무수한 눈들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만이다), 내 안의 시선은 눈을 감는 순간 더 선명하게 보인다.
    ('과연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중에서/ p.88)

    일에 지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새벽길, 문득 올려다본 감청색 하늘에 달이 떠 있다. 대보름달이라 유난히 밝고 둥그런 달. 아, 달이구나. 나는 하루 종일 글자를 들여다보느라 잔뜩 충혈이 된 눈으로 달을 보았다. 진짜 달이었다.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산다는 이야기 속의 달이 아니라 진짜 달. (…) 너무 동그래서 외려 달 같지 않아, 그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는 달. 갑자기 내가 세상 모든 이야기의 바깥에 슬쩍 비켜서 있는 것만 같았다.
    ('달을 보았다' 중에서/ p.101)

    간혹 도서관에서 교정지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혹은 도서관 밖 벤치에 앉아 있다가, 그 자세 그대로 내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더 이상 내가 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다. 어떤 때는 삼십 초에 불과하지만, 어떤 때는 오 분 가까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거나 세운 채로 혹은 펜을 손에 쥔 채로, 아니면 다리를 꼰 채로 영원히 그대로 굳어질 것만 같다. 그러다가 나는 깨닫는다. 내가 마침내 스스로를 나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니, 슬픔이 나를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나열하는 자의 슬픔' 중에서/ pp.176~177)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나는 무섭도록 말이 없는 학생이 되었다. 그냥 멍한 표정으로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하굣길에 선배에게 경례를 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뺨을 맞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해 겨울 아버지는 또 양복값을 받지 못했고, 6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이광수에서 시작되는 그 책들을 나는 겨울방학 동안 한 권씩 읽어나갔다. 그리고 교보문고를 다니며 용돈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로 시작되는 소설책들을.
    ('소설 이야기, 하나' 중에서/ pp.192~193)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아침형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내 인생에서 오전은 대개 비몽사몽간에 지나가버린 시간들이었다. 그렇다고 밤의 삶을 흥겹게 산 것도 아니니, 내 삶을 굳이 규정하자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오후의 삶 정도가 되지 않을까. 교정 교열자로 살면서 5년 가까이 ‘오후 네 시의 풍경’이라는 인터넷 서점 블로그를 운영한 적이 있다. [동사의 맛]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소설의 첫 문장]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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