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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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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 한빛비즈
  • 발행 : 2019년 03월 15일
  • 쪽수 : 296
  • ISBN : 9791157843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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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를 삶 앞으로 이끄는 철학의 힘!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진짜 적은 따로 있는데 정작 서로를 견제하고 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세상은 ‘을’이라 부른다. 알바에서 시작해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삶, 식품 판촉 사원으로 길거리에서 시음을 권하고, 본사(갑)에서 파견한 영업 사원으로 점주(병)에게 밀어내기를 강권하고, 다니던 회사에서 푼푼이 모은 돈을 금융사기로 날려버린 을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 바로 저자의 이야기이다.

늘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20대를 살았고, 30대가 되어서도 괴로운 일상을 보내야 했던 저자는 조용히 머물 곳이 필요해 막연하게 도서관을 찾았고, 그곳에서 철학과 만났다. 니체, 마르크스,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그들이 겪은 고뇌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어제와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됐고, 세상을 보는 나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

저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것처럼 도서관에 박혀 마르크스를, 니체를, 알튀세르를, 들뢰즈를 읽어나갔다고 말하며, 그렇게 철학을 통해 느낀 해방감을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향한 검열과 증오를 멈추게 하는 것도, 나를 둘러싼 세상을 해석하고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결국 나의 철학이라는 것을 깨달은 저자는 독자들 역시 나를 나에게 이끄는 철학의 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출판사 서평

“을乙이라는 이 커다란 절망을 읽다 보면
희한하게도 자꾸만 희망이 생겨난다.”

힘내라는 위로보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자기계발서보다
나를 살게 했던 힘, 철학
2019년 3월 5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선진국의 기준이라는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제 ‘나’는 선진국의 국민이다. 선진국의 정의를 찾아본다. “다른 나라보다 정치, 경제, 문화 따위의 발달이 앞선 나라.” 그러나 셋 중 무엇의 발달도 체감할 수 없다. 여전히 겨우 먹고 산다. 오직 없는 자들끼리 없음을 경쟁하는 사회. 자본주의란 원래 그런 것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례는 저자의 실제 경험담이다. 20대의 저자는 식품회사의 판매 사원으로 길거리에서 시음을 권하고, 본사(갑)에서 파견한 영업 사원으로 점주(병)에게 밀어내기를 강권하며 지옥 같은 비정규직을 살았다. 그나마 회사 생활로 푼푼이 모은 돈마저 금융사기로 날려버리자 삶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알바에서 시작해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삶. 뾰족한 재주 없이 고만고만한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가 다 그렇듯, 시련은 손님처럼 찾아왔다.
무명 저자의 투고를 출간하겠다는 출판사가 열 곳이 넘었다. 150년이 더 지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니체의 말이 ‘을乙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 순간, 철학은 시간과 학문이라는 장벽을 훌쩍 넘어 2019년의 대한민국을 사는 이들의 마음을 열어젖혔다. 저자가 성산대교 대신 도서관을 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만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책에는 절망적인 현실과 끝없는 자기 검열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읽다 보면 자꾸만 희망이 생겨난다. 지금 ‘나는 왜 이토록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면, 이 뜨거운 위안을 당신께도 권하고 싶다.

‘존재’를 이해하는 순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타고난 복이 없는 자가 자본주의 사회를 산다는 것은 100미터쯤 뒤에 그어진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직선 코스 달리기 같다. 그만큼 이상한 상황을 빈번히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다. 방식만 다를 뿐 모순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착취를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불합리, 사훈과 배치되는 회사 관리자들의 표리부동한 잣대를 직장을 옮길 때마다 마주친다. 진짜 적은 따로 있는데 정작 서로를 견제하고 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세상은 ‘을’이라 부른다.

〉〉재고 돌려막기를 해야 하는 나와 재고 손실을 껴안아야 하는 대리점 점주들, 하위 구조에 속한 우리에게는 공통의 환상이 있었다. 바로 브랜드에 대한 신뢰였다. 본사에서 필요한 만큼의 수익과 나의 미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점주도 나도 같은 믿음이 있었다. (…)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말한다.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호명된 주체로 만든 채 무의식까지 지배한다고. 진짜가 뭔지 알려 하지 말고 니들끼리 싸우라 한다고.

호명된 주체로 살아가는 ‘을’에게 철학은 누릴 수 없는 사치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은 허영이 아니다. 그냥 삶이다. 눈뜨면 일하러 가기 바쁘고 돌아오면 씻고 자기 바쁜 ‘을’에게 철학은 뜻밖의 위안이자 삶 그 자체로 다가왔다. 저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것처럼 도서관에 박혀 마르크스를, 니체를, 알튀세르를, 들뢰즈를 읽어나갔다고 말한다. 책은 그렇게 철학을 통해 느낀 해방감을 적어나간다.

〉〉니체가 말했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행해진다고. 그때의 나는 밖으로 전혀 분출하지 못했다. 그러면 결론은 두 가지다. 자기를 학대하거나 타자를 학대하고, 자기를 비하하는 우울증 혹은 타인에 대한 폭력과 분노로 이어진다. 그렇게 쌓인 생명의 피로는 결국 내 안으로 퍼져갔다. 이 사회는 최고를 강요하고, 다짜고짜 성공을 강요한다. 패자와 승자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하다. 그 이데올로기에 갇히면 한동안 자기 검열이 운명인 줄 알고 살게 된다.

‘진짜’라는 명제가 붙으면 원래 삶은 아프기 마련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일, 내가 철저하게 길들여져 왔음을 깨닫는 일, 이런 자각들은 내 삶과 철저하게 연관된다.
철학은 결국 세상을 보는 나만의 관점을 형성한다. 스스로를 향한 검열과 증오를 멈추게 하는 것도, 나를 둘러싼 세상을 해석하고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결국 나의 철학이다. 그렇게 나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비로소 주변의 타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 곁을 스쳐 가는 모든 이들의 삶 역시 그들의 철학 안에 있었다.

알고 나면 어제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좌절은 모두 사실이고 적용된 철학은 매우 구체적이다. 학교가 아닌 책으로 철학 공부를 시작한 저자에게는 학문적 계보를 이어야 할 의무도, 그럴만한 스승이나 선후배도 없었다. 덕분에 철학을 형이상학적 접근이나 학문적 독해가 아닌 ‘을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철학이 밥이자 물이고 목숨이었던 다급함이 만들어낸 삶의 언어다.

〉〉우리가 만약 고정된 실체이고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한다. 고정된 자아도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 타자와의 관계이며, 관계 속에서 어떤 삶이 주어지든 자기 삶을 이끌 자유 의지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 책이 망라하는 철학자들의 역사에서 우리는 동질의 고뇌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삶을 이끄는 자유 의지를 따라 변화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가난과 추방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마르크스, 세상을 등지고 숲으로 들어간 소로, 칠순의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들뢰즈까지 모두 자신을 가둔 껍데기를 깨고 체제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통해 내가 변해간다. 이처럼 알고 나면 어제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그 모든 불행이 내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더 큰 불행이 닥쳐온다 해도 더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철학은 나를 나에게 이끄는 화해의 손길이다. 날 때부터 주어진 가난, 내 앞에 등장한 악인, 쓰라린 이별의 상처…. 철학은 우리가 마주친 많은 불운이 그저 수많은 우연의 접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책을 멈추고 자신을 검열했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온전히 스스로와 마주하라고 말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 모습이 썩 아름답지 않더라도, 어제의 추함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오늘의 나는 안다. 그것이 나를 삶 앞으로 이끄는 철학의 힘이다.

목차

프롤로그

1장. 나는 왜 하필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것일까?
구조적 모순 앞에 선 나
# 모순Ⅰ # 모순Ⅱ
구조적 모순의 늪에서 내가 본 것
# 진짜 적은 누구인가 # 완충지대는 없다
자본주의도 역사의 과정일 뿐이다
# 마르크스가 책을 쓴 이유 #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
마르크스와 니체가 세상을 읽는 방법
# 조금 위험할 수 있는 관념론 # 니체가 세상을 읽는 방법
자본주의에서도 공생할 방법이 있다 : 마르크스식 해법
# 생산수단의 사회화 #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든 사수하자
# 나만의 생산수단을 소유하자

2장. 우리는 속았다
경쟁에 길들여진 우리
# 경쟁 # 나를 다시 살게 하는 동일시
자기 검열에 길들여진 우리
# 지옥 # 반생명적인 공부
허무주의가 오는 이유
# 호명테제 # 외재성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도
# 냉소 # 지나친 자의식
헷갈리면 나를 가까이 읽자
# 우울에 대하여 # 얼음 땡

3장. 반자본주의적 삶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백수여서 좋았던 점
# 소비하지 않을 자유 # 붕괴되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문제는 돈이 아니다
# 화폐Ⅰ # 화폐Ⅱ
그는 왜 숲으로 갔나
# 타고난 권리 # 선언
이대로 사라지기 전에 도서관에 가자
# 피난처
유쾌한 파멸
# 유쾌한 소비Ⅰ # 유쾌한 소비Ⅱ

4장. 오늘 내가 비루하다는 걸 안다는 것
나는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 건가
# 좋은 공부 # 우리는 돈이 되지 않는 걸 사랑했다
뭘 원했던 걸까
# 꿈의 집착 # 진짜 교육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 갑질 # 사장 아들
알면 어제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 지옥에서 하는 철학 # 당신과 상관없는 선과 악을 넘어라
강하다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5장. 왜 나는 자유를 원하는가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
# 죽음을 선택할 자유 # 반응적 인간
새는 새로 기르자
#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 내가 만난 아이
사랑하지 않을 자유
# 서브병 # 졸혼
있는 그대로 볼 자유
# 잔혹성
자유로부터의 도피
# 변하지 않는 사람들

6장. 어떤 충동까지 버틸 수 있는가
나는 그 말이 왜 힘든가
# 비트겐슈타인 # 역린
우리는 매트릭스에 산다
# 우리 주변의 스미스들 # 스미스와 싸워 이기는 방법
당신이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자
# 주인이 되지 못한 자, 직함에 상관없이 다 노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약자의 배려 # 차이의 철학
공명하지 못한 인연과의 단절
# 단절

7장. 나 자신에게 착하게 살자
당신의 손발은 무사한가
# 잘린 손과 발 # 조화 같은 우리
반응적 인간을 버리는 담론
# 나는 쉬운 사람이 아니다
비가 와도 상관없다
# 마음을 비우면 두려울 게 없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진다
# 개별화 # 중심주의 해체
저 새가 날아간다
# 직업자살에 대하여

8장. 삶은 마주침이다
남 일이 아니다
# 감히 모른다 # 타자들
우리는 마주침의 산물
# 상견과 단견
무상을 보라
# 직면
알면 보인다
# 역지사지 # 침묵이 위로가 될 때
과거와의 단절
# 결정론과 운명론의 함정

참고 문헌

본문중에서

정규직은 어쩌면 제일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10년 다닌 직장을 한순간에 집어치우는 걸 바로 옆에서 목도했다. 뭐가 안전하다는 걸까.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각자의 품안에 장착한 침묵의 시위 현장이 안전하다고? 어차피 삶 자체가 비정규직 아닌가. -본문 67쪽 〈자기 검열에 길들여진 우리〉

동양철학에서는 삶과 우울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유리되지 않고 공명한다. 《동의보감》 은 더 단순하게 말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존재 자체가 질병이라고, 삶은 누구나 아픈 채로 가는 거라고. ‘생로병사’가 한 단어인 것처럼 말이다. 특정 인간관을 설정하는 게 싫었다. 각종 설문지로 분석이라는 과정을 거쳐 마치 정답인 양 나를 대하는 게 싫었다. 몇 가지 항목 이상이면 당신은 우울증 초기 증상이니 말기 증상이니 하는 것들이 답답했다. 감정을 과학으로 대하는 게 어색했다. 그래서 더욱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본문 97쪽 〈헷갈리면 나를 가까이 읽자〉

“이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낙타처럼 살아도 견딜 수 있어”라고. 기꺼이 부양할 가족을 만드는 비범함이 거기에 있다. 내가 가난해지더라도, 내 것을 기꺼이 주고 싶을 때 하는 게 사랑이고 결혼이니까. 그런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결혼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무언가 바라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결혼은 없다. 남들 다 하는 것이니 하는 행위는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말대로 “타자의 욕망을 따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본문 121쪽 〈그는 왜 숲으로 갔나〉

우리는 마트에서 ‘당근 천 원’, ‘수박 만 원’이라고 쓰인 것을 보며 당근은 1천 원의 가치밖에 없고 수박은 1만 원의 가치가 있으니 수박이 더 귀한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당근과 수박 모두 어떤 이의 땀이 들어간 노동의 결과물이다. 우리의 교육은 왜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가. 마르크스 말처럼 노동과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안에 있는 가치를 철저히 은폐한 것이다. -본문 139쪽 〈나는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 건가〉

한때는 노예 근성이 있는 내가 미치도록 싫었다. 싫어도 좋은 척 웃는 피에로 가면을 쓴 채 하루 종일 가식을 떨어대는 내가 미웠다. 제발 좀 그만하라고 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매일을 살았다. 니체는 수동적이고 약한 인격체를 ‘반응적 인간’이라 불렀다. 나는 누구보다 반응적 인간이었다. 불편한 것을 잘 참는 내 자신이 진짜 불편했다. 그런 내가 권력을 쥔 자에게 보인 반항 아닌 반항은 웃고 싶을 때만 웃는 거였다. ‘웃어야 할 때’ 가 있고 ‘웃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마음은 절규하는데 겉으로 웃고 있으면 사람들은, 특히 권위로 나를 통제하려는 자들은 진짜 웃고 싶어서 웃는 걸로 판단하고는 했다. -본문 175~175쪽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

아침 7시 신도림역.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손발을 잘리러 간다. 회사 문 앞에 서면 심호흡을 해야 한다. 잘리기 직전이니까. 늘 그랬다. 한 번도 좋은 감정으로 회사 문을 연 적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면 순간의 우울함과 계속 만나야 한다. 내 시간도, 내 육체도 그들의 것이다. 자료 좀 찾아줘, 몇 시까지 서류 정리해서 넘겨 등등 명령의 향연 속에서 내 머리는 그 모든 것을 겨우겨우 해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그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이다. 그 반복 속에서 무수히 잘려나간 내 머리를 위해 두통약을 집어삼킨다. 그러다 보면 점심시간이다. 그 시간만이라도 혼자 가만히 앉아서 생각 좀 하고 싶지만 이내 동료가 찾는다. “밥 먹어요, 수진 씨.” -본문 230쪽 〈당신의 손발은 무사한가〉

뉴스에서 직업적 자살을 접한다. 어떤 간호사는 ‘태움’이라는 악습 때문에, 어떤 상담사는 고객의 ‘갑질’ 때문에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심장 끄트머리에 밀어넣었던 선명한 생채기가 다시 나온다. 그들은 왜 살려고 들어간 직장에서 살기를 포기 했을까. 5개월째 야근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같은 양말을 3일째 신고 있었다는 걸 출근하면서 알았다. 오늘이 수요일인 건 알겠는데 며칠인지는 모른다. 기억해야 할 건 많은데 정작 기억나는 건 없다. 하늘 한번 올려다볼 기력도 없다. 그래도 이런 건 지나가게 할 수 있다. 다시 기억하면 되니까. 하늘 한번 보면 되니까. 이 정도까지는 스님이 든 몽둥이 너머로 날아가는 새를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다. -본문 252쪽 〈저 새가 날아간다〉

아무리 기를 쓰고 잘하려 해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당해본 사람은 안다. 영업할 때 우리 팀에 여직원은 나 혼자였다. 나의 실적은 그들에게 그저 들러리여야 했다. 감히 내 실적 따위가 그들 위로 올라가는 현실이 펼쳐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맘대로 되는가. 내가 간 지역에서 하필 운이 좋았고, 그곳에서 나의 실적은 그들을 넘고 말았다. 이게 문제였다. 한동안 해명할 필요도 없는 수많은 소문과 억측들이 손님처럼 나를 찾아왔다. 그래, 손님이다. 곧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갈 손님. -본문 253쪽 〈저 새가 날아간다〉

우울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성산대교에 갔다가 이내 마음을 바꾼 적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없으면 나는 별 수 없이 죽겠구나 싶은 사람, 살아갈 의미이자 전부인 사람. 사람이든 동물이든 못다 이룬 꿈이든, 이런 대상이 있으면 쉽게 떠날 수 없다.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갈 ‘너’의 삶이 두렵다. 그래서 만일 죽을 때가 온다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만나서 정말 좋았노라고, 같이 숨 쉬고 밥 먹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살아 있음을 느꼈노라고,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나는 나로서 충분히 살다 가니 아쉬울 게 없노라고, 그러니 당신도 온전히 당신의 남은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는 그거면 된 거라고 전하고 싶다. -본문 261쪽 〈남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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