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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시간을 그리며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비발디의 「사계」가 흐른다. 내 인생의 사계가 흐르는 듯하다. 흘러간 세월을 그려본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도 그려본다. 흘러간 세월의 밑그림은 선명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의 밑그림은 그렇지 않다. 계절은 시간의 약속이고 시간의 모습이다. 시간의 약속에 따라 계절은 모습을 바꾼다. 흘러가는 시간 따라 계절의 모습과 내 인생의 모습도 변한다. 내 인생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밑그림을 바라본다. 시간의 밑그림은 시간의 수채화이고 자연의 순환이다. 이 시간의 밑그림은 교단 퇴직 후 첫 번째 수필집이다. 나의 성찰, 나의 고백, 나의 생활기록이다. 내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 그리고 관심과 추구의 대상을 여섯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음미하여 본 것이다.
탈고를 하고 퇴고를 하며 1년여 고민 끝에 출판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내 인생이 자랑할 것 없이 부끄럽기만 하고 내 글 또한 그러하여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뜻밖의 한국생활문학회 문학상 수상 통지에 힘입어 원고에 숨을 불어 넣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주류로 살지 못하고 변두리 인생으로 살아온 듯하다. 대체로 주연이나 무대의 주변을 서성거린 셈이다. 수도 서울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주로 지방에서 30년 이상 활동하였다. 변방 인생이었던 셈이다. 작은 지방 생활 중심이어서 명품인생이 되지 못하고 짝퉁 인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인생을 부러워 한 적이 없고 내게는 별 불만이 없는 소중한 삶이었기에 내 인생의 족적에 이정표를 세운다는 마음으로 만용을 부려본다. 나의 에세이집 『캠퍼스의 자화상』을 출판한 지 11년 만의 일이고 정년퇴직 기념집 『시민과 환경』 간행 후 6년 만이다. 퇴직 후의 생각과 마음의 흐름 그리고 생활 내지 활동에 관한 밑그림이다.

정년퇴직 후 6년이란 세월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흘렀다. 퇴직 후 나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정시출근이 없어지고 그간 해오던 농사에 주력하게 되었다. 농촌관련사회단체 등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도 하며 문필활동을 또 다른 본업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복수전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복수전공 인생이다. 농사는 나이와 상관이 많지만 문필활동은 별 상관이 없어 점차 문필활동 쪽으로 기울고 있다. 농사는 힘이 부쳐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늦깎이로 문단에 등단하여 집필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철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되고 생활이 불규칙하여 지는 것이 고민이다. 요즈음은 글쓰기조차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산속에서 고립된 농촌생활을 하며 「사회에 충실하기」에서 「나 자신에 충실하기」로 생활태도를 바꿨다. 「세상에 손 떼기」와 「글쓰기에 정 붙이기」를 시도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나갔다. 퇴직을 계기로 인생의 정리기에 들어섰다는 마음으로 시민사회단체나 정부관련 활동 등 외부활동을 하나 둘 정리해 나간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지출도 감소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로 전환되며 새로운 활동이 수반됨이 불가피함을 깨닫게 된다. 나만의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아직은 건강이나 경제면에서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라 자위해 본다. 나의 「욕심 버리기」와 「함께하기」는 내 생활을 바꾸고 내 인생을 바꾸는 듯하다. 가까운 친인척 중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 오래전부터 조금씩 배려도 하고 전문지식과 교직을 통한 사회봉사활동은 해 오고 있었지만 사회에 기여가 되는 일은 별로 하지 못하였다. 함께하기는 나 하나 챙기기에 급급하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은 별로 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성찰이다. 이에는 생활의 가치를 창조하고자 하는 마음과 재능기부의 성격도 있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과 함께 「잔여인생 정리하기」로 떠날 준비도 함께 하기로 하였다. 시작과 끝을 동시에 생각하며 시작과 끝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는 결국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인생은 결국 시작과 끝이 따로 없고 서로 바로 이어지는 원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이 책속에는 나의 자전적 수필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정리한 글이다. 이는 나의 「잔여인생 정리하기」의 하나이기도 하다. 모교인 고려대학교 65동기회의 『광복세대의 꿈과 삶』(서정시학, 2016) 출판기획에 따라 원고제출 요청을 받고 또한 학과동기들의 집필권유를 받아 집필하였던 것이다. 동기 자서전 편집위원회의 편집방침에 따라 나의 원고는 1/3정도 생략되어 출판되었지만 여기에는 원고 전체를 수록하고 일부를 수정 보완하였다. 수필집 속에 자전적 수필을 포함하여 다른 수필집과의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실험수필집적 성격을 띤다할 수 있다. 고대와 숙대 총장을 역임하신 차낙훈 은사님은 숙대총장 퇴임 후 자서전 집필을 하지 않으시느냐는 나의 질문에 자서전은 자기변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서전 중에는 자기변명이나 자기과시가 두드러진 것도 있고 타인이 대신 집필한 것도 있다. 요즈음은 자서전 쓰기가 유행하는 듯하다. 이 글은 나의 주관이나 감성, 의지보다 외부에 나타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정리되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 쓴 나의 생활기록, 「나의 실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해 가을 캐나다 로키를 보기 위하여 이른 아침 캐나다 밴쿠버공항으로 이동하면서 맑은 하늘에 선명하게 나타난 무지개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2중으로 보이는 쌍무지개였다. 국내에서도 보기 어려운 무지개, 더욱이 쌍무지개를 외국에서 보다니… 어렸을 적에는 비가온 뒤엔 어렵지 않게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비온 뒤 갠 하늘을 수놓은 무지개는 참으로 아름답고 보기 좋았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희망이고 이상이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무지개를 잡는다고 뛰어다녔다. 이상을 좇아 희망을 잡고자 뛰어다녔던 것이다. 나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한편 무지개를 좇는다. 이율배반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퇴직 후에도 무지개를 좇아 바쁘게 살아가는 삶의 향기가 은은히 배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무리이고 오만일까.
인생은 수필을 만들고 수필은 인생을 윤택하게 한다. 뒤늦게 윤택한 인생을 좇아 나선다. 욕심에는 염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내 생각과 내 판단이 옳은지를 자문한다.

이 수필집에는 월간 「한국수필」, 계간 「생활문학」, 계간 「현대시문학」, 인터넷신문 「후아이엠」, 한국수필가협회 기념집 「군산」(2016.7.), 한국수필작가회 30주년 기념집 「헤세와의 조우」(2016.12.), 한국수필가협회 2017대표선집 「사람,집 그리고 길」(2017.2.), 현대시문학 엔솔로지 「바람구두를 신은 랭보의 꿈」(2016.4.) 등에 게재된 나의 수필이 포함되어 있다. 중학 2학년 때 「달력」이란 수필이 교지에 실린 이후 50년 이상 간간히 수필을 써 오고 있지만 아직도 수필은 쓸수록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 젊은 날의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다시 도전에 나선다.
이 수필집을 상재하면서 곁에서 도움을 준 베아따와 원제, 가영, 민영에게 감사한다. 또한 글감으로도 도움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그리운 우리 5남매의 동생네 가족을 기억하며 고마움을 전한다.

2017년 10월 반달숲에서
서암 최 장 호崔章鎬

시간의 밑그림 목차

Ⅰ. 인연과 추억

시인의 추억, 동자스님의 추억
맞선보기와 결혼 전 데이트의 추억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나의 인생 여정, 길
아버지의 교훈
옛 것을 찾아서
어떤 인연
고교 동창들과의 시베리아 여행

Ⅱ. 문화와 기행

고흐를 특별히 만나다
서산 부석사 기행
군산 봄나들이
5남매 부부의 회갑기념 단합여행
화가 박수근을 찾아서
소수서원과 부석사 탐방
이태준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모네전 단상
바이칼호 브랴트족과 교감하며
망년회 -연극 엘링을 보고
밀레전 나들이
오드리 헵번 전시회
서촌방향 둘러보기

Ⅲ. 인생과 종교

겨울 인생, 스키 인생
고귀한 인생, 순교 인생
여자의 일생 -길상사와 법정 스님
갓바위 등산객
성당 작은 도서관 개관과 성당문화
일본 문화기행과 사찰 순례자
간월산 등산과 죽림굴
일본 동대사와 신사를 둘러보고
사랑의 바자회 하느님의 사업
토론 송년회

Ⅳ. 인간과 사회

내 인생의 보물
문학과 철학의 만남
솎아내기
나의 팬클럽
종각 옆 라이브카페 망년회
기내식 마니아
청출어람 여담
쑥 뜯는 남자가 되는 뜻은
난 아직도 걸음이 빠르다
우리집 설날과 세배문화

Ⅴ. 농촌과 자연

쌀이 남아돌아 문제라니
밭고랑과 세월
친구의 귀농
봄의 아우성교향곡

Ⅵ. 자전적 수필

1. 내 인생의 사계
2. 내 인생의 봄:전쟁과 운명
3. 내 인생의 여름:교수활동과 미국 생활
4. 내 인생의 가을:인생 황금기
5. 맺는 말 : 새로운 꿈과 도전

나의 인생 여정, 길





우리 인생에서 길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방학숙제로 길에 대하여 산문을 써 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고 학문의 길, 구도의 길에 대하여 글을 썼었던 듯하다.
이제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어 내가 다니는 길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녀온 길에 대하여도 생각해 본다. 나의 인생은 내가 다닌 길의 총합으로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다닌 길을 모두 연결하면 오늘의 나에 이른다. 길은 인생 궤적이요 삶의 수레바퀴 자국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국내외 적지 않은 길을 다녔다. 특히 많이 다녔던 길을 생각해 보니 네댓 개의 길이 떠오른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미국의 동서부에서 다녔던 길도 눈에 선하다.
먼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오고 갔던 서울 돈암동 길이 생각난다. 6?25동란 피난살이에서 돌아와 나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언덕길이다. 우리집이 초등학교 후문 바로 앞에 있어 그곳에서 그 초등학교를 5년여 다녔다. 집과 학교와의 거리가 가까워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라고 했었다. 그런 관계로 나는 수시로 방과 후에도 다시 학교운동장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그러나 전쟁 후 폐허에서 놀 곳도, 놀 거리도 마땅치 않아 하루의 대부분을 집 앞 길에서 뛰어 놀면서 지냈다. 길거리 인생이었다고 할 만 하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길은 눈을 감고서도 다닐 수 있을 듯하다. 그 길을 뛰어 다니며 조부모님의 보호아래 나는 내 인생의 기초체력을 키웠고 꿈을 키웠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추억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 후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중학에 입학하며 고등학교까지 그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어 중학시절에는 주로 전차를, 고등학교시절에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전차는 학교까지 가는 직선 노선이 없어 돈암동이 종점인 전차를 이용하여 혜화동과 종로5가를 지나 을지로 4가에서 내려 남대문 방향으로 가는 전차를 갈아탔다. 남대문에서 내려 그곳서 부터는 지금은 대한상공회의소 건물이 있는 남대문초등학교 앞을 지나 서소문 길을 걸어서 학교를 오고 갔다. 내가 유소년시절 서울 변두리 길을 오가며 생활을 하다가 생전 처음 시내 상업중심가를 오가며 도심의 생활상을 보고 익힌 것이다. 내가 다닌 도심의 길은 걸어서 가든 교통수단을 이용하든 훤하게 알게 되었고 그 변화도 즐기게 되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주로 85번 버스 노선을 이용하여 학교를 다녔다. 그 길은 성북동에서 출발하여 혜화동, 창경원과 돈화문을 지나 중앙청에서 광화문을 거쳐 시청 앞까지 이어졌다. 시청 앞에서는 덕수궁 길을 따라 정동교회 앞을 지나거나 서소문 길을 따라 학교를 다녔다. 주로 고궁이나 정부종합청사 등 관공서가 있는 길이었다. 고궁 길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꿔 4계절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가끔은 계절 불문하고 먼 거리를 걸어서 다니기도 하였다. 봄에는 창경원 담장 쪽 동물원근처에서 개나리꽃이 새로운 희망을 전해 주는 듯 노랗게 물들어 볼만하였다. 특히 늦봄이면 창경원의 벚꽃들이 하얗게 피어나 장관을 이루었다. 여름에는 전구 간 모든 길의 백양나무 가로수들이 파랗게 우거져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그늘 따라 휘파람을 불며 걸어 다니는 것이 좋았다. 가을에는 가로수의 단풍이 쓸쓸하게 휘날리고 창경원과 창덕궁의 고즈넉한 돌담길의 운치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대한문에서 미국대사관 앞을 지나는 덕수궁 돌담길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어울려 가을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게 하었다. 그리고 겨울에는 길고 긴 고궁 길 따라 흰 옷을 입은 눈길을 밟으며 뽀드득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다.
나는 중앙청과 정부청사 앞길을 지나다니며 가끔은 공무원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대사관 앞길을 다니며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집에서 중고등학교까지의 길은 나의 청소년시절을 지켜보며 키워준 은혜의 길이기도 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돈암동에서 성북동 한옥으로 이사하였다. 대들보가 한 아름이나 되고 본채와 별채가 이어져 있는 한옥이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께서는 본채를 쓰시고 우리 형제들은 별채에 기거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안암동에 소재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주로 버스를 이용하여 성북동에서 돈암동과 안암동 길을 오갔다. 그러나 가끔은 걸어서 다니기도 하였다. 또한 집 근처 성북동 버스종점 인근에는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과 전형필의 간송박물관 그리고 이효석, 정지용 등과 9인회를 함께 하였던 이태준 생가 등이 있기도 하여 가끔은 저녁을 먹고 성북동 길을 따라 산책을 다니기도 하였다
집에서 대학교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직선으로 쭉쭉 뻗어 있었고 행인도 많지 않아 조용하고 쾌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