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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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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는 석 달 동안 에이즈였다
피로 쓰인 절망과 배신의 기록
허구와 실제로 이룬 진실의 완성


시나리오 작가이자 사진가 그리고 소설가,
에르베 기베르의 대표작
자신의 세계를 빌려 픽션으로 기록한 죽음의 세월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사진 칼럼니스트인 에르베 기베르(1955〜1991)가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쓴 자전적 소설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가 알마에서 출간됐다.
7년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서 사진 및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으며 1984년 세자르 영화제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한 당대 프랑스 문화계의 명사 에르베 기베르. 서른여섯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는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필립 베송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등 오히려 사후에 작가로서의 광휘를 문학사에 한층 뚜렷이 아로새겨나가는 인물이다.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는 그런 에르베 기베르가 199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동성애자였던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밝힘은 물론 에이즈로 사망한 옛 연인 미셸 푸코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여 대중에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에르베 기베르는 자신의 대표작인 이 소설에서 긴 문장으로 이어지는 몽환적 서술과 사진을 찍는 듯한 집요한 묘사가 어우러진 특유의 문체로써 실제인지 허구인지 경계가 모호한 세계 위에 그 자신과 주변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에이즈라는 정체불명의 병이 한 줄기 검은 바람같이 불어와, 마치 페스트처럼 냉량한 죽음의 공포로 육체에 스미어 정신마저 잠식하곤 끝내 한 인간을 치욕스러운 배신감과 함께 병몰(病沒)시키는 과정을 분노와 체념의 서늘한 필체로 그려냈다. 독자는 죽음의 시간에 내던져진, 예술적 감수성의 혈액을 지닌 이가 감각하는 예민하고 서글프며 처절한 투쟁의 기록을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사신과의 동거, 죽음의 유예기간
최후에의 갈망과 모순된 부정(否定)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불분명한 이 기록은 1988년부터 시작된다. 기억은 1981년으로 돌아간다. 에이즈, 즉 후천성면역결핍증이 아직 소문만 무성할 뿐 그 실체를 아는 이가 많지 않던 시기다. 에르베 기베르는 장차 자신을 죽음의 좁고 가는 고통의 길로 인도할 이 병에 대해 처음 듣는 장면을 반추한다. 그 기억 속엔 ‘뮈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베르의 옛 연인, 미셸 푸코가 있다. 에이즈가 ‘동성애자들이 걸리는 암’이라는 이야기에 뮈질은 폭소를 터뜨린다. 이 치명적인 병에 대해 마약을 코로 흡입하다 갑자기 중단하면 감염된다거나 냉전 중이던 미국 또는 소련이 개발한 세균병기라는 말들이 나돌던 때였다. 뮈질은 1984년, 에이즈에 의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소설 속 기베르는 옛 연인이자 오랜 친구의 죽음으로 비로소 실재의 외피를 두른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 뮈질과 “공통적인 타나토스의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내 마음을 무너뜨리는 공포가 기베르와 그의 주변인들 사이에 만연해진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 그들이 딛고 선 땅에서 연거푸 이어지며 그들의 근간을 흔드는 두려움의 여진이 에이즈, 곧 죽음이라는 불행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방탕에서 비롯된 죽을병으로부터의 도피와 체념이 거듭되는 예민한 우울의 날들이 이어지고, 그러다 마침내 확진 판정을 받고부터는 기나긴 죽음의 유예기간이 시작된다. 줄곧 죽음에 경도되었다가 진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자 오직 더욱 깊어진 죽음과의 친밀감만이 필요해진 기베르는 “세상 무엇보다 고귀하고 혐오스러운 공포와 갈망”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는 “에이즈의 잔혹함에서 감미롭고 황홀한 무언가를 보았다”고 고백한다. 작품 속에서 ‘마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배우 이자벨 아자니는 인터뷰에서 오랜 친구 에르베 기베르에 대해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환상의 세계에 잠식당했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그 상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다만 건강한 존재일 뿐인 것에 지루해했다”며 “그는 늙고 싶지 않아 했다”는 말로 기베르가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를 증언한다. 그러나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세상의 이미지를 순간의 포착으로 현상(現像)하던 기베르가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을 일관된 자세로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했고, 동시에 그러한 도피 가능성이 모래성처럼 덧없이 무너져 내려 스스로 영락없이 스틱스 강을 건너게 되기를 바라는 양가감정을 갖는다.
이처럼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에서 에르베 기베르는 자신의 입체적인 내면을 혼란스러운 서사 속에 투영해 적나라한 나체를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가명으로 쓰인 주변 인물들의 온통 모순된 사생활까지 누출하면서 거침없는 망설임으로 부정(否定)의 서사시를 써 내려간다.

거푸 갈마드는 절망과 희망
피로 쓰인 배신과 체념의 기록

에르베 기베르로 하여금 이 “수치 또는 파렴치”의 기록을 가능케 한 것은 배신이다.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를 꼽으라면 ‘배신’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1981년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에이즈에 대한 소식을 기베르에게 처음 전해준 빌이라는 이가 있다. 빌은 대형 백신 연구소의 소장으로, “동시대를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발견에 한 발을 담글 수 있었”던 그는 한편으론 에이즈 백신의 개발을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수단으로 보는 것을 숨기려 들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 내에서 가장 제 욕망에 충실하여 그것에 추동되는 면모를 보이는 빌은 어쩌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이인 동시에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한 수단을 비열하리만치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일 것이다. 사형선고를 확신하며 즐거워하다가도 절망하고 그러다 또다시 죽음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순간을 기다리던 기베르들에게 그는 치유라는 이름의 희망을 던져준다. 그리하여 깜부기불 같은 삶의 의지와 점점 불어가는 고통 속에서 담담히 죽음의 기록을 써나가며 자신의 육체를 대신할 정신으로서의 작품에 남은 시간을 오롯이 바치고자 했던 기베르는, 어느덧 희원(希願)으로 지핀 강렬한 삶의 의지를 불사르며 발버둥 친다. 빌이 전해오는 소식 하나하나마다 일희일비하던 그는 결국 빌이 실패와 외면으로 그들을 배신했음을 깨닫고 배신감에 치를 떤다. 빌이 “구원이라는 허구의 마수”를 뻗치지만 않았던들, “이 친구들에겐 감추는 걸 저 친구들에겐 털어놓는 식”으로 자신이 대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놀이에 심취하지만 않았던들 기베르는 지하로의 기나긴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죽음의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목에 중의적으로 쓰인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가 빌만은 뜻하는 것은 아닐 게다.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소문을 공개적으로 부정함으로써 그녀와 공통의 운명으로 결속돼 있다 믿었던 에르베 기베르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순 마린, 뮈질이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진실”을 잔인하게 폭로하는가 하면 스스로 죽음을 갈망했으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애썼던 기베르 자신 모두를 배신의 주인으로서 아우르는 것일 테다.
에르베 기베르는 자신의 바람대로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절규 속에서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고 자신의 절망을 표현하면서 “죽음에 익숙해져야 함을 깨달았다”고 체념하고 ‘친구’들을 사랑하고 증오하기를 반복하는 혼란스러운 마음 가운데서도 채혈 주사기의 실린더를 채우던 피의 선연한 붉은빛처럼 분명했던 것은, 연인인 쥘과 베르트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비록 나는 제발 그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고,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도록 나의 피를 그들의 피로부터 분리시켜달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그들을 나의 절망 속 가시적인 피의 바다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는 생명 곧 영원이 죽음과 길항 또는 순환의 관계에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치 소설 최종장의 “액자 구조 속에 갇혔다”는 그의 절규처럼.
시인 김현이 해설에서 말하듯 “산 자의 사실들은 허구를 향해 있”고 “그게 예술이 죽음을 이겨내는 힘”이다.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라는 작품을 통해 에르베 기베르는 죽음과 예술의 대치 그리고 동화(同化)의 기전을 치열하게 탐구함으로써 “예술을 영원의 영역에 소속”시켜 스스로를 불멸로 남겼다.

진실의 완성은 허구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진실인가 허구인가? 이에 대해 작품의 해설을 쓴 시인 김현은 “‘진실의 완성’은 허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허구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완성으로 완성된 이 책을 마침내 완결하는 독서 행위란 아마도 에르베 기베르에게 친구로서 화답하는 일일 것이다. 그에 관한 회고가 아니라 내가 구하지 못한 죽음에 대한 회고로. 에르베 기베르는 자신이 발췌하여 제시한 삶의 부분을 통해 결국에는 읽는 이 스스로가 어떤 삶의 조각을 찾아내길, 기적 같은 우연을 실제로 완성하길 요구한다. 마치 그로써 자기 죽음을, 예술을 망각이 아니라 영원의 영역에 소속시키길 바라듯이.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욕망은 ‘계속해서 살아남기’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에 관한 에르베 기베르의 이러한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질병은 ‘예술’이다.
(/ 해설 〈닉네임〉 중에서)

목차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해설: 닉네임_김현

본문중에서

소문만 무성하던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처음으로 꺼낸 이는 빌이었다. 1981년이었을 것이다. 빌은 출장차 다녀왔던 미국에서, 관련 잡지를 들추다가 그 질병으로 발생한 죽음에 관한 첫 임상 보고서를 읽었다. 그는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며 무슨 미스터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 병을 언급했다. 빌은 백신을 생산하는 대형 제약 연구소에서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뮈질과 단둘이 저녁을 들면서 빌이 퍼뜨린 공포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뮈질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다가 급기야 몸을 비틀며 소파 밑으로 굴렀다. “동성애자들만 걸리는 암이라니. 허무맹랑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웃겨 죽겠네!” 그때 뮈질은 이미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인 레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듯하다.
(/ p.20)

1983년 가을, 뮈질은 세미나에서 돌아와 각혈을 했고 밭은기침 속에서 점차 쇠약해졌다. 하지만 기침하는 사이사이 샌프란시스코의 사우나에서 벌였던 마지막 광란을 회상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말했다. “에이즈 때문에 거기도 이젠 쥐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가 대답했다. “모르는 소리. 외려 사우나에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린 적은 일찍이 없었어. 그야말로 특별해진 거지. 그곳에 감도는 위험이 새로운 공모감과 새로운 애틋함, 새로운 결속감을 만들어냈거든. 전에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던 이들이 이젠 대화를 해. 다들 자기가 왜 거기에 와 있는지 아주 잘 아니까.”
(/ p.30)

1983년은 쥘이 멕시코에서 목의 림프절종으로 고생한 해였다. 1984년은 마린 그리고 내 편집자가 나를 배신한 해이자, 뮈질이 죽은 해였고, 일명 ‘이끼절’이라고 하는 교토의 사원 사이호지에서 소원을 빈 해였다. 1985년은 우리의 이야기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 1986년은 사제가 죽은 해였다. 1987년은 대상포진이 발병한 해였다. 1988년은 절망적인 가운데 내 병을 발견하고 석 달 뒤, 내게 구원을 믿게 했던 우연에 희망을 건 해였다. 스테판에 따르면, 잠복기가 네 해 반에서 여덟 해에 이르고 이제는 자각하게 된, 그 여덟 해에 걸쳐 내 곁에 어른거리며 나를 위협하던 그 병의 징조들의 연대기에서 육체적 이상(異常)들은 성적인 만남들보다 덜 결정적이지 않았고, 예감 또한 그 예감들을 지워버리려는 시도였던 기도보다 덜 결정적이지 않았다. 이 연대기는, 병의 진행이 방탕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의 도식이 되었다.
(/ p.64)

뮈질에게서 [명상록] 판본을 받으면서 알게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배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스승들, 특히 죽은 이들에게 먼저, 그들이 그의 존재에 가져다준 것과 가르쳐준 것에 대해 각각 특별한 헌사를 바쳤다. 그러자 몇 달 뒤 죽게 될 뮈질이 자기도 다음 책에선 그런 식으로, 내게 바치는 헌사를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준 것이 없는 내게.
(/ p.81)

신호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억제된 숨소리가 느껴졌다.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나는 침대에 누운 자세였다. 배신의 조짐에 순간 복부에 말뚝이라도 박힌 듯한 통증을 느꼈다. 침대의 네 다리가 마린이 작동시킨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며 나를 고문했다. 다음 날, 리샤르를 만나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한 끝에 마린이 변심한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는 어느 정도 한물간 미국인 백만장자 배우와 연애 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린에게 혼인증명서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그녀의 꿈이었던 미국 영화 세 편의 주연 자리를 약속했다.
(/ p.90)

내 일기의 목적이 어쩌면, 이 점이 가장 혐오스러운데, 어쩌면 뮈질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그가 자기 속에 단단히 품은 비밀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불투명하게 반짝이는 검은 다이아몬드의 매끄러운 면들만을 남겨둔 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진실을 증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일기가 그의 전기(傳記)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진정한 애물단지가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p.104)

불행한 자에게 가장 심한 욕이 되어버린 6월의 태양으로 환한 병원 앞마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뮈질이 이제 곧 죽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테판에게 들었을 땐 믿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 확신이 들자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틀린 내 얼굴이 눈물 속으로 흘러내리며 형체를 잃더니 나의 절규 속에서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나는 곧 뭉크의 〈절규〉였다.
(/ p.109~110)

아울러 그는 뮈질의 죽음 때문에 자기가 이토록 잘생긴 남자들로 가득한 이토록 멋진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에 극도의 죄책감을 느꼈노라고 털어놓았다. 당연히 나는 그 여름에, 수영을 한 뒤 바위 위에서 알몸으로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일광욕을 하던 귀스타브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그 병으로 죽을 거야. 나, 너, 쥘,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 p.124)

이제 와 고백하건대, 나는 마린의 에이즈 감염 소식을 소문이 아닌 진실로 받아들이고서 기뻐했다. 사디즘 때문이 아니라, 혹자들이 남매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던 우리가 공통의 운명으로 단단히 결속되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 p.138)

순간 나는 우리에게 불행이 들이닥쳤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빠져나갈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왕성한 불행의 시기를 맞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검사 결과에 화상을 입어 겉으로는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상, 계속해서 쩍쩍 갈라지는 보도의 파편 위에 쓰러져 있었던 그 불쌍한 녀석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 자신에게 한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내가 가장 무서웠던 것은, 쥘이 사형선고에 대비하여 내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자 얘기했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여전히 우리의 검사 결과, 혹은 어쩌면 자신의 검사 결과가 음성일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이었다.
(/ p.156)

죽음은 내게 끔찍하게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잔혹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죽음과 관련된 그 모든 잡동사니들이 혐오스러워졌다. 나는 의과대학생용 두개골을 치워버리고 공동묘지는 페스트라도 되는 양 피했다. 죽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마치 죽음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런 겉치레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이젠 오직 더욱 깊어진 죽음과의 친밀감만이 필요하다는 듯. 나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죽음의 감정을 찾아나갔다. 세상 무엇보다 고귀하고 혐오스러운, 그 공포와 갈망을.
(/ p.160)

샹디 박사는 처음부터 경고했었다. “현재로선 딱히 에이즈 치료제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그저 증상이 생기면 그때그때 적절히 치료해나가는 수밖에. 그러다가 마지막 단계가 되면 그때부턴 지도부딘이 있는데, 그건 한번 시작하면 끊을 수 없소.” 그는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때까지”라고 말했다.
(/ p.179)

수첩의 날짜를 다시 세어보았다. 쥐라 거리에서 내 병을 최종적으로 선고받았던 1월 23일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받아들였던 첫 번째 선고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도 있다는 두 번째 선고가 내려진 3월 18일 사이에 56일이 있었다. 사형선고를 확신하며 즐거워하다가도 절망하고, 잊었다가도 지독한 강박에 시달리는 것에 길들여진 56일을 살아낸 참이었다. 나는 이제 어쩌면 이전 단계보다 더 가혹할지도 모를 정지와 희망과 불확실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 p.189)

쥘은 우리가 감염되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내게 에이즈는 멋진 병이라고 말했었다. 실은 나 또한 에이즈의 잔혹함에서 감미롭고 황홀한 무언가를 보았다, 내게 에이즈는 분명 잔혹한 병이었으나 급격한 것이 아니라 기나긴 계단을 통과해야 하는 단계적인 병이었다, 기나긴 계단은 영락없이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각각의 칸은 비할 바 없는 죽음의 수련이었다, 에이즈는 죽을 시간이 주어지는 병이었다, 요컨대 죽음에게 살 시간을, 시간을 발견할 시간을, 그리하여 마침내 삶을 발견할 시간을 주는 병이었다, …
(/ p.193)

나는 그 아이들을 내 육신 이상으로,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내 육신을 통해 낳은 아이들처럼, 피를 나눈 것 이상으로 사랑했다. 어쩌면 HIV로 인해 그들의 피 속에 내 자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음울한 의미로서 피를 나누었다는 것이, 피로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 비록 나는 제발 그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고,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도록 나의 피를 그들의 피로부터 분리시켜달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그들을 나의 절망 속 가시적인 피의 바다에 빠뜨리고 있었다.
(/ p.227)

내 손에 밋밋하고 성실하며 두툼한 책 한 권이 놓였고, 나는 읽기도 전에 그것이 불완전하고 불순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 입술을 달싹이는 진정한 첫 문장, 그러나 내가 진정한 저주인 양 매번 가능한 한 내게서 멀리 밀어내고 잊으려 했던 그것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전조였고, 나는 글로써 그 문장의 효력이 발생할까 봐 두려웠다. “불행이 우리를 덮쳐야만 했다.” 그래도 써야 했다, 끔찍스럽게도, 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
(/ p.237)

그 순간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부터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로만 보이던 내가 놀라우리만치 잘생겨 보였다. 문득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거울을 볼 때마다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시체의 것으로 느껴지던, 야윌 대로 야윈 저 얼굴에 익숙해졌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극치에 의해서든 나르시시즘의 중단에 의해서든 결국 저 얼굴을 사랑했어야 했다는 것을.
(/ p.259)

빌은 우리의 세계에 속해 있지 않고, 우리 편도 아니에요. 절대 영웅은 될 수 없는 인간이죠. 영웅은 죽어가는 이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거든요, 선생님처럼. 그 죽어가는 이는 어쩌면 저고요. 빌은 누가 됐건 절대 죽어가는 이의 곁에 있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엔 너무 겁쟁이거든요.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누워 있는 친구한테 갔을 때도, 보다 못한 그 친구의 형이 빌을 쿡 찌르며 친구와 대화해보기를 권하자 마지못해 아주 잠깐 친구의 손을 잡았다가 겁에 질려 이내 놓아버리더니 그 뒤로 다시는 병문안을 가지 않았죠.
(/ p.283)

나는 내 책의 액자 구조 속에 갇혔다. 진퇴양난이다. 대체 내가 어디까지 침몰하기를 바라는가? 차라리 목을 매고 죽어버려, 빌!
(/ p.286)

저자소개

에르베 기베르(Herve Guibert)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55~1991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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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사진가와 기자로 활동한 에르베 기베르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기는 파리에서 보내고 라로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극단 활동을 했다. 1973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화 학교에 지원해 탈락하지만 여러 잡지에 영화 칼럼을 발표한다. 이후 그는 사진과 언론 분야로 관심 영역을 넓히고 1978년부터 약 7년간 일간지 〈르몽드〉에서 사진 및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한다. 파트리스 셰로와 공동으로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 〈상처받은 남자(L’homme blesse)〉로 1984년 세자르 영화제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다. 1987년에 에르베 기베르는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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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파리3대학에서 영화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 『히피』 『지도와 영토』 『복종』 『아주 특별한 컬렉션』 『날개 꺾인 너여도 괜찮아』 『10월의 아이』 『포기의 순간』 『부영사』 『엘르』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인생의 맛』 『비밀 친구』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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