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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 근대 일본의 첫 대외 전쟁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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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민중, ‘국민’이 되어 전쟁에 협력하다

    청일전쟁 통사를 다룬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존 청일전쟁 관련 책과 몇 가지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책들은 주로 정치, 외교, 군사적 관점에서 청일전쟁을 다뤘지만, 이 책은 언론과 민중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국민’을 탄생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근대 일본이 치른 첫 대외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경제의 근대화와 함께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청일전쟁은 왜 시작되었던 것일까? 당시 일본의 민간인이자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가리켜 문명국인 일본과 야만국인 청의 전쟁, 즉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전쟁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군사 헌금 조직화의 선두에 서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국민도 이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곧 ‘문명 전쟁’론이나 ‘문야의 전쟁’론은 국민의 내셔널리즘과 전쟁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이 하나가 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민간인들은 ‘국민’이 되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전장에서 병사·군부로서 전쟁을 체험했고, 후방 지역 사회에 남은 압도적 다수는 다양한 언론 매체가 전하는 정보를 통해 전쟁을 ‘체험’했다. 이들의 전쟁 ‘체험’과 전후의 전몰자 추도, 또한 전쟁 중에 친숙해진 ‘군인 천황’상에 대한 숭배를 통해 근대 일본의 ‘국민’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오타니 다다시 교수는 일본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미디어사를 전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 정부의 대외 언론 공작과 당대 일본 언론들의 모습, 국민들이 이런 언론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당시 일본 정치를 책임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무쓰 무네미쓰를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곧 이들이 당시 펼쳤던 정치와 외교가 어떤 것이었나를 살피면서, 과연 청일전쟁이 꼭 일어나야 했던 전쟁이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 등의 협력 관계를 살피면서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도 질문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의 모습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전투를 하고, 중국 대륙에 진출한 상황, 그리고 대만을 점령한 상황들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 왕궁 점령 사건’이나 ‘뤼순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의 ‘역사 위조’를 지적한 점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조선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일본의 역사에서는 먼저 사격을 가한 조선군에 일본군이 반격해서 왕궁을 점령한 자위적·우발적 사건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견해가 명백한 ‘위조’라고 말하면서 일본 공사관과 혼성 여단이 사전에 계획해서 실행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뤼순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도 일본 역사에서는 부정되거나 규모를 축소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면서 뤼순 학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문제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출판사 서평

    일본은 왜 청일전쟁을 일으켰는가?
    일본 민중은 어떻게 ‘국민’이 되어 전쟁에 협조했는가?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조선은 왜 최대 희생자를 내야만 했을까?

    청일전쟁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는가?

    보통 한국 역사에서는 청일전쟁을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1894년 8월 1일 일본이 청에 선전 조서를 공포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종료되었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전쟁 개전 시기와 종결 시기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관점은 "옛날 교과서와 같은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러 연구들을 종합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광의의 청일전쟁은 전투 대상과 지역이 세 개(조선, 중국, 대만)인 복합 전쟁이며,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조선 왕궁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시기는 청과의 전쟁은 1895년 3월 30일 휴전조약 조인으로 전투가 정지되고,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조인과 비준서 교환으로 5월에 법적으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조선과의 전쟁 및 대만 주민과의 전쟁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으로 종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1월 18일의 대만 평정 선언으로도, 1896년 4월 1일의 대본영 해산으로도 종결되지 않았으며 전투의 양상을 바꾸면서 실질적으로 계속되었다고 말한다. 즉 조선과의 전투는 갑오농민전쟁 진압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그 이후의 의병 투쟁으로 계속되며, 청과의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만에서도 일본군에 저항하는 무력 투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저자는 광의의 청일전쟁은 종결 기간이 애매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가?
    전쟁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당시 일본 정치는 어지러웠다. 1890년 11월 25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1회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초기 의회에서는 번벌 정부와 자유당 및 입헌개진당 등의 민당(반정부 세력)이 대립해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은 잇달아 민당 측에 의해 삭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 8월,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성립했다. 이토 내각도 마찬가지로 조약 개정과 예산안 등으로 민당 측과 계속 대립했고, 결국 두 번이나 의회를 해산하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두 번이나 의회를 해산하는 행위로 사실상 헌법 정지 상태가 될 가능성마저 있었으며, 또 이토 내각은 앞으로 다가올 총선거 결과에 자신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조선은 청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톈진조약을 근거로 들며 곧바로 조선에 파병했다.
    청일전쟁은 정말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전쟁이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조선에 파병할 때까지만 해도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오히려 청과의 협조를 유지하면서 조선에서 얻는 권익을 유지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파병이 되자 대내외적으로 전쟁을 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각종 저널리즘과 국민, 심지어 민당 측에서도 전쟁을 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리고 결국 이토는 국내의 정세를 극복하고자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저자는 당시 수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전쟁 개전에 대한 책임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그가 전쟁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청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외교의 책임자였던 무쓰 무네미쓰의 책임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쓰 무네미쓰가 자신의 외교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전쟁을 주장했다고 비판한다. 육군을 비롯한 군부 세력은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전쟁 개전 책임이 클 수밖에 없다.
    저자는 자유민권운동을 추진했던 민당 세력 또한 전쟁에 대한 책임이 크다고 비판한다. 민주적인 정치 운영을 요구하며 정부를 비판해왔던 민당이 어느 순간부터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되었으며, 청일전쟁 개전과 그 후 일본의 제국화에 큰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예전에 ‘정비 절감, 민력휴양’을 주장하던 민당 세력의 다수는 청일전쟁 중에 전쟁 승리에 열광했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정부와 군이 확립한 아시아에 대한 군사 침략 노선에 동조하여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는 증세와 공채 모집을 승인했다. 그 대가로 민당이 받은 것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보였던 번벌 정부와의 제휴가 한층 강화된 것과 번벌 정부가 독점하던 행정부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저널리즘과 국민들도 전쟁을 부추기고 전쟁에 적극 가담했다. 언론들은 선뜻 전쟁 결심을 하지 못하는 이토 내각을 비판했고, 국민들 또한 의용병 운동을 일으키면서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정치적인 민주화를 요구한 재야 세력 또한 예외는 있었지만, 번벌 정부 이상으로 침략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청일전쟁 최대 희생자는 동학 농민군
    뤼순 학살 사건의 진실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하는 부분이 남아 있지만, 청일전쟁에서 최대의 희생자는 조선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청일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동학 농민군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동학 농민군은 당시 총에 맞아 죽거나, 칼로 찔려 죽거나, 부상을 입어 죽어나갔다. 저자는 전체 희생자가 3만 명이 훨씬 넘는 것은 확실하며 그 외에 사망한 경우 등을 추가하면 5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에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일본군의 전략이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일본군의 목적은 동학 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하는 것이었다. 이를 명령한 사람은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 참모차장이었다. 당시 일본군을 이끌던 그는 대표적인 주전론자였고,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에서 전쟁 지도를 사실상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1894년 11월 제2차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농민군은 한때 일본군의 병참선과 전신선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자 가와카미는 동학 농민군과 그들을 지원하는 조선 농민에 대한 제노사이드적인 살육을 명령했던 것이다.
    원래 일본 정부는 청일전쟁이라는 무대에서 일본군이 전시 국제법을 준수한 ‘문명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동학 농민군 학살처럼 잔인한 학살이 중국 뤼순에서도 일어났다. 저자는 당시 병사가 쓴 종군 일기를 통해 일본군의 잔혹성을 밝히고 있다. 아군의 시체를 목격한 병사들은 흥분해서 적을 "모두 죽이기"로 하거나 복수하겠다는 말을 종군 일기에 남겼다. 그러나 상급 지휘관이 그런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다면 학살 사건은 그 정도로 중대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상급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학살을 부추겼다. 한 병사는 "야마지 장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있었다. ...... 앞으로는 토민土民이라 할지라도 아군을 방해하는 자는 남김없이 죽이라는 명령이다"라고 기록했다. 또 다른 병사는 "집합지를 출발할 때, 남자로서 장정인 청나라 사람은 모두 놓치지 말고, 살려두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모든 병사들이 용기가 넘쳤다"라고 썼다. "지나支那병을 보면 가루로 만들고 싶어 했고, 뤼순 시내에 있는 사람을 보면 모두 죽였다. 그 때문에 도로 등은 죽은 자들만 있어서 행진하기에도 불편하다"라고 종군 일기에 묘사된 것처럼 뤼순에서 무차별 살해가 벌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학살 사건이 "단순히 적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하급 장교나 하사관과 병사 계층이 흥분해서 보복을 했다는 우발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는, 일본군의 조직 자체에서 유래해 청일전쟁 시점에 벌어진 구조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언론과 국민들의 전쟁 협력
    민중은 국민이 되어 국가와 함께 싸웠다


    이 책의 백미는 단연 제5장 [전쟁 체험과 ‘국민’의 형성]에 잘 나와 있다. 이 장은 당시 일본의 사회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쟁 정보가 언론에 의해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졌는지 당시의 언론 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전쟁 정보 수용을 통해서 민중들이 ‘일본 국민’으로서 어떻게 공통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토 내각은 초고 검열제, 납본제 등을 실시하며 언론을 통제했다. 그러나 점차 일본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자 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황해 해전에서 승리하자 그때부터 승전 소식을 언론에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들은 전쟁 현장에 종군 기자와 화가들을 파견해 전쟁 소식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전쟁 정보를 전달받은 독자들은 차츰 언론의 내용에 적극 호응하며 ‘일본 국민’으로서 전쟁을 바라보게 되었다. 책에는 당시 언론 현황, 기자와 화가들의 활약상, 독자들의 반응 등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언론은 좀 더 많이, 좀 더 상세하게 전쟁 정보를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이룬 언론사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독자들 또한 전쟁 정보를 통해 국가와 개인을 하나로 여기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지역 신문은 종군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문품이었고, 전장과 지역 후방 사회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파이프였다. 이 파이프를 통해서 전장과 지역 후방 사회는 정보가 교환되어 서로를 자극했고, 전장의 체험이 일반화되어 지역 신문의 독자에게 공유되었던 것이다."
    [후소신문] 기자 스즈키 게이쿤은 4회에 걸쳐 전장에 나가 취재를 했다. 그리고 귀국한 뒤 50회 이상 전황 보고회를 열었다. 스즈키는 이 보고회에서 일본 군인의 용맹함, 적병의 비겁함, 평양의 경관, 격렬하고 참담한 전투 경험 따위로 청중을 흥분시켰다고 한다. 이 보고회에 참가한 대중의 수는 5만 명이 넘었는데, 그만큼 대중이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에 처음 파병되었을 때만 해도 많은 민중은 조선 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언론을 비롯해 일부 사람들만 소리 높여 전쟁을 떠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도 비밀리에 외교를 진행한 터라 국민에게 전쟁 협력을 호소하는 일도 없었다. 당시 일본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신문과 잡지 등 활자 매체, 대외경파 등 민당 정치인들이 전쟁을 부추겼고, 전쟁을 하자는 분위기가 차츰 퍼져나갔던 것이다. 저자는 민중의 자발적인 전쟁 협력의 구체적 예로 1894년 6월 하순부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용병 운동을 들고 있다. 의용병이란 민간인이 비정규 군대를 조직한 것을 말하는데, 의용병 운동을 통해 민중들은 스스로 전쟁터로 나갔던 것이다. 징병제로 구성된 정규군을 정비해온 정부의 방침과는 모순되는 움직임이었다. 의용병 운동을 통해 민중들은 지역을 넘어 "국가적 내셔널리즘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곧 민중은 이제 ‘국민’이 되어서 국가와 함께 싸우게 되었다.

    청일전쟁 전 과정을 충실하게 담은 통사

    이 책에는 청일전쟁의 전 과정이 충실하게 담겨 있다. 우선 청일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 제1장에서는 1880년대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을 개설한 뒤, 외세의 간섭에 의해 좌우된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 체결된 톈진조약으로 인해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을 철수하기로 했고, 출병 시 상호 사전 통고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청일 양국의 군사력의 근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톈진조약 협조 체제가 변화하는 가운데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 양군이 조선에 출병하고, 이런저런 과정 끝에 청일 개전에 이르는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풍도 해전, 조선 경복궁 점령 사건, 성환 전투 등의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개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투, 즉 평양 전투, 황해 해전, 동학 농민군 섬멸 작전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제4장에서는 중국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 양상과, ‘뤼순 학살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제5장은 제1장에서 제4장까지 묘사한 것과 같은 정치사·외교사 연구가 아니라 사회사·미디어사를 다루는 장으로, 전쟁 정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그 정보가 수용된 결과 사람들과 지역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제6장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내용과 대만 침공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청으로부터 군사 배상금 2억 냥(일본 엔으로 3억 1,100만 엔)을 획득했고 더 나아가 랴오둥반도 반환 보상금으로 3,000만 냥(4,500만 엔)을 받았다. 전승 결과, 일본은 합계 2억 3,000만 냥(3억 5,600만 엔)을 얻었다. 한편 청은 배상금을 자력으로 염출할 능력이 없어서 외채에 의존하는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 일본은 배상금의 8할을 군비 확장에 쓰면서 군국주의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다.

    목차

    머리말
    청일전쟁 관련 연표

    제1장 | 전쟁 전야의 동아시아

    1. 조선의 근대와 톈진조약 체제

    ‘속국’과 ‘자주국’
    개화 정책과 임오군란
    청일의 대응
    갑신정변-급진 개화파의 쿠데타 실패
    조슈파와 사쓰마파의 대립
    톈진조약과 일본, 청, 영국의 협조 체제
    극동 러시아-이미지와 실상

    2. 일본과 청의 군비 확장
    청의 군비 근대화-회군의 팽창
    북양 해군의 근대화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군비 근대화
    우선시된 해군의 군비 확장 | 육군, 7개 사단 체제로
    육해군 연합 대연습
    참모본부의 대청 전쟁 구상의 형성

    제2장 | 출병에서 전쟁으로

    1. 갑오농민전쟁과 청일 양국의 출병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성립
    이토 내각의 고난-조약 개정과 대외경파
    갑오농민전쟁-동학의 확대와 봉기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
    청과 일본의 출병

    2.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일 정부
    청일 양군의 조선 도착
    이토 수상의 협조론, 무쓰 외상의 강경론
    제1차 절교서와 영국·러시아의 간섭
    청 정부 내의 주전론과 개전 회피론

    3. 전쟁이 시작되다.
    7월 19일의 개전 결정
    풍도 해전
    조선 왕궁 무력 점령
    혼성 제9여단의 남진
    성환 전투
    선전 조서를 둘러싼 혼란-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
    개전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생각

    제3장 | 한반도 점령

    1. 평양 전투

    전쟁 지도 체제
    단기전에서 장기전으로
    제5사단 본대, 조선으로
    짐을 옮기는 병사의 부족-"수송의 한계"
    제3사단의 동원
    노즈 제5사단장의 평양 공격 결의
    청과 일본의 무기 차이
    격전-혼성 제9여단의 정면 공격
    평양 점령과 청군의 패주

    2. 황해 해전과 일본 정세
    9월 17일의 조우
    승리-과도기의 군사 기술과 제해권 확보
    메이지 천황과 히로시마 대본영
    대본영 어전 회의
    청일전쟁 와중의 총선거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7 임시 의회

    3. 갑오개혁과 동학 농민군 섬멸
    갑오개혁-친일 개화파 정권의 시험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부임과 조선의 보호국화
    제2차 농민전쟁-반일·반개화파
    동학 농민군에 대한 제노사이드

    제4장 | 중국 침공

    1. 일본군의 대륙 침공

    제1군의 북진과 청군의 요격 체제
    압록강 도하 작전
    가쓰라 사단장과 다쓰미 여단장의 독주
    제2군 편성-뤼순반도 공략으로
    무모한 뤼순 공략 계획

    2. ‘문명 전쟁’과 뤼순 학살 사건
    구미의 눈과 전시 국제법
    뤼순 요새 공략 작전
    11월 21일, 어둠 속의 뤼순 점령
    학살-서로 다른 사건의 모습
    왜 일본군은 학살 행위를 벌인 것인가?-병사의 종군 일기를 읽다
    서양 각국에 대한 변명 공작

    3. 동계 전투와 강화 제기
    제1군과 대본영의 대립
    야마가타 제1군 사령관 경질
    제1군의 하이청 공략 작전
    랴오허 평원의 전투
    산둥 작전과 대만 점령 작전
    산둥 작전으로 북양 해군 궤멸

    제5장 | 전쟁 체험과 ‘국민’의 형성

    1. 언론과 전쟁-신문, 신기술, 종군 기자

    조선으로 향하는 신문 기자들
    강화되는 언론 통제
    국민의 전쟁 지지와 정보 개시
    신기술 도입과 [아사히신문]의 전략
    [아사히신문]의 취재 체제
    고급지 [시사신보]의 전쟁 보도
    아사이 주와 ‘화보대’
    [국민신문]과 일본화가 구보타 베이센 부자
    사진과 회화의 차이
    가와사키 사부로의 [일청전사] 전 7권

    2. 지역과 전쟁
    의용병과 군부
    군부 모집
    병사의 동원과 환송
    전장과 지역을 연결한 지방지
    [후소신문] 기자 스즈키 게이쿤
    성황이었던 전황 보고회
    개선, 귀국과 사람들의 환영
    추도와 위령-‘선별’과 도호쿠의 사정
    후쿠시마 현청 문서가 남긴 ‘지역과 전쟁’
    동원과 전시 사무-정·촌장들의 ‘근무 평정’
    청일전쟁과 오키나와
    그 후의 오키나와

    제6장 | 시모노세키 강화조약과 대만 침공

    1. 강화조약 조인과 삼국 간섭

    직례 결전 준비
    정청 대총독부의 이동
    강화 전권 사절에 취임한 이홍장 | 교섭 개시와 이홍장에 대한 테러
    청의 고뇌와 조약 조인
    삼국 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랴오둥반도 환부 요구
    랴오둥반도 반환과 ‘와신상담’

    2. 대만의 항일 투쟁, 조선의 의병 투쟁
    대만총독부와 ‘대만민주국’
    증파되는 일본군
    남진 작전 수행에 대한 격렬한 저항
    ‘대만 평정 선언’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전투
    민비 살해 사건
    항일 의병 투쟁과 아관파천

    종장 | 청일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규모
    전쟁 상대국과 전쟁의 계속 기간
    누가, 왜, 개전을 결단했는가?
    미숙한 전시 외교
    곤란한 전쟁 지도
    전비와 청일의 전후 경영

    후기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본문중에서

    예전에는 일본이 서구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성은 불가결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의한 조선·중국 침략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청일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견해가 유력했다. 즉 일본 정부도, 군도 청일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여 준비를 거듭해 개전에 이르렀다는 견해로, 지금도 이런 생각이 통설로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청일전쟁의 필연성은 실증적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 p.9)

    이러한 가운데 천황은 점차 전장에 가까운 히로시마로 친정하여 대본영에서 솔선해서 전쟁을 지도하고, 소박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계속했다. 이때 전장의 장병들의 노고를 생각한다는 ‘군인 천황’상이 형성되어 국민의 전쟁 협력과 동원의 계기가 되었다.
    (/ p.155)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뤼순 학살은 단순히 청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하급 장교나 하사관과 병사 계층이 흥분해서 보복을 했다는 우발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는, 일본군의 조직 자체에서 유래해 청일전쟁 시점에 벌어진 구조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
    (/ p.206)

    출정 병사에 대한 전승 축원회, 산둥 작전의 전승이 전해지자 열린 전승 축하회, 의원금·휼병恤兵 헌납품 모집 캠페인, 군사 공채를 모집하는 기사 등이 실렸고 이 중 가장 등장 횟수가 많은 것이 가족 부조 관계 기사였다. 민중의 흥분과 행정 시책이 서로 공조하면서 지역의 후방=전시 체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p.282)

    지역 신문은 종군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문품이었고, 전장과 지역 후방 사회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파이프였다. 이 파이프를 통해서 전장과 지역 후방 사회는 정보가 교환되어 서로를 자극했고, 전장의 체험이 일반화되어 지역 신문의 독자에게 공유되었던 것이다.
    (/ p.285)

    이런 연구 상황을 종합한 결과, 현시점에서 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광의의 청일전쟁은 전투 대상과 지역이 세 개인 복합 전쟁이며,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조선 왕궁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시기는 청과의 전쟁은 1895년 3월 30일 휴전 조약 조인으로 전투가 정지되고, 강화 조약 조인과 비준서 교환으로 5월에 법적으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조선과의 전쟁 및 대만 주민과의 전쟁은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으로 종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1월 18일의 대만 평정 선언으로도, 1896년 4월 1일의 대본영 해산으로도 종결되지 않았으며 전투의 양상을 바꾸면서 실질적으로 계속되었다.
    (/ p.361)

    한편 제2차 이토 내각은 조약 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대외경파의 공격을 받아 연속해서 두 번이나 중의원을 해산하는 내정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토 수상에게 6월 2일 단계에서 파병은 청일 개전을 상정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 총선거 대책을 위해 대외적 위기를 연출한다는 내정적 이유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청을 압도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전시 정원으로 8,000명이 넘는 혼성 여단)을 조선으로 파병하게 되자, 파병을 계기로 불거진 대청·대조선 강경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이토 내각은 철병할 수 없게 되었고 개전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p.363)

    그리고 민당을 지지하고 민당 소속 의원을 국회로 보낸 지역 사람들의 경우 어떤 이는 전장에서 병사·군부로서 전쟁을 체험했고, 후방 지역 사회에 남은 압도적 다수는 다양한 언론 매체가 전하는 정보를 통해 전쟁을 ‘체험’했다. 이들의 전쟁 ‘체험’과 전후의 전몰자 추도, 또한 전쟁 중에 친숙해진 ‘군인 천황’상에 대한 숭배를 통해 근대 일본의 ‘국민’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 p.374)

    저자소개

    오타니 다다시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50~
    출생지 일본 돗코리현
    출간도서 1종
    판매수 80권

    1950년, 일본 돗토리 현 출생. 오사카대학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에 센슈대학 법학부 강사, 조교수, 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센슈대학 문학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일본 근대사・미디어사. 주된 저서로 《근대 일본의 대외 선전》(1994), 《병사와 군부의 일청전쟁》(2006) 등이 있다.

    생년월일 1989~
    출생지 전북 익산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89년 전북 익산 출생. 해군 부사관(하사 제대)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역사, 사회,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미국과 중국의 대립 등을 보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 대한 책과 영상물 등을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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