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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글씨 : 이윤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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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이윤기
  • 출판사 : 작가정신
  • 발행 : 2018년 09월 10일
  • 쪽수 : 112
  • ISBN : 979116026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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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故) 이윤기(1947~2010) 8주기 추모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탁월한 번역가, 신화 연구가
이윤기 다시 읽기


“내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종이었다.
내 어머니는 그 아버지의 종이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탁월한 번역가, 신화 연구가, 고(故) 이윤기 작가. 작가정신에서는 이윤기 작가 타계 8주기를 추모하여, 그가 생전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쳐온 소설, 에세이, 인문(신화)의 세 분야의 대표작 3종(『진홍글씨』, 『이윤기가 건너는 강』, 『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을 개정하여 출간하였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각 작품에 실린 의미를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감각으로 재해석하되, 이윤기 작가의 전방위적 사유와 인문 정신이 오롯이 담긴 표지와 판형으로 재단장했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의 세계를 남성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파헤치고 고발한, 선구적인 페미니즘 보고서 『진홍글씨』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조화’라는 미명으로 존재하는 균형이 기실 허위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낸 작품이다. 첫머리에 “‘A’는 ‘간음Adultery’의 두문자 ‘A’가 아니다. ‘A’자는 ‘아마존Amazon’의 두문자 ‘A’다”라는 자기반성적인 논리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유방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선입견을 제시하는 초반부를 필두로, 삶에 숨어 있는 문화적·신화적 상징들을 분석해나감으로써 이 세계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철저하게 까발린다.

나아가 급작스러운 파국을 제시함으로써, 여성에게 유달리 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남성조차 기존의 양성 간 불편등한 섹슈얼리티 착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의 물리적 폭력만 없으면 여성억압이라는 현실이 가려지리라는 허위의식을 꿰뚫고, 문화적·관습적으로 뿌리깊이 자리잡아온 상징들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것이다. 다수의 페미니즘 소설들이 등장한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이윤기 작가가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서평

[줄거리]
주인공 ‘나’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물든 가정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결혼해서도 딸 둘만 둔 ‘나’는 물론이고 역시나 딸들만 줄줄이 낳은 장남 오라버니도 ‘나’의 아버지 앞에서는 찬밥 신세이며, 오직 아들을 본 남동생 부부만 환영받는다. 친정 모임에서도 ‘나’와 남편을 비롯하여 두 딸은 ‘헛것들’이라 불리며 대놓고 차별과 괄시를 받는다. 비교적 남성우월주의를 벗어난 남편과의 삶에서 ‘나’는 다소 위로를 받으며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에 조금씩 눈뜨지만, 그 길은 험난하다.
온 가족과 위스콘신의 메디슨으로 떠났던 ‘나’는 그곳에서 남편과 함께 대학원 공부를 한다. 남편의 직장인 은행에서 연수 프로그램 기금을 받아 경영대학원(MBA) 석사과정을 다니는 겸, ‘나’도 같이 공부를 한 것이다. 여느 한국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성에 관해 평등적인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의 연수원 영어 강사 ‘밈시 헤스터’를 경계한다. ‘밈시’는 꾸밈없이 성과 이혼을 밝히고, 또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당당한 모습을 갖고 있기에, 한국인 여성으로 주눅 든 삶을 살아온 ‘나’와는 비교하는 자격지심을 부추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두 딸을 향한 사랑만으로 살아온 남편조차도 ‘밈시’가 매혹적임을 인정하지만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며 ‘나’를 다독인다.
시간이 흘러 경영대학원 과정을 마친 남편은, 느닷없이 박사과정까지 공부를 이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나’는 당혹감과 더불어 외도의 우려를 넌지시 던지지만, 남편은 거듭 ‘나’를 안심시킨다. ‘나’와 두 딸과 멀리 떨어진 채 홀로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한 남편은, 이메일로 한결같이 연락을 취한다. 어느 날 남편은 ‘밈시’와 계속해서 교류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나’는 재차 ‘밈시’와의 관계를 의심한다. 의심의 꼬리가 길어져 ‘나’는 남편에게 배달되어온 우편물을 통해 외도를 추측하게 되는데…….

남성 작가 최초로 여성 억압적 현실을
문명사적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는 문제작

이윤기 작가는 번역가이기에 앞서 소설가였다. 그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비록 수백 권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본령은 늘 소설이었다. 이윤기 작가는 43년의 창작 인생 속에서 꾸준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작품을 썼다. 그는 굵직하고 웅숭깊은 소설들을 선보여, 동인문학상·대산문학상을 받으며 그 세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소설 세계는 신화와 문화라는 양면으로 단단하게 지어진 요새와도 같았다. 이윤기 작가는 ‘여성’의 문제에 누구보다도 밝고 깊은 눈으로 천착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화와 문화 읽기에서 비롯되었다. 신화를 통해 역사를 읽어냄으로써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미래의 새로운 문화를 예견하는 혜안을 길러낸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신화와 문화를 공부해온 자신만의 결론을 밝힌다. “남성만이 할 수 있던 일, 여성은 도저히 할 수 없던 일”이 줄어가고, “여성만이 할 수 있던 일, 남성은 도저히 할 수 없던 일”이 줄어가고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남녀동권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신이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의 조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태”를 안타까워하며, 불화의 책임이 온전히 “치사한” 남성에게 있음을 지적한다.
1998년 이 세상에 나왔던 『진홍글씨』는 바로 그러한 통찰력의 결실이었다. 여성을 억누르고 재단하는 일방적인 폭력의 세계를 남성 작가가 직접 파헤치고 고발한, 선구적인 페미니즘 보고서였던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다수의 페미니즘 소설들이 등장한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서, 『진홍글씨』를 읽으면 이윤기 작가가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선견지명을 진즉에 보여주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홍글씨』가 처음 발행되었던 스무 해 전과 요즈음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독자들은 지금 여기서 성찰해볼 만하다.

문화인류학·신화학의 만남으로 풀어낸,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조화’라는 허위에 대한 탐구

『진홍글씨』라는 제목을 보면, 한눈에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왔음을 알아챌 수 있다. 남성 젠더의 폭력이라는 죄업을 한 자 한 자 새긴다는 의지에서 의도된 이 패러디의 제목을 넘겨보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조화’라는 미명으로 존재하는 균형은 기실 허위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작가의 그러한 자기반성적인 논리를 독해해냄으로써,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사람들 앞에다 이마를 들이댈 수 있다. 들이대고는 내 이마에 진홍글씨 한 자를, 새길 테면 새겨보라고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핏빛 ‘A’자를, 크고 선명하게 새겨보라고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A’는 ‘간음Adultery’의 두문자 ‘A’가 아니다. 나는 하지 않았거니와 설사 했다고 하더라도 이 ‘간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 혼외의 사랑이 한편에서는 한량의 파격으로 미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간부姦婦의 패덕으로 매도되는 이 불공정한 시대의 성적 교섭 환경에서는 ‘간음’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남성과, 남성이 주도하는 지배계층 언어 간의 간음을 통하여 생겨난 사생아일 뿐이다.
‘A’자는 ‘아마존Amazon’의 두문자 ‘A’다. 아마존은 남성의 종노릇을 거절하고 무리지어 여성만의 모듬살이를 꾸몄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여인국女人國의 여전사들이다. ‘아마존’은 ‘젖이 없는 여인들, 무a 유방mamos 여인들’이다.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활 쏠 때 시위에 걸린다고 오른쪽 젖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오른쪽 젖이 없었단다.

주인공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주홍글씨』와 전혀 다른 궤도로 역사가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A가 간음(Adultery)의 이니셜이던 『주홍글씨』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아마존의 이니셜이어야 함을 힘주어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처럼 낙인찍히기를 거부하고, 결연히 자신의 오른 젖을 잘라버리는 희생의 자립을 택한다. 남성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스스로 삶을 결정짓는 아마조네스를 동경하고 딸들이 그런 삶을 살기를 기원한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초반부와 종반부에 두 차례 반복되며 결연히 강조된다.

내 세대 자매들과 다음 세대 딸들에게 써서 남긴다.

이와 같이 구세대 여성의 당당한 유언이 놀라울 뿐 아니라, 남성 캐릭터가 그전까지의 페미니즘 소설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독창적이라서 이 소설은 더더욱 빛난다. 문학평론가 류보선은 해설에서 작품 속 ‘남편’을 두고 “이제까지 여성 문제를 다룬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인간형”이라고 평한다. ‘남편’의 경우 “일상적인 폭력을 일삼거나” 혹은 “권위를 강요하는 독재적이고 독선적인 성격”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소설이 “남성의 폭력 그 자체를 너무 부각”시키고 “남성의 폭력적인 구조를 절대화”하는 등 폭로하는 고발을 넘어, 현실에서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폭력이 내재화된다는 입체적인 모순을 빚어내는 표현력을 선보인 것이다. 『진홍글씨』에서 ‘남편’은 당대의 다른 페미니즘 소설들이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캐릭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최근의 페미니즘 담론에서야 ‘깨어 있는 남성’의 교묘한 모순을 다루기 시작했는데, 『진홍글씨』는 선구적이게도 무려 20년 전에, 주인공 ‘나’의 조언자로 등장한 ‘남편’이 적대자로 격변하는 과정까지 보여주면서 ‘깨어 있는 남성’이라는 캐릭터를 역동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나’는 ‘밈시 헤스터’라는 여성인물을 통해 더 뚜렷한 심리적 입체감을 얻는다. ‘밈시’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나’와 같은 여성이지만 여러 외국어를 섭렵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다가 중국인과 한 차례, 일본인과 한 차례씩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는데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보수적인 한국의 가정에서 나고 자라나 불평등한 성 착취 구조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나’와는 매우 다르다. 이로 인해 ‘나’는 ‘밈시’에게 불가사의한 경계심을 갖게 된다. 이는 ‘밈시’와 ‘나’ 모두 명예남성 또는 코르셋의 혐의를 만드는 소설적 장치로 작용한다.

야, 우리 집에서 나보다 더 암내를 피우는 법이 어디 있어? 나보다 더 ‘암컷성’을 자랑하는 법이 어디 있어?

소설 속 ‘밈시 헤스터’는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주인공 ‘나’의 대칭점에 있다. 이름부터 『주홍글씨』에 나오는 ‘헤스터 프린’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주홍글씨』의 성 착취 구조에 대한 비판적 패러디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주홍글씨』에서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헤스터 프린’이 간통(Adultery)의 A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진홍글씨』에서 남편은 아내인 ‘나’를 두고 예상외의 다른 여자와 결국 간통을 저지르지만 A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는 형벌 따윈 받지 않는다. 그 누구로부터 낙인찍히지도 않는다. 그것은 남편이 ‘나’를 비롯한 여성의 편에 서는 교묘한 방식으로 남성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할 만큼 치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패러디는 17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주홍글씨』와 현대 사회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간통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남편의 머리를 벼루로 내리친다. 뜬금없는 파국의 결말에 독자들은 당황할 수도 있으나, 독자들로 하여금 나머지 결말을 뒤잇게 하기 위한 의도된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각별히 문제가 있어서 남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양성의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여성을 편드는 척하며 오히려 간통으로 기만한 남편을 징벌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남편의 죄를 남편에게 낙인찍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몸에 새긴다.

신체의 일부에다 글씨를 새기는 저 자자형刺字刑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위협했던가? 하지만 이제 나는 이마를 내밀고 자자형을 받겠다. 이제는 자자형도 내게는 위협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마를 내밀고 요구한다. 내 이마에 핏빛 진홍글씨로 자자刺字하라.

이로써 제목이 ‘진홍글씨’인 까닭은, 종반부에 이르러 초반부의 암시가 살아나면서 비로소 밝혀진다. 우연히 마련되어 있던 벼루에는 남편의 죄를 기록할 수 있는 검은 먹물이 담겨 있었기에, 그 검은 먹물이 남편의 붉은 피와 뒤섞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새기는 주체와 대상은 모두 여성 자신이다. ‘나’는 그 때문에 자매들과 딸들을 위해 이 기록을 써서, 제 몸에 새겨진 죄의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21세기 페미니즘의 청사진을 그리다
더 급진적이고 노골적인, 남성을 벗는 여성의 이야기

『진홍글씨』는 페미니즘 소설이자 르포 소설이다. 이윤기 작가는 문화인류학·신화학을 오고가며 우리 일상생활에, 그리고 뇌리에 당연하게 세뇌되어 있던 관행과 전통의 폐부를 서슴없이 꺼낸다. 그 속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불평등과 교묘한 차별은 물론이고, 제도적으로 안착해버린 폭력과 사회화된 악습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이 소설이 다른 페미니즘 소설과 남다른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이유이다. 실제로 작가는 유방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선입견을 제시하는 초반부를 필두로, 삶에 숨어 있는 문화적·신화적 상징들을 분석해나감으로써 이 세계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명료히 까발린다. 나아가 급작스러운 파국을 제시함으로써, 여성에게 유달리 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남성조차 기존의 양성 간 불평등한 섹슈얼리티 착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의 물리적 폭력만 없으면 여성억압이라는 현실이 가려지리라는 허위의식을 꿰뚫고, 문화적·관습적으로 뿌리깊이 자리잡아온 상징들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것이다.

작품해설
이윤기의 『진홍글씨』는 문제적이다. 『진홍글씨』의 문제성은 우선 남성 작가에 의해 쓰인 이 소설이 여성 억압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서사화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제까지 남근중심적 사회에 대한 비판은 여성 작가의 전유물이었다. 특히나 90년대 들어서는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에 의해 혹은 남성에 비해 철저하게 훼손된 여성의 삶에 주목했으며, 그 결과 여성 문제를 다룬 소설은 90년대 문학의 가장 거대한 줄기로 자리 한 바 있다. 하지만 남성 작가들은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철저히 침묵해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관심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출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다면 남성 작가인 이윤기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서사화했다는 점은 기존의 문학의 장(場)의 구조와 역사를 거스르는 대단한 서사적 모험이라 할 만하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목차

작가의 말

진홍글씨

작품 해설

본문중에서

아마존의 오른쪽 젖 자르기는 병원의 무영등無影燈 아래서 벌어지는 현대의 ‘마스텍터미乳房切除手術’가 아니다. 그것은 모성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성의 노예 노릇만은 거절하겠다는 피눈물 나는 선택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나날이 확산되어가던 가부장家父長 사회에 대한 모권 사회의, 마지막 저항의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나도 젖을 잘랐다. 그것은 병원에서, 마취 상태에서 받은 마스텍터미가 아니었다. 젖을 맡기고 마취 상태에서, 잘리기를 기다렸다가, 붕대 싸매고 돌아서는 그런 마스텍터미가 아니었다. 내 손으로 잘랐다. 나는 이제 아마존이다. 젖이 없는 여자다.
_12~13쪽

나는 이마를 내밀고 요구한다. 내 이마에 핏빛 진홍글씨로 자자刺字하라.
두렵지 않으냐고? 처음에는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두렵지 않다. 희망을, 화해를 요구하는 비굴한 미소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알았다. 나는 두려움이 노예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노예만이 두려워한다는 걸 알았다. 이제 나는 자유인이므로, 젖이 없는 아마존이므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내 몸에서 돌출해 있는, 머리 다음으로 귀중한 것을 잘랐다. 가장 귀중한 것을 자르지 않은 것은, 이 글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_13~14쪽

유학생 부부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안팎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다. 대부분의 한국인 유학생 남편은 집안에서는 한국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태도로 아내를 대한다. 말하자면 밥 가져오너라, 국 가져오너라, 와이셔츠 다려놓아라, 여편네가 집에서 뭐 하는 일이 있다고 집구석이 쓰레기하치장 꼴이냐, 하는 식이다. 나는 뷔페식당에서까지 아내에게 무슨 무슨 음식 가져오너라, 하고 명령하는 한국인 남편을 본 적이 있다. 남편이 좋아할 것으로 짐작하고 남편 음식을 알아서 챙겨오는 한국인 아내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간혹 초대받아 가보는 미국인의 가정은, 능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과는 딴판이다. 미국인 가정이 손님을 초대하는 경우 남편은 숫제 머슴 꼴이 되어 아내가 시키는 대로, 아내의 입 안에 든 혀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다. 손님 간 뒤에는 아내에게, 신문 가져와, 리모컨 어디 있어, 이러면서 잔심부름을 많이 시킬 값에라도 손님 앞에서는 껌뻑 죽는 시늉을 하고는 했다. 이런 것을 자주 보게 될 경우, 대부분의 한국의 아내들은 당연히, 미국 여자들에 견주면 한국 여자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할 법하다.
_31~32쪽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편들은 하나같이 아내를 하대하고 아내들은 하나같이 남편을 예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자다. 한국인 부부의 경우, 남편의 나이는 아내의 나이보다 3, 4년 많은 것이 보통이다. 그 경우의 예대와 하대까지 시비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동갑일 경우에도 예대와 하대가 반듯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부부가 동갑인데도 남편은 아내를 하대하고 아내는 남편을 예대하게 하는 작가와 감독을 나는 살짝 경멸한다. 그렇게 쓰는 작가나 감독이 여자일 경우 나는 그만 슬퍼지고 만다. 나는, 30년을 함께 살고도 남편이라는 자가 아내에게, 내 집에서 나가, 하고 고함을 지르는 광경을 텔레비전에서 보고는 치를 떤 적이 있다. 무서운 무신경이 아닌가?
_32~33쪽

사람의 마음만큼 몸속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짐승은 대개의 경우 마음의 작용을 사람들에게 읽히고 만다. 위스콘신에서 남편과 둘이서 낚시하러 다닐 때 나는 이것을 알았다. 그는 물고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읽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 많은 동물들은 동물심리학이라는 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읽히고 만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짐승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도 어쩌면 짐승에게 그 마음을 읽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완벽한 이중인격이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_54쪽

“한 달에 한 번쯤 들른다는 거 나도 아니까, 조심해… … 참, 밈시가 퀘벡의 병원에서 자궁 수술을 받았대. 토끼 새끼만한 기름 덩어리를 적출摘出했다던가… …. 부위가 부위인 만큼 위로 인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겠다.”
“자궁은 한낱 명사名詞에 불과하다.”
“여자에게는 눈물 나는 일이라고… ….”
_67쪽

나는 이렇게 해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되고 만다. 아득한 옛 신화가 ‘세멜레의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악타이온의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나는 이렇게 해서 낯을 익힌 셈이다. 세멜레는, 보아서는 안 되는 빛의 신 제우스의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졸랐다가 결국 그 모습을 보고는 그 위광威光에 타죽은 여자다. 악타이온은 목욕하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죄로, 제 손으로 몰고 다니던 사냥개 이빨에 뜯겨 죽었다.
내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죄로 그들과 같은 벌을 받는다면 내 남편은 신인가? 턱도 없는 소리. 나는, 내가 진상이라고 믿던 것을 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_70~71쪽

내 세대 자매들과 다음 세대 딸들에게 써서 남긴다. 쓰고 나니 조금 후련하다. 슬픔이 가라앉힌 모양이다.
사랑하라. 이것은 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싸워라. 이것은 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특권을 원칙에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둘 다 잃는다.
_85쪽

저자소개

이윤기(李潤基)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470503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다.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 1'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2000년 소설집 '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번역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변신 이야기'를 비롯, 2백여 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2000년 9월 한국번역가상을 수상했다.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종교사) 및 동 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비교문학)를 지냈다. 2010년 8월 27일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장편소설 '하늘의 문', '햇빛과 달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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