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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업과 얼굴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큰 화두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일 터, 이걸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 범철 시인이 택한 길은 물론 대결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넘어서거나 무시하거나 투항하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밖 의 세계’를 세밀히 훑으면서, 그 안쪽으로 파고들어 작은 틈을 내고 길을 만들어, 드디어 안팎이 하나가 되는, 말하 자면 ‘포월包越’의 접점에 이른다. 그래서 ‘그늘’에 서 있 으면서도 “안간힘으로 세상을 붙잡거나”(「그늘론」), ‘햇살’을 향해서도 “아름다운 적개심”(「사랑에게 할퀴 다」)을 보이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추워도 “뜨거움을 식 히며 단단해지고 싶은”(「얼굴은 어디서 오는가」) 것이 다. 원망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면,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우리는 참고 견딜 수 있다. 이 시집을 한마디로 요약 한다면 나는 ‘견딤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시인의 말

제1부
1월도 소리 없이 간다 15
가업家業 17
개심사 20
겨울 단상斷想 22
나를 비우고 25
겨울에 대하여 26
견인지역 28
계단에 있는 사람 30
그늘론論 33
그 숲에 들다 36
그림자 밟기 38
기중기 41
고목 44

제2부
나무는 울고 싶을 때 새를 찾는다 49
나무가 되고 싶은 50
낙엽송 52
마음이 젖은 것들 53
다리에는 길의 기억이 남아 있다 54
돌멩이 되어 56
두물머리 58
마당에 비를 던지고 60
목탁새1 62
목탁새2 63
소나무 65
물결에 상처를 씻으며 66
물의 갑옷 68
바람소리뿐 70

제3부
맨드라미꽃 75
버려진 것들끼리는 76
불두화의 역사 78
빨래를 걷으며 80
사랑에게 할퀴다 82
생각의, 밖이 더 조용하다 84
수채 화話 86
안부 89
아무 일도 없는 날 90
얼굴은 어디에서 오는가 92
얼음의 말 94
여울을 건너오는 다리에서 96

제4부
자목련101
오래된 통점痛點 102
우화羽化 104
우러니 마을의 저녁 106
장정리 마을슈퍼 108
저녁 바다 110
참깨를 털고 난 후 112
창이 없는 방 114
첫눈 조심 116
출생에 관한 소문 118
흔들리는 틈 121
톱풀꽃 124
풍경 126

해설/ 이동훈
아름다운 가업과 얼굴 129

가업家業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똥장사를 했다
내가 다닌 모교에서 똥을 싼 값으로 사다
남의 밭에도 뿌리고 아버지의 밭에도 뿌렸다
1원에 학교 화장실 전체의 똥을 사서
조심스럽게 퍼 날랐다
우리 학교는 똥통이 아주 커서 돈이 되었었노라
고 들었다
남의 밭에 똥을 뿌린 값으로
소를 하루 얻어 당신의 밭을 갈기도 하고, 돈을
받기도 하였다
똥이 소가 되고,
똥이 돈도 되었다
집식구를 먹여 살리고 학교도 가르쳤다
내가 학교에 입학할 때는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
셨으나
시골 국민학교 똥에 대한 이권은 다행히
형들에게 물려주고 가셨다

나는 학교 근처에 놀다가 똥이 마려우면 학교로
뛰어갔다
나의 똥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형들에게 들은 이
후다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어 없는 똥까지 누면서
뿌듯해 하였다
내가 집안일을 힘껏 도울 수 있는 길이었으니 당
연했다
지게에 똥장군을 지기도 하고 리어카로 똥을 받
아 오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똥을 퍼 나르다 똥장군이 깨져 형들은
온몸에
똥을 뒤집어쓰고 들어온 날도 있었다
돈이 되는데 무슨 상관이랴 형들은 그러는 것 같
았다
나는 형들의 똥장사 덕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
을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는
똥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먹고 살았으며
똥장사로 이문을 남겨 학교를 가르친 것이리라
아버지가 물려주고 간 똥짱사는 그러니까
2대째 내려오는
우리집의 가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