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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貴子 정승희의 민화, 삶을 본本뜬 겨레그림 ]을 내놓으며

이 책은 반세기 가까이 민화 작가 정승희가 올곧게, 차근차근 쌓아온 작품 세계를 담은 책입니다. 뿌리 없이 시절의 유행만 좇아 ‘이름만 민화’ ‘재료만 민화’ ‘도상만 민화’인 요즘 그림들에 정승희의 민화가 던지는 묵직한 경종을 만나실 테고요. 무엇보다 ‘제-대로; 본래 상태 그대로’ 된 민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실 수 있을 테지요.

자, 눈을 감고 상상하세요. 자박자박 비 내리는 봄밤, 여염집 처자가 책가도 병풍 앞에서 바느질 중입니다. 겨울에도 변치 않는 창밖의 벗, 매화가 그 곁에 자리하죠. 그림 속엔 문방의 네 벗지,필,묵과 벼루이 놓여 있어요. 서역에서 넘어온 진귀한 기물도 그림 안에 그득하군요. 이런 곳에서라면 맹물 마시며 시를 읊조려도 그 맛을 어디에 견줄 바가 없겠네요. 이렇듯 시정詩情 가득한 민화 속으로 한 걸음 성큼 들어오시길 권합니다.

귀자 정승희, 본本뜨다

삶이란 당신이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 동안에 슬그머니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존 레논의 노래가 있죠. 그만큼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게 우리 삶입니다. 그래서 삶이 더 흥미로운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 굽이 어딘가에 흥미진진한 우여곡절이 숨어 있으리라 기대되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듯 그림이 그를 이끌었다던가, 3대째 그림 그리는 집안의 무남독녀 외딸이라거나, 천재화가 부모에게 그 부황나는 삶까지 물려받았다거나… 이런 스토리는 그에게 없습니다. 그 궤적이 위인의 일대기처럼 극적으로 치닫지 않죠. 대신 그 촘촘한 밀도 때문에 마음에 꽤 진한 자국을, 오래 남깁니다. 새들도 속은 솔거의 그림처럼 초등학교 사생대회에서 그의 그림에 잠자리가 날아들었다 합니다. 어릴 적부터 화실을 오가며 그림 보는 눈을 틔웠고요. 하지만 그림으로 밥을 구하는 삶은 애당초 그가 예측하지 못한 삶이었죠. 화학과를 졸업하고도 데생이니 텍스타일이니 응용미술이니 두루 살폈지만 그의 맘으로 쑥 들어오진 못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민화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가슴에 미열 같은 게 차올랐습니다. “한번 해봐?” 그 길로 방송국에 전화해 “저 그림을 어디서 배울 수 있느냐?” 물어 찾아간 곳이 광화문 서울사대 동창회관 건물의 민화연구소(청원靑圓 정수희 선생 1의) 였죠. “몇 분이 모여 민화를 그리는데 분위기가 푸근하고 좋았어요.” 1970년대 당시만 해도 민화는 남루한 환쟁이가 저잣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그리는 저급한 그림이라거나, 폐가의 낡은 병풍에서나 보는 옛그림 정도로 여겨졌죠. 민화 그리는 이도 인사동에서 활동하는 작가 몇 명, 여성 작가 몇 명, 그림 그려 판매까지 하는 나까마 2 몇 명이 전부인 때였고요. 하지만 그에게 민화는 ‘처음 볼 때조차 다시 보는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뼛 속 깊이 흐르는 기시감旣視感 같은 것이었을까요? 여하하든 그리는 일이 마냥 좋아 연구소 문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섰던 시절이었습니다. 1978년 즈음이었죠.

스승이라는 본보기

사람들은 흔히 민화를 ‘본그림’ ‘뽄그림’이라 부릅니다. 밑그림인 ‘본’에 대고 윤곽선을 먼저 그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민화는 단순한 ‘모방 그림’ 3과는 의미의 갈래가 좀 다릅니다. 이쯤에서 잠깐, ‘본’과 ‘뜨다’가 만난 겹씨 4 ‘본뜨다’를 들여다봅니다. ‘본本’은 나무木 아래 한一이 붙어 ‘매우 굳센 뿌리를 가진 나무’라는 뜻이 되죠. 근본, 시작, 뿌리, 마음, 본성, 바탕, 자기 자신, 모범, 본보기 같은 속뜻을 지녔고요. ‘뜨다’는 새겨진 글씨나 무늬 따위를 드러나게 하는 일입니다. ‘본뜨다’는 말 그대로 ‘무엇을 본보기 삼아 그대로 좇아 하다’란 말이죠. 무언가를 본뜨려면 그 ‘본’아 훌륭한 것이어야 합니다.

1982년 그는 그 ‘본’을 만났죠. 바로 한국 민화계 원로 1세대이자, 당시 전통미술인회 회장인 고안古岸 김만희 선생입니다. “당시 민화 배우는 이들에게 김만희 선생님은 범접 못할 존재였어요. 민화 작가도 극소수인데다 남은 유물도, 변변한 민화 책 한 권도 없는 시기에 민화 연구의 토대를 세운 분이니까요. 민화 작가로서도 독보적 존재였고요. 선생님은 민화 그리는 이라면 어려운 길 함께 가는 이라며 누구든 격려해주셨어요. 제게도 ‘이미 내 제자요’ 하며 반겨주셨죠.”

그가 김만희 선생이라는 ‘뿌리’를 만난 건 작가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산사나 민가를 찾아 헤매며 남아 있는 민화를 연구하셨죠. 온양박물관이며 각 지역 박물관이며 숱한 박물관을 찾아다니실 땐 카메라와 제가 동행했고요. 그나마 박물관에 남아 있는 민화를 사진으로 찍고, 연구한 자료와 함께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셨죠. 저도 옆에서 도우며 이론을 탄탄히 익힐 수 있었고요. 일주일의 반 이상 선생님과 함께 하며 연구하던 시간이었죠.”

무엇보다 고작 한두 시간의 몰두로 ‘나는 최고다’라고 외치는 허풍선이들의 세상에서 그 스승은 묵묵히 그 느리고 겨운 일에 헌신한 작가입니다. 미수를 넘어서도 하루 세 시간 이상 꼬박 민화 그리는 일에 몰두한 스승이죠. 그 역시 그 스승을 본받아 성실을 전재산으로 알고 삽니다. “선생님은 늘 ‘민화는 모방이 기본이니 전통 그림을 본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야 한다. 그 방법도 연구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셨죠. 제 그림에 현시대 문물인 CD 등이 재료로 쓰이거나, 스타벅스 커피가 등장하거나 하는 것도 선생님의 가르침과 이어져요.” 1996년 김만희 선생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民畵匠’으로 등록된 후 지금까지 정승희 작가는 전수교육조교로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또 스승과 함께 정기적으로 전시를 열고, 후학을 교육하고, 대중에게 민화를 알리는 일에 힘써왔죠. 국내외 문화원, 문화센터, 개인 화실, 무형문화재교육관…장소 가릴 것 없이 말입니다.

“이 그림이 내 역사”

가진 것으로 순간순간 최대치를 산 그에게 ‘기회’라는 게 찾아왔습니다. 1991년 그의 첫 개인전을 일본에서 열게 된 거죠.니가타 시의 거류민단 단장이던 외삼촌을 통해 간간히 일본인들에게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림 구입자 중 한 사람이 니가타에서 개인전을 제안했습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작품 50여 점을 준비해 건너갔는데 알고 보니 지자체, 국제교류문화재단 등 스무 군데에서 후원하는 큰 행사더군요. 이틀만에 모든 작품이 팔렸죠. 내 그림이 좋아서요? 그보다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인 민화가 일본인의 마음마저 울린 거죠.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 없는, 누가 뭐래도 유일무이한 ‘조선 그림’이었기 때문에 외국인도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본 거죠. 사실 궁중화나 문인화를 명실상부한 ‘조선 그림’이라 하기엔 어려움이 있어요. 일본의 우키요에, 중국의 연화, 베트남의 테트Tet화, 인도의 마두바니 민화나 왈리 민화까지 민간회화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가장 그 나라다운 혼을 담고 있는 것처럼이요.” 이후 그는 말레이시아, 오스트리아, 베트남 등 해외에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였습니다. 일본민예관, 일본 문화원에서는 스승 김만희 선생과 함께 강의를 열었고요. 저절로 오는 거 저절로 다녀가게 길 터주며 물 흐르듯 산 사람이지만, 그라고 소일거리 대하듯 그림을 할 순 없었을 겁니다. 마음에 이는 모래바람을 감당할 길 없어 잠시 채색화로 돌아서 석당 우희춘 선생 5을 사사하기도 했죠. 작업을 병행하면서 생산적인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와 패션 쪽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민화를 그리고 싶어 그예 돌아왔죠. 니가타 전시에서 ‘조선 그림‘에 열광하던 일본인들, 태극기와 일장기 나란히 걸린 전시장에서 눈물 훔치던 교포들을 본 이후로는 한눈 팔지 않게 됐고요. 밤 사이에 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죠. 진심과 자부심은 고초의 시간만큼 충전되는 법입니다. 그는 이틀 동안 밤새우며 16폭 병풍을 그리다 쓰러지기도, 작업대에 고부라진 채 일하다 병을 얻기도 하면서 살았죠. 결혼하고 누군가의 어미 되는 평균율의 일상 대신 “이 그림이 내 역사”라며 살았고요. 세상 모든 엄마가 ‘내가 이 아이의 생명의 출처’라 기쁘게 여기며 사는 것처럼, 그도 ‘내가 이 작품의 생명의 출처’라고 아프게, 기쁘게 여기며 사는 중입니다.

그를 본뜬 그의 그림

기도도 정말 좋은 기도는 반만 하는 것이라죠? 그의 그림이 그래요. 섬세하고 단정하고 선이 곱지만 결코 과함이 없죠. 색으로, 선으로, 면으로 조금만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많이 설명하는 거죠. “민화는 비슷해 보여 그대로 본뜨기 했나 싶은 그림에도 그린 이의 인생 빛깔이 제각기 담겨 있어요. 그러니 귀한 그림이죠. 민화를 처음 시작할 땐 제 그림이 차갑고 깔끔하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어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붓선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꼭 고쳐 그려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성격이었으니까요. 세월이 지나며 제 그림이 이제 좀 편안해졌나 봅니다.” 평생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산 이는 그 한 가지 일을 통해 세상 보는 눈이 후련히 열리는 법이죠. 30년, 40년, 50년 몰입한 시간이 허공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몸 속에 쌓여 세상을 깨치고 자신을 알게 하는 통로가 되죠. 그도 붓통 옆에 끼고산 세월 동안 그림을 통해 세상과 자신과 운명을 깨쳤습니다. “한편, ‘본그림’을 그리며 생각해요. 세상 누구든 애환은, 기쁨은 크게 다를 바 없다고요. 아주 미세한 선 하나씩, 점 하나씩 다르려나?” 짐이기도 하지만 덤이기도 한 것이 인생이라는 공감, 거기서 얻는 작은 위안. 그런 걸 그림이 그에게 가르쳐주었나 봅니다. 부지불식 붓이 지나가는 자리에 나타난 그의 애환은 우리의 애환과 닮아 있죠. 그의 그림, 처음 볼 때조차 ‘다시 보는’느낌이 드는 건, 바로 이 때문인가 봅니다.

012 책머리에
021 본本뜨다
031 본本받다
041 본本이 되다
052 민화의 갈래
187 작가 소개

“잡화’, ‘별화’, ‘속화’라며 푸대접하는 호칭 대신 그나마 ‘민화’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가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이라는 게 못내 안타깝더군요. 정식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 화가가 그렸다는 이유로 낙관 하나 찍지 못한 ‘무명씨의 그림’ 으로 남았지만, 제작 연대조차 알 수 없지만, 민화야말로 우‘ 리 그림’이지 않습니까. 우리 옛 어른들의 삶에 한 몸처럼 착 달라붙어 있던 ‘생활 밀착형 그림’, 우리 겨레의 미감과 정서가 오롯이 담긴 ‘겨레 그림’이 민화란 말이지요. 도화서라는 전문기관에 의해 집단기획, 집단창작된 ‘프로젝트성 그림’ 궁중화에 비해 민화는 꽤 민주적 그림이었지요. 그림을 의뢰한 이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솔직한 감정(‘무병장수’ ‘부귀’ ‘수복다남’ ‘관직등용’ 같은)을 담은 그림이니까요. 그리는 이도 궁중화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미의식과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고요. 양반 회화처럼 이념이나 이상향에 발목 잡히지도 않았지요.

꽤 오랫동안 회화사의 범주에서 푸대접 받은 민화가 오늘에서야 전성기를 맞았다 합니다. 민화 인구가 30만 명은 족히 될 것이며, 실제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10만 명쯤 될 것이라 하더군요. 서울 인사동에서 민화가 빠지면 갤러리나 표구사 운영이 안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고요. 2017년부터 해마다 ‘대한민국 민화아트페어’도 열리고 있습니다. [근사록近思錄]이라는 고명한 책에 ‘성인위계 필어방성지시聖人爲戒 必於方盛之時’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성인이 경계할 것은, 반드시 일이 성할 때이다”라는 말로, ‘전성기에 경계하라’는 뜻이 되겠지요. 민화가 성하는 이 시기에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쓰러지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 같은 민화 작가를 바라는 이유가 그것입니다.이 책은 반세기 가까이 민화 작가 정승희가 올곧게, 차근차근 쌓아온 작품 세계를 담은 책입니다. 뿌리 없이 시절의 유행만 좇아 ‘이름만 민화’ ‘재료만 민화’ ‘도상만 민화’인 요즘 그림들에 정승희의 민화가 던지는 묵직한 깨우침을 만나실 테
고요. 무엇보다 ‘제-대로; 본래 상태 그대로’ 된 민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실 수 있을 테지요. 자, 눈을 감고 상상하세요. 자박자박 비 내리는 봄밤, 여염집 처자가 책가도 병풍 앞에서 바느질 중입니다. 겨울에도 변치 않는 창밖의 벗, 매화가 그 곁에 자리하죠. 그림 속엔 문방의 네 벗(지, 필, 묵과 벼루)이 놓여 있어요. 서역에서 넘어온 진귀한 기물도 그림 안에 그득하군요. 이런 곳에서라면 맹물 마시며 시를 읊조려도 그 맛을 어디에 견줄 바가 없겠네요. 이렇듯 시정詩情 가득한 정승희의 민화 속으로 한 걸음 성큼 들어오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