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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앤 포터 :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원제 : The Collected Stories of Katherine Anne 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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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전미도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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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미국 텍사스주의 허름한 농장에서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포터는 일찍이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를 섭렵하고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는 에세이를 쓸 만큼 영민한 소녀였으나, 지극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남부 사회에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여섯 살에 텍사스 출신 남성 존 헨리 쿤츠를 만나 결혼하지만, 8년여에 걸쳐 그로부터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한다. 남편 모르게 시와 소설을 쓰며 작가를 꿈꾸던 포터는, 계단에서 떠밀려 발목이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아이까지 유산한 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이혼을 감행하고,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하듯 자신을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 ‘캐서린 앤’으로 개명한다. 포터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1936년 작 [오랜 죽음의 운명]에는 당시 그녀가 느꼈을 법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출판사 서평

    아름답게 직조된 이야기 속에
    시대의 어둠과 개인의 불행을 날카롭게 담아낸
    미국 단편소설의 여왕 캐서린 앤 포터


    "아주 사소한 문장 하나에도 세밀한 기억을 담아 글을 쓰는 작가."
    - 유도라 웰티

    약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 전쟁과 질병이 만연한 현실을 파고들어 20세기 미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서른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포터는 1890년 태어나 1980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격동의 세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자기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적 작품들을 주로 썼다. 과작寡作인 탓에 평생 장편소설 한 편과 중·단편소설 스무 편만을 발표했으나, 짧은 이야기 속에도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맞닥뜨린 인간사의 단면을 섬세하게 담아내 “시대의 기록자” “순수성과 정확성을 갖춘 언어로 글을 쓰는 일류 예술가”라는 칭송을 받으며 이례적으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 특히 단편소설에서 독보적인 기량을 발휘하여 중편과 단편 전작이 수록된 [캐서린 앤 포터 소설집The Collected Stories of Katherine Anne Porter](1965)으로 1966년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는데, 현대문학이 선보이는 [세계문학 단편선] [캐서린 앤 포터]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명실상부한 거장이자 단편소설의 여왕, 캐서린 앤 포터의 출발점과 정수가 한데 모인 이 책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았다.
    포터는 플래너리 오코너, 유도라 웰티, 카슨 매컬러스 등과 함께 대표적인 남부 작가로 분류되지만, 남부에 국한되지 않고 뉴욕과 멕시코, 독일 등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이는 상당 부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세계 각지를 떠돌며 살았던 그녀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 텍사스주의 허름한 농장에서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포터는 일찍이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를 섭렵하고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는 에세이를 쓸 만큼 영민한 소녀였으나, 지극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남부 사회에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여섯 살에 텍사스 출신 남성 존 헨리 쿤츠를 만나 결혼하지만, 8년여에 걸쳐 그로부터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한다. 남편 모르게 시와 소설을 쓰며 작가를 꿈꾸던 포터는, 계단에서 떠밀려 발목이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아이까지 유산한 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이혼을 감행하고,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하듯 자신을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 ‘캐서린 앤’으로 개명한다. 포터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1936년 작 [오랜 죽음의 운명]에는 당시 그녀가 느꼈을 법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친척이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이 집안하고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떠나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시댁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과 증오를 온통 쏟아붓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은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미란다는 자신이 결혼으로 도망친 이유를 깨달았고, 바야흐로 결혼에서도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 그녀에게 “안 돼”라고 말하는 모든 종류의 장소와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작정이었다."

    이후 남부를 떠나 콜로라도주 덴버와 멕시코를 오가면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녀는 1922년 《센추리 매거진》에 단편 [마리아 콘셉시온]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미국 전역과 멕시코, 유럽을 종횡무진 여행하고, 거트루드 스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셔우드 앤더슨 등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유하며, 멕시코 혁명 이면의 허위와 부조리를 파헤친 [아시엔다]와 [그 나무],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한 [순교자], 뉴욕에 사는 독신 여성의 하루를 건조하게 그려 낸 [절도], 제2차 세계대전을 불과 몇 년 앞두고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국제 정세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기울어진 탑] 등 저널리스트로서의 예리한 면모가 돋보이는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특히 식민 지배하에서 착취당해 온 토착민들과 남부의 가혹한 노예제에 얽매여 살아온 흑인들, 공동체에서 외면받는 장애인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온갖 형태의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일상을 들추어 보이며 약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러한 부조리의 피해자이자 목격자로서 포터가 던지는 삶과 존엄에 관한 질문들은 당대 미국 문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포터가 늘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작품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등장인물 간 대화와 의식의 구획을 허무는 방식으로 다양한 문학적 실험을 했고, 이러한 시도는 포터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빛을 발했다. 포터는 1918년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무수한 희생자를 낸 스페인 독감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와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를 썼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인공을 덮쳐 오는 환각과 환청, 흔히 ‘주마등’이라 불리는 기억의 파노라마, 고통을 넘어서 황홀경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포터의 압도적 문장은 독자마저도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몰아넣으며 역설적으로 그 끝에서 삶의 본질을 마주하게 한다.
    무명의 시기를 거쳐 문단의 스타이자 권위자로 인정받기까지 다섯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국땅을 전전하며 질병에 시달리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포터는 남부에서 보낸 고통스러웠던 유년 시절과 불행한 결혼 생활로부터 벗어나고자 평생 애썼으나, 한편으로 그러한 경험과 기억은 포터가 자신의 시대와 인간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고 당대의 현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낼 수 있는 중대한 토양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의 삶과 작품에 있어 더 넓은 곳으로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세상이 부여한 한계를 깨고 ‘여류 작가’라는 호칭마저 거부한 채 자신의 삶과 시대를 소설이라는 형태로 치열하게 기록했던 포터는 평생을 독립적인 직업인으로 살다가 말년에 동부 메릴랜드주에 정착해 남편도 자식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1986년 미국 공영방송 PBS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미국의 거장들American Masters]은 [캐서린 앤 포터: 기억의 눈Katherine Anne Porter: Eye of Memory]을 제작해 포터의 삶과 예술 세계를 기렸다.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세계문학 단편선]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장편소설 위주의 관습에서 벗어나 단편소설에 초점을 맞춘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는 그동안 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의 형성과 발전에 불가결한 대표 작가들을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지구촌 시대에 걸맞게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문학의 변방으로 여겨져 왔던 나라들의 대표적 단편 작가들도 활발히 소개해 단편소설의 발전이 문화의 중심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성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 호러, SF 등 문학 장르의 분화를 촉진했는데 이러한 장르문학의 형성에도 단편소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한 장르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들의 단편 역시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은 그리스 신화가 그러했듯이 삶의 불변하는 단면을 촌철살인의 관찰력과 응축된 예술적 형식으로 꾸준히 생산해 왔다. 작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그린 칼로 베어 낸 듯 날카로운 인생의 다양한 단면들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새로운 문학적 기법과 실험의 도입을 통해 단편소설은 현재도 계속 진화, 확장되고 있다. 작가의 예술적 열정이 가장 뜨겁게 투영된 다양한 개성의 다채로운 단편들을 통해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통찰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문학작품은 독자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쁜 일상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세계문학 단편선]은 중심을 잃지 않고 삶과 사회, 나아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 믿는다.

    목차

    서문 잘 가렴, 작은 책아……

    꽃피는 유다 나무
    마리아 콘셉시온
    처녀 비올레타
    순교자
    마법
    밧줄
    그 애
    절도
    그 나무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
    꽃피는 유다 나무
    금이 간 거울
    아시엔다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오랜 죽음의 운명
    정오의 와인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기울어진 탑
    옛 질서
    지혜로 가는 내리막길
    하루의 일
    휴가
    기울어진 탑

    옮긴이의 말 남부에서 그리고 남부 너머로
    캐서린 앤 포터 연보

    본문중에서

    양심이고 뭐고 간에, 매트리스 내놓는 건 내일 하면 뭐 어때? 아니, 대체, 이 집에서 살려는 거야, 아니면 이 집에 깔려 죽으려는 거야? 그 말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입가에 분노가 떠올랐다. 굉장히 위태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집안일은 내 일이기도 하지만 당신 일이기도 해. 나도 나만의 직업이 따로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살면 내 직업에 들일 시간이 언제 나겠어?
    또 그 얘기야? 내 일은 규칙적인 돈벌이가 되지만 당신 수입은 불안정하다는 거, 피차 잘 알잖아. 고작 당신이 버는 돈으로 우리가 먹고살려면…… 이 문제는 제발 이번에 완전히 결판을 내고 넘어가자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 말은, 우리가 각자의 직업에 자기 시간을 써야 하니까, 집안일도 서로 나눠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야? 순전히 알고 싶어서 묻는 거야. 그래야 나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지. 참 나, 그건 다 결론 난 거 아니었어? 내가 집안일을 돕기로 했었잖아. 그래서 늘 돕지 않았어? 여름마다?
    맞잖아, 안 그래? 내가 도왔잖아? 아, 그렇잖아? 언제? 어디서? 대체 뭘 도왔는데? 와, 진짜 웃겨서 환장하겠네!
    정말로 환장할 만큼 웃겼던 모양인지, 그녀는 얼굴이 살짝 자줏빛을 띠더니 자지러지는 웃음을 토해 냈다. 너무 격하게 웃다 못해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급기야 눈물을 왈칵 터뜨렸고, 당겨 올라간 입꼬리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 p.86)

    휘플 부인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애가 눈꼬리에서 흘러내리는 커다란 눈물방울을 닦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훌쩍거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휘플 부인은 “오, 얘야, 많이 속상한 건 아니지? 그치? 그렇게 많이 속상하진 않지?” 하고 자꾸만 물었다. 그 애가 그녀를 책망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따귀를 맞았던 때를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황소를 끌고 왔던 날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추워서 밤잠을 설쳤는데도 말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너무 가난해서 자신을 돌볼 수 없기에 영영 떠나보내려 한다는 걸 그 애도 아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건, 휘플 부인은 그 생각을 차마 견뎌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리며 둘째 아들을 힘껏 부둥켜안았다. 그 애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에서 굴렀다. 그녀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애를 사랑했지만, 애드나와 엠리 생각도 해야만 했고, 그 애의 삶을 보상해 주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 아예 처음부터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는데.
    (/ pp.105~106)

    네가 조지를 좀 찾아 주렴. 조지를 찾아서 내가 그를 잊었다고 전해 다오. 그 일을 겪고도 나는 남편을 얻었고, 여느 여자들처럼 아이들도 집도 가졌다는 걸 그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어. 게다가 좋은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좋은 남편하고 살면서, 훌륭한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다고 말이야. 내가 원한 것보다도 더 많은 걸 누렸다고, 그가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돌려받고도 더욱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이야기해 다오. 오, 아니, 오, 하느님, 아니야, 그 집과 그 남자와 그 아이들 외에도 뭔가 또 있었는데. 오,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뭐였지? 돌려받지 못한 게 있는데…… 숨이 갈비뼈 안에서 꽉 차올랐다. 숨은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고 형태가 되어 가면서 날을 바짝 세웠고, 그 뾰족한 모서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어마어마한 고통이 치밀었다. 그래, 존, 이제 의사를 불러 줘.
    (/ p.153)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
    후스티노를 데려가려면 2,000페소를 내놓으라는 판사의 요구는 그대로였다. 빈센테도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리라. 빈센테는 그날 오후 내내 벽에 기대앉아, 무릎을 턱 아래 당겨 모으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너덜너덜한 샌들을 신은 양쪽 발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시간을 보냈다. 돈 헤나로가 가져온 나쁜 소식은 불과 반 시간 만에 용설란밭 전체에 퍼졌다. 식탁에서 돈 헤나로는 자기 생사가 걸린 문제로 마지막 기차를 잡아타야 하는 사람처럼 급하게 허겁지겁 말없이 먹고 마셨다. “도저히 못 해 먹겠습니다.” 그가 접시 옆을 탕 내리치면서 내뱉었다. “그 얼간이 판사가 나한테 뭐랬는지 아십니까? 고작 농노 한 명 가지고 왜 그리 걱정하느냐더군요. 그래서 내가 뭘 걱정하고 말고는 댁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 대꾸했더니 그자가 하는 말이, 우리 아시엔다에서 총 쏘는 영화를 찍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총살 예정인 죄수들이야 감옥에 한 무더기 있으니 필요하다면 기꺼이 보내 주겠다지 뭡니까. 진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상황에서 왜 굳이 죽이는 척만 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요. 그는 후스티노도 총살감이라고 생각해요. 어디 한번 해 보라지요! 아무리 그래도 2,000페소는 절대로 못 주니까!”
    (/ p.293)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녀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을 잡은 채 잠 아닌 잠 속으로, 선명한 저녁 햇살이 비치는 작은 숲으로 떨어졌다. 그 숲은 분노에 휩싸인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음성 같지 않은 노랫소리들이 숲속 가득히 울려 퍼졌다. 쌩 날아가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음색이었다. 그런데 그 노래의 화살촉들 중 하나가 애덤에게 날아와 맞았다. 화살은 그의 심장을 관통한 뒤 그 뒤편의 나뭇잎들을 베어 내며 맹렬히 날아갔고, 애덤은 그녀의 눈앞에서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멀쩡해진 몸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쏜 화살이 또다시 그에게 명중했고, 그는 쓰러졌다가 또다시 살아났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 속에서 그는 그렇게 온전히 남아 있었다. 미란다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이기심을 주체 못 하고 그의 앞에 불쑥 뛰어들어 화살을 막아섰다. “안 돼, 이런 게 어딨어?” 놀이터에서 반칙을 당한 아이처럼 그녀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엔 내 차례란 말이야. 왜 항상 너만 죽는 쪽이야?” 그때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직격으로 꿰뚫고, 그의 몸까지 날아가 명중했다. 그러자 그는 죽었고,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숲이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쳐 댔다.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 풀잎 하나가 모조리 각자의 목소리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녀는 달음질을 쳤다. 그러자 뒤따라 뛰어온 애덤이 방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따라잡고 말했다. “미란다, 나도 깜빡 잠들었나 봐. 왜 그래? 왜 그렇게 비명을 질러?”
    (/ pp.522~523)

    “여기 오는 길에 배에서 만난 독일인들도 내내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하지만 사실, 저는 평생 동안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생각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만약 생각을 했더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겠지요. 우리는 전쟁 말고는 생각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로자가 검은색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지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큰 은행에서 철창 너머 직원의 팔꿈치 사이로나 언뜻 볼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지폐가, 한 뭉치씩 고무줄로 묶인 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로자가 돈다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고작 10만 마르크짜리 지폐들일 뿐이죠…… 잠깐만요.” 그녀는 또 다른 돈다발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낱장을 훑었다. “이건 50만 마르크짜리예요. 또 이건……”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건 100만 마르크짜리 지폐 다발이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지폐 뭉치들을 하나씩 떨어트리면서, 내내 시선을 내려뜨린 채 그렇게 말했다. 잠깐이나마 그 돈의 가치가 예전처럼 느껴지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와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500만 마르크짜리 지폐, 본 적이나 있나요? 여기 그 지폐가 백 장이나 있어요. 이런 광경은 평생 다시는 못 볼 거예요. 그런데, 오!” 그녀는 일순 비탄에 북받친 듯 소리를 내지르며, 그 기만적인 종잇조각들을 두 손으로 움켰다. “이걸 다 가져가서 어디 빵 한 덩이라도 살 수 있나 해 보세요. 해 봐요, 해 보라고요!”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이,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그녀가 두 팔을 맥없이 늘어뜨리자 쓸모없는 돈들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 pp.804~805)

    저자소개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890~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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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 미국 텍사스주 인디언크리크에서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캐서린 앤 포터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남부 사회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열여섯 살에 남부 출신의 존 헨리 쿤츠와 결혼하지만, 8년여에 걸쳐 그로부터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한다. 남편 모르게 시와 소설을 쓰며 작가를 꿈꾸던 포터는 남편의 폭력으로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아이까지 유산한 뒤,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이혼을 감행하고, 과거와의 결별을 위해 자신을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 ‘캐서린 앤 포터’로 개명한다. 이후 남부를 떠나 저널리스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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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단편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로 대산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했고, 환상 문학 웹진 〈거울〉에 창작 및 번역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레딩 감옥의 노래』, 『캐서린 앤 포터』,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게스트』, 『캐릭터 공작소』, 『신더』, 『오늘 너무 슬픔』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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