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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투스

원제 : VI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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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빅투스], 유럽의 정치 지형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은
    사실상의 ‘세계 1차대전’을 그린 정통 역사소설!


    [빅투스Victus]라는 책 제목은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에서의 ‘Vici’를 ‘Victus(졌노라)’로 바꿔 단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1701-1714)의 마지막 점을 찍었던 1714년 바르셀로나의 함락을 중심으로, 하층 바르셀로나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빅투스]는 2012년 바르셀로나 소재의 La Campana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올 당시에도 큰 논란과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어판이 나온 2017년 현재 카탈루냐 독립운동 문제가 국제 뉴스의 첫 대문을 장식하고 있는 시점에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 산체스 피뇰은 카날루냐 출신 문화인류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 고집스레 카탈루냐어를 고집했지만, 이 소설은 처음부터 에스파냐어로 집필했다. 그 의도는 이 소설이 다루는 주제가 비단 카탈루냐인만의 일이 아니라 카스티야인(지금의 에스파냐)의 일이기도 하다는 문제의식에 있을 것이다.(이 소설의 에스파냐어판은 출간 후 90일 만에 총 10만 부가 팔려 나갔는데, 에스파냐와 카탈루냐 지역이 4:3의 판매율을 보였다.).
    한국의 독자들은 이베리아반도의 상황이 낯설고, 유럽의 얽히고설킨 정치지형에서 배태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 대해서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카탈루냐 문제로 유럽 전역이 들끓는 와중에, 현 질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유럽 강대국들의 반응은 그렇다 쳐도, 카탈루냐 내부에서도 독립에 대한 찬반 움직임이 따로 작동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빅투스]는 그 지역 문제의 원초성을 더듬어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가 된다.
    한편, 이 소설은 많은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정통 역사소설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새로운 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높은 평가도 받고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것의 장엄한 스펙터클에 더하여 에스파냐어권 특유의 피카레스카(惡漢소설)풍 유머와 해학이 [빅투스]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체스 피뇰이 톨스토이 외에도 갈도스, 뒤마, 위고를 잇는다는 평은 이 소설에 대한 찬사로서 매우 합당해 보인다. 이에 조응하듯, 피뇰 자신도 앞으로 18세기 유럽 역사가 지닌 가치에 주목하면서 10권 분량의 대하소설을 집필하고 싶다는 욕망을 공개적으로 피력하여 독자들의 기대를 집중시키고 있다.

    출판사 서평

    [빅투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포인트

    하나. 카탈루냐는 왜?
    이베리아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에게 바르셀로나 하면 명문 축구클럽 FC바르셀로나의 연고지부터 떠오른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의 중심 도시다. 그 팀과 상대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연고지 마드리드는 현재 에스파냐의 수도로서, [빅투스]에서 그곳은 카스티야인들이 새롭게 건설한 도시로 등장한다. 이베리아반도는 서쪽으로 포르투갈왕국, 가운데가 카스티야왕국, 그리고 동쪽의 지중해로 띠를 두른 카탈루냐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그 위로 프랑스가 위치해 있다).
    [빅투스]의 1인칭 화자가 말하기로, 에스파냐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세 개의 왕국은 가톨릭교를 신봉했으며, 그들은 각자의 왕조를, 고유한 언어를, 고유한 문화를,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항상 으르렁거렸다.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정신은 서로가 달랐으며, 성인(聖人) 열전 외에는 공통적인 게 없었다. 카스티야는 천수답이고, 카탈루냐는 지중해였다. 카스티야는 귀족적이고 농지이며, 카탈루냐는 부르주아적이고 해상무역이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카스티야는 몇 명의 폭군이 나왔다는 것뿐이었다."
    (/ p.166)
    양 왕국 사람들의 기질 차이를 화자는 다음과 같은 중세 설화로 설명한다.
    "카스티야 공주가 카탈루냐 왕자와 결혼한다. 공주는 바르셀로나로 간다. 객지에서의 둘째 날에 어린 신부가 보초를 서는 하인에게 물 컵(그게 요강이었는지는 모르겠다.)을 달라고 하자 하인은 직접 찾아보라고 대답한다. 공주가 남편에게 하인이 안하무인이라며 매질을 요구한다. 공주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어깨를 흠칫 들썩이며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 미안하지만 그대의 청은 들어줄 수 없어요." 공주가 재차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자 남편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 사람들은 카스티야와 달리 자유인이거든요.""
    (/ p.167)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자.
    "카스티야는 아메리카 정복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나중에는 나약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카스티야의 그 유명한 인물 ‘이달고’들(하층귀족)은 극단적인 광기에 긍지를 갖고, 명예에 관심이 많고, 죽을 때까지 상대를 짓밟을 힘이 있지만 소소하면서 건설적인 것을 추진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들에게 영웅적인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들을 벌이면서 잘났다고 우기는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빛나는 과거를 향해 몸부림칠 뿐이다. 그들의 손은 오로지 무기를 쥐는 데만 쓸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더러워질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다른 형태의 경험으로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묵인하지 못하고 근면한 것을 혐오한다. 그들은 번영을 추구하지만, 그들의 품위 있는 개념이 오히려 그들의 왕실로 하여금 무방비인 대륙을 약탈하거나 비굴한 아첨질에 나서도록 재촉한다.
    ......그 잘난 카스티야 사람들에게 일을 하는 것은 불명예고, 반대로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일을 안 하는 것은 불명예다. 아직도 내 귀에는 아버지가 열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내뱉던 말이 쟁쟁하다. "손바닥에 못이 안 박힌 자를 믿어선 안 된다.""
    (/ p.170)
    "1450년경에 두 왕국은 왕실 간의 혼인으로 왕좌를 통합했다. 하지만 양자의 통합은 누가 보더라도 나쁘게, 아주 나쁘게 끝장날 혼인 같았다. 내가 양자의 통합을 나쁜 혼인에 비유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결혼한 부부의 어긋난 결말과 무척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양자의 통합을 카탈루냐 사람들은 서로가 동등한 호혜의 통합으로 대했지만, 카스티야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본적인 통합의 원칙을 망각했던 것이다."
    (/ p.167)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은 통합 왕국 에스파냐의 얼빠진 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촉발된다. 유럽의 강력한 라이벌 가문인 부르봉가(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세력권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각각 에스파냐의 황제 후계자를 지목하게 되고 이로부터 카탈루냐의 비극이 시작된다.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연합군을, 오스트리아와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동맹군을 결성하고서 에스파냐 전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동맹국이 내세운 후계자 카를 6세가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1세의 뒤를 잇기 위해 비엔나로 떠나면서 동맹군은 와해되고, 카탈루냐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연합군의 가공할 공격을 받다가 1714년 바르셀로나의 함락을 끝으로 왕위계승전이 막을 내린다. 이때 바르셀로나에 쏟아부은 연합군의 포탄이 3만여 발이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바르셀로나인들이 겪었을 참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9월 11일을 카탈루냐인들이 지금도 ‘카날루냐의 날’로 기념하는 것에서도 그들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둘. 정통 역사소설의 진화 가능성을 보여준 새로운 시도.
    [빅투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긴 다리 수비리아’가 공병인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다루는 역사소설이 포병이나 기병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비하면, [빅투스]는 처음부터 이야기의 틀을 다른 각도에서 꾸려나갈 채비를 한 셈이다. 공중폭격이나 미사일 등에 의한 원거리 타격을 주공으로 하는 현대전과 달리, 성채를 둘러싼 대면전을 펼쳐야 했던 당시에는 공병의 참호 작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점에 주목하여, 피뇰은 요새전을 새로운 경지로 올려놓았다고 평가되는 보방과 쿠호른 등의 역사상 유명한 군사공학자들을 소설 속에 불러내어 판화풍 삽화를 곁들여가며 전투의 진행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이 소설의 역사적 자료인 [역사 이야기Narraciones histoicas]의 저자 카스텔비도 등장하는 가운데, 주인공 수비리아가 실존한 인물이었음이 소설 말미에 딸린 "[빅투스]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짤막한 노트"와 "등장인물_ [빅투스]의 안팎을 넘나드는 그들의 이야기"에 밝혀져 있다.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양군 지휘관들에 대한 묘사는 팩션이 저지르기 쉬운 자의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엄격한 사실(史實)에 준거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공식적인 역사, 즉 승자나 힘 있는 자들의 일방적인 시각이 아니라 목숨밖에 내놓을 게 없는 민중들의 시각에 철저히 입각해 있다. 이때 자칫하면 무겁고 우울한 ‘한풀이’처럼 흐를 수 있는 서사 방식을 배제하고, 위트와 유머, 해학과 기지, 에스파냐의 전통 산문 장르인 피카레스카 소설 기법을 차용함으로써 새롭게 진화한 역사소설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전쟁의 잔혹함과 비통함, 사회 지도층의 무능함과 민중에 대한 배신, 양 진영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먼 주인공의 행태를 통해 인간 희로애락의 감정을 유감없이 선사하는, 832쪽에 이르는 장편이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지루할 틈이 없게 하는 소설이다.

    목차

    제1부 왔노라 VENI
    제2부 보았노라 VIDI
    제3부 졌노라 VICTUS

    [빅투스]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짤막한 노트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연대기
    등장인물_ [빅투스]의 안팎을 넘나드는 그들의 이야기
    옮긴이의 말_ 바르셀로나 1714년 9월 11일

    본문중에서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 나는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하긴 일개 하녀가 어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겠는가. 발끝을 덮는 롱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우아한 모습에다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진지했다.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능력을 시험해보라고. 아버지가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 앞에 있다 보면 지레 겁을 먹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어요.” 이어 서류철을 열더니 판화를 꺼냈다. “시험 문제는 딱 한 가지. 그림을 하나 보여줄 텐데,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거예요. 간결하게 말예요.”
    첫 번째는 나였다. 그녀가 내 눈 앞에 판화를 내밀었다.
    지금도 나는 그 사본을 갖고 있다. (에이, 이런 남아프리카 들소 같은 년 봤나. 글쎄 그건 여기다 배치하라니까!)
    차라리 아람어로 쓴 시를 보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나는 어색해서 어깨를 흠칫 들어 올리면서도 머릿속에 스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별이네요. 이파리 대신에 가시가 달린 꽃송이처럼 생긴 별 말입니다.”
    곁눈질로 판화를 훔쳐보던 뚱보와 홀쭉이가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고, 이번에는 뚱보에게 보여주었다.
    (/ pp.29~30)

    뒤크루아 형제가 성채를 구경시켜 주는 동안에 잔의 침실을 몰래 알아두었던 나는 다들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사실 궁금한 게 많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등잔불을 챙겨 들고 맨발로 방을 나섰다.
    잔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었다. 더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돌아갈 것인지 망설이는 순간에 문이 열렸다.
    어쩌면 어린 나의 치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분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겪었다’고 표현한 것은 사랑이란 게 육체적인 고통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장이 오그라들고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 돌아가던 판단력이 흐트러지면서 손에 든 등잔불까지 부르르 떨렸다.
    내가 맨 처음에 본 그녀는 시골 처녀 차림이었고 두 번째는 왕비 같았는데 지금은 다소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차림이었다. 어둠 속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두 개의 불빛이, 그녀와 내가 손에 든 등잔불이 그녀의 속옷을 투영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준비했지만 결국 입만 헤벌리고 만 꼴이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겨우 마음속의 말을 꺼냈다. “그쪽이 아니었으면, 여기 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숙녀의 침실을 찾은 게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나를 뽑았습니까? 셋 중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지원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 그게 바로 나라는 거, 그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나는 평소에 편한 옷을 입어요. 하지만 그 두 지원자는 하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아니, 아예 아무것도 안 보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보잘것없는 하녀한테 도움을 청했어요.” 그 대목에서 그녀는 속내를 드러낸 게 계면쩍었는지 복도 좌우를 슬쩍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 “몇 살이에요?”
    당시 나는 두 달 후면 열다섯 살이었다.
    “열여덟 살입니다.”
    “그렇게 어려요?” 그녀가 깜짝 놀랐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오히려 스무 살 정도 더 어려 보였다. 그것은 그 ‘미스테어’가 나를 젊은 나이에, 정확히 1714년에 죽이려고 나를 급속도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로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범우주적인 차원의 일을 몇 차례 더 겪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나이를 더하는 것을 망각한 ‘미스테어’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
    (/ pp.45~46)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을 세상에 도착한 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법률적인 존재로서 책임졌다. 나는 당신의 손찌검과 매질에도, 아니, 그것보다 더한 일에도 항변하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세상에는 몽둥이질을 안 당하는 것보다 포옹을 못 받는 것을 더 불평하는 자식이 존재한다. 내 기억에 당신이 나를 껴안은 것은 딱 한 번, 내 생일날이었다. 그것도 죽은 아내의 대용품으로 자식을 껴안았던 것이다. 그날 당신은 술에 취한 채 짐승처럼 울면서 죽은 아내의 이름을 되뇌었는데 나는 곰처럼 우악스러운 당신 품에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기억밖에 없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비문명적인 세상은 교육을 위해 땡전 한 푼 저축하지 않았다고. 바르셀로나의 학교들은 이른바 좋은 학교들까지 포함해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들은, 그러니까 케케묵은 사제들은,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를 ‘썩어 문드러질 운명을 지닌 죄인들’로 취급했다.
    (/ pp.66~67)

    “난 저녁 식사 때 가끔 자네 등에 묻은 지푸라기를 보았지. 그런 날이면 우연찮게 잔의 옷에도 묻어 있더군.”
    나는 모든 규율에 의거해서 책임을 물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탄식이었다.
    “부부란 게……, 그래……, 일종의 포위된 도시라고 할 수 있겠지. 밖에 있는 자들은 들어가고 싶어 하고, 안에 있는 자들은 나가고 싶어 하는 도시…….”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원자 수비리아, 자네는 모든 요새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성스런 부부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하지만 만나면 안 됩니까?”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강의실로 가는 것이고, 거기서 가르치는 전술에 전념하는 거야. 남보다 곱절로 말이지. 가장 최근에 일어난 경우에서 증명되었듯 자네는 전술적으로 너무 느슨했어. 기왕에 등 뒤에서 공격했으면 엉덩이가 아니라 숨통을 끊었어야지.”
    (/ p.124)

    누군가가 광기를 부리면 일단 주변은 마치 광기라는 악이 주변에 공격성을 전염시킨 것처럼 그에 대한 의혹과 분노가 뒤섞인 불안한 반응을 보인다. 전쟁터에서도 그렇다. 다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탈영병은 대열을 이탈함으로써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광기를 일으키던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면 주변의 불안감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탈영했던 병사가 부대에 복귀해서 동료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것처럼. 잔의 남편과 그의 주변이 그랬다.
    (/ p.147)

    가만, 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끔찍한 내 사랑 발트라우트 같은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아니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여담부터 해야겠다. 그 어떤 것이란 단순하게 표현해서 에스파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카이사르가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 갈리아에 대해, 도이치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을 따랐던 에스파냐에 대해 말했다면, 갈리아는 북쪽에서 남쪽에 걸쳐 이루어진 세 개의 띠로 나뉘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 수직 방향의 띠들 중의 하나가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지도에서 반도의 대서양 쪽 3분의 1을 차지한다. 또 하나 반도에서 가장 넓은 띠를 이루는 게 한가운데 위치한 카스티야다. 나머지 하나는 지중해 쪽으로 띠를 이루는 곳으로, 오늘날의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곳이 바로 카탈루냐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카탈루냐왕국이었다.)
    세 개의 왕국은 가톨릭교를 신봉했으며, 그들은 각자의 왕조를, 고유한 언어를, 고유한 문화를,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항상 으르렁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정신은 서로가 달랐다. 성인(聖人) 열전 외에는 공통적인 게 없었다. 카스티야는 천수답이고, 카탈루냐는 지중해였다. 카스티야는 귀족적이고 농지이며, 카탈루냐는 부르주아적이고 해상무역이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카스티야는 몇 명의 폭군이 나왔다. 나는 출처가 의심스럽지만 양자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납득할 만한 중세 설화를 하나 기억하고 있다.
    카스티야 공주가 카탈루냐 왕자와 결혼한다. 공주는 바르셀로나로 간다. 객지에서의 둘째 날에 어린 신부가 보초를 서는 하인에게 물 컵(그게 요강이었는지는 모르겠다.)을 달라고 하자 하인은 직접 찾아보라고 대답한다. 공주가 남편에게 하인이 안하무인이라며 매질을 요구한다. 공주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어깨를 흠칫 들썩이며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 미안하지만 그대의 청은 들어줄 수 없어요.” 공주가 재차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자 남편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 사람들은 카스티야와 달리 자유인이거든요.”
    (/ pp.166~167)

    카스티야는 아메리카 정복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나중에는 나약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근거들이 기록되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그 유명한 인물 ‘이달고’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중세 발명품이다. 그들은 극단적인 광기에 긍지를 갖고, 명예에 관심이 많고, 죽을 때까지 상대를 짓밟을 힘이 있지만 소소하면서 건설적인 것을 추진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들에게 영웅적인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들을 벌이면서 잘났다고 우기는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의 즉흥적인 것 너머를 보지 못하고 날아오르지 못해 제자리를 맴도는 잠자리처럼 빛나는 과거를 향해 몸부림칠 뿐이다. 그들의 손은 오로지 무기를 쥐는 데만 쓸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더러워질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다른 형태의 경험으로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묵인하지 못하고 근면한 것을 혐오한다. 그들은 번영을 추구하지만, 그들의 품위 있는 개념이 오히려 그들의 왕실로 하여금 무방비인 대륙을 약탈하거나 비굴한 아첨질에 나서도록 재촉한다.
    에스파냐 시골 귀족은……, 에스파냐 시골 귀족은……. 젠장, 나는 그 잘난 에스파냐 시골 귀족에게 방귀나 한 방 시원하게 뀌어줄 참이다. 그렇게 비천한 시골 귀족에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볼 게 있었겠는가? 그 잘난 카스티야 사람들에게 일을 하는 것은 불명예고, 반대로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일을 안 하는 것은 불명예다. 아직도 내 귀에는 아버지가 열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내뱉던 말이 쟁쟁하다. “손바닥에 못이 안 박힌 자를 믿어선 안 된다.
    (/ p.170)

    그러면 이제부터는 나로 하여금 분노를 폭발하도록 허락해달라.
    대체 누가 믿겠는가? 나라 전체의 의견은 고사하고 헤네랄리타트의 견해조차 묻지 않은 채 나라를 대표한다는 소수의 지도자들을. 물론 당시에 바르셀로나는 부르봉군에 장악되어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그들이 무슨 권한으로 우리를 들판에 산책 내보내듯 세계적인 전쟁에 개입시킨다는 말인가? 그들은 그것이 강낭콩 한 자루나 소금 한 자루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피와 미래를 파는 것임을, 우리의 모든 것을 문서 조각과 바꾸는 것임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소수의 그들에게는 시작이 잘못된 게 아니라 최악의 상상이 잘못된 것이었다. 우리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1713년에 우리의 마지막 군대는 바르셀로나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모든 외국 군대는 이미 떠난 뒤였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텅 빈 허공에 남았다. 여러분도 한번 알아맞혀보라. 영국이 무엇을 했는지를. 영국은 우리를 속이는 데 신중함조차 무시했다. 누군가가 그 유명한 문서 조각을 들이대자, 영국의 귀족들은 만방을 향해 이렇게 일축했다. ‘It is not for the interest of England to preserve the Catalan liberties.’
    어쩌면 그렇게 황당무계할 수가! 그리고 우리 카탈루냐 대사가 절박한 상황에서 끝까지 미치광이 부르봉군에 맞서는 바르셀로나를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들의 우아한 여왕 폐하**의 발밑에 부복하자, 여왕은 뭐라고 했는가? 더도 덜도 말고 우리를 위해 밤새 고민하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 pp.174~175)

    베릭에게서 두드러진 것은 살벌한 군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미소년 같은 얼굴이다. 나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젠장, 이런 애송이가 어찌하여 모든 병사들의 존중을 받는다는 거야?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나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곳에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완벽한 타원형의 얼굴, 어린애처럼 여리고 매끄러운 볼, 가늘면서 오뚝 솟은 코, 관능성이 흐르는 좁은 입술, 상냥한 미소가 번지는 입꼬리, 활 모양을 이루는 눈썹, 우측이 조금 더 닫힌,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은 눈까지.
    제임스 피츠제임스 베릭. 그는 지인들 사이에서 ‘지미’로 불리며, 금세기에 가장 많이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다. (아마도 허영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초상화를 한 점, 아니 두 점을 여러분에게 선물하겠다. 그러니 초상화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판단하라. (뭐! 맘에 든다고? 오, 끔찍한 내 사랑 발트라우트야, 진짜 그렇다는 거냐? 그렇다면 당장 꿈에서 깨어나도록 해줘야겠구나. 장담컨대 그자는 너한테 눈길 한 번, 아니 반 번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발 달린 항아리만큼이나 못생기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으니 말이다.)(*이 대목에서 이미 베릭이 성소수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 pp.181~182)

    저자소개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Albert Sanchez Pinol)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5~
    출생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간도서 4종
    판매수 693권

    1965년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작가다.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을 그린 풍자 수필 [어릿광대와 괴물(Pallassos imonstres)](2000)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데뷔 소설은 뛰어난 화술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차가운 피부(La Pell Freda)](2002)로, 에스파냐 카탈루냐 지방에서만 20만 부 이상이 팔리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피뇰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03년 ‘오호 비평상(el Pr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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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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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도서 0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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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파냐어권 전문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다. 경희대, 멕시코 과달라하라 주립대, 에스파냐 마드리드 국립대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전공했다. 여러 매체에 에스파냐어권 문학, 인문, 예술 분야의 텍스트를 소개하며 출판기획과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 [뻬드로 빠라모] [불타는 평원] [목수의 연필] [시대를 앞서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 [16인의 방랑자] [궁둥이] [뒤마클럽] [바다의 성당] [고래 여인의 속삭임]과 이 책을 쓴 저자의 [빅투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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