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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문학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품의 수준 활동기간 작품의 양을 꼽을 수 있다면 정연희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성과를 남긴 작가다. 활동기간에 있어서도 스물이 갓 넘은 대학교 3학년 나이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로 지금까지 단 한 차례 공백도 없이 꾸준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문단에서 그의 정열적인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경이다.

『바람의 날개』에서 보이는 조화, 화해, 포용, 관용의 몸짓은 반백년의 삶과 문학을 오로지 다 받쳐 얻어낸 우담바라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말년성은 전후에 그 짐승스러운 이분법과 동일성, 폭력에 맞선 치열했던 단독성에 열망을 거치고 이룬 것이기에 더욱 빛난다. 오랜 시간 흐름 속에서도 정연희의 문학이 바래지 않는 이유다.

“한 생의 슬픔이 그리움 되어 외로운 넋이 눈물을 삼키게 하는 해질 역”이라는 이 표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 영역은 ‘영혼의 속삭임’으로 응집된 종교적 신념을 삶과 소설 쓰기에서 하나같이 실천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작가 정연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작품을 두고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문명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인간의 생명과 영혼의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 존재의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그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든 이번 소설집에 나타난 작가의 작품 세계는 그 모든 측면에서의 접근에 대해 깊고도 넓은 문제의식을 던져 놓고 있다. 특히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노을 위로 흘러가는 강물에 독백의 무늬를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라는 진술은 한국 소설에서 노인 문학이, 그리고 여성 문학이 나아갈 새로운 지평을 함축하고 있다.
오랜 세월, 영혼의 향기를 찾아 소설을 쓰고 삶을 살아온 작가의 다음 작품이 어떻게 더 깊고 넓어지는가를 가슴 설레면서 지켜보는 것은 문학하는 사람만이, 또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일 것이다. 이런 뿌듯한 행복감을 주는 작가의 이번 소설집에 다시 한 번 문학적 존경을 표하면서, 작가의 작품을 휘감고 도는 아뜩한 영혼의 향기를 오래오래 맡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 문흥술 「해설」에서

그물코 007
영원한 현재 047
일회용, 일회용! 083
바람의 날개 119
무덤에 내리는 꿈 169
치앙마이 209
하품 245
하늘 사다리 281
불쌍히 여기소서 313

해설|문흥술 _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343

소설가의 마음|아직 남아 있는 몇 마디 374

차오르프라야 강(江) 연안에 있는 도시 치앙마이에는 고층건물이 없었다. 하늘을 찌르는 예각의 높은 건물이 없어서였을까, 그 지역 어디에도 칼날 같은 서두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것이 밤이었다. 그저 그곳의 밤은 순한 어둠이었다. 어둠의 품은 깊었지만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곳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잠을 잔다. 눈이 아프도록 불을 밝힌 야경이라는 것이 없었다. 찢어지도록 밝게 밝힌 불이 없었다. 달빛은 달빛이었고 별은 별빛으로 반짝였다.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는, 그래서 하늘로 치솟은 건물이 없었다. 거리에는 서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걷는 사람도 없었다. 성형외과 광고판도 없었다. 서울 지하철역마다 도배하듯 처덕처덕 붙여진 성형외과 광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네는 서울에서 그런 광고가 눈에 뜨일 때마다 궁금했다. 저렇게 딴판으로 얼굴을 뜯어 고치면 나중에 저승에 가서, (더러는 천국이라고들 하지만) 부모도 형제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까, 현세에서 턱뼈 깎고 광대뼈 갈아내고 딴판이 되어 눈 동그랗게 뜨고 살고 싶은가? 치앙마이 거리에는 으리으리, 느끼한 풍요도 보이지 않았다. 체제도 통제도 상관없어 보였다. 정체성? 그런 게 있어? 스타도 탤런트도 없는 거리. 그런 것에 관심조차 둘 일이 없는 거리. 국가의 통치개념이 필요 없어 보이는 거리. 자유민주주의?, 그런 것이 밀고 들어온 자유시장 경제체제?, 다스리는 사람이 따로 없이 그저 사람이고 그저 하루가 평화로운 거리였다. 그 지역에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달리는 속도가 없었다. 초고속을 지나 광속이라는 개념을 꿈에서도 알아볼 수 없는 거리였다. 성공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그네는 그 지역에서 하루 종일 말을 섞을 일이 없었다. 더러 물건을 사러 거리로 나가면 몸매며 얼굴 색깔이 비슷하여 현지인들은 그네가 자기네 족속인줄 알고 심상하게 말을 걸었지만, 그곳에 안착한 지 두어 달이 지나도록 그 나라 그 지방 사람들의 말을 아예 익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 품에서 젖 떨어지면서 배우기 시작하여 잠꼬대까지 합쳐 육십 평생 쏟아놓은 말을 쌓아놓는다면 그야말로 수미산보다 더 했겠다는 생각에, 남의 나라 말을 새로 배운다는 것에 넌더리가 쳐졌다. 인간은 얼굴을 마주치면 입을 열어 말을 하지만, 그 말이 다 소통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한다면서, 죽도록 사랑한다면서도, 더러는 상처가 되고, 더러는 화를 돋우고 증오에 불을 붙이게 되는 것이 말이다. 말을 섞는 일. 주고받는 말 말, 소통이며 공감이며 이해고 설득이며 협력을 시도하는 힘이라고도 하지만, 언어가 독을 품는 날이면 저주에서 살인에까지 이른다. 오해와 반목, 증오와 질투, 인간관계를 지옥으로 몰고 가는 채찍이 되기도 하는 것이 말이다. 오해가 억울해서 이해를 시키겠다며 핏대를 올리다가 더 큰 싸움이 되고, 설명을 하겠다고 덤벼들다가 멱살 잡히는 일이 모두 말에서 비롯되었다. 말로 빚어지는 사건에 끊임없이 말려들어 헐떡거리는 중생. 말씀으로 창조를 이루신 신께서 바벨탑을 흩치신 까닭이야말로 인간이 말로 망하게 될 것을 저어하셨음이리라. 말을 간직한 자가 누구인지,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말이 창조가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하겠지만, 말을 품고 그 말이 발효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결혼하여 아내로 어미로 며느리로 살던 40여 년 동안, 모든 오해와 박해와 재앙은 거의가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어마어마한 오해는, 인습과 막연한 동경과 스스로를 깜빡 속이는 감미에서 비롯되지만, 그 꿈은 관계가 빚는 언어에서 무자비하게 깨어지기 시작했다. 결혼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는 시댁 식구들이나 남편뿐 아니라 제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까지도 때로는 주고받는 말로 아득한 오해의 거리감을 만들었다. 옛날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어미가 일러주는 계율에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맹인 3년을 살라는 말이 있었지만, 관계에서 벙어리 노릇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깔아뭉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합당한 이유가 되어 벙어리도 천만 안될 일이었고, ‘말 없음’은 그것만으로 박해의 이유가 되기 안성맞춤이었다. 40여 년 동안 그네가 막연하게 꿈꾸어 온 것은, 말을 섞을 일 없는 어느 낯선 나라로 숨는 일이었다. 여행을 떠나면서 외국어를 단 한 가지도 모르는 일에 대하여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말을 섞을 일이 없는 길을 떠나기로 한 결심의 덕이었다. 단 한마디 말을 섞지 않고도 꽃과 향초의 가게 주인하고는 극락을 이루지 않았는가. ‘인간은 일 분(分)에 3백에서 1천 단어를 내면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어느 학자의 논문에 있지만, 그네는 내면의 말조차 지워가며 살고 싶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