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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의 사람들 : 발레리아 루이셀리 장편소설

원제 : LOS INGRAVIDO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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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도서재단 젊은 작가 5인상(5 Under 35),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트 세덴바움상 수상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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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세계 문단이 주목하는 멕시코 신예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 첫 소설

    소설가는 멕시코시티에서 두 아이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남편과 함께 살아간다.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 틈틈이 글을 쓰는 그녀의 일상은, 마치 소설 속 문장처럼 “숨 가쁘게” 흘러간다. 남편은 그녀의 글을 수시로 훔쳐 읽고 과거사를 의심하며 끊임없이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고,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소설 쓰기에 매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목적은 밝히지 않은 채 필라델피아로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젊은 여자는 뉴욕 할렘의 작은 출판사에서 당시 미국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작품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식처럼 언제나 빨간 외투에 회색 스타킹을 신는 그녀는 늘 사람들과 함께이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부유한다. 문학이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상황에서 진정한 작품을 발굴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그녀를 더욱 방황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비친다. 다름 아닌, 할렘 르네상스 시대 뉴욕에서 변방의 이방인으로 고독하게 살았던 멕시코 시인 힐베르토 오웬에 대한 발견이다.

    1920년대 후반 오웬은 세력가의 자제인 아내와 이혼한 후 뉴욕 주재 멕시코 영사관에서 서기로 일한다. 병마와 고독, 좌절과 가난에 시달리는 그의 일과 중 하나는 뉴욕의 지하철역 체중계로 점점 줄어드는 몸무게를 재는 것이다. 그의 눈앞엔 빨간 외투를 입은 여인이 자주 출몰하고, 그는 자신이 유령을 닮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출판사 서평

    멕시코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첫 소설 [무중력의 사람들]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환영처럼 부유하는 현대인의 삶을 낯설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조형한 [무중력의 사람들](2011)은 출간 당시 독자와 언론의 큰 호평을 받으며 ‘전미도서재단 젊은 작가 5인상(5 Under 35)’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트 세덴바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또한 두 번째 장편 [내 이에 관한 이야기들]이 2015년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도서 100권’에 선정되고,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루이셀리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신예 작가로 급부상했다.
    세계 문단에 작가의 이름을 확고히 각인시킨 [무중력의 사람들]은 기근과 질병, 폭력 등 중남미의 현실을 담은 기존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사나, 그러한 현실을 환상적 기법으로 그려낸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은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탈영토화된 문학을 지향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이셀리의 소설은 그 어떤 문학의 분파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연속적인 플롯, 의미의 빈틈과 공백, 존립 불가능한 시제……
    새로운 세계를 빚어내기 위한 언어의 실험실


    루이셀리는「말 더듬는 도시」라는 에세이에서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쓰든지 간에 그것은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세계 각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언어에 대한 남다른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에게 새로운 공간에 들어간다는 건, 새로운 언어로 살아간다는 것과 동일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말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을 통해 언어란 구멍과 틈으로 가득 찬 불완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집요한 자의식이 투영된 [무중력의 사람들]은 소설 형식, 또는 글쓰기의 잠재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한 “언어의 실험실”이다.

    [무중력의 사람들]의 양식적 특징은 짧게는 몇 줄부터 길게는 몇 쪽에 이르는 파편화된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빈번한 생략과 암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일선상에 놓이는 존립 불가능한 시제 등도 일반적인 서사 기법에서 벗어나 있다. 이러한 독특한 구성 양식은 소설의 의미 생성 과정에 독자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보다 풍부하고 매혹적인 허구의 세계로 이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세 화자가 ‘1920년대의 뉴욕’, ‘1970년대의 뉴욕’, 그리고 ‘오늘날의 멕시코시티’로 구분되는 시공간을 불연속적으로 넘나들며 전개된다는 것이다. 우선, 이 소설의 중심 화자는 현재의 멕시코시티에서 틈날 때마다 글을 쓰는 소설가다. 화자는 젊은 시절,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번역가로 일할 당시 멕시코의 무명 시인 힐베르토 오웬에게 사로잡혔던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작품 중반부터는 화자의 또 다른 소설 속 인물인 오웬이 화자로 등장하여, 1920년대 후반 할렘 르네상스 시대에 뉴욕에서 지내던 시절을 회상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세 화자의 목소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교차되고 뒤섞이면서,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야기는 점점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처럼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킨 역동적인 서사의 흐름 안에서, 정교하게 직조된 낯선 삶의 이면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모든 삶은 붕괴의 과정일 뿐이고, 이에 맞서려면 계속 글을 써야만 한다”
    환영과도 같은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 관해 “모든 붕괴되어 가는 존재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의 기억에 시달리며 유령들과 대화를 나누는 소설가, 문학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거짓의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여자, 매일 뉴욕의 지하철역 체중계로 몸무게를 재며 생의 남은 나날을 가늠해보는 시인 힐베르토 오웬……. 이들은 모두 삶의 중력에 짓눌려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희미한 유령처럼 살아가는 존재다. 특히 [무중력의 사람들]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실존했던 멕시코의 시인 힐베르토 오웬(Gilberto Owen, 1904~1952)이다.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루이셀리는 기존의 문화나 사회 구조에 속하지 않은 라틴아메리카 지식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할렘 르네상스 시대 뉴욕에서 살았던 멕시코의 무명 시인, 문학계의 틈새에 존재하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인 힐베르토 오웬이라는 작가를 주목했고, 상품으로 전락한 문학의 비참한 위상 앞에서 “존재의 파멸과 붕괴에 맞서기 위해” 글을 쓴 오웬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써 내려가게 되었다.

    “지하철은 나를 죽은 것들에게로,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의 죽음으로 데려다주었다”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공간, 지하철


    시간의 이동을 핵심으로 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지하철 장면이다. 지하철은 단순히 일상적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20년의 시간을 넘어, 오웬은 뉴욕의 지하철에서 빨간색 코트를 입고 책을 읽는 젊은 여성을 자주 목격하고, 이 젊은 여성 또한 열차 안에서 삶에 지친 시인을 목격한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하나의 시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다, 마침내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공존하게는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 오웬과 에즈라 파운드, 에즈라 파운드와 프랑스 조각가인 브르제스카와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하철은 “유령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이 공존”하는 장소다. 이때 죽음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에 균열과 빈틈을 내준다. 그리고 이 빈틈은 존재의 ‘소멸’이 아닌 새로운 ‘탄생’을 향해가는 경로가 된다.

    에즈라 파운드, 에밀리 디킨슨, 로르카, 주코프스키……
    현실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드는 예술가들의 유령이 되살아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은 결국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라는 솔 벨로의 말을 인용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의 존재는 다른 누군가의 투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존이 지닌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있다. 그들은 바로 에즈라 파운드, 에밀리 디킨슨, 페데리코 로르카, 주코프스키, 넬라 라슨, 호세 리몬 등의 예술가들이다. 실체 혹은 본질은 있지만 형체가 없는 존재들, 견고해 보이는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의식 너머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유령들, 즉 무중력의 사람들인 것이다.
    루이셀리는 생의 막다른 지점으로 내몰린 오웬과 소설가, 번역가의 모습과 이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환기하는 예술가의 유령들을 통해, “지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삶”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의 존재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삶을 구속하는 시간의 한시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힘, 즉 글쓰기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사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소설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서사 장르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녀의 소설은 우선 마약 및 폭력과의 전쟁을 다룬 낡은 이야기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감성적인 초자연주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문학의 역량에 천착한 [무중력의 사람들]은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 세대에 합류한 여성 작가의 감동적인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 가디언

    기분 좋을 만큼 기이하면서도 독특한 이 소설은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 뉴욕 타임스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아름답고 우울한 관조와 함께, 일상적 삶의 견고한 경계를 교란시킨다. 이 우아한 소설은 인간 존재의 한시성과, 시간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세련된 직관을 통해 다룬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정교한 플롯, 유쾌한 성격 묘사, 속도감 있는 전개…… 로베르토 볼라뇨와 앙드레 지드를 떠오르게 하는 루이셀리는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세계 사이에 자리한 역동적인 유령의 세계를 탐사한다. 몇몇 소설들은 독자를 당황하게 하고, 놀라게 하고, 이상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데, 그 교활한 실험이 바로 루이셀리의 작품이다.
    - 북리스트

    사랑과 정체성, 예술, 그리고 유령에 관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매혹적이면서도 능숙하게 의식의 흐름 기법의 문체를 구사한다.
    - 북 라이엇

    그녀의 매혹적인 소설은 단락과 단락 사이의 휴지(休止)로 가득 차 있다. 짤막한 구간 사이의 별표(*)에 붙박이도록 독자를 이끌어가는 제니 오필의 훌륭한 소설 [사색의 부서]와도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 릴럭턴트 해비츠

    루이셀리의 글쓰기는 시공간이 중첩되는 세 화자의 이야기를 가로지르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책 속의 페이지로 빠져드는 순간, 당신은 인간과 유령 또는 진실과 거짓 사이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믿게 될 것이다.
    - 헤이즐 & 렌 리뷰 / 미국 문학 커뮤니티 사이트

    그것이 아무리 초라하다 할지라도 모든 문학의 표현은 도취와 환각, 그리고 눈에 일렁이는 불빛처럼 묘한 것을 가지고 있다. 유머와 전율, 그리고 미묘한 만남과 들리지 않는 절규로 넘치는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첫 소설은 그러한 자유와 불빛,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정말 장래가 촉망되는 대단한 작가다.
    - 엘 파이스 / 스페인 및 라틴아메리카 최대 일간지

    지극히 무심하지만 확신에 찬 태도로, 자아와 타자, 사실과 허구의 문제에 관해 논의한다. 마치 두 가지 모두가 하찮은 주제에 불과하다는 듯이. 새롭고, 혁명적인 소설이다.
    - 픽션 애드버킷 / 미국 문학 전문 비평 사이트

    목차

    무중력의 사람들

    작품 해설 시간(들)이 빚어낸 세계(엄지영)
    부록 새로운 세계 만들기(발레리아 루이셀리)
    옮긴이 주

    본문중에서

    모든 것은 다른 도시, 다른 생生, 그러니까 현생現生보다는 이전이고, 내생來生보다는 후인 생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여전히 내가 그 시공時空에 있고, 그때의 사람인 것처럼 - 이 글을 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당시 지나쳤던 수많은 거리와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하게 말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당시 상황을 표현할 적절한 시제를 찾기가 어렵다.
    (/ pp.9~10)

    남편은 글을 굉장히 빨리 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면 달까닥달까닥하는 키보드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데, 조금만 써도 인물들이 목소리와 육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페이지가 끝나면, 그는 인물들의 대사를 따라 읽는 버릇이 있다. 그건 극화劇化하는 과정이다. 반면 나는 나의 유령들을 흉내 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 소리를 일절 내지 않고 환영과도 같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 pp.28~29)

    언젠가 솔 벨로의 책에서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이들은 중심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반면, 죽은 이들은 주변에서 어떤 종류든 중심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온몸이 꽁꽁 얼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날 밤 저체온증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날 나는 처음으로 힐베르토 오웬의 유령과 함께 밤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없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점점 내 삶이 아닌, 가능한 또 다른 삶이 내 안에 들어온 것처럼 존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존재의 삶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나는 급기야 바깥에서 중심을, 어떤 곳에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pp.51~52)

    지하철은 나를 죽은 것들에게로,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의 죽음으로 데려다주었다. 어느 날, 나는 도시 남쪽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또다시 오웬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할렘의 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어떤 것에 의해 나타난 허깨비 같지도 않았고, 전에 전철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도 않았다. 뭔가가 내면에서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느낌, 분명 아름답지만 두려운 그 무엇 앞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가슴속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물론 터널의 짙은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가고 있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열차가 다가와서는 내가 타고 있던 열차와 한동안 같은 속도로 달렸다. 바로 그 순간, 그가 보였다. 그는 머리를 창에 기댄 채—나도 보통 그런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가 탄 열차가 속도를 내면서, 무엇인가에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내 눈앞으로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밖이 또다시 어둠으로 뒤덮이자, 유리창 위로 내 모습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의 내 얼굴이 아니라, 그의 모습 위에 포개진 내 얼굴이었다. 마치 그의 잔영이 유리창 위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유리창에 갇힌 그의 분신 속에 내 얼굴이 비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p.116)

    수직으로 이야기하는 수평적 소설. 안에서 읽기 위해, 밖에서 써야 하는 소설.
    (/ p.117)

    내가 수없이 맞이하는 죽음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호머 씨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 이론을 처음 제시한 것은 호머 씨였고, 나는 단지 그가 하는 이야기를 다듬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친애하는 오웬 씨, 사실 사람들은 한평생 살면서 수차례 죽음을 맞이하죠.
    콜리어 씨,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사람들은 죽으면서, 무책임하게도 그 자리에 자신의 유령을 남겨놓으니까요. 그러고는 계속 사는 거죠. 하나는 실제

    본모습대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령으로. 그렇게 각자 따로 따로 사는 겁니다.
    (/ pp.211~212)

    그런데 미래를 기억한다는 건 대체 어떤 거죠? 나는 호머 씨와 함께 코카인이 든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목이 막히는 바람에 간신히 물어보았다.
    이런 한심한 양반 같으니. 그건 바로 당신 자신이에요.
    (/ p.217)

    뒤늦게 극심한 고통을 일으키며 마음을 들쑤시는 것이 무엇인지, 외부에서 온 것도 아니고 막을 수도 없지만, 서서히, 그러면서도 강하게 몰아닥친 고통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나는 비스킷 하나를 집어 먹는다. 그러곤 입 안에서 반죽 덩어리가 될 때까지 씹는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점점 더 크게 불어나는 덩어리. 언젠가 파멸이 닥치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피츠제럴드는 너무도 빨리 자신의 붕괴를 연습했던 셈이다. 반대로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입 안에서 덩어리가 점점 더 불어난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파멸과 붕괴에 맞서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대체 뭘 쓰려고 하는 걸까? 어린 시절 멕시코시티에 있던 큰 집과 청년 시절 뉴욕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소설에 나올 인물들은 죄다 죽었거나, 유령으로 변했다. 물론 본인들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살바도르 노보는 멕시코에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소설을 쓰고 있는 젊은 작가가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하나 남은 비스킷을 입 안에 집어넣는다. 그러곤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비스킷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입천장이 얼얼하다. 나는 오렌지 나무 옆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 p.253~254)

    저자소개

    발레리아 루이셀리(Valeria Luiselli)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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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독창적이고, 지적이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라고 불리는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1983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코스타리카, 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 스페인 등 세계 각지를 다니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비교문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멕시코인과 외국인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은 여성 이주민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에 주목하게 하고, 멕시코의 현실을 보다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멕시코 문화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섬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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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과 스페인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라틴아메리카 소설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 루이스 세풀베다의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로베르토 아를트의 [7인의 미치광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계속되는 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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