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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숙 시집 『갈매기 학습법』. 200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수필 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엄정숙 시인의 첫 시집이다. 때문인지 시인은, 시적 언어로 이룰 수 있는 서정과 사색의 궁극 지점, 즉 모든 존재의 융화된 상태 속으로 내밀하게 스민 자아의 진경을 보여준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240. 2003년에 『시사사』, 200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수필 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엄정숙 시인의 첫 시집. 때문인지 시인은, 시적 언어로 이룰 수 있는 서정과 사색의 궁극 지점, 즉 모든 존재의 융화된 상태 속으로 내밀하게 스민 자아의 진경을 보여준다. “종일 바다를 필사하고 발목이 닳도록 시를 쓰”다가 어느덧 그 자신이 “멀리 보는 법을 익히는 갈매기”가 된 시인의 여정은, ‘동일성의 원칙’을 지향하면서 길항(拮抗)하는 서정의 자리를 잘 조감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시인은 자신이 설정한 학습과 체득(體得)이라는 상보적인 원칙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나가는데, 그렇게 새롭게 발견된 ‘나’는 단지 기억을 전사하거나 희망을 필사하는 ‘나’는 아니다.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위(定位)는 어려운 만큼 값진 것으로서 엄정숙 시인은 학습과 체득이 시적으로 융합되어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서적 울림에서 비롯하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식적 태도의 수정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엄정숙 시인의 시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어쩌면 잠시 잊고 있던 근원적 서정의 힘을 재삼 확인하게 해준다.

시인의 말

제1부

꽃씨우체국 13
햇볕공작소 14
외인출입금지 16
여자를 펼치다 18
갈매기 학습법 19
바닷가의 집 20
까치 소리 22
긴요한 아침 24
오래된 계단 26
겉멋 28
가뭄 29
개미에 관한 보고서 30
빈집의 습관 32
허물에 대한 변명 34
기차와 흰 당나귀 36

제2부

어느 버킷리스트 39
아침의 귀가 40
소금의 시 42
바다 레일바이크 44
고요의 뒤편 45
봄비 46
폐가 48
어느 봄날의 삽화 50
아찔한 햇살 51
민박집 봄 52
입하(立夏) 54
무당벌레 56
민달팽이의 봄날 57
골목이 사라지다 58
결국 60

제3부

배꼽인사 63
석양 64
오동도 66
와온벌 68
聖명자나무 70
목련꽃 그늘 72
옆집 74
소리를 전시하다 75
옛집 소묘 76
가을 즉흥 78
소문 80
어떤 기도 81
와온(臥溫)에 가고 싶다 82
실마리를 풀다 84
자화상 86
겨울 표정 88

제4부

비의 발묵법(潑墨法) 91
은행나무 거리 92
겨울나무 소견서 94
떠돌이별 96
오월 98
쑥부쟁이 100
갈매기 생각 101
낡은 풍경처럼 102
바퀴 달린 동네 104
금오도 편지 106
아이리스 꽃밭에서 108
꽃눈 110
고인돌 공원에서 111
선소의 봄 112
풍차가 있는 풍경 114
풀꽃 세상 116

해설 | 세계를 구축(構築)하는 명징(明澄)한 울림 117
백인덕(시인)

세계를 구축(構築)하는 명징(明澄)한 울림

서정시의 본질, 또는 근본 원리는 몇 개의 정의를 통해 정리해볼 수 있다. 서정시란 영혼의 깊이 속에 기반을 두며 뚜렷한 윤곽이나 형체를 통해서가 아닌 언제나 이름 지을 수 없는 색채와 향훈(香薰)으로 존재하는 정조(情調)의 표출로 이루어진다거나, 개인에게만 내재된 고유한 개성 즉 가장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며 일회적이며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정조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서정시는 무목적이며 고독한 세계이다. 그 정조는 자신만의 외로운 시간 속에 깃든 고요함 속에서 순간적으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정조는 아주 각별한 순간, 타인의 내면세계와 겹쳐지며 그로 하여금 황홀한 감흥 속에서 마음이 열리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서정시는‘회감(回感)’곧 융화의 상태를 지향한다. 서정시에서 모든 존재는 융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런 순간 시인의 굳건한 자아의식과 이성에 바탕을 둔 정신성은 소멸된다. 만약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대상을 논증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고자 할 때 서정시의 정조는 사라지고 세계는 대상화되고 만다.
엄정숙 시인의 시집 『갈매기 학습법』은 전술한 서정시의 근본원리에 최대한 충실한 시적 태도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아와 세계의 ‘동화와 투사’라는, ‘동일성의 원칙’이라는 서정시 본연의 작동원리가 각 개별 작품에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바다를 펼치다가 손을 베인다. 어제 베인 데를 오늘 또 베인다. 상처는 졸다가 놓친 한 줄 비문(秘文)이다. ‘바다를 썰어 드립니다’는 숙자상회 간판에 추가로 붙은 로고다. 자투리 천에 쓴 글씨는 비가 오면 잘려나간 바다처럼 구겨진다. 그런 날은 뽕짝과 화투를 펼쳐 불쾌지수의 비늘을 걷어낸다. 주문받지 않은 회를 뜬다. 화투 아이콘이 일러준 오늘의 운세에 따라 도다리와 광어를 판가름한다. 시간마다 바뀌는 운세의 빛깔은 휴대용 티슈처럼 추억을 닮아 간다. 레깅스 바지보다 빡빡한 하루, 라면을 끓이거나 감자 칩을 씹으며 바다를 읽는다. 처음 대면한 바다는 수직이어서 지문을 스캔할 때마다 쓸데없는 바람이 불었다. 바다는 그녀가 정독한 단 한 권의 책, 결국 바다의 책사(策士)가 되었다. 그녀는 바다를 얇게 썰어 파도가 씹히지 않게 하는 일을 좋아하고, 무게를 따지는 사람들은 바다의 첫 페이지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한밤중, 그녀는 거래 장부를 펼쳐 숫자 대신 제문을 적는다. 아직 펼쳐보지 못한 야생구역의 물때썰때와 수평선을 자르지 않는 고집 센 감성은 줄돔 무늬 표시를 한다. 그녀의 책갈피는 늘 젖어 있어 펼칠 때마다 간간한해조음이 입안에 철썩 달라붙는다. 그녀는 계절도 없이 산란하는 바다다.
?「여자를 펼치다」 전문

“바다를 펼치다가 손을 베인다”라는 은유적 수사 전략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그녀는 계절도 없이 산란하는 바다다”에서 ‘산란’이라는 시어의 중의성이다. 이 ‘산란하다’는 축자적으로는 ‘흩어지다’와 ‘알을 낳다’의 큰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를 시의 제목인 ‘여자를 펼치다’와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표면에 드러난 여자의 행위‘(바다를 썰어 드립니다’로 대표되는)와 이면에서 출렁이는 의도‘(책갈피는 늘 젖어 있어’로 응축하는)가 전략적으로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란’이라는 하나의 시어가 이 작품 전체를 집약한다고 할 수 있다.

갈매기의 이름을 바닷가에 쓴다
호명하는 대로 일어서면
바다를 지키는 솟대 같다
종일 바다를 필사하고
발목이 닳도록 시를 쓴다
오늘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먹지도 않고 스텝을 밟는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줄 아는 것은
손자의 병서를 먼저 읽어서다
꾸륵꾸륵 사람 꾸짖는 소리를 내는 것도
하루아침에 닦은 도가 아니다
캄캄하게 저물 일만 남은 나는
갈매기 앉은 자리에 앉아
미역귀보다 질긴 적막이나 던져준다
지뢰를 밟은 듯 갈매기 몇 마리가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멀리 보는 법을 익히는 갈매기를
나는 오래전에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갈매기 학습법」 전문

이름은 존재의 표명이다. 무정형의 날것에다 이름을붙이는 행위는 사건의 주체로서 내 영역 안으로 초대하는 일종의 존재적 사건을 불러온다. 호명?응답이야말로 현존재를 보증하는 제1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가 세계를 향해 일종의 촉수를 대고 정조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늘 열려 있는 상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형상화되는 엄정숙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의미 형성의 토대로서의 ‘어휘’가 아니라 사용된 시어들이 정서를 빚어내는 계기로 작동하는 ‘어조(語調)’로서 독특한 시적 태도와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특징 또한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시작(詩作) 특징이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