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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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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독서법에 관한 최초의 책 [디다스칼리콘]을 읽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독서 성찰!

국내 처음 소개되는 일리치의 대표작 [텍스트의 포도밭(In the Vineyard of the Text)](1993)은 흥미롭게도 독서에 관한 책이다. 무미건조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 전락한 현대의 독서법을 비판하며 12세기 수도사들의 온몸으로 읽는 읽기를 소개한다.

출판사 서평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참고서인가?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없는 시대
온몸으로 읽는 수도사들의 읽기를 소개하다!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타임스), "어떤 위치에서든 총을 겨눌 수 있는 지식의 저격수"(뉴욕 타임스),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가디언) ......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수많은 수식어를 동반하는 논쟁적인 사상가이다. 12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사회학, 철학, 신학, 역사학, 과학기술 등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쳤고, 살아 있는 인간의 복원을 위해 주류적 흐름에 반하는 대항 연구와 지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대와 80년대 현대의 모순과 비인간화된 사회를 폭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전문가들의 사회] 등을 통해 ‘학교가 교육을 망치고’, ‘병원이 병을 만들고’, ‘전문가가 우리를 불구로 만든다’라는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져왔다. ‘일리치 열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책과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지만, 생애 후반 20년은 사라지는 듯했다. "1970~1980년대 한동안 일리치 열풍이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일리치를 읽지 않는 듯하다"(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 오히려 2002년 타계 후, 다시 언론들은 일리치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도 ‘이반 일리치 전집’이 출간, 그의 사상을 탐구하는 철학 강좌가 열리는 등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사라나고 있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 현대 사회의 각박함이 일리치를 21세기로 ‘강제 소환’해 고전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국내 처음 소개되는 일리치의 대표작 [텍스트의 포도밭(In the Vineyard of the Text)](1993)은 흥미롭게도 독서에 관한 책이다. 무미건조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 전락한 현대의 독서법을 비판하며 12세기 수도사들의 온몸으로 읽는 읽기를 소개한다.

수도원의 포도밭으로 떠나는 순례 여행
달콤한 포도의 맛처럼 풍성한 텍스트 읽기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디다스칼리콘]은 12세기 대수도원장이자 학자였던 성 빅토르의 후고Hugues de Saint-Victor가 1128년경에 쓴 독서법에 관한 최초의 책이다.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다."라고 시작하는 첫 문장은 [디다스칼리콘]의 핵심 주제로, 후고는 궁극적으로 지혜로운 읽기, 신의 목소리를 듣고 깨달음의 기쁨을 경험하는 읽기를 권하고 있다. 수도사들은 마치 수도원 포도밭에서 딴 포도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듯 글을 한 줄 한 줄 맛보았다. 당시 읽고 배운다는 것은 수확한 포도의 달콤함에 비유될 정도로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성경을 읽다가 "거룩한 이해의 달콤함을 맛볼 때면 그것은 정말로 꿀이다."라고 기록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사들에게 "성경을 읽어라. 그것이 모든 꿀보다 달콤하고, 어떤 방보다 맛있으며, 또 어떤 술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권했다. ‘텍스트의 포도밭’이라는 제목도 이 은유에서 지어진 제목이며, 실제로 페이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지나pagina는 포도 덩굴시렁에서 유래했다.

기억력 훈련은 읽기의 전제조건!
온몸으로 읽는 낭독의 재발견


당시 수도사들은 입으로 소리를 내며 글을 읽었고 주위를 기울이며 귀로 그 소리를 포착했다. 수도사들에게 "읽기는 주마등 같은 면은 훨씬 덜하고 신체적인 면은 훨씬 강한 활동"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박동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글을 이해했고, 기억했고, 그것을 다시 생각할 때는 입안에 넣어 씹는 것과 관련지었다. 여러 자료에서 수도사들이 중얼거리고 우적거리는 사람들로 묘사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낭독은 텍스트를 몸에 완전히 새기고 암기하는 데 탁월했다. 후고는 아주 열심히 읽어서 책장을 넘기지 않고도 바로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할 수 있는 수준의 공부를 권했다. 지금의 책과 다르게 당시의 책은 알파벳 순서에 따른 배치나 장章 구별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원하는 구절이 있어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통으로 암기하는 편이 효과적이었고, 기억력 훈련이 읽기의 전제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중 연설가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은 문장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기 위해서도 암기는 필수였다. [디다스칼리콘]에서 기억 훈련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기억을 찾아 꺼내 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학생에게 익숙한 정신적 라벨을 각각의 기억에 하나하나 붙이는 것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기계적인 암기를 위해 염소나 해, 가지나 칼에 문장을 하나씩 붙여놓았다. 연설이나 논쟁을 위해 이렇게 궁전을 갖추어놓은 저자는 그냥 적당한 상상의 방으로 옮겨 가 한눈에 라벨이 붙은 물건들을 파악하고, 자신이 그런 상징들과 연결시켜놓은 기억된 공식들을 바로 꺼내 올 수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조선시대 서당 아이들이 음과 뜻을 큰 소리로 낭독하여 암기하던 것이 떠오른다. 실제로 동양에서도 읽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이었다. ‘독서讀書’는 원래 큰 소리로 읽는다는 뜻으로 보다시피 한자에도 ‘말씀 언言’이 들어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은 ‘간서看書’라고 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오랫동안 인류는 소리 내어 책을 보았고 몸 안에 텍스트를 넣어 궁극적으로는 몸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말 그대로 책을 체현하고 육화한 것이다. 이처럼 읽기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활동이 아닌 온몸을 사용하는 신체 활동이었다. 그러다 오늘날의 ‘책’이 탄생하면서 독서는 ‘수사’들의 방식에서 ‘학자’들의 방식으로 변화한다.

책의 탄생은 어떻게 읽기를 바꾸었는가?
읽는 방식이 완전히 전복된 12세기 중세를 돌아보다


읽기의 오랜 역사 중 일리치가 12세기를 선택한 것은 이때 오늘날의 ‘책’이 탄생했고 이에 따라 읽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책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책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과거의 책은 첫 문장이 입구 역할을 하는 긴 복도와 같았다. 누가 어떤 구절을 찾고자 책을 넘긴다 해도 찾을 확률은 매우 낮았으며 내용은 첨가를 통해 뒤로만 늘어날 수 있었다. 책 제목이 따로 있지 않아 ‘인시피트’라 부르는 첫 문장이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되었고,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알파벳 순서에 따른 배치, 주제 색인, 훑어보며 읽기에 적합한 페이지 레이아웃, 내용에 따른 장章 구별 등은 12세기에 이르러 생겨난 테크놀로지이다. 여전히 인쇄된 책이 아니라 필사본이었지만, 테크놀로지라는 면에서는 이미 상당히 다른 물체였다. 15세기 인쇄술은 12세기 필사자들이 이루어 놓은 변화를 기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책의 탄생은 어떻게 읽는 방식을 바꾸었는가? 후고 세대 이후의 학생들은 몇 년 공부로 수도사가 평생 정독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수의 책을 읽게 되었다. 온몸으로 읽었던 수사의 읽기가 눈으로 보는 학자의 읽기가 되었고, 수도원 안에서 집단으로 낭독하던 읽기는 개인적인 묵독으로 바뀌었다. 포도밭으로 떠나는 순례와 같았던 독서는 점점 지식을 획득하는 공부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수사’의 방식이 아니라 ‘학자’의 방식으로 읽고 썼다. 이제 포도밭, 정원, 모험적인 순례를 떠날 풍경으로서 책에 접근하지 않았다. 이제 책은 그들에게 보고寶庫, 광산, 창고에 가까운, 판독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
(/ 본문 중에서)

12세기 독서법의 변화를 살펴본 일리치는 읽는 방식이 곧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로 후고 사후 100년 동안 영국에서는 계산서와 법적 면허장이 50에서 100배 증가해 글로 남겨진 기록이 목격자의 말보다 법적으로 강한 효력을 발휘했고, 법정에서는 면허장이 최종 결정을 좌우했다.

카드 뉴스, 한 줄 요약 ... 조금도 읽지 못하는 세대
지금은 사라진 독서법이 말해주는 것


몇년 전부터 SNS에서 유행하는 카드 뉴스는 네다섯 장 분량의 뉴스마저도 너무 길다고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미지와 카피로 구성된 카드로 뉴스를 전달한다. 웬만한 언론사에서 너나할 것 없이 카드 뉴스를 선보이는 이유는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적합하며 기존의 뉴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관람기, 맛집 탐방기, 오늘의 이슈 등 인터넷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이미 요약된 글임에도 마지막에 ‘한 줄 요약’, ‘한줄 요점 정리’ 등을 넣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수준까지 정보를 나눈다. 스마트폰의 등장이 짧은 글을 양산했고, 읽는 사람의 호흡은 점점 더 짧아졌다. 후고가 열매가 시들어버린 무미건조한 학자의 읽기를 염려했다면, 지금의 읽기는 주마등이 스쳐가는 수준의 기억에도 남지 못할 읽기이다.

일리치가 [텍스트의 포도밭]을 쓴 1993년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읽는 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일리치는 12세기의 독서법을 탐구하는 것이 지금 또 다른 변화를 앞둔 새로운 통찰을 줄 것이라 생각하며 이 책을 출간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일리치가 염려한 디지털 시대의 읽기 문제는 더 심화되고 있다. 사회가 더 각박해지고, 인간다운 삶이 어려워질 때 일리치를 읽으라고 했던가! 현대의 읽기와 비교하여 지금은 사라진 독서법을 추적하는 이 책은 지금의 독자들에게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제시할 것이다. 독자는 객관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현대적 읽기에서 경험할 수 없는 지혜로운 읽기를 배우고,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의 읽기, 특히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유형의 읽기는 컴퓨터나 관광객의 활동이다. 보행자나 순례자의 일이 아니다. 차의 속도와 도로의 따분함과 정신 사나운 광고판 때문에 운전자는 감각적 박탈 상태에 빠지며, 이 상태는 책상에 앉자마자 급하게 매뉴얼이나 정기간행물을 넘길 때도 계속된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학생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복사기로 간다. 그는 사진, 삽화, 그래프의 세계에 살고 있고, 여기에서는 채식이 있는 문자 풍경의 기억은 이미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본문 중에서)

추천사

이반 일리치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성직자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역사학자 이반 일리치의 날카로운 통찰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책은 읽기의 역사와 쓰기의 역사를 넘어 인류가 간직해온 마음의 역사를 꿰뚫는 눈부신 지혜의 통찰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전자 미디어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마음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반 일리치의 열혈 독자로서 내 마음속 은밀한 서재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컬렉션을 추가할 수 있게 되어 뿌듯하다.
- 정여울 / [공부할 권리], [헤세로 가는 길] 저자

목차

머리말

1. 지혜를 향한 읽기
인시피트
아욱토리타스
스투디움
디스키플리나
사피엔티아
루멘
거울로서의 페이지
새로운 자아
아미치티아

2. 질서, 기억, 역사
어떤 것도 낮추어 보지 마라
오르도
아르테스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보물 상자
기억의 역사
기도 예배에서 사용하는 법률가의 기술
지혜의 서곡으로서의 기억 훈련
기초로서의 이스토리아
모든 피조물은 잉태 중이다

3. 수사의 읽기
묵상
중얼거리는 자들의 공동체
포도밭과 정원으로서의 페이지
생활 방식으로서의 렉티오
오티아 모나스티카
렉티오 디비나의 죽음

4. 라틴어 ‘렉티오’
라틴 수도원 생활
그레고리오 성가
라틴어의 문자 독점

5. 학자의 읽기
후고, 서문을 덧붙이다
읽을 의무
빈약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수사 신부는 렉티오를 통해 교화한다
페이지 넘기기
새로운 성직자, 문자를 독점하다
소리 내지 않고 읽기
학자의 딕타티오
6. 말의 기록에서 생각의 기록으로
테크놀로지로서의 알파벳
발화의 흔적에서부터 개념의 거울까지
이야기에 대한 주석에서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오르디나티오: 눈에 보이는 패턴
스타침 인벤니리: 즉각적 접근
알파벳 색인
저자 vs. 편찬자, 주석가, 서기
레이아웃
일루미나티오 vs. 일루스트라티오
휴대용 책

7. 책에서 텍스트로
대상으로서의 텍스트의 역사를 향하여
텍스트의 추상
링과와 텍스투스
“만물은 잉태 중이다”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본문중에서

알파벳의 영향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 역사 가운데 12세기 초를 선택한 것은 내 이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내가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에 대한 해설을 쓰는 것은 논리적이고도 어울리는 일로 보였다. [디다스칼리콘]은 읽기 기술에 관해 쓴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문적 기여를 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내가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을 얻었던 과거의 한 시점視點에 다가가도록 안내하기 위해 쓴 것이다.
(/ pp.16~17)

읽는 사람이 과시를 목적으로 지식 축적을 추구하지 않고, 노력을 통해 지혜로 나가려 할 때 익혀야 할 습관을 형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 나온 말은 그와 관련하여 후고가 제시한 일반적 성격의 여남은 가지 규칙 중 몇 가지다. 읽는 사람은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
(/ pp.32~33)

후고는 읽는 사람을 낯선 땅으로 이끈다. 그러나 가족과 익숙한 풍경을 떠나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를 향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길에서 돌아다니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을 유배시켜 책의 페이지를 통과하는 순례를 시작하라고 청한다. 그는 순례자를 끌어들이는 ‘궁극적인 것’은 지팡이를 든 순례자를 위한 천상의 도시가 아니라, 펜을 쥔 순례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지고至高의 선’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길에서 독자가 자기 자신에게 자아를 드러내는 빛 안으로 들어간다고 지적한다. 후고는 학생들에게 학식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읽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구하고 마치 거울을 얼굴 앞에 두듯이 그들의 말을 늘 정신의 눈앞에 두려고 열심히 노력하라"라고 촉구한다.
(/ pp.42~43)

눈으로 읽는 사람에게 과거의 이런 증언은 충격적일 수 있다. 눈으로 읽는 사람은 입으로 읽는 읽기가 모든 감각에 영향을 줄 때 생겨나는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 게다가 맛과 냄새를 표현하는 어휘는 시들고 움츠러들었다.
(/ p.86)

지혜를 향한 개인적인 진전과 구분되는 어떤 궁극적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읽기에 관해 말할 때, 후고는 엄한 경고를 덧붙인다. (......) 나중에 종합대학을 낳게 되는 단과대학이 생기고, 여기에서는 수사의 의식이 아니라 학자의 의식이 거행된다. 스투디움 레젠디는 더는 규율을 갖추고 읽는 사람들 대다수를 위한 생활 방식이 아니며, 이제는 ‘영적인 독서’라고 부르게 된, 한 가지 특정한 금욕주의적 관행으로 간주된다. 한편 ‘공부’는 점점 지식의 획득을 가리키게 된다. 렉티오는 기도와 공부로 나뉜다.
(/ pp.97~98)

소리를 내지 않는 특정한 읽기 방법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이고 명시적인 진술 또한 후고에게서 나왔다. "읽기는 책에서 가져온 규칙과 교훈을 기초로 우리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읽기에는 "세 종류가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읽기, 배우는 사람의 읽기, 혼자 책을 묵상하는 사람의 읽기다." 후고는 세 가지 상황을 구분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소리 내어 읽으면서 페이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의 상황, 읽은 것을 듣는 사람, 즉 교사나 읽는 사람을 통하여 또는 그 ‘밑에서’ 읽는 사람의 상황, 책을 조사하면서 읽는 사람의 상황이다.
(/ p.136)

새로운 종류의 읽는 사람이 등장했다. 몇 년 공부로, 묵상하는 수사가 평생 정독할 수 있었던 것보다 많은 수의 저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알게 되기를 바라고 읽는 사람이었다. 이런 새로운 요구는 새로운 참조 도구에 의해 자극을 받기도 하고 충족되기도 했다. 이런 도구의 존재와 사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 말의 기록에서 생각으로 기록으로, 지혜의 기록에서 지식의 기록으로, 과거에서 물려받은 전거典據의 전달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지식’ - 잘 만든 말이다 - 의 저장으로 변화해간 것은 물론 12세기의 새로운 정신 상태와 경제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새로운 테크닉을 이용하게 되면서 현실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 어떻게 자라났는가?
(/ pp.150~151)

어떤 경우에도 테크놀로지가 정신 상태에 끼친 영향을 우리가 가장 분명하게 연구할 수 있는 예는 알파벳순 색인의 창조다. 그 뒤로 지식을 추구하고 과학적 절차의 범주를 규정하는 정신적 지형은 후고의 정신이 움직이던 공간과는 단절되었다. 저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서 텍스트의 창조자로 변한다.
(/ pp.160~161)

[디다스칼리콘]에서는 양피지 표면의 텍스트를 밝히는 것은 여전히 읽는 사람의 눈의 루멘이다. 100년 뒤 보나벤투라가 존경하는 선배 후고에 대해 이야기할 때 텍스트는 이미 페이지 위로 둥둥 뜨기 시작했다. 텍스트는 사본을 원본과 구분하는 공간을 통하여 의미 있는 기호들을 실어 나르는 일종의 배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 배는 여기저기에 닻을 내린다. 그러나 텍스트와 페이지의 이런 분리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는 책 안에 항구를 유지하고 있다. 책은 또 은유적으로 텍스트를 위한 항구 역할을 하며, 텍스트는 여기에 의미를 내려놓고 보물을 드러낸다. 수도원이 신성한 책의 문화를 위한 세계였듯이, 이제 대학이 새로운 책 텍스트를 위한 제도적 틀이자 상징적 교사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 p.180)

모든 컴퓨터에는 데이터, 대체, 역전, 즉시 인쇄로 가는 새로운 고속도로를 열겠다고 약속하는 불도저가 웅크리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텍스트가 내 학생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하는데, 그것은 아무런 닻이 없는 프린터 출력물, 은유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저자의 손에서 나온 원본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프린터 출력물이다. 유령선에서 나오는 신호처럼 그 디지털 사슬은 스크린에서 자의적인 폰트 형태를 이룬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들이다. 의미의 항구를 찾아 책에 다가가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물론 일부에게는 책이 여전히 경이와 기쁨, 당혹과 쓰디쓴 후회를 주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 안타깝게도 - 그 정당성은 정보를 가리키는 은유에 있을 뿐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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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이반 일리치(Ivan Illich)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26~
출생지 오스트리아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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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 국제부 직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빈민가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인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1956년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 부총장이 되었고, 1961~1976년에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일종의 대안 대학인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하여 연구와 사상적 교류를 이어갔다.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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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현재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옮긴 책으로 《로드》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책도둑》 《미국의 목가》 《에브리맨》 《울분》 《포트노이의 불평》 《굿바이, 콜럼버스》 《네메시스》 《죽어가는 짐승》 《달려라, 토끼》 《제5도살장》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등이 있다.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유럽 문화사》로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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