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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나 시집 『유리 자화상』. 한이나 시인의 시 작품을 수록한 책이다. '붓꽃 춤', '책들의 둥지', '도라지', '파릉의 취모검', '걷는 독서', '산 위의 바다', '하조대, 소나무', '꽃 경전, 스스로 붉다', '새 그림자', '그늘의 집' 등 한이나 시인의 주옥같은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다.

밤 이슥토록 나에게 두 귀를 열어놓고
온 마음을 기울였다
검은 벌레가 종이에 구멍을 뚫는, 흑백 점묘법
콕 콕 콕 콕 콕 허구헌 날 점 찍으면
그을음이 씻겨 나갔다
손끝에서 소리가 그려졌다
내 안의 나무와 그림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향으로 종이에 구멍을 내어 쓴
이제 막 태어난 아이
건너편으로 옮겨가는 체인지링이다
정적 속 시마詩魔에 끌려나온 저 뼈와 피의 육필 시,
‘내 안의 나’를 지나온 다섯 번째 시집을 묶는다
여기가 무한반복의 제자리일지라도
이후, 한 발짝의 마음을 더 보탤 것이다

2016년 새봄, 부드러운 직선을 꿈꾸며
한이나

신경림(시인)
시 한편 한편이 단아하고 흐트러지지 않은 완성도 높은 시. 이 시집에는 완성도가 높은 시가 아주 많지만 그의 시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붓꽃춤」 한편을 읽어 보기로 하자.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만연체로 피어난 붓꽃을 머릿속에 돋움새기기도 하지만 한편 묵향을 풍기며 쓰여지고 있는 붓글씨에 황홀하게 취하기도 한다. 이 시는 그 어느 한쪽에 액센트를 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 둘이 서로 충돌하고 뒤섞이며 만들어가는 ‘아름다움의 절정’이 바로 이 시가 보여주고 싶은 대목이리라. 이 시인이 즐겨 쓰는 이런 시의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그의 시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한 순간은 우리 시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새로운 지평이다. 시집 속의 시 편편이 단아하고 어느 한군데 흐트러지지 않은 점은 그가 얼마나 완성도 높은 시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1 파릉의 취모검

붓꽃 춤 17
책들의 둥지 18
도라지 佛 19
파릉의 취모검 20
걷는 독서 22
산 위의 바다 1 24
하조대, 소나무 25
고인돌 그 아래 26
꽃 경전, 스스로 붉다 28
그늘의 집 30
새 그림자 32
속리俗離 33
새 전시장 34
마리서사 36
끝, 그리고 시작 38
유리 자화상 1 39
유리 자화상 2 40
유리 자화상 3 42
제주바다 모래찜 44



2 지금이라는 고비

물과 불 47
화염산 48
지금이라는 고비 50
고승高僧을 만나다 52
낙타를 타고 54
명사산 신기루 56
사막의 초승달 58
나의 사막 60
화엄, 흑매 61
산그늘 62
적막강산 64
수연산방壽硯山房 66
에펠탑의 페인트 공과 나 68
압센트를 마시다 70
수도원 앞 라벤다 밭 71
론 강의 별 72
색채의 마음기법 74
환상방황 76
녹이 피다 78



3 모래여자 박물관


모래여자 박물관 83
저 피리소리 84
북소리 85
로망스 2악장 86
저 묵란 88
물을 품다 90
궁서체 발자국 92
모시구름 옷감 93
죽서루 대밭 94
느티나무 전각 96
얼음 강 98
북극성 100
서천꽃밭 101
데자뷰 102
그늘의 깊이 103
회귀 104
호박 칸타타 105
밤의 벽화,블랙 106
공즉시생空卽是生108





4 마음 속 다리



마음 속 다리 111
마음의 기술 112
적멸을 읽다 114
파도문자 116
줄탁동시 118
산 위의 바다 2 120
환幻의 꽃 121
돌 거울 122
블루 데이 124
월리사月裡寺 125
석남사 먼 곳 126
심죽心竹 127
결빙기結氷期 128
행복한 세계 130
길끝 마을 131
화엄경 학교 가는 길에 132
하늘종이 134
가을 약초 135

｜해설｜
- 詩, 적멸을 스치다 139
신진숙(문학평론가)

해설
한이나 시인은 말한다. “글자들이 저를 불태우며 서 있다”(「마음의 기술」)라고. 아마도 그녀의 시 또한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짊어져야 할 삶의 고통이 그침이 없으며,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 고통은 시적 자유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이나 시인의 정제된 언어들 속에는 깊은 번뇌의 순간들이 무수한 주름으로 접혀 들어 있다. 마음을 토설하지 않는 서정의 정갈함이, 자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고통을 타고 넘는 그녀의 마음기법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을는지.
(「유리 자화상」 -中에서) - 신진숙(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