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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윤고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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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생존에는 상관없지만, 삶을 좀 더 따뜻하게 하는 여덟 가지 이야기

이효석문학상, 한겨레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작가인 윤고은의 세 번째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2014년부터 2016년까지의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서 조금 더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서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따스하고도 고유한 여덟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소설가 정소현과의 대담은 소설가 윤고은의 솔직 담백함과 사랑스러움을 확인하게 해주어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

윤고은은, 삶보다 더 큰 악몽을 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무도 바쁘게만 그리고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만 애쓰는 이들에게 ‘난 그쪽 세계의 생존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짊어진, 매일같이 싸고 푸를 삶이라는 생존배낭 안으로 소독제일 수도, 온기일 수도 있는 여덟 가지 이야기를 슬며시 밀어 넣는다.

생존에 있어선 아무 소용없어 보이는 이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싱크홀 속에 갇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쿨함과 다정함으로 다가와 그 느닷없음이란 공포로부터 꺼내어준다. 그녀의 소설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 등과 가슴을 맞대고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목적지가 어디든, 최대한 자유로운 곳으로, 유머러스한 품격을 잃지 않은 채로.

출판사 서평

삶이라는 이 길고 환한 밤을 통과하게 해주는
따스하고도 고유한 여덟 가지 이야기
이효석문학상, 한겨레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작가
유머러스한 품격을 지닌 소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이효석문학상, 한겨레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작가인 윤고은의 세 번째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가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은 윤고은의 다섯 번째 책으로, 두 번째 소설집 《알로하》(2014) 이후 꼭 2년 만에 펴내는 책이다. 첫 장편이었던 《무중력 증후군》(2008) 이후 대담한 상상력과 유쾌한 풍자, 그리고 신선한 문체로 현대 사회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독보적인 개성으로 이야기했던 작가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의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서 조금 더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서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따스하고도 고유한 여덟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소설가 정소현과의 대담은 소설가 윤고은의 솔직 담백함과 사랑스러움을 확인하게 해주어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
윤고은은, 삶보다 더 큰 악몽을 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무도 바쁘게만 그리고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만 애쓰는 이들에게 “난 그쪽 세계의 생존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짊어진, 매일같이 싸고 푸를 삶이라는 생존배낭 안으로 소독제일 수도, 온기일 수도 있는 여덟 가지 이야기를 슬며시 밀어 넣는다. 생존에 있어선 아무 소용없어 보이는 이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싱크홀 속에 갇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쿨함과 다정함으로 다가와 그 느닷없음이란 공포로부터 꺼내어준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읽으며 우리는 서로 등과 가슴을 맞대고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목적지가 어디든, 최대한 자유로운 곳으로, 유머러스한 품격을 잃지 않은 채로.

생존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결국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의 소설들은 모두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한 고찰이자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표제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 ‘생존배낭’이 나와서만은 아니다. ‘살아남는다’라는 건 ‘살아 있다’는 말과도 ‘살아간다’는 말과도 같지 않다. 그 속에는 어떤 뭉클함과 처절함이 있으며, 찌질함과 진심이 있다. 그렇다면 먼저 작가 윤고은은 살아남았을까? “원래 신춘문예로 등단하면 그해에 한두 명만 살아남는다”(〈책상〉)고 하니 어쨌든 작가로서는 살아남은 게 분명하다. 살아남은 작가는, 살아남았기 때문인지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 대신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귀 기울이는 것 같다. 달력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지면이 필요한 ‘일구’와 ‘나’(〈전설적인 존재〉), 책상을 들고 여전히 살아남은 한 남자, ‘기암’(〈책상〉), 제 살던 시대를 통째로 도둑맞은 채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동명동인 ‘박태원’(〈다옥정 7번지〉), 죄책감, 억울함, 배신감으로부터, 오두막에서의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과거의 한 ‘연인’(〈오두막〉), 떼인 돈을 받기 위해 전문가 ‘조’를 찾아가는 ‘부녀’(〈된장이 된〉), 화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작품을 불태워야 하는 화가(〈불타는 작품〉), 생존배낭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지만 결국 회사에서 살아남는 게 더 큰 문제인 ‘나’(〈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불량품인 채 살아가야 하는 ‘Y-ray’와 ‘Y’들은(〈Y-ray〉), 모두 저마다의 생존배낭을 짊어진 채 살아남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윤고은이 바라보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 곁에서 ‘여전히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살아남는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는 건 결국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윤고은 소설의 특징이었던 대담한 상상력은 말하는 개 ‘로버트’나(〈불타는 작품〉), 지금 이 시대로 와버린 작가 박태원에서(〈다옥정 7번지〉) 여전히 빛을 발하지만, 우리는 이번 소설집에서 조금 더 핍진해진 윤고은을 만나게 된다. ‘생존’을 바라보는, ‘삶’과 ‘일상’을 꿰뚫는 ‘재기발랄함은 보존된 채로 맛은 점점 깊어지는 오래된 된장’ 같은 그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창문입니다. 쓰레기통이 아닙니다’라는 문장 앞에서, 오두막 안에서 들리는 ‘살려주세요’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잘못 선택했으나 끝까지 읽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윤고은의 말은 그런 고민 앞에 선 우리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한다. 윤고은은 인물들을 지켜보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늙은 차를 얻어 타고 울룰루에 닿을 때까지. 끝까지 닿을 수 있도록 격려하면서.

“누구나 책상 하나의 무게는 다 짊어지고 걸어가는 게 아닐까.”

《무중력 증후군》 작가의 말에서 윤고은은 이렇게 말한다. “활자는 바이러스다. 백신은 없다.” 그랬기에, 우리가 짊어진 생존배낭은, 아웅다웅하며 그 안에 밀어 넣은 물품들은 애초부터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짊어지고, 어떤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쩌면, 경량화에도 표준화에서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기능은 적은 ‘책상’ 같은 걸 짊어지고 가는 게 “인생이 몇 조각으로 큼직하게 부서지는 순간” 앞에서 결국 우리를 버티게 할지도 모른다. 동생을 업고 쓰러질 때까지 걸었던 ‘마일러’처럼. 마일러는 쓰러진 걸까? 아마, 결코 아닐 것이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통해 윤고은이 보여준 이야기들처럼, 모든 것이 몰살당한 것 같은 밤일지라도, 이야기가 놓여 있는 우리의 사각형 책상 위에는 소독제일 수도, 온기일 수도 있는 햇빛이 모여 있을 것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빛은 아닐지라도, 그 노란 빛과 함께 우리는 조금씩 옆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앞은 아닐지 몰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살아서 말이다.

■ 대담
“비루한 나에게 뭔가가 있다, 는 느낌을 주는 게 소설이에요.”

정소현(이하 정)_ 소설이 자신을 변화시킨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윤고은(이하 윤)_ 변화의 기점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있던 나를 ‘저렇게’ 변화시킨 건 없는 것 같은데.
정_ 작가 본인은 소설이 자기를 변화시키는 걸 모르지만, 제삼자가 볼 때는 소설이 항상 옆에서 작용하고 있기에 계속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요?
윤_ 그럴 수도 있죠. 소설을 쓸 때 좀 특별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특별해진다기보다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 상태, 라고 해야 할까요. 비루한 나에게 뭔가가 있다, 는 느낌을 주는 게 소설이에요. 없으면 많이 초라할 거 같아요. 피부는 좋아질 수 있어요. 멍 때리는 것도 없어질지 모르고요. (웃음)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전 그 사람 안에 있는 농담 같은 걸 읽고 싶어져요. 유머러스한 품격 같은 거랄까.”
정_ 윤고은의 소설에는 악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거 같아요. 〈오두막〉의 연인처럼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잘못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악의로 인해 갈등을 만들어내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지어 떼인 돈 받아주는 조도 험한 일 하는 사람 같지 않게 순해요.
윤_ 아마도 제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보는 거겠죠.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전 그 사람 안에 있는 농담 같은 걸 읽고 싶어져요. 단지 말장난 정도를 말하는 건 아니고요. 유머러스한 품격 같은 거랄까, 아기자기하고, 동심에 가까운 좀 소박한 형태의 순정 같은 것. 수수료 대신 된장을 받고도 가만히 있었던 조를 떠올리면, 그 사람은 떼인 돈 받아주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프로예요. 돈에 대해 정확할 것 같지만, 그 프로가 돈 대신 된장도 접수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아버지의 사연이 조 안의 농담을 건드렸기 때문 아닐까요. 물론 멋있는 척은 다 했지만, 뒤늦게 구시렁거리거나 그다음부터 전단에 ‘현금 결제만 가능’이라고 써넣을 수도 있겠지만. 전 그런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거든요. 약간의 낭만이랄까, 계산 안 되는 품격 같은 걸 가진 사람이요. 그걸 농담이라고 부르고요. 겉모습이나 현재 위치, 처한 상황이 어떻든 누구나 그런 농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노출된 정도가 다를 뿐이지. 타인에게서 그런 농담을 읽게 될 때 설레요. 소설 속 인물들을 만들 때도 속에 품은 농담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인물이 자기 안의 농담을 생매장하거나 거세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 그럴 때란 어떤 것인가 상상하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주로 다루는 인간은 악하다기보다는 약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각자 다들 살아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문제는 각자 살아남기만 하다 보면 방치되고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오잖아요. 그런 상황이 올 때는 약함이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약해서 나를 지키려고 했을 뿐인데 그런 방관과 무관심, 혹은 지레 집어먹은 겁 같은 게 결국 악이 되는 경우요. 내가 희생당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건데 내 희생과 타인의 희생이 저울 위에 올려둘 만큼 비슷한 무게가 아닌데도 그런 논리가 적용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자신의 담배 한 대와 타인의 목숨이 비교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게 좀 무서워요.

* 책속으로 추가 *

그 밤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내가 이해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사라진 건 집이나 약국, 골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라고. 여기 제 살던 시대를 통째 도둑맞은 사내가 있다고. 그렇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누구의 식민지도 아니고 모던 보이도 없는 그런 시대로 떨어져버린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시대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 시대로부터 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더 간편한 것도 같군요. 그 시대에서 나만 증발해버리면,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무탈하지 않겠습니까. (173쪽, 〈다옥정 7번지〉)

사건 이후 그들이 헤어지기 직전까지 도영은 몇 차례 문자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 문자에는 바람을 뚫고 그들을 찾아왔던 말, 그 다섯 글자 ‘살려주세요’가 적혀 있었다. 케이는 그 문자의 출처를 알고 있었는데, 문자가 제대로 갔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도영은 내색하지 않았다. 발신인은 없고 수신인은 분명한 문자가 몇 차례 그녀에게로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들이 헤어지고서 도영의 전화번호가 바뀌자, 그 문자는 날아갈 곳을 잃었다. 케이가 힘들었던 건 이젠 아무리 미칠 것 같은 날이어도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일지도 몰랐다. 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왜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 왜 제일 사랑하던 사람에게, 너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아마 네가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나 봐. 그랬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정말 그 기억으로부터 좀 살려달라고. (235쪽, 〈오두막〉)

나는 가방 안에서 위키의 사진을 꺼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밤은 길었지만, 이야기는 우리가 이 길고 험한 밤을 멈춘 채 통과하는 한 방법이었다. 위키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까만 밤, 붉은 흙 위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등에 업고 걸어오는 장면과도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른다. 서로 등과 가슴을 맞대고 걸어가는 아이들 말이다. (279쪽,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목차

된장이 된
불타는 작품
전설적인 존재
Y-ray
책상
다옥정 7번지
오두막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대담 | 생존배낭에서 나온 소설가들 윤고은×정소현(소설가)

본문중에서

빌라 근처에 연두색 마티즈가 주차된 게 보였다. 몹시 낡아 보였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 계단 다섯 개 정도를 밟고 아래로 내려가 벨을 누르면 그들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문을 열면 아버지를 평생 농락한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내 발은 B101호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거기서 발걸음을 돌렸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가 들추고 싶지 않았던 그 마지막 한 장을 내가 들출 권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관 옆으로 난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까치발을 들고, 지면 위로 반쯤 머리를 내민 듯한 창문이었다. 그 창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밖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창문 앞에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고, 앞머리가 잘리긴 했지만 그건 익숙한 말이었다. 오래전 아버지가 탄원서를 쓰며 고심했던 그 문장 말이다. ‘창문입니다.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37쪽, 〈된장이 된〉)

소각, 이란 단어가 마치 재갈처럼 개의 입에 채워져 있었다. 로버트는 자꾸 ‘소각’, ‘소각’ 하고 말했다. 그것은 또각또각하고 누군가가 나를 쫓는 소리 같기도 했고, 째깍째깍하고 시간이 나를 쫓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정말 거대한 화덕이 작품을 삼킬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안으로 내가 그린 다섯 작품이 들어갈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단 하나 〈떠난 사랑〉만은, 그것만은 살리고 싶었다. 로버트는 화덕 안으로 들어가서 잿더미가 되어야 ‘살리는’ 거라고 했지만, 나는 심정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저 작품은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70쪽, 〈불타는 작품〉)

문짝 안에서 다른 사람이 놀란 얼굴로 나올 때까지도 나는 그 집이 우리 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현관문 안의 사람에게 ‘누구세요?’라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문을 쾅 닫았다. 이런 일이 흔한 듯 ‘여긴 3동 306호예요’라고 말한 후. 다시 일구를 끌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뭔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약간의 소름을 동반한 그 기분은 뭐랄까, 출처에 관한 것이었다. 좀 전의 그 집이 내 집이 아니었음에도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문짝 앞에서 열쇠를 돌리는 동안, 나는 조금도 집을 잘못 찾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집에 다다랐을 때 몸이 보내던 신호들, 그러니까 요의를 느낀다든지 하는 신호들도 그대로였다. 진짜 사실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였다. (99쪽, 〈전설적인 존재〉)

“저 가위는 진짜 당신 몸에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이건 Y-ray일 뿐이니까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빛이라서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말은 의사가 남자의 배를 가르고 녹슨 가위를 꺼낼 수도 없단 얘기였다. 의사가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은 것은 남자 전에 다녀갔던 수많은 환자 때문이었다. 휴대전화 배터리를 품은 사람도 있었고, 칼날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종잇조각과 비닐봉지도 흔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였다. 의사는 늘 그렇게 설명했다. X-ray 사진이 보여주는 게 실재라면 Y-ray가 보여주는 건 그림자라고 보면 됩니다. Y-ray는 우리 몸속에 들어 있는 물체가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보여주니까요. 이상한 건 눈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 때문에 이물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분이 아직 의사가 풀어내지 못한 무언가, 였다. (119~120쪽, 〈Y-ray〉)

기암이 운동장 모퉁이 창고에서 자신의 책상을 꺼내 들고 마치 몸과 집을 함께 이동시키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어요. 그건 아주 일상적이고 우직하고 반복적인 행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책상 하나의 무게는 다 짊어지고 걸어가는 게 아닐까. 오늘 내가 뭔가에 짓눌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결국은 내게 할당된 양이니 감당해야 한다고 말이죠. 빼면 다시 채우고 빼면 다시 채우기를 반복하는 저 늙은 선생도 있는데, 나라고 여기서 물러날쏘냐 싶었던 겁니다. 누구든 인생이 몇 조각으로 큼직하게 부서지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요. 통으로 붙어 있는 인생은 없다, 그건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이었습니다. 그 밤, 책 읽는 의자 위에서 기암을 목격했던 순간은 내 인생의 조각과 조각 사이에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나는 덕분에 날아올라 다음 조각으로 넘어갈 수 있었죠. (162~163쪽, 〈책상〉)

저자소개

생년월일 1980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2008년 제1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으며, 장편소설로 '무중력증후군', '1인용 식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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